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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묘한 이끌림 <한낮의 시선 - 이승우>

After Reading
"아버지는 왜 나를 사랑하느냐, 혹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다'가 아들에게 속한 동사가 아님을 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쩔 때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존재는 딸-아버지의 관계 보다도 아들- 아버지의 관계 속에서 보다 모호하게 드러나는 듯 하다. 직접 느껴보진 못했지만, 그리고 제대로 설명하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딸인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뭔가 오묘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책 속의 주인공은 이름도 모르는,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아버지를 찾아서 떠난다. 키워준 아버지가 없었기에, 어머니는 그에게 너무나 각별한 보살핌을 주었다. 완벽한 어머니로 인해 아버지의 존재는 흐릿했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와 대면해야겠다는 이상한 이끌림이 생긴다. 그래서 머무르게 된 휴전선과 가까운 작은 도시 안에서 외삼촌에게 들은 약간의 단서 하나로 아버지를 찾아나간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 이름을 가진 자의 부재때문에 발음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부재가 존재로 바뀌는 순간, 그 순간 앞에서 그는 두렵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삶에서 계속해서 '부재'상태였던 그의 아버지는 주인공 한명재의 꿈속에 등장하여, '절대로 한데에 오줌을 누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꿈 속의 나를 지독하게 옭아매었던 아버지, 그는 현실에서도 주인공의 앞에 불편한 존재로서 등장하게 된다. 절대로 사랑을 주지 않는, 오히려 그를 이용하려고도 한다. 이끌림으로 찾아내었던 아버지에 대한 환멸과 실망은, 결핵을 앓고 있던 주인공이 피를 쏟게 함으로서 지금까지의 감정을 모두 분출해내게 한다. '그는 드디어 참으로 간절하게 신의 빛나는 사랑을 받고자 원하면서 그에게 이르는 길이 아득히 멀다는 것도 함께 깨닫는다.' 작가는 소설의 첫부분부터 인용했던 <말테의 수기>의 '말테'의 행동을 해석해가며, 사랑의 있고 없음과 상관없이 추구하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일깨우고 있다.
벌써 세번째,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세 권이나 읽었다. 그만큼 이승우 작가는 소설 속에서 '아버지'에 관한 물음을 재차 던지고 확인한다. 소설 속의 '아버지'는 작가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어떠했는지 계속해서 궁금해지게 만든다. 또한 <한낮의 시선> 속에서 '아버지'는 신적인 존재로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은 소설의 의미와 재미를 떠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독특한 문체를 보는 재미도 있어 보는 맛이 있다. 해외에서 사랑하는 작가이자 한국의 두터운 매니아층을 갖고 있는 이승우 작가, 그의 소설은 '관계'와 '사랑'의 진중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 다소 무겁긴 하지만 하나하나 읽어나가고 싶게 만든다. 묘하게 끌린다.
Underline
- 버스 안에는 불안정한 침묵이 감돌았다. 지친 낙타의 신음 같은 엔진 소리만 침묵의 표면을 휘저었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버스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간혹 차내로 들어왔다. 공기 속에 이미 가득 차 있는 악취에 스며든, 연소가 덜 된 일산화탄소와 질소가 속을 뒤집어 메슥거리게 했다. 먹은 것은 없다고는 해도 차멀미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는데, 무슨 불길한 조짐처럼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도대체 나는 그곳에 살려고 가는 것일까, 죽으려고 가는 것일까. (9p)
- 나는 처음으로 자연 가운데 혼자 있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고 온전하게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숲에 들어오기 전에는 혼자 있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랬으니까 혼자 있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필요할 때는 필요한 줄 모르니까 원하지 않고, 어찌어찌하여 원치 않았던 필요가 충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산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인식이라는 게 대개 이런 식이다. (...) 모순이지만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 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어쨌거나 정적과 고요 속에서 나는 아마도 처음으로 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고, 아마도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안락감 속에 빠져 지냈다. 그것은 나로서는 퍽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22p)
- 아버지는 말로만 존재했다. 참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요. 나는 물었다. 참을 수 없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참을 수 있어도 참아야 하고 참을 수 없어도 참아야 한다. 아버지는 단호했다. 아버지의 금령은 예외가 용납되지 않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나는 그 법칙을 지키려고 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참을성이 있는 편이었다.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까지 지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킬 수 없는 상황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32p)
- 나는 내가 이제까지 접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문 앞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할 수만 있다면 들어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정신을 멍멍하게 했다. 왜냐하면 법 앞에 서 있는 카프카의 인물에게 그랬듯 그 문은 오직 나를 위한 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추구하는 존재거든. 때로는 자기가 무얼 찾는지, 왜 추구하는지도 모른 채 찾고 추구하지. 몽유병 환자처럼 말이야. 찾다가 못 찾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추구가 의미 없는 건 아니지." 은퇴한 교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41p)
- 두 사람의 이야기는 나를 빨아들였다. 문제의 인물에게 감정이입까지 하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폭군-보호자의 괴롭힘보다 그의 부재가 더 견디기 힘들었을 정황이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두렵고 불안한 '있음'보다 두렵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없음'이 더 두렵고 더 불안했을 것이다. (142p)
Add...
무엇보다도 표지가, 완전 맘에 든다.
판형도 작고 150페이지 남짓의 얇은 책이어서 읽어나가기는 편하다
그 안의 내용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소설.
'그런데 정말, 아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