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천국의 죄수들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이명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여기가 바로 토마스 모어가 꿈꾼 유토피아이자 캄파넬라가 만든 태양의 나라가 아닌가. 우린 지금 그런 낙원에 살고 있는 거야" - 책 첫머리에서.

 

  갑작스럽게 문명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이런 표류 생활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이 다뤄져왔다. 가장 기본적으로 떠올리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접했던 책이 <로빈슨 크루소>다. 물론 지금은 단편적인 줄거리만 기억나지만, 최근에 찾아보게 된 결말에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로빈슨이 무인도를 그리워하고 돌아가려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고 한다. <유쾌한 천국의 죄수들>에서는 몇십 명의 '로빈슨 크루소'가 등장한다. 갑작스러운 비행기 사고로 다양한 직업의 (의사, 간호사, 산파, 벌목공, 기자, 스튜어디스, 기장 등) 사람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동안 <기발한 자살여행>, <목 매달린 여우의 숲>등의 소설을 써낸 핀란드의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는 기발한 생각과 살짝 어이없고 유쾌한 웃음으로 '블랙코미디'를 즐기게 해주었다. <유쾌한 천국의 죄수들>, 제목만 보면 전혀 '무인도의 이야기'라고 볼 수 없을 듯하지만, 초반부터 신선한 설정으로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그것은 바로, 무인도에 불시착한 그 비행기가 '피임기구'를 운반하는 용도였던 것! 망가져 바다에 널브러진 비행기 속에서 잔뜩 먹을거리나 의료물품을 찾으려 했던 '로빈슨 크루소' 팀들은 비행기 안에 가득 찬 기구들을 보고, 아주 황당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기저기 유용하게 쓰이게 되는데.

 

  무인도에 표류한 40여 명의 사람들은, 섬에 있는 각종 '음식으로 가능한 것들'을 먹고, 집과 도구를 만들고, 각종 편의시설에, 각자의 노동을 통해 보상을 받는 방식으로 '원시 공산사회'를 구성해나간다.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고, 남녀 구성원들도 충분해서 각자 짝을 만들고, 힘든 것을 잊고 웃을 수 있게 만드는 '술'도 있다. 너무나 이상적인 유토피아, 그곳을 떠나면 스트레스뿐인데 먹고 즐기는 이 무인도를 왜 버리고 떠나야 하는지, 그들은 갑자기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너무나 잘 적응해 나갔고, '행복한 조난자'에, '유쾌한 천국'에 살고 있는데!

 

  작가는 '유쾌한 천국',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를 조롱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많은 것을 포기함으로써, 이 이야기 속에서는 지니고 있던 대부분의 것들을 사고에 의해 빼앗기게 되면서 불행이 올줄 알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너무나 순탄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언제 불행(혹은 사고&죽음, 물론 사고는 등장하기는 한다)이 닥칠까 염려하지 않고 즐겁게 책장을 넘기는 과정이 즐겁다. 무인도에 표류하는 수많은 이야기 중 가장 최근에 읽은 작품은 <파리대왕>인데, 오묘한 기분에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이 작품에 비해 <유쾌한 천국의 죄수들>은 긴장과 불안보다는, 마치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비록 주인공들이 소년과 - 성인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도 거의 다른 모습이다. 작가의 재치 있는 설정들이 소설을 심각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술술 넘어간다. 찝찝하지 않고 재밌게 볼 수 있는 '블랙코미디'소설, 이 작가의 소설을 이래서 좋아한다.

 


 

  "우리는 이 섬이란 감옥에서 무조건 기다릴 것을 선고받은 죄수들 같군요. 당분간 구조될 가능성도 전혀 안 보이고, 그래서 말인데...... 몸까지 수갑을 채워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갈색머리 산파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니넨 박사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여자들에게 서둘러 피임기구를 보급하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았다. 섬에는 남자들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임기구 착용을 강요하진 않으나 원하는 여자들에겐 허용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전체회의를 소집해 공표했다. 그러면서 원치 않는 임신은 족쇄가 되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특히 보수적인 유럽사회는 더욱 그럴 거라고 못 박았다. 이 못이 저마다 가슴 깊숙이 박혔는지, 수다스럽던 분위기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70p)

 

 

사실상 계획을 단념해봤자 우리에게 득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적어도 6개월은 걸릴 터였다. 정글에 과연 글씨를 새겨야 하는 걸까?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일까? 지구표면에 글자로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혹 십자가는 어떨까? 삼각형은? 원은? 아니면 일직선은 어떨까?

(...) 차라리 만자형의 십자가라면 개간하기는 상당히 쉬울 테지만, 그것 역시 그다지 시선을 끌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도형도 포기했다.

"벌써 우리 머릿속에 불꽃이 타오르고 있군!" 키스트가 눈을 반짝이며 힘주어 말했다. (132p)

 

 

곧 조용하던 캠프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금주파였고 다른 한쪽은 알코올 생산을 합법화해 캠프에서 적절한 선에서 함께 소비하자고 했다. 양쪽 주장이 워낙 팽팽해 결국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누군가 투표용지로 47장의 나뭇잎을 따왔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알코올 생산 합법화가 99%여서 온 캠프장이 한동안 폭소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아니 우리의 고독을 풀어줄 저 위대한 주님을 거부한 자가 누구야?"

(...) "100%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어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 외로운 섬에서 기댈 게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투표에서 100%가 나온다는 건 어떠한 이유에서든 이미 한 집단이 견제와 균형을 상실하고 절대화되어 간다는 징표가 아니겠어요? 우리 공동체도 그런 조짐이 보여서 막았을 뿐이에요." (144p)

 

 

"여기를 떠나려고 이렇게 애쓰는 게 과연 합리적일까? 이 섬은 우리가 남은 생을 유쾌하게 살아가기에 아주 이상적인 곳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테일러가 이렇게 서두를 꺼내면서 왜 우리가 저 바깥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전쟁으로 가족이 짖어지고 세금을 내야 하며, 비싸고 쓸데없는 물건을 사야하며, 각종 암에 걸리거나 교통사고가 나고, 다리가 부었다는 둥 세면대는 항상 막힌다는 둥 끝없이 늘어놓은 아내의 하소연을 계속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은 추운데다가 에너지 위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여기는 서구식 민주주의도 필요 없으니까 지금의 우리 캠프가 훨씬 더 낫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 낙원을 떠나려고 하다니, 우리는 완전히 돌았다며 개탄했다! (152p)

 

 

"오염도 제로의 청정해역에서 생산한 신선한 생선과 풍부한 과일들을 비롯해서 거북이, 달팽이, 원숭이, 뱀, 새 같은 별미들도 지천에 널려 있어. 원하면 술도 마실 수 있고 외국어도 배울 수 있고, 운동도 하고 아주 친절한 의료 서비스도 받고, 실컷 사우나도 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넓은 태평양 풀장에서 돈 한 푼 없이 마음껏 수영할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린 한마디로 행복한 조난자들이지!"

"행복한 조난자?"

"그렇지, 즐거운 천국의 죄수들!" (153p)

 

 

* 그러고 보니 이 작가의 주요(?) 소설들을 세권이나 봤는데

<기발한 자살여행>, <목 매달린 여우의 숲>이 두 권이 이것보다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이 책이 재미없다는 건 아니고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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