
After Reading
"일곱 장의 초상화와 일곱 명의 예술가, 그리고 일곱 명의 '책 읽는 여인들'"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기분 좋다. 그리고, 책을 소재로 하는 책은 언제나 반갑다. 그러나 '책 읽는 소녀'라는 제목은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무난하고 특징 없게 들렸다. 그래도, 일곱 가지 이야기를 묶을 수 있는 제목이라면 이것이 유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이 소설은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책 읽는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깃거리까지 집어넣는다. 짧은 소설의 제목이 등장하고 나면 그림에 대한 정보와 QR 코드가 제공된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고 그림을 볼 것인지, 읽기 전에 그림을 보고 먼저 상상해보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은 소설 속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가 된다. 첫 번째 단편을 예로 들면, 명화 '수태고지'가 등장하면서 그 그림의 모델이 되는 한 소녀의 삶을 간단하게 다룬다. 그리고 그 소설과 간혹 소설 속의 주인공은 다음에 올 소설들의 소스가 되기도 한다.
그림과 텍스트를 연결 짓는 소재 - 여기서는 실제 인물들까지 붙여 넣었지만 - 는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접했던 적이 있다. 피카소의 삶을 소설로 재현해낸 <피카소의 색>에서는 물론 소설의 주인공이 화가이기 때문에 그림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시되지만, <책 읽는 소녀>와의 공통점은 QR코드로 그림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페이지에 그림을 넣어주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때로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마치 그냥 아무것도 연상되는 것 없이 쓰인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책을 보다가 그림이 나오는 순간, 퍼즐처럼 이야기를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QR코드를 하나씩 찍는 수고 없이도 이런 효과를 볼 수도 있다. 황경신의 <눈을 감으면>에서는 이야기의 끝에서, 주인공의 말이 끝나는 시점에서 페이지에 꽉 차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림을 보는 순간, 이야기는 더욱더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텍스트로만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시각적인 그림으로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QR코드를 책에 심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읽다가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한 장의 사진에도 수많은 것들이 들어있듯이, 한 장의 그림에도 그 그림을 만들어낸 사람의 추억 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어떤 예술작품들 중에는 묘하게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그림들이 많다. (물론 평소에 그런 그림들을 보고 굳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안의 어떤 소품들, 그리고 모델의 표정, 그 안의 상황들... 그것들은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을 준다. 그림과 이야기를 연결짓는 상상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작가들에게도 흥미롭고, 감미로운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인 듯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의 문체 때문일까, 특이한 분위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저 무난하게 읽히는 정도다. 기대보다는 살짝 달랐지만, 특별하고 새로운 시도의 책을 접했다는 점에서는 좋은 경험이었다.
Underline
자리에서 일어난 화가는 그녀가 건드리지도 않은 올리브 접시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올리브를 집어 그녀에게 내밀지만, 그녀는 또다시 거절한다. 그는 올리브를 먹고 손바닥에 뱉은 씨를 그대로 들고 있다. "올리브를 먹을 때마다 난 씨를 뱉고 버린다. 넌 올리브를 먹고 남은 씨를 어떻게 하느냐?" "저도 버려요."
"그래. 사람들이 올리브를 한 알씩 먹을 때마다 그 씨앗을 전부 땅에 심어 나무로 자라게 한다면 이상하겠지. 너도 알다시피 올리브나무는 신성하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테나라 불리는 여신이 포세이돈 신과 어느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고, 그 도시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올리브 나무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승리했단다. 난 또 하나의 위대한 도시가 우리처럼 강력한 수호자를 지녔다는 것이 마음에 든단다.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훌륭한 이야기지. 아무 이유도 없이 다 자란 올리브나무를 베어낸다는 것은 너무나 파괴적인 생각이다." "정말 나쁜 생각이에요...." "정말 나쁜 짓이지."
(...) "넌 신께 기도를 올리지만,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느냐? 나는 어째서 신이 너와 내가 만나도록 했는지를 묻는다. 처음에는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없구나. 조심하거라, 라우라 아녤리.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신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말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어린 라우라야, 그건 네 결정이다. 네 양심을 보듬어야 하고 네 행동이 결정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은 바로 너란다." (69p,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일요일이 돌아오자 사람들이 온다. 미친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괴롭힌다. 그들은 입장료를 냈고, 유흥거리를 요구한다. 문명인의 옷을 입은 그들은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지만, 못된 계략을 꾸며 그를 썩은 냄새가 풍기는 어두운 불길이 타오르는 구멍에 던져넣고, 온갖 벌레들이 그의 살갗을 타고 기어올라 그를 산 채로 잡아먹게 할 것이다. 그는 살갗을 기어오르는 벌레들을 느낄 수 있다. 벌레들은 그의 몸속에도 있다.
방문객들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고 즐거워한다. 그가 우스운 몸짓을 하며 허공으로 팔을 아무렇게나 흔들 때마다 그들은 재밌어 한다.
"뭘 하는 거죠? 풀무질 흉내를 내는 건가요? 아니면 끌로 뭔가 새기는 흉내를 내는 건가요? 있지도 않은 못을 박는 건가요?"
그들은 그가 자기만의 상상 속에서 대장간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84p, 그녀가 빛 속으로 걸어나올 때)
그들을 갈라놓았던 세월이 이렇게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깊이 교감한다.
"공평하지 않았어. 네가 원했잖아. 난 아니었고. 서로 바꿔서 해볼 수 있었다면...."
"하지만 바꿀 수가 없잖아. 차라리 잘된 거야."
그들은 서로 꼭 붙어 팔짱을 끼고 추위에 맞서 앞으로 걸어간다. (249p, 골트 가의 쌍둥이 자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전 아름다움을 위해 시빌을 만들었어요. 우리 인간들은 직관적으로 아름다운 사물들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죠. 우리는 아름다움에는 힘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좇고 그래서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키죠. 아름다운 사물들에는 목소리가 있어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가. 과거와 결부된 목소리들이죠."
"당신의 발명품은 예술작품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입니까?"
"시빌은 우리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게 해줘요. 그리고 전 시간문제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시빌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다른 이가 했겠죠. 우리는 아직 시빌의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릅니다. 시빌은 우리에게 더 보여줄 것이 많아요."
"자랑스러운 부모처럼 말씀하시네요."
"예전과는 달라요, 디렉터 페르난드. 지난 세대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진품인 작품들을 직접 볼 수가 없어요. 우리는 메쉬에 접속해서 정부가 보증하는 작품들과 개인 소장품들을 고스란히 모사한 작품들을 볼 수는 있지요. 하지만 후대를 위해 보호하고 있는 진짜 작품들을 우리는 대부분 보지 못해요. 우리는 전 세대보다 불행해요. 우리는 동굴 속의 죄수가 된 건가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시빌은 더 열등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빌을 통해 경험하는 예술작품들은 진품과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요." (399p, 클라우드의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