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성숙한 감성이 채워진 아홉 가지 이야기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 앨리스 먼로>

 

 

 

 

 

 

 

 

 
 
  제대로 된 독서 습관이 자리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수상작이나 유명한 고전들에게 많은 신뢰를 하는 편이다. '이 책은 수상작이니 정말 멋진 작품이고, 배울 점이 많겠지.' 생각하면서. 아마도 '검증된' 책을 많이 읽으려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가끔은 버거운 작품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수많은 책이 있고, 취향이 다르니 어떠한 책이 안 맞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가끔은 아쉽다. 조금만 더 잘 읽혔으면 좋았을걸,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함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이 단편집을 쓴 작가 '앨리스 먼로'는 201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의 여류작가다. 수상 소식이 인터넷에 알려졌을 때,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라는 것에 놀랐고, 작가의 소설들은 거의 단편소설집이 전부였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평소 단편보다는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이 작가의 단편소설은 굉장한 힘이 있겠구나 하며 그녀의 책을 처음으로 접해보았다.
 
  여러 개의 단편에서 성숙한 감정들이 물씬 풍기고 있다. 간단해 보이지만 무언가 의미 있어 보이는 단편집의 제목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이라는 단어들의 조합처럼, 여류작가의 섬세한 감성이 느껴진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책의 맨 끝에 나왔던 <곰이 산을 넘어오다>였다. 2008년의 영화인 <어웨이 프롬 허>의 원작이어서 그런지 읽기 전 기대가 컸었고 책 속의 여러 단편들 중 가장 잘 읽혔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부인을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라는 확실한 상황이 정해져있고 어느 정도 결말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니,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 건네주고 있는 듯한 감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인상 깊은 작품들은 문장이 특히나 아름다웠던 <기억>과 <물 위의 다리>. 앨리스 먼로의 문체는 확실히 좋았다, 마치 한낮에 햇빛이 마구 쬐여드는 실내에서 아른아른한 기분을 느끼는 듯한 글들.
 
 그러나 이야기들에 담긴 감정들을 이해하기엔 내가 아직 어렸던 것일까.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결혼'이라는 세계, 그리고 또 다른 삶에 대한 욕구와 생활과의 균형, 사랑인지 아닌지 그저 관심인지 아리송한 감정들, 자신만의 공간을 내어주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마음... 작품 속에 드러나는 생각들은 이렇게 하나하나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깊이 공감하기는 아직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왠지 나른하고 몽롱한 느낌이라 더욱 몰입이 안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더욱 많은 삶이 채워지고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감정이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아지면, 이 책도 다르게 다가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아직은 나에게 너무 일렀다. (흠, 그런데 나중에 읽어도 별 감흥이 없다면.... 몰라. ) 후에 다시 한번 읽어보기라 약속하며 다시 책장에 꽂아두기로 했다.
 

 
 

   - 그녀가 정말 그 사실을 잘 안다는 걸, 그녀와 함께라면 다 괜찮을 거라는 걸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바로 조해너 같은 사람이었다. 기꺼운 감사의 마음이 밀려왔다. 고맙다는 마음이 특히 상대방이 그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부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걸 그는 이제 깨달았다. 뭔가 새로운 변화를 내부로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게 내게 필요한 변화였어. 그는 전에도 늘 이런 말을 하곤 했지만, 이번에야말로 이 말이 진실임이 입증될 것 같았다. 따뜻한 겨울, 상록수 숲의 향기와 익어가는 사과들.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 (75p,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 "가서 좋은 게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좋은 시절도 있었겠지만, 지금 그녀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거든요.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예요. 어떨 때는 그녀가 연극을 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어요. 일테면 종일 한자리에 앉아 누가 말을 걸든 간에 '아직도 건강하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계속해서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 또 어떤 날은 멀쩡하게 대답을 하기도 하고요." 그녀가 말했다. (158p, 어머니의 가구)

 

 

- 마이크는 이 모든 것을 나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 역시 그것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그의 시선으로 그리고 동시에 나의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받은 인상은 본성상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서 그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실질적으로 쓸모가 있는 것은 그의 의견들이었다. 헛간 입구의 크고 흰 바위는 아래쪽 경사면의 작은 바위들 위를 날아 마구간 문 옆의 단단한 땅 위로 한 번에 착지하기 위한 디딤돌이 되었다. 나무들, 특히 가지를 타고 베란다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집 바로 옆의 단풍나무들은 모두 기어오르기 위한 기둥이 되었다. (217p, 쐐기풀)

 

 

- 첫 번째 시를 받아본 후 그녀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고심했다. 뭔가 감상 평 같은 말, 하지만 엉뚱하지 않은 말을 해야 할 텐데. 브렌던이 들을 수 없을 만큼 멀리 갔을 때 그녀가 한 말이라곤 고작 "시, 고마웠어요."라는 한마디 뿐이었다. "재미있었어요."라는 말은 할까 하다가 참았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휙 젖히더니 대화를 중단시키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는 계속해서 도착했지만 로너는 이제 더 이상 시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시가 메시지가 아니라 제안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테면 브렌던이 생각하는 것 같은, 구애의 제안은 아니었다. 시에는 그녀에 대한 감정은 물론, 사적인 내용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오넬의 시를 읽을 때면 그녀는 봄철에 보도를 걸을 때 종종 눈에 들어오는 희미한 그림자가 생각 나곤 했다. 지난해의 젖은 낙엽들이 남긴 그런 자국들 말이다. (264p, 포스트앤드빔)

 

 

- 데려가 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다른 데로 가요 대신 그녀는 다른 데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했다. 모험, 그리고 결정권의 이전. 완벽한 모험과 결정권의 이전. 다른 데로 가요라고 말했다면 자기가 먼저 시작한다는 점에서 모험은 여전히 존재했겠지만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포기는 없었을 터이고 그 순간의 에로틱한 흥분 역시 모두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 역시 선택권을 포기하며 다른 곳 어디요?라고 물었다면 그 경우 역시 에로틱한 긴장감은 모두 증발하고 말았을 터이다. 그는 그때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대답해야만 했다. 알았어요라고. (319p, 기억)

 

 

 

 

  이 책보다 조금 더 알려진 <행복한 그림자의 춤>도 비슷한 느낌일까요, 집에 사다 놓긴 했는데 펼쳐보기 조금 겁납니다 ;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으로도 하나 출판되었던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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