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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9
윌리엄 골딩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6월
평점 :
가장 순수한 아이들에게서 드러난 인간의 본성 <파리대왕 - 윌리엄 골딩>
책을 읽고서, 여운에 잠기다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를 보았다. 상상했던 모든 것이 시각적으로 재현되어 더 잔인한 감이 있지만, 아이들의 모습이 책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앳되어 보여서 안타까웠다. 90년대에 나온 영화 <파리대왕>도 괜찮았지만, 역시 축약된 부분이 많아 책을 먼저 읽기를 추천한다. 책은 영화보다도 잔혹하고 소름 끼치는 장면이 많다. (+ 영화 속에서는 아이들을 사관학교 출신들로 설정하였다.)
핵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회, 영국의 소년들은 무인도에 고립되고, 앞으로 살아남을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 그중 의식 있는 소년 '랠프'가 대장으로 나서고, 다른 소년들의 동의를 받고 무인도 생활을 이끌기로 한다. 새끼돼지라 불리는 뚱뚱한 소년은 아이들의 놀림을 받지만, '랠프'의 참모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지독한 근시인 '새끼돼지'의 눈과 같은 안경은, 소중한 불을 피울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랠프'는 가장 먼저 규칙을 정한다. '소라를 잡은 사람만 말을 할 수 있고, 그 소라는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다.', '구조되기 위하여 산꼭대기의 봉화를 올리고, 그것을 지켜내야 한다.' 그러나 고기를 얻기 위해 멧돼지 사냥에 몰두한 '잭'과 그 주위의 소년들은 '봉화'의 규칙을 지켜내지 못하고, 살육의 희열을 느껴가면서 대장 '랠프'와 대립하게 된다. 이제 두 팀으로 나눠진 소년들, '잭' 군단들은 얼굴에 색칠을 하고 벌거벗으며 사냥에 나선다. 그러던 중 낙하산에 매달린 채 무인도에 떨어진 어떤 병사를 괴물로 착각한 소년들은 괴물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상상하지 못할 행동을 저지르는데..
순수했던 많은 아이들이 이후 광기 어린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무인도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비록 어린아이들일지라도, 어디까지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어린아이들, 어쩌면 보다 의식이 자리 잡히지 못한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기에 효과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린아이들은 무인도의 생활 속에서, 어른들의 정치와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합리적인 규칙에 서있고 인간의 본성을 결코 잃지 않으려는 이상주의자 '랠프'는 회의와 발언권 등을 떠올리게 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꿈꾸는 대장이다. 그와 반대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잭'은 고기로 아이들을 현혹시키는 '독재자'의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구조'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현실'을 택하기 위해 '잭'의 편을 선택한다. '문명'이라고 불리는 사회의 '규칙'은 결국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랠프에게 남은 친구는 '새끼돼지' 하나뿐, 그는 살아가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안경'(불을 만드는)을 지니고 있다. 그 안경은 결국 불행을 부른다.
순결했던 아이들은 결국 '선(善)'을 지키지 못 했다. '순수'는 '선'과 직결되지 못했다. 아이들의 죽고 죽이는 싸움이 어른에게는 마치 놀이처럼 느껴질 정도로 순수한 모습이었지만, 본성을 드러낸, 그 드러낸 모습을 목격한, 그 서러움의 폭발이 결말 부분에 나타난다. 인간의 본성은 결국 '악(惡)'일까, 멧돼지 머리 앞에서 들었던 '짐승의 일부분'이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것들을 드러내고 있어, 너무나 잔혹하다.
작가 '윌리엄 골딩'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큰 회의감에 이 소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많은 문학작품이 현실을 반영하듯 그들의 세계는 현실과 닮았다. 이데올로기의 갈등, 이득을 탐하려는 싸움,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독재와 현혹.. 더욱더 아이러니한 점은 소설의 끝에 등장한다. 광기를 맛본 그들 앞에 보인 '군홧발', 소년들은 과연 '구조'된 것인가. 혹여 더 큰 싸움 속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숲 속의 정적은 무더위보다 더 그를 짓눌렀다. 대낮인데도 벌레의 울음소리조차 없었다. 화려한 빛깔의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로 지은 원시적인 둥지에 있다가 잭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푸드덕 날았을 때에야 비로소 정적은 깨어졌다. 그리고 아득한 태고의 심연 속에서부터 퉁겨져 나오는 것 같은 요란한 울음소리가 만드는 메아리가 울려올 뿐이었다. 잭 자신도 이 울음소리에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면서 찔끔했다. 순간 그는 사냥 나온 소년이라기보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원숭이 같은 피조물이 되는 것 같았다. (70p)
파리 떼는 사이먼의 콧구멍 밑을 간질이고 넓적다리 위에 등넘기를 하고 있었다. 파리 떼는 시커멓고 다양한 색이 섞인 초록색을 띠었고 헤아릴 수 없이 수가 많았다. 그런데 사이먼의 정면에는 파리대왕이 자기의 지팡이에 매달려서 밝게 웃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먼은 눈 감은 자세를 포기하고 돌아보았다. 흰 이빨과 희미한 눈과 피가 보였다. 또한 그의 응시는 그 케케묵고 피할 수 없는 인식으로 인해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사이먼의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기 시작하더니 골을 때렸다. (209p)
"너는 여기 혼자 와서 무엇을 하는 거냐? 넌 내가 두렵지 않으냐?"
사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너를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나뿐이야. 그런데 내가 바로 그 짐승이야."
사이먼의 입이 기를 쓰더니 귀로 들을 수 있는 단어가 가까스로 튀어나왔다.
"막대기에 꽂힌 멧돼지 머리야."
"짐승을 사냥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구나." 하고 멧돼지 머리가 말했다. 잠시 숲과 희미하게 식별될 수 있는 다른 그 밖의 장소들이 멧돼지 머리가 낸 웃음소리를 흉내 내며 메아리를 보냈다. "너도 알지? 나는 너희들의 일부분이야. 아주 밀접하게 가까이 있는 일부분이야. 왜 모든 것이 그릇되게 돌아가고 모든 일이 현재의 이 모양으로 되었는가 하면, 그건 모두 나 때문이야." (218p)
"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 그놈을 죽여라!"
막대기가 내리퍼부어지고 새로 원을 그린 소년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 짐승은 원의 한가운데에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짐승은 고함소리에 지지 않으려고 산에 있는 시체에 대해서 무어라고 자꾸만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짐승은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가 원형을 꿰뚫고 가파른 바위 끝에서 물가의 모랫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곧 소년의 무리는 물밀듯이 그 뒤를 따라 바위를 내려가 짐승에게로 뛰어내렸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고 주먹질을 했다. 물어뜯고 할퀼 뿐이었다.
곧 구름이 걷히고 비가 폭포처럼 억수로 퍼부었다. 빗물은 산꼭대기에서 퍼부어 나뭇잎과 가지를 나무 줄기에서 떼어내고 모래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한 떼의 소년들 위로 냉수 샤워처럼 퍼부어댔다. (233p)
- 이런 종류의 소설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역시 극한의 상황은 무인도가 최고인가 봅니다...
- 책장을 보니, 어두운 소설만 가득이다. 기분 좋은 '소설' 추천해줄 분 없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