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당신은 그런 일이 당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어날 리 없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도 당신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당신에게도 일어나기 시작한다."

 

  인생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봄, 겨울, 가을의 흔적을 모두 씻어내듯이, 폴 오스터의 인생도 <겨울일기>에 스르륵 쏟아낸다. 그는 몸이 기억하는 시간의 기록을 털어놓는다. 단, 그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닌 당신의 몸으로 언급된다. '당신'이란 이름으로 그는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일부이자 이제는 멀리 떨어진 '당신(혹은 자신)'을 추억한다. '당신'이기에 그 몸의 생동하는 움직임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기억해낼 수 있다. 또는 그 당신을 많은 사람들에게 넓게 적용할 수 있다. 기억은 그의 몸에 새겨졌다. 얼굴에 있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 담배로 인해 끓어오르는 가래를 내뱉던 목구멍, 행복감을 만끽하며 달렸던 다리, 농성으로 인해 잡혀서 짓밟히고 그 밖의 수많은 곳을 스치고 건드린 손은 육체의 일부이자 기억의 한 부분이 된다.

 

  상상하기 낯부끄러운 것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인생의 회고록에, 몸이 뚜렷이 기억하는 감정을 불어넣는다. 사춘기의 쑥스러운 성충동과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고스란히 고백한다. 하나하나 벗겨내 알몸이 될 때까지, 허공으로 추락하는 자유와 행복의 감정 그리고 참을 수 없이 솟구치던 분노와 변명도 할 수 없었던 수치스러운 감정까지 드러낸다. 한없이 깊은 감정으로 추락해 들어가다가, 어릴 때의 에피소드 - 그 시시껄렁한, 예를 들면 자신이 좋아했던 여러 가지 음식이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들 같은 - 를 속닥속닥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스무 번이 넘게 변화했던 그의 생활공간 (집)도 빼놓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 자신의 몸을 품은 그 공간들을 빼곡하게 기억한다. 변화되는 모든 상황 속의 감각을 털어낸다. 물론 그 집도 보이지 않는 그의 흔적을, 집 안을 활보하던 발의 느낌을 기억할 것이지만 말이다.

 

  그는 여러 번 죽음을 인식해왔다. 땅에 묻힌, 풍경에 갇힌 죽음들이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도 인식하고 있을, 또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찾아올 것인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큰 고통이고 통증이지만 두렵지 않다. 그의 신체가 그의 일부이므로, 죽음도 그 일부를 거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한 언급에는 '늙음'의 쓸쓸함이 없다. 60여 년의 세월을 맞아왔음에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의 기억 탓인지. 늙음이 언급되지 않기에 인생의 겨울은 차디차고 낯설지만 어두컴컴하지는 않다.  

 

  그의 말에 의하면 "평범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라고 했다. 아마도 그 누구의 삶이더라도 '평범함' 그 자체의 삶은 없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담은 인생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오로지 '단어'다.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하고 고민하는 인생의 겨울, 그 시기의 폴 오스터. 모든 것과 연결된 육체로 그는 쓰기 시작한다. 언젠가 무용수의 춤을 보고 다시 잡게 된 펜, 자신의 호흡을 따라, 심장의 박동을 따라울리는 몸의 음악(글쓰기)을 연주한다. 이보다 환희스러운 경험이 있을까? 그는 자신의 모습과, 변화와 순간의 감정과 감각을 받아들이고 종이에 풀어내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한다. 깊은 호흡으로 몸의 움직임을 듣는다. 그로 인해 새로운 봄을 시작할 것이다. 그의 봄도, 당신의 봄도.

 

 

  언제나 당신을 감싸고 있던 것은 외부, 즉 허공이지만 자세히 말하면 당신을 둘러싼 허공 속 당신의 몸이다. 발뒤꿈치는 땅에 굳게 딛고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허공 속에 있다. 그곳이 당신의 몸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이고 또한 모든 것이 몸에서 끝날 것이다. 지금 당신은 바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그 후에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열과 추위, 셀 수 없이 다양한 비, 눈이 없는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뚫고 온 안개, 바르 강가에 있는 집의 타일 지붕을 덜거덕거릴 정도로 미친 듯이 때리던 기관총 소리 같은 우박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주의를 온통 차지한 것은 바람이다. 공기는 가만히 있을 때가 거의 없다. (18p)

 

  사람이 죽음을 맞는 바로 그 순간, 존재는 의식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적어도 당신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로부터 5년 후 처음으로 공황 발작이 일어났을 때, 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것 같은 갑작스럽고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때 당신은 침착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때도 역시 당신은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살면서 그렇게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의식의 다른 차원이니 눈물의 계곡으로부터의 조용한 탈출이니, 다 쓸데없는 소리였다. 당신은 바닥에 누워 가슴이 터지도록 울부짖고 또 울부짖었다. 죽음은 당신의 안에 있었지만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울부짖었다. (40p)

 

  서른두 살. 1979년 초 거기에 정착하기 전 한바탕 충격과 갑작스러운 변화, 당신을 바꾸어 놓고 당신의 삶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틀어 놓은 내면의 동요가 몰아쳤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지만 갈 데도 없고 이사할 돈도 없는 상태에서 당신은 파경 이후에도 더치스 카운티의 집에 머물며 아래층 서재 구석의 침대 겸용 소파에서 잠을 잤다. 지금 와서야 (서른두 해가 지나) 생각해 보니 그것은 어린 시절 당신의 침대였다. 두어 주가 지난 뒤 뉴욕으로 떠나면서 당신은 우주의 틈새 속으로 당신을 밀어 넣는, 델 듯이 뜨겁고도 명징한 에피파니의 순간, 일종의 계시를 경험했고 그것은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게 했다. (102p)

 

  세 번째 잔을 다 비우고 또 한 잔을 비운다. 결국 이것이 마지막 잔, 치명적인 한 잔이 되고 만다. 몸의 안팎에서 동시에 공격이 시작된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당신을 의자에 억지로 주저앉혔다가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것처럼 당신을 둘러싼 공기의 압력이 갑자기 엄습한다. 동시에 머리통 벽면을 두드리며 절그렁거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고 머릿속은 섬뜩할 정도로 가벼워진다. 그러는 내내 바깥쪽에서는 계속해서 당신을 짓누르고 안쪽은 텅 비어 가는 바로 그 순간, 어느 때보다도 더 어둡고 텅 빈 바로 그때, 당신은 기절해 버릴 것만 같다. 고동이 빨라지고 가슴을 뚫고 터져 버리려고 하는 심장을 느낄 수 있다. (...) 이제 당신은 돌이 되어 가고 있다. 부엌 바닥에 누워 입을 벌린 채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없게 되어 검고 깊은 죽음의 바닷속으로 당신의 몸뚱이가 익사해 가기를 기다리며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다. (140p)

 

  당신은 <옛날이 좋았지>라는 말을 싫어한다. 문득 향수에 젖어 지금보다 삶을 더 낫게 만들어 준 것만 같은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데 슬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면 스스로에게 당장 그만두고 잘 생각해 보라고, 지금을 볼 때와 같이 그때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오래지 않아 당신은 그때와 지금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결론에 이른다. (19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