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생존자 - 테렌스 데 프레>

 

 

After Reading

 

 

 

   "우리들이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우리들의 불꽃같은 눈동자들이었다."

 

  <생존자>는 역사상 인간 최대의 본성을 시험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기록과 발언을 토대로, 인간의 삶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문학 도서이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생존자'라는 단어가 죽음이라는 이미지와 직결되는 부분이 다소 있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소설'인줄 알았지만, 실제적인 기록과 체험을 직접 적어낸 책이다. 끔찍하고 무서운 상황을 그대로 전달해야되는 주제의 특성상, 저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 책 전체에서 건조하고 담담한 문체로 적어내고 있다.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죽음의 위험이 하루하루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 안에서 '생존'이란 것은 보다 조직적인 관점이 중요해지며, 냉정한 결단력이 요구됨으로써 존재한다. 생존자들이 '생존'이후에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주어는 '나'에서, '우리'로 바뀌기 시작한다.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 자신만의 체험이 아닌 우리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으며, 가혹한 세계를 기억하고자 하는 몸부림 또한 많은 사람들이 소리없이 동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책 속에서 말하는 '생존자'는 '인간으로서의 행동 방식을 영위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은 채 공포와 절망을 견디어 낸 사람, 즉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인간으로서 견디지 못할 정도의 더러운 공간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든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암묵적으로 동의해 '증인'으로서 살아남은 사람, 현실보다 차라리 나은 매일 밤의 악몽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 수용소 조직을 형성하며 서로 도우며 살아남은 사람이다.

 

  "나는 17개월 동안을 레닌그라드의 감독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내가 작가였다는 것을 알아보고 알은체를 했다. 그러자 내 뒤에 서 있던, 입술이 시퍼렇게 얼은 여인이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이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글로 쓸 수 있나요?'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기도 힘든 그 여자의 얼굴에 미소 비슷한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64p)

 

  인간의 모든 것, 정신마저 파괴시키려고 노력했던 그 죽음의 장소들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생존자'들의 내면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아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었는지 탐구해볼 수 있었던 인문학 책 <생존자>. 그들이 가장 원했던 일,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슬픔, 끝없이 따라다니는 고통이 완전히 망각의 세계 속에 사라져 가지 않게 하는' 최소한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이 실감나게 재현된 책이다. 극한의 세계를 '책'으로 체험하면서도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오싹할 수 있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어 증거와 기억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던 생존자들의 모습을 보면 숙연한 마음으로 읽게 된다.

 

 

 

Underline

 

 

 

  - 생존자에게 있어서는 내려가는 길이 다시 곧 올라가는 길이 된다. 다른 유형의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자들도 바로 사선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선을 넘어가 버리지 않고 그 선상에 '머문다'는 것이 구별되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의 특이한 자유가 정말 현실화되는 것은 존재와 사멸이 팽팽히 맞선 지점에서이다. 그들의 혜안은 마음속의 환상으로 흐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돌발적으로 닥친 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갑자기 발견하고 놀라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죽음이 곧 닥쳐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항상 죽음과 접하고 있으므로 생존자들은 죽음을 어느 정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만, 살아 있는 한 결코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없다. 그리고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생존자들은 우리들보다 더욱 절실하게 삶에 뿌리박게 된다. 그들의 살아남으려는 의지는 삶 자체로 추진되는 것이며, 강하게 튕겨 오르는 용수철처럼 완강한 힘을 가진다. (55p)

 

 

  - 정신적 파괴는 대량 학살의 요구와는 종류가 다른 것인데도,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된다. 즉 영혼을 죽이는 것이 목표다. 인간의 정신력을 말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공포나 극도의 궁핍보다도 우선 생존자의 순수성과 가치 의식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선행되었으며, 이것이 배설물에 의한 고문으로 나타난 것이다. (...) 왜 그토록 비참하게 수용자들을 학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왜 그런 동물 이하의 상태에까지 인간들을 몰아넣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하고도 정곡을 찌른 해답은 "SS 대원들의 작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희생자들이 도저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천하고 더러운 몰골을 하고 있을수록, 학살자들은 인간을 대량 살육한다는 공포감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이다. (119p)

 

 

  - 동정심이란 좀처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특히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절대로 금물이었다. 감정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결단력을 약하게 할 뿐 아니라, 지하조직의 모든 멤버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집단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이 죽음의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인 상처를 지불하고라도 삶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적인 큰 손상을 입더라도 삶은 그대로 지속되어야 했고, 전략적 타협과 도덕적 타락을 분별할 수 있는 명확한 시선도 그대로 유지해야 했다. 매번 어려운 선택이 강요되었지만, 어떤 임무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할 수가 없었다. 가장 선량하고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도, 작전에 투입될만한 행동력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234p)

 

 

  -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빵을 훔칠 만큼 도덕적으로 타락한 재소자가 생겼다 하더라도, 그를 SS대원들에게는 물론 구역 감독에게도 보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처벌했던 것이다. 그가 죽을 만큼 매를 때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화장터에 보내지기 꼭 알맞게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 빵의 법률을 인정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법은 실제로 수용소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도덕성을 유지시키고, 동시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모두들 깨달았기 때문이다. (255p, Weinstock)

 

 

  - 이곳에 온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예전의 바로 그 사람인가를 의심하게 되는 순간,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다. 인간의 존재는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엔 비참하고 가련한 동물만이 남아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벌거숭이의 동물, 심한 구역질을 참아가면서 타인의 땀으로 흠뻑 젖은 누더기를 가지고 열심히 자신의 알몸을 가리고 있는 동물. (315p, Szmaglewska)

 

 

  - 죽음에 대한 자각은 삶을 향한 강력한 관심을 일으키는 데 반하여, 죽음에 대한 부정은 격렬한 파괴 행위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문명사회와 극한 상황의 궁극적 차이, 즉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아마도 옥타비오 파스의 다음과 같은 짧고 신랄한 말 속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죽음에 맞설 때면 삶이 되고, 삶에 맞설 때는 죽음이 된다." (356p)

 

 

Add...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배설물의 공격' 편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더욱 참담한 모습에 할말이 없어지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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