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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물고기
다니엘 월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인생이 즐겁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유머'다. 많은 책들 속에서도 필요성을 강조하듯이, 가장 짧은 한마디와 단순한 생각으로 누군가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유머'다. 길게 이어지는 지루한 대화 속에서 지루함을 탈피해주는 것도 '유머'고,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가 매달리는 것도 웃음을 주는 '유머'다.
그리고 일생에서 절대로 '유머'와 '상상력'을 버리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있다. 그 존재 자체로 이야기가 되어버린 한 남자. 그는 소설 <큰 물고기> 속의 '에드워드 블룸'이다. 큰 연못에서 헤엄치는 큰 물고기가 되고자 했던 '에드워드 블룸'. 그러나 항상 즐겁고 엉뚱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가득했던 그의 삶에도 뜻밖의 우연은 다가오고, 에드워드는 병상에 눕게 된다. 투병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는 '나는 이렇게 죽지 않아, 미래를 봤다'며 농담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아들 '윌리엄 블룸'은 착잡하고 불만이 가득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믿거나 말거나 모험담' 대신 현실적인 이야기,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우습지 않은 상황에 억지로 웃어야 한다는 것은 답답하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다. 아들은 멋지게 포장된 위대한 아버지의 모습보다는, 굴곡이 있더라도 진실되게 보여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한 곳에서 정착할 수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누구나 사랑하게 만드는 사교성이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무릅썼고, 누구보다도 낭만적이고, 세상을 보는 일을 즐겼다. 평생 동안 가족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속에는 어릴 때 이상한 노파의 눈을 통해 미래를 본 이야기, 어느 날 강가에서 신비스러운 소녀를 만나게 된 이야기, 엄청난 거인을 만난 영웅담, 전쟁에서 살아남아 돌아온 이야기... 믿거나 말거나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들.
아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우리에게 옮겨주면서 점점 깨달아나간다. 아버지가 정말로 물려주고 싶어 했던 것은, 자신의 위대한 영웅담이나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사교성이나 그 무엇이 아니라, 즐겁게 이야기하게 만드는 '웃음'이라는 것을.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의 삶이 진실이든 허구이든, 특별한 이야기를 믿고 즐길 수 있는 것임을.
'아버지'란 이름을 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삶을 걸어가고 있다. 그들이 모두 위대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도 연못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헤엄치는 위대한 '큰 물고기'가 되고 싶은 사람일 수 있다. 살아가면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각자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가진 위대한 '큰 물고기'로서 우리가 이해해주기를 소설은 말하고 있다. 존재 자체로 이야기가 된 너무나 특별한 아버지인 '에드워드 블룸'의 입을 빌려 소설은 말한다. "누군가가 한 이야기를 기억해준다면 그는 영원히 죽진 않는 거란다"라고.
아버지는 항상 뭔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살았다. 무엇이든 그것을 성취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성취하기까지의 투쟁이 중요했다. 결코 끝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하고 또 일했다. 아버지는 한 번 나가면 여러 주 동안 뉴욕이나 유럽, 일본과 같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는 어느 날 불쑥 이상한 시간, 이를테면 밤 아홉 시쯤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리고 마실 것을 만들어 들고는 명목상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자리인 그의 의자를 메운 채 앉아 있곤 했다. 그럴 때면 으레 그는 멋진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28p)
그래서 우리는 두 명의 백치처럼 얼굴에 어설픈 미소를 띤 채 꼼짝없이 이러고 앉아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그어지는 이정표가 되는 마지막 날, 즉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있어 모든 것이 변하게 될 그날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말하고 어떤 화해를 할 수 있는가? (110p)
우리 모두가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해왔다. 이른 아침 박스 팬티만 입고 있는 모습을 봤어도, 그리고 한밤중에 모든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 그의 꿈꾸는 얼굴을 마치 수의처럼 덮고 있는 푸른 빛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봤어도 우리는 왠지 아버지가 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웃음의 신, 입만 열면 '옛날이 이런 사람이 있었단다'로 시작하는 신, 아니면 적어도 사람들이 좀 더 웃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신과 어떤 인간 여자 사이에 태어난 혼혈 신이라고 생각했다. (166p)
그래도 나는 이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고, 그러다가 결국 다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의 병까지도 하나의 은유로 생각했다. 그의 병은 그가 이 세상에 싫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진 것이다. 거인도 없고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유리 눈도 없고 생명을 구해주었더니 나중에 나타나서 목숨을 구해준 강의 소녀도 이젠 없었다. 이제는 단지 에드워드 블룸, 하나의 평범한 남자일 뿐이었다. 나는 그가 숨기고 싶은 장면을 살짝 엿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단지 이 세상이 이제는 그가 거창하게 살 수 있는 마술적인 힘을 갖고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의 병은 좀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한 승차권이었다. 나는 이제 그걸 안다. (249p)
제목이, 아시겠죠? 팀 버튼 감독의 영화로 나왔던 원작 소설입니다 :)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면은.. 정말 좋았어요. 소설과 영화 속에서 둘 다.
아 참, 이 책은 절판되었어요. 중고로 구하시거나 빌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