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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볼라뇨의 필생의 역작인 <2666>이 (물론 사다 놓고 대작이란 부담감에 아직 읽지 못하였으나) 악의 기원과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 소설이라면, 그 분량의 거의 1/5도 되지 않을 듯한 <팽 선생>은 일종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볼라뇨 작가 인생 '초기'에 쓰였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볼라뇨 문학의 시작점을 건드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1938년이라는, 비교적 정확한 연도가 제시된 '파리'의 어느 날, 최면 요법가인 팽 선생은 '레노 부인'으로부터 자신의 친구의 남편 (바예흐)의 병을 치료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달려가는데, 그의 병은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 병'이다. 어떤 의사도 그를 치료하지 못해 거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부인에 대한 호감이 있었던 팽 선생은 그녀의 절실한 부탁을 수락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치료할 것임을 약속한다. 이후 '바예흐'를 방문하려 하는 그는 이상하게도 묘한 불안감을 직감하게 된다.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다는 불안감, 무언가로부터 감시당하고 보여지고 있다는 긴장감. 그 이상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이후에는 거의 의도적으로 - 뇌물을 주면서 혹은 술과 먹을 것으로 회유하면서 - 바예흐를 향한 팽 선생의 접근을 막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주무르는 '최면요법가'라는 직업의 팽 선생은, 되려 자신이 그 이상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불안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긴장과 감시 속에 그는 계속해서 악몽을 꾸게 되고, '깨어있음'과 '잠들어 있음'이 반복되는 모호한 소설의 구성 속에서 어딘지 모르게 멀뚱멀뚱 서있는 듯한 존재로 보인다. 소설의 중간쯤 극장에서 상영되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영화는 그 대사들과 함께 소설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더욱 극대화시키는데, 긴장 속에서 갇혀있는 '팽 선생'의 모습은 언젠가 보았던 영화 <트루먼 쇼>의 무시무시한 상황을 생각나게 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당혹스러운 감정이 온몸을 감싸는 이 소설은 어떠한 말로도 정확히 정의 내리기 어렵게 보이긴 하지만,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실제 인물들의 등장으로 어떠한 의미를 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 당시 전체주의의 폭력에 희생하며 온몸으로 저항했던 '바예흐' 시인은 소설 속에서, 많은 이들의 무관심 속에 홀로 죽어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한 개인이, 문학 속에서는 억압된 심리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팽 선생'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그 현실을 부정적으로 만들어나가는 막대한 힘들 - 설명할 수 없이 묘한 분위기의 긴장감과 억압된 분위기 - 과 그 힘들을 보고 있지만 빨려 들지 않고 방관하는 '레노 부인'과 같은 사람들, 그리고 막대한 힘과 권력을 빌려 자신의 위치를 재창조해 나가려고 하는 '플뢰뫼루보두' 같은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각기 다른 성질의 사람들이 모여 어떤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리고 억압과 불안의 심리가 있었던 과거의 모습과, 미래인 지금은 또 어떻게 달라졌는가.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바라보았던 볼라뇨의 바람은 뒤로 한 채, 아마도 지금은 과거의 모습처럼 -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희생양과 함께 -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을지도. '악'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힘은 모호하게 연결되는 장면들과 곱씹으면 소름 끼치는 대사들에 숨겨져있다. 그것을 찾아보는 재미, 볼라뇨의 소설에서 느껴볼 수 있을지도.
그녀를 따라가려는 순간, 몰려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는 듯한 느낌과 조금 전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의사들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을 잡아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내 추측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몸짓을, 즉 그들의 입장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무표정한 얼굴을 했지만, 이는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무표정과는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레노 부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녀가 지나치게 빨리 걸었던 것 같다. 반대로 내 다리는 납덩이나 된 듯이 너무나 무거웠다. 결국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예술품을 전시한 갤러리에 잇는 것 같은 느낌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고, 결국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32p)
두려움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하지만 두려움 비슷한 것이 나에게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숙명적인 정적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어떤 목적으로 이런 소리를 내는지 밝히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정적 말이다. 한 가지는 명백했다. 소리는 내가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벽을 따라오고 있지만, 곧 벽에서 멀어져 내가 있는 중앙을 향해 다가올 것 같았다. 나와 평행이 되었을 때 벽에서 떨어져 나올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러나 나를 뒤에 남겨둔 채 계속해서 나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 경우엔 분명히 뒤쪽에서 접근하려고 할 것이다. (107p)
나는 보도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것도 나를 가려 줄 만한 것이 없었을뿐더러, 나는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좀 놀란 듯한 그의 두 눈을 향해 완벽한 과녁이 되어 주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스페인 사람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이 사내는 내가 자기를 따라오길 원하고 잇는 것일까? 분명히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맥이 빠졌다. 다른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누가 미친 것일까? 그인가, 아니면 나인가? 온몸에서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병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니 내 정신은 여전히 맑게 깨어 있었다.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호기심과, 비현실적인 거리를 따라 두런거리며 나아가고 있는 알 수 없는 믿음을 향해 열어 놓은 마음. 그러나 나는 비를 계속 맞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보류해 놓은 뭔가를 아직은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따뜻한 커피와 술 한잔에 대한 생각에 나는 깜짝 놀랐다. (120p)
스페인 사람은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 싶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가 팔꿈치를 움직여 자기 동료에게 내가 나타난 것을 알렸다. 그 친구가 눈치채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는 스크린 속 장면 하나하나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자연스럼게 말을 건넸다. 「안녕, 팽. 잘 지냈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만들어 낸 적지 않은 흔적에도 불구하고, 금세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그리고 당신은 아직 젊고. 사랑하는 친구여, 노력해 보게.> <나는 여전히 밤이 두려워, 폴.> <용기를 내!> <용기를 낸다는 건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지를 알 때 비로소 가능한 거야. 그런데 내 경우는 아니야. 내 적들은 허공을 떠다니고 있어. 더 문제는 제일 밑에 있다는 거야. 죄악의 땅을 기어다니고 있다고.> <아무튼 너무 지나치게 악몽에 짓눌리진 마, 미쉘. 악몽은 다 쓸데없는 거라고. 그것을 명심해야 해.> <악몽은 과거야, 내 과거라고. 잊기 위해서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거야.> (12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