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그의 열정과 영혼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곳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김영갑>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같다'고 말한 <달과 6펜스>의 '찰스 스트릭랜드'. 이 책을 보면서 그가 떠올랐다. 정체모를 이끌림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고, 홀린듯이 찾아온 예술혼을 무작정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인물. '찰스 스트릭랜드'에 화가 '고갱'의 삶이 투영되었고, '고갱'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들의 얼굴이 새겨진 것이라면, 거기에는 우리나라의 '김영갑' 작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밥은 못 먹어도 필름은 사야 했고, 따뜻한 집은 없어도 사진을 인화할 암실은 있어야 했다. 가족들을 뒤로 한채 멀리, 섬의 오지로 떠났다. 자연 속의 생명과 영혼을 느끼고, 그것을 담아내기 위한 찰나를 얻기 위해 자연에 묻혀 지냈다. 밥벌이도 못하는 일들에 많은 지인들이 만류하고 한마디씩 던졌지만,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의 삶에 열중하고, 혼자의 길이라며 다독였다.

 


 

 
  그가 그렇게나 몰두했던 사진을 잠깐이나마 잊혀버리게 만드는 것은 자연의 풍광이었다. '대지의 호흡을 느끼고,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가슴이 뛰는 오르가슴을 느끼는' 자연 속에 묻혀사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놀라움. 그는 자연의 소리를 듣고, 황홀함을 느꼈다. 그 황홀함을 사진 속에 담기 위해, 자연 속에 살았고 숨막히는 멋진 풍경을 느낄 수 있는 많은 섬을 거쳐갔다. 그는 마치 산속의 신선 같았다.
 
  자연의 움직임을 그대로 담은 그의 사진은 정말로 생생하다. 그의 눈을 통해 렌즈에 담기는 풍경을 그대로 잡는다. '이렇게 봐주세요'와 같은 기교가 없지만, 그의 사진 속에서는 스쳐가는 바람, 싸늘함과 따뜻함, 소리, 눈부심... 마치 그곳에 서있는 듯한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그를 그렇게나 몰두하게 만들었던 사진, 그러나 카메라의 셔터조차 누르지 못하게 만드는 '루게릭 병'이 어느날 그에게 찾아온다. 병의 고통 속에서 그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 '갤러리'를 만든다. 그동안 찍어둔 사진과 필름들이 잊혀지지 않고, 누군가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리저리 광고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작가는 갤러리를 완성했다. 관람객들과 지인들이 말릴 정도로 건강은 악화되었지만, 어딘가에 몰두하는 것만이 병을 잊을 수 있는 평화를 주었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자연의 깊은 곳과 황홀한 순간을 담고자 노력했던 김영갑 작가는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그가 바라본 신성한 풍경은 책 속에, 자연 속에, 제주에 남아있다. 사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숙명과, 사진을 통해 느끼는 기쁨, 그리고 사진을 할 수 없게 되는 슬픔까지 작가 스스로 써낸 참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애달프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했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물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슬퍼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섬에는 작가의 열정과 영혼이 숨 쉴 거라고 위안한다. 그리고 당신이 간 곳, 그곳의 모습은 이곳보다 더욱 찬란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아직 다하지 못한 셔터를 쉼없이 눌러볼 수 있도록.

 

 

  산다는 것이 싱겁다, 간이 맞지 않는다,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마음의 장난이다. 살다보면 때때로 죽고 싶다는 말이 습관처럼 튀어나온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도피처를 찾는다. 그 최종 도피처는 죽음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잊기로 했다. 죽음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늘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25p)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궁금해 사진가가 되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다. 대자연의 신비를 느끼고 하늘과 땅의 오묘한 조화를 깨달았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의 평화와 고요가 내 사진 안에 있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나는 그 사진들 속에서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다운 삶을 여한 없이 보고 느꼈다. 이제 그 아름다움이 내 영혼을 평화롭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지금, 나의 하루는 평화롭다. (29p)

 

 

  척박한 섬에서 바람과 싸우면서 씨 뿌려 거두고, 성깔 사나운 바다에서 물질을 해도 늘 배고픔에 시달린다. 허리띠 졸라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서 변방의 불모지를 일구며 살아온 섬 토박이들의 가슴앓이는 옥토를 가꾸며 살아온 뭍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섬을 선택했다. 섬에서 무엇을 작업할 것인가. 그 문제는 살아보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었다. 세상이 변해 오늘날 뭍의 사람들은 섬으로 몰려와 바람 많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려 한다.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변방이라 부르던 시절, 토박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을 흘렸었다. 인내와 희생만을 요구하던 시절을 살다간 그들의 땀과 눈물의 흔적이 이 땅에는 아직 남아있다. 그렇게 살다 떠난 토박이들의 흔적들을 한곳에 모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129p)

 

 

  사진은 이미지의 미라이다. 내가 원하는 사진은 박제된 동물이나 새가 아니다. 새의 생김새나 크기를 설명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새가 숲에서 즐겁게 노래하는 모습, 무리끼리 지저귀는 소리에 숲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런 분위기에 빠져들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그런 숲의 분위기를 사진으로 표현하려 한다. (136p)

 

 

  내가 사진에 붙잡아두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들판의 빛과 바람, 구름, 비 안개이다. 최고로 황홀한 순간은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삽시간의 황홀이다.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아니라 대자연이 조화를 부려 내 눈앞에 삽시간에 펼쳐지는 풍경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 한순간을 위해 보고 느끼고, 찾고 깨닫고, 기다리기를 헤아릴 수 없이 되풀이했다. (180p)

 

 

  카메라를 잡을 수 없는 사진가의 삶은 날개 잃은 새의 운명처럼 시련의 연속이다. 폭풍 치는 바다에서 날지 못하는 새는 내일을 기약하기 힘들다. 새는 더 이상 짙푸른 하늘을 꿈꾸지 않는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는 사진가는 고민하지 않는다. 눈, 비, 바람, 구름, 안개에 마음이 달아오르지 않는다. 편안하게 바라보며 잃어버린 것보다는 얻은 것을 생각하며 미소지을 뿐이다. 이제 마음으로만 숱한 사진을 찍는다. 절망하자면 한없이 절망스런 상황이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234p)

 


 

 

 

 

 
 
병의 고통과 싸우면서도 일궈냈던 작가의 갤러리가 바로, 제주도에 있는 '두모악 갤러리'랍니다.
정말로 꼭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아마도 현재로선 1순위로 가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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