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집짓기 - 마흔 넘은 딸과 예순 넘은 엄마의 난생처음 인문학적 집짓기
한귀은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예전에 건축·인테리어에 관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유럽에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작은 공간이든 큰 공간이든 오밀조밀하게 '그곳에 사는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충족시킨 집들을 보았다. 땅덩어리도 좁고 집을 만들어 살기보다는 만들어진 집, 이를테면 아파트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어지간히 부러워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집을 만들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꿈에 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그 꿈은 현현된다. 이 에세이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영화 <건축학개론> 속의 멋진 집, 그리고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 남자 주인공이 벽돌 한 장 한 장 올려 만든 집. <엄마와 집짓기>는 이런 꿈을, 영상이 아닌 이미지도 아닌, 실제로 실현한 이야기이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집짓기', 누구나 꿈꿀법한 이 일이 더욱이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부르기만 하면 애정이 샘솟는 '엄마', 미안할 걸 알면서도 굳이 투정 부리고 짜증을 부리게 되는 '엄마', 저자가 '모녀 사이의 특별한 우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엄마가 나, 그리고 형제들을 키우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왔음을 알기에, 정말로 편한 가정(집), 엄마에게 맞는 집을 선물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엄마를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미 여러번 '감성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지식과 감동, 여운을 함께 주었던 저자는 엄마와 함께 '인문학적 집짓기'를 실행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의 스타일'에 꼭 맞게, 즐겁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60대,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한 엄마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하여 집을 짓는다. 방에 들어오는 빛, 창의 크기, 바닥재, 돌담과 주차장, 물길, 창고... 저자가 건축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신중하게 만들어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은 욕심이 가득 찬 으리으리한 집이 아니라,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이 채워진 따뜻한 삶의 공간이 된다.

 

 

  <엄마와 집짓기>에는 엄마를 위한 집짓기와, 자식을 위한 집 만들기가 함께 있다. 집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를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도 같이 있다. 이제 마흔이 넘은 저자가 자식을 위해서 꾸며나가는 공간에 대한 것들이 후반부에 펼쳐지는 것이다. 딸로서의 삶, 엄마로서의 삶을 모두 겪고 있는 그 시점은 내가 언젠가 맞이할 때이기 때문에 묘하게 와 닿는다. 아마도 여자들이라면 책 속의 감성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인문학적 사색들이 담겨있는 이 책은,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과 깊은 생각들이 꾹꾹 담겨있어 더없이 소중한 느낌이다.

 

 


 

 

  집짓기는 엄마의 서러웠던 과거가 흙부스러기처럼 조금씩 부서져 내려 평평한 바닥에 고요히 얹히는 일이기도 하고, 그 엄마의 딸인 내 과거가 함께 햇빛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두 과거의 반석 위에 미래를 짓는다. 집짓기는 늙으신 엄마와 늙어가는 딸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며, 어쩌면 후에, 그 후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엄마와의 추억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기 위한 딸의 기획이기도 하다. 엄마는 차츰 집을 당신의 존재 자체로 여기신다. 엄마는 이제 엄마 자신, 아니면 당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한 집을 지으려 한다. (20p)

 

 

  하이데거의 관점을 거칠게 요약하면 불안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시간 내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불안이 생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불안의 감지와 자신의 무(無)에 대한 자각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지금의 나'는 '염려적 현존재'라고도 했다.

 엄마의 불안도 궁극에는 시간에 닿아 있다. 새집 앞에서 당신은 낡아간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그 부조화가 안타까우신 것이다. 그리고 이 불안은 나 또한 비껴가지 않는다. 엄마의 집을 지으면서 나는 자꾸만 엄마의 노년을 떠올리게 된다. 이 불안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불안이 좀 덜 잦게 찾아오게 만드는 것만이 최선일 것이다. (107p)

 

 

  어두운 방으로 들어온 태양광뿐만 아니라, 밤의 어둠에 하나씩 켜진 조명도 빛을 만들고 그 빛은 공간에 깊이를 부여한다. 작은 공간도 빛과 어둠의 무수한 결 때문에 더 깊어지고 아늑해진다. 그래서 '감성조명'이란 말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깊은 공간에서 더 감성적이 되는 법이다. 감성이란,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능력이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기 시작하는 어스름 무렵이나 한밤의 간접조명 아래에서 감성적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빛' 때문만도 아니다. 빛과 어둠, 그 사이에 있는 켜켜이 다른 빛의 자질들 때문이다. 우리는 이 빛과 어둠이 만드는 깊이 속에서 세상과 관계에 대해 더 아름다운 생각, 더 깊은 사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69p)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어둠이 메타포일까. 사랑하지 않아도 어둠은 많은 것을 변질시킨다. 가령,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떤 비밀을 누설하고 싶어진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취기가 돌고 '내일'이라는 시간이 의식되지 않고 다만 '지금 여기'만이 팽창할 때, 그때 우리는 감춰두었던 어떤 '사실'을 들키기 위해 애쓴다. 그때 진실게임 같은 것을 한다. 상대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어서이다. 그런 점에서 진실게임은 비밀을 이야기하는 게임이 아니다. 비밀이 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소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그 진실이란 것은, 결코 비밀이 될 수 없는 부분에 한정된다. 비밀은 그냥 비밀로 묻혀 잇는 것이다. 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앎과,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앎으로 나누어져 있다면, 진짜 비밀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앎에 포함된다. 혹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척해야 하는 앎에 해당된다. (176p)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의 엄마는 빌리에게 "항상 너 자신이길......(Always be yourself)"이라는 말을 남긴다. 엄마가 아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자기 자신을 믿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한쪽이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선사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을 믿는 또 다른 존재와의 만남 사이에서 증폭되는 에너지이다.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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