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온다 리쿠'의 책을 읽어보기로 결정했을 때, <밤의 피크닉>과 <삼월은 붉은 구렁을> 중에서 많이 고민했었다. 결국 제목이 더 익숙하고,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밤의 피크닉>을 먼저 읽었고, 이건 나의 '온다 리쿠 두 번째 책'이다. 예전에 일본 소설에 능통한 이웃분들께 '온다 리쿠'의 책은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역시 서정적이고 약간은 대중적인 소설이라고 느껴졌던 <밤의 피크닉>과 비교해서, 이번 책은 작가 나름의 독특한 생각들이 많이 첨가된 것 같은 느낌이다.
작가는 책 속에 등장하는 미스터리하고 수수께끼 같은 책(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소재로 하여, 독립된 네 편의 이야기지만 오묘하게 연결돼있는 구성을 만들어낸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우연히 다과회에 초대된 주인공이 누군가가 익명으로 출간한,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읽어보지 못한 수수께끼의 책 <삼월->의 정체를 파악해나간다. 다과회에 모인 사람들이 말하는 소설 <삼월->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는 매혹적인 소설이며, 회장의 집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어딘지 모르게 귀신에 홀린 듯한 이야기의 끝이 약간은 꺼림칙했지만, <삼월->이라는 소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경쾌한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이야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딘가에 있을 법한 미스터리한 소설'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두 명의 편집자가 '이즈모'로 가는 열차 안에서 미스터리한 소설 <삼월->의 작가를 추리하는 여정을 그리는 '이즈모 야상곡'. 그리고 잔잔하지만 안타까웠던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담았던 '무지개와 구름과 새와', 소설 속의 소설 그 자체를 그리고 있던 '회전목마'까지.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은 이 네 가지 이야기 바깥에서 흐르는 배경이 되며, 각각의 상황에 맞추어 시시각각 변화한다. 이야기마다 각기 다른 얼굴들로 보여지는 이 흥미로운 '책'의 모습들을 천천히 겹쳐보는 것도 재밌고, 정체불명의 '책'이라는 소재로 쓰인 이 이야기들 속에서 미스터리한 요소를 즐길 수도 있다. 또한 책 속의 책,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슬그머니, 그리고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 책은 또다시 '삼월 시리즈'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연결된다. 이야기 네 개로 비로소 <삼월->이라는 소설의 형태가 만들어지지만, 또 한 번 무수히 다른 얼굴들을 비추어내는 소설. 이쯤이면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책을 좀 읽는다고 자만하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것도 터무니없는 환상이에요. 인간이 한평생 읽을 수 있는 책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거든요. 서점에 가면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나는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읽지 못한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하고 늘 절망합니다. 내가 읽지 못하는, 천문학적인 수효의 책들 중에 내가 모르는 재미가 넘치는 책이 수없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어요. 이야기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만, 그러니까 뭐랄까, 우리가 열중하고 있는 <삼월> 또한 독자가 대단히 원하는 작품인가 하면,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 끌어내봤더니 빛을 잃어버리는, 그런 작품일지도 모르죠. (58p)
화장실로 가던 다카코는 다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탓에 통로를 휘청휘청 걸어갔다. 좁다란 통로에 좁은 문이 여러 개 늘어서 있다. 다들 잠이 들었는지 기척은 없다. 창밖은 칠흙같은 어둠이다. 산과 숲이 가까이 다가와 있는 느낌은 있어도, 어둠은 깊고 묵직했다. 다카코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어둠을 가르고 달려가는 열차의 창에 그리우면서도 두려운 뭔가가 비치는 것 같았다.
언제나 우리는 밤 바다를 달려간다. 우리는 어둠의 바닥을 홀로, 원하지도 않은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아아, 이것도 <삼월>의 한 구절이다. 그렇게 오래 전에 읽은 책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니. (132p)
괴물 같은 소설이야. 그저 그 존재만으로 겹겹이 베일을 둘러가고 있어. 이미 실체도 없고,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데도, 간단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려. 하지만 진짜 이야기란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몰라. 존재 그 자체에 수많은 이야기가 보태져서 어느새 성장해 가는 것. 그게 이야기의 바람직한 모습일지도 몰라. (...)
그래 자신도 그 과정에 하나를 보탰을 뿐이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자신조차 모르는 사이에 전설의 일부를 만들어간다. 그 수수께끼에 싸인, 커다란 상처가 있는 이야기의 전설을. (191p)
그렇다. 미사오에게는 어딘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구렁 같은 부분이 있었다. 매일 다니던 길가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고 하자. 아주 깊기 때문에 떨어지면 위험하다. 치명상을 입을 수가 있다. 처음에는 조심조심해 가며 길을 걷는다. 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지고, 곧 구멍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길을 걷게 된다. 마치 원래부터 구멍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그러나 깊은 구멍은 늘 그곳에 있다. 처음부터 같은 깊이로. 자칫 잘못하면 빗물에 깎여서 더 깊어지기도 하고, 모르는 새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기도 한다. (254p)
회전목마와 책 한 권. 대체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두르면 안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천천히 진행시킬 작정이다. 태엽 풀린 오르골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같은 마지막 말을 속삭이듯이. 기울어진 그릇에서 그레이비 소스가 천천히 흘러 떨어지듯이. 재촉하면 안 된다. 나는 당신이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어떻게 해서 나와 그가 만나, 실이 한 가닥으로 꼬이듯이 서로에게 끌렸는지. (372p)
* 소설도 재미있긴 했지만 그 속에 나오는 '책'과 글쓰기에 관한 글들이 참 공감이 많이 되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