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김용규>
After Reading
문학에 대해 항상 궁금했지만 감히 철학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
꽤 오래 책장에 꽂혀 있었던 책이다. 사놓고선 계속 읽지 못했던 이유는 제법 굵직굵직한 고전들을 주로 다루고 있어서, 어느 정도 책에 대한 개념이 잡힌 후에 읽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표지에 있는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라는 문구처럼, 저자는 많은 고전들 중에서도 진지하고 심각한 질문을 하는 책을 다룬다. 조금 어려울 수 있는 책들이라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는지, '철학카페'라는 이름 하에 카페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듣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투로 철학과 문학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말하는 문학 비평을 커피에 비유한다. 카페에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주문하는 커피, 부드럽거나 씁쓸한 다양한 맛들. 이 책 속에는 이렇듯 다양한 맛의 커피같은 정보들이 섞여 있다. 고전 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가볍게 워밍업처럼 시작되는 첫 이야기, 그리고 책에 대한 소개, 뒤에는 조금은 깊이있게 들어가는 철학적인 해석까지. 저자는 이러한 '커피'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골라 마셔도 된다고 말하지만, 특별 메뉴인 '철학적 해석'을 꼭 읽어보길 권하고 있다. '철학카페'라는 이름을 붙인 만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묵직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대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고전문학들은 인간의 존재, 실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다고 느낀다.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고민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 '나'의 존재에 대해서. 이 책도 <파우스트>, <데미안>, <구토> 같은 묵직한 문학들을 통해 그런 고민들을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도움을 준다. 고전의 중요성을 알지만 쉽사리 도전해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철학적 해석 부분은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참고 넘어간다면 고전을 읽을 때도 더욱 풍부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Underline
- "하지만 네가 내 크기를 알기 전에는 난 내가 얼마나 큰지를 몰랐어. 네가 내 나이를 알기 전에는 난 내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몰랐지. 네가 내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기 전에는 난 내 모습이 어떤지도 몰랐어. 더구나 네가 내게 말을 걸기 전에는 난 말도 할 줄 몰랐단다. 그래서 만일 네가 없다면 난 다시 내 크기를 모르게 될 거야. 내 나이를 잊게 되겠지. 내 모습도 볼 수 없을 거야. 난 다시 벙어리가 된단다. 넌 내 거울이야.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지. 넌, 이 넓은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란 말이야." "아, 정말 아름다운 꿈이다." 꿈에서 태어난 소년은 감탄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내 알게 되었지요.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73p)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로스의 이러한 본성을 '탐욕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로스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자, 결국에는 그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탐욕이라는 거지요. 곧 사랑으로는 상대에게 영원히 다가갈 수만 있을 뿐, 단 한순간도 하나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로스로서의 사랑이 가진 존재론적 구조이자 한계인 거지요. 그래서 우리 사랑이란 깊어질수록 쓸쓸하고, 다가갈수록 허전해지게 마련인 겁니다. 알고 보면, 질투의 존재론적 자리도 바로 여기에 있는 거지요. 만일 사랑을 통해 완전하고 철저하게 상대를 소유할 수 있다면, 그래서 결국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질투라는 말은 아예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에로스 안에는 이미 질투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겁니다. (111p)
-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못생긴 데다,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마저 없다고 한다면, 그는 사회에서 인정 받거나 사랑 받기가 어렵지요. 따라서 그의 존재는 자신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지요. 가정이란 가족 중 그 누가 설령 못생겼다고 해도, 또는 성격이 사교적이지 못하다고 해도, 특별한 재능이나 재산이 없다고 해도 그의 '있음' 그 자체가 인정받고 사랑받아 기쁨이 되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르셀이 행한 '가정에 대한 존재론적 새석'이라는 거지요. (118p)
- 인간은 이러한 존재질문을 하는, 곧 세계와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입니다. 풀도, 나무도, 소도, 양도, 그 어떤 존재자들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지요.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염려하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지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존재자'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그렇게 간절하게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는 우리가 그것에 대해 도대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이때 '알 수 없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지가 아니라 무의미라는 겁니다. 즉, 자신과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런 것 자체를 아예 발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190p)
- 이어 "자유라는 것에 사랑이 깃들기는 어려워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가 함께 행해질 수도 있다."라고도 합니다. 한마디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서, 아니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구분조차 없는 곳에서만 '우리들의 천국'은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지요. 옳은 말이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이청준의 정치철학 내지 유토피아공학은 한계를 드러내 보입니다. 그가 천국 건설의 해법으로 제시한 사랑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적 해법이지 사회공학적 해법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 우리가 오늘날 추진하고 있는 사회공학인 민주주의에는 비록 선거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통치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와 통치를 받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은 불가피합니다. 민주주의란 단지 통치가 통치 받는 자들의 '동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2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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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로 나온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도 읽어봐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