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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에브리맨 - 필립 로스>
"그 무겁고, 무덤 같고, 바위 같은 무게는 말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고"
소설은 한 평범한 남자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초반부터 '죽음'이란 이미지가 가득 차 있는 소설. 언제 어디서나 있을만한 흔한 장례식에 뒤이어, 흔한 만큼 평범했지만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았던 그 남자의 삶에 대한 회상이 이어진다. 그 회상의 첫 부분에서 나오는, 삶에서 단언컨대 가장 끔찍한 첫 경험이었던 '탈장수술'. 병원에서 있었던 한 소년의 죽음과 마취 직전에 다가왔던 극심한 공포감은 그 남자에게 있어서, 살아가면서 아픔과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몇 차례의 이혼, 그리고 계속해서 찾아오는 신체상의 문제는 삶을 지탱하고 있던 그를 더욱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이었고, 이혼한 아내와 아들들은 자신에게 어떠한 애정 따위 없으며 삶의 외로움을 더욱 극심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희망은 딸인 '낸시'와 '피비'. 그리고 평생 바라보고 살아왔던 또 다른 꿈 '그림'이었다. 그렇게 그림에 대한 열망을 삶의 후반부에서 작은 일상으로 이루어내고, 젊은 여자를 유혹하고 만나면서 그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고 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을 보낸다.
노년기에 접어든 한 남자의 쓸쓸한 인생에의 관조는 소설 속에서 중간 중간 격한 감정으로 나타난다. 담담하고 냉정한 어투로 이야기되는 삶의 회상은 점차 나이가 먹어갈수록, 죽음과 고통에 가까워져갈수록 절망적이고 외롭다. 죽는 순간에 어떠한 감정으로 그 죽음을 맞이할지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고, 살면서 그 감정이 좋은 것이 되게끔 걱정하고 준비하고 대비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는 주인공이 결국 소설의 마지막,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 때로' 되돌아간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 마지막 부분은 소설의 처음과 끝이 만나게 되는 지점이며 더욱더 아이러니한 감정을 안겨주게 된다.
그런데, 삶은 정말 '무'일까, 아니면 죽음과 맞닿을 때의 삶이 '유'에서 '무'로 변해버리는 것일까. 주인공의 마지막 감정과 회상은 체념일까, 저항일까. 삶의 마지막에서 더 이상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지 모르겠다.
- 동생인 로니가 먼저 무덤으로 나섰다. 손에 흙을 한 줌 쥐자 그의 몸 전체가 떨리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거세게 토해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그 감정은 적대감이 아니라 적대감 때문에 빠져나올 수단을 찾지 못 했던 다른 감정이었다. 입을 열었지만, 일련의 괴상한 헐떡거림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지 몰라도, 그 스스로는 절대 그것을 끝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21p)
- 그는 아버지가 세상에서 1센티미터씩 사라지는 것을 다 지켜보았다. 맨 끝까지 그 과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죽음 같았다. 그렇다고 첫 번째 죽음보다 덜 끔찍하지도 않은 죽음. 그는 갑자기 밀려오는 감정에 실려 자신의 삶의 켜들을 뚫고 저 아래로, 저 아래로 내려갔다. 병원에서 그의 아버지가 갓 태어난 손자 세 명을 처음으로 안아주고 있었다. (67p)
- 그는 늘 안정에 의해 힘을 얻었다. 그것은 정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정체였다. 이제 모든 형태의 위로는 사라졌고, 위라는 항목 밑에는 황폐만이 있었으며,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질감', 이것은 그의 언어에서는 그에게 낯선 어떤 상태를 묘사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 교실 학생 밀리선트 크레이머가 자신의 상태를 한탄할 때 그 말을 묘하게 도드라지는 느낌으로 사용하면서 달라졌다. 이제 그 어떤 것도 그의 호기심에 불을 붙이지 못했고 그의 요구에 답을 해주지도 못했다. 그의 그림도, 그의 가족도, 그 이웃도. 아침에 널을 깐 산책로에서 그의 옆에서 조깅하는 젊은 여자들을 빼면 아무것도. 맙소사, 그는 생각했다, 한때 나였던 남자! 나를 둘러쌌던 생활! 나의 것이었던 힘! 그때는 어디에서도 '이질감'은 느낄 수 없었다! 한때는 나도 완전한 인간이었는데. (135p)
- "(...) 노년은 전투예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 (149p)
- 자신이 없애버린 모든 것, 이렇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스스로 없애버린 모든 것, 더 심각한 일이지만, 자신의 모든 의도와는 반대로,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없애버린 모든 것을 깨닫자, 자신에게 한 번도 가혹하지 않았던, 늘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주었던 형에게 가혹했던 것을 깨닫자, 자신이 가족을 버린 것이 자식들에게 주었을 영향을 깨닫자, 자신이 이제 단지 신체적으로만 전에 원치 않았던 모습으로 쪼그라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깨닫자,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자책에 박자를 맞추어 쳤다. 심장제세동기를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로 빗나갔다. (164p)
짦은 소설인데도 어떤 긴- 소설보다 감동이 더할 때,
이런 책은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단순히 짧다고 좋은 건 아님 ㅎㅎㅎ;;)
중간 중간 베껴 쓰고 싶은 멋진 글들도 많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