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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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의 예술적 감수성은 그가 남긴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드러난다. 단순히 작가라서 당연히 따라올 수 있는 문학적 감수성 뿐만 아니라, 헤세는 그림과 음악에 관해서도 열정과 감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유리알처럼 여리고 섬세한 내면이 묻어 나온다. 생전엔 정신적인 고통도 많이 느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청소년기에는 그야말로 '질풍'의 시기를 보냈고,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대한 폐해를 비판함으로써 받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가정의 불화는 그의 정신을 약하디 약하게 만들었다. 이후, 헤세는 내면을 굳게 하기 위해 자연을 접하며 문학을 통해 스스로가 치유하기 시작했고, 그때 만들어진 작품이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다. 즉,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쓰여진 작품이다.

 

  '클링조어'는 헤세의 분신과도 같다. 헤세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이 소설 또한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있다. '클링조어'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 자체인 그림을 그려나간다. 소설 속 그는, 친구들을 만나고 사랑하는 여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태백의 시를 읊고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구구절절 이야기한다. 자연과 마을, 수많은 형상을 채색하던 실제 헤세의 체험이 그에게 입혀졌고, 정신적인 죽음 앞에 서있던 헤세의 모습은 '클링조어'가 그대로 재현해냈다. '자신의 몰락을 앎으로써 열광적으로 생기를 얻는'다는 '몰락'의 개념은 이 소설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어떠한 극적인 사건 없이 이 소설은 '클링조어'의 내면, 감수성, 예술혼을 표현함으로써, 헤세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모든 것들을 풀어놓았다.

 

  또 하나, 색다른 점은 소설 속에 그려진 '클링조어'는 화가 '고흐'를 떠올리게도 한다는 점이다. 정신적인 고통으로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 '고흐', 그리고 화가 친구와 각별한 사이를 이루어나가는 모습이 닮았다. 실제로 헤세는 '고흐'의 삶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언급했다고 한다. '인간의 고통과 절규' 그리고 삶과 운명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고흐'의 그림들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거칠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소설은 음악의 선율처럼 자유자재로, 그리고 마치 그림을 덧칠하는 것처럼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문학과 음악, 그림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으며, 이 소설 속에서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예술혼이 뿜어내는 광기, 그리고 생동하는 열정은 그 모습이 닮았다. 그를 몰두하게 만들었던 세 가지의 예술, 이 책은 아름다운 색채와 감미로운 선율, 매력적인 문체가 담겨있는 예술 그 자체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일 년쯤 지나면 - 혹은 더 이를지도 모르지만 - 그 두 눈이 보이지 않게 되고, 그의 가슴속 불도 꺼져 버릴지 모른다. 그래, 그 누구라도 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을 오랫동안 지켜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또한, 열 개의 목숨을 가진 클링조어 또한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오랫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불을, 자신의 모든 화산을 불태울 수는 없으며, 그 누구라도 밤낮으로 계속해서 불꽃 속에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속해서 즐기면서, 계속해서 창조적으로, 모든 창문들 뒤쪽에서 매일 낮 음악이 울리고 매일 밤 수천 개의 촛불이 반작이는 성처럼 계속해서 모든 감각과 신경을 명료하게 극도로 긴장시킨 채, 그는 매일 낮 여러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작업하고, 매일 밤 여러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제 끝이 다가오고 있다. 이미 힘은 많이 소진되었고, 시력도 많이 약해졌다. 삶은 많은 피를 흘렸다. (11p)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릴 거야. 당장 내일부터라도. 그러나 집과 사람, 나무는 더 이상 그리지 않을 거야. 악어와 불가사리, 용과 심홍색의 뱀, 그리고 태어나고 있는 모든 것, 변화하고 있는 모든 것, 인간이 되려는 충만한 동경, 별이 되려는 충만한 동경, 충만한 탄생, 충만한 소멸, 충만한 신과 죽음을 그릴 것이야." (51p)

 

 

그는 증오로 가득 차서 집시들이 몰고 온 초록색 마차 아랫부분의 주름을 파리 블루로 할퀴듯 그려 넣었다. 그는 격분한 나머지 크롬 옐로를 방충석 모서리에 내동댕이쳤다. 그는 깊은 절망에 사로잡혀, 칠하지 않고 비워 둔 곳에다 치노버를 찍어서 튀어나온 하양을 죽여 버렸으며, 영속을 얻기 위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웠고, 잔인한 신을 표현하기 위해 옅은 노랑과 나폴리 옐로로 고함을 쳤다. 그는 신음을 내면서 더 많은 파랑을 무미건조한 먼지투성이의 초록에 내동댕이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음속의 불을 저녁 하늘에 붙였다. 작은 팔레트는 불의 힘을 가진, 순수한, 섞이지 않은, 가장 밝은 색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 색들은 그의 위안, 그의 탑, 그의 무기고, 그의 기도서, 사악한 죽음을 겨냥하여 쏘는 그의 대포였다. 자주는 죽음의 거부였으며, 치노버는 부패를 조롱했다. 무기고는 훌륭했고, 작고 용감한 그의 군대는 광휘를 발했다. 재빠르게 발사하는 대포는 빛을 내며 위로 울려 퍼졌다.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모든 발사는 헛되었다. 하지만 발사는 상당히 훌륭했으며, 그것은 행복이자 위안이었고, 여전히 생명이었고, 여전히 승리의 함성이었다. (59p)

 

 

그를 조롱하기 위하여, 나는 반야를 노래 부르네,

취한 나의 노래는 웅얼거리며 지친 숲 속으로 퍼진다네,

내가 부르는 노래와 내가 마시는 술의 의미는

그의 위협을 비웃어 주는 것이라네.

 

나, 기나긴 노정의 방랑자는 많은 것을 행하고 또 겪었다네,

이제 이 저녁에 앉아, 술을 마시며 불안하게 기다린다네,

번쩍이는 낫이

내 머리를 움찔거리는 심장과 분리할 때까지. (89p, 클링조어가 친구 두보에게 보내는 시)

 

 

* 헤세가 이태백의 시를 좋아했다는 게 신기하네요 :) 책 속에서도 이태백의 시가 등장합니다,

* 원래 좋은 글을 만나면 포스트잇을 붙이는데, 이 책에는 장난아니게 붙여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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