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여행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전국 산천을 자전거로 누빈, 특별한 여행 에세이 <자전거 여행 - 김훈>

 

 

 

 After Reading 

 

 

 

 

   나는 스무 살이 되서도 자전거를 잘 타지 못했다. 지금은 기적적으로 많이 밉지 않은 키가 되었지만,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 가장 쬐그만 아이였고 약간 비실거렸던 나는 밖으로 나도는 걸 별로 안좋아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어렸을 때 자전거를 배우긴 했었다. 뜨문뜨문 기억이 나는데, 청소년용 자전거에 보조바퀴를 달아 탄 기억만 있을 뿐 자전거 본래의 두 바퀴로 탄 기억은 없다. 성인이 되고난 후, 샤랄라하게 자전거를 타는 로망이 생겨서 자전거 안장에 올랐지만, 영 무서워서 균형이 안잡히는 것이었다. '나도 어릴 때 좀 남자아이들처럼 뛰놀고, 자전거 타다 크게 좀 넘어져 보고 했다면 지금은 괜찮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못하는 것도 많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른이 되서도 넘어지는 것에 겁은 많아가지고 쉽사리 타지 못했지만, 어쩌다 균형을 잡기 시작한뒤에 마을 근처에 있는 공원 자전거 코스를 혼자 달렸다. 하루살이가 눈앞에 어른어른 거려도, 페달을 돌리며 시원한 봄바람을 맞는 그 순간이 어찌나 시원했던지.

 

  자동차, 기차를 타고 달리는 여행은 물론 '여행'이란 의미 안에서 각자의 낭만이 있지만, 내 온몸의 힘을 다하여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 여행은 더욱더 특별한 낭만일 것이었다. 김훈 작가는 자신의 지인인 사진가들과 함께 '풍륜'이란 자전거를 데리고 전국의 산천 여행길에 올랐다. 자전거 '풍륜'과 함께 태백산맥, 그리고 세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바닷길 또한 굴러갔다. 자전거 여행의 힘든 부분을 조금이나마 걷어내고 작가가 본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낸 글들에 왠지 모를 낭만이 스민다.

 

  한국의 수많은 산천을 돌고 돈 여행기이기에, 숲과 산, 물이야기가 많고 한적한 시골마을, 실명을 거론한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 평범해보이는 여행기가 작가의 연필을 만나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김중식 시인은 김훈 작가의 글에 대해 "세상에 대해 욕을 할 때도, 그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욕으로 들리지 않는다." 라고 남겼다. 김훈의 에세이들을 보면 그 느낌이 맞다. 왠지 입에 담기 부끄러운 '똥' 이야기를 해도 그 글이 좋고, 좋은 음식을 가리는 평범한 상식이 왠지 좋게 들린다. 어쩔 땐 거친 것 같기도 한데 어쩔땐 너무나 감성적이고 아름답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김훈 작가의 글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니깐. 실제로 <자전거 여행> 속에 나오는 한마디가 있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36p)'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이 나올 수가 있을까? 이래서, 남다른 눈을 가진 작가들을 존경한다.

 

   언젠가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떠나보고 싶다. 가장 달려보고 싶은 곳은 바다가 쭉 보이는 길, 그리고 울창한 숲길.

 요즘은 하고 싶은 게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 큰일이다. 하지만 기회가 오면 몸사리지 말도록.

 

 

 Underline

 

 

 

  -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에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17p, 프롤로그) 

 

 

  - 봄 풀들의 싹이 땅 위로 돋아나기 전에, 흙 속에서는 물의 싹이 먼저 땅 위로 돋아난다. 물은 풀이 나아가는 흙 속의 길을 예비한다. 얼고 또 녹는 물의 싹들은 겨울 흙의 그 완강함을 흔들어서, 풀어진 흙 속에서는 솜사탕 속처럼 빛과 물기와 공기의 미로들이 퍼져나간다. 풀의 싹들이 흙덩이의 무게를 치받고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흙덩이의 무게가 솟아오르는 풀싹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풀싹이 무슨 힘으로 흙덩이를 밀쳐낼 수 있겟는가. 이것은 물리 현상이 아니라 생명 현상이고, 역학이 아니라 리듬이다. 풀싹들은 헐거워진 봄 흙 속의 미로를 따라서 땅 위로 올라온다. 흙이 비켜준 자리를 따라서 풀은 올라온다. 생명은 시간의 리듬에 실려서 흔들리면서 솟아오르는 것이어서, 봄에 땅이 부푸는 사태는 음악에 가깝다. (31p, 흙의 노래를 들어라)

 

 

  - 5월 차나무 밭의 냄새는 풋것의 향기가 습한 육질 속에 녹아 있지만, 5월 찻잔 속의 향기는 이 육질이 제거된 향기다. 시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5월의 찻잔 속에서는 이 접합부의 이음새가 드러나지 않는다. 꿰맨 자리가 없거나 꿰맨 자리가 말끔한 곳이 낙원이다. 꿰맨 자리가 터지면 지옥인데, 이 세상의 모든 꿰맨 자리는 마침내 터지고, 기어이 터진다. 차는 살아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스승의 자유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논리의 허세가 없다. (105p, 찻잔 속의 낙원)

 

 

  -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 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 (147p,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빛이 있다)

 

 

  - 저무는 날의 마지막 잔광이 사위는 저편 능선으로 그는 하루의 마지막 렌즈를 조준했다. 산맥에 가득 찬 가을 빛 속에서 겨우 한줌의 빛오라기를 추슬러 간직하는 카메라는 가엾은 기계였다. 내일은 또 내일의 빛이 쏟아져내릴 터인데, 그 감당 못할 영원성 속에서 그가 작동하는 셔터의 60분의 1초는 가엾은 시간이었다. 그 60분의 1초에 의해 세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힘겹게 화해하고, 그 가엾은 기계의 안쪽으로 세상의 무늬와 질감은 겨우 자리잡는 것인데, 사람들이 영원성을 향하여 지분덕거리는 연장들의 안쓰러움은 대체로 이와 같고 언어 또한 저와 같아서, 가을의 태백산맥은 입을 열어서 말을 주절거리려는 인간을 향하여 입 닥쳐라 입 닥쳐라 한다. (266p)

 

 

Add... 

  

지금은 절판이 되었지만, 동네서점에서 너무나 운좋게 발견해서 데려왔던 책이다.

그래서 이 책만 보면 왠지 뿌듯뿌듯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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