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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헤세
헤르만 헤세 지음, 폴커 미켈스 엮음, 박민수 옮김 / 이레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펜과 붓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포도주와 같습니다 <화가 헤세 - 헤르만 헤세>
After Reading
"펜과 붓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런 일에 취하면 삶이 아주 멋지고 푸근해져서 삶을 견딜 수 있게 됩니다."
열두살때부터 생각했던 시인의 꿈을 이룬 헤세의 또다른 바람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의 광기에 회의를 느낀 헤세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또다른 꿈이었던 그림을 독학으로 익혀서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불안정한 내적 세계를 자전적 소설로서 표현해내고 그것으로부터 안정을 찾았던 것처럼 보이는 헤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그림'으로부터 삶의 위안을 얻었다. (헤세의 그림에 대한 이상은 '로즈할데'와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라는 작품에도 표현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이 헤세의 인생 속 내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고, 전쟁 중 수작업으로 자신의 그림과 시를 직접 써서 판매하기도 했으며 생계 유지에도 도움을 주었다.
<화가 헤세>는 77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으로, 몇천점에 달하는 헤세의 그림을 골라 그가 쓴 산문, 시와 엮은 것이다. 산문 하나하나 옆에 붙은 그림들은 산문의 느낌과 아주 잘 어우러져 마치 헤세가 그 그림을 그리는 상황이 연상되는 듯 하다. (헤세의 시와 산문은 행복감이 넘쳐흐르는 것들이 많아서, 평소에도 굉장히 좋아한다. 그 중 구름에 대한 헤세의 묘사는 정말 일품이다! 이건 나중에 따로 발췌해 올릴 예정.)
헤세의 작품들 중 좋았던 그림들을 연도순으로 나열해보았다.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나지만 그림들을 보면 느낌이 굉장히 다양하게 다가온다. 헤세가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습작으로 성장하면서 그림체 또한 서서히 변화했기 때문인 것 같다. 첫번째 그림은 20년대 초, 단순한 선으로 윤곽을 잡고 칠한 느낌이고 헤세의 많은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간 바랜 느낌이 든다. 두번째 그림은 색채가 굉장히 다양하고 단순한 스케치에 색을 칠한 첫번째 그림보다 구조가 세밀해진 느낌이다. 세번째 그림은 26년도의 그림인데, 약간 추상적인 느낌이 듦과 동시에 동양적인 분위기까지 나는 듯 하다. 헤세의 동양에 대한 관심이 그림으로도 표현되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그림은 58년도, 생을 마감하기 4년 전의 그림이다. 평화롭고 은은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헤세의 초기 그림들과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가 나지만 이 작품도 굉장히 와닿는다.
그의 넘치는 예술성은 문학으로, 미술로, 음악으로도 표현되었다. 그 중 글과 그림은 헤세 자신을 온전히 집중하고 바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세밀하고 아름답게, 자신을 담아 표현한 글과 그림은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림이 없었다면 시인 헤세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그의 '그림에 대한 사랑'은, 헤세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남다른 그의 예술성과 또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남긴 문학과 그림작품들을 지금 보는 우리는, 그가 그림에 몰두한 시간동안 문학과의 거리가 멀어졌을지라도 그 속은 결코 좁지 않았음을, 헤세의 문학에 그림또한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Underline
- 여기 앉은 내가 우리 마을에서 보는 것, 그것을 이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저 아래 바래고 갈라진 석회 벽이 하늘의 파란색을 끌어당겨 땅 위까지 물결치게 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녹색 미모사 사이에서 박공벽의 빛바랜 분홍색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하게 미소 짓는지 보는 사람은 없으며, 아다미니 집의 어두운 황갈색이 짙푸른 산을 배경으로 얼마나 풍성한 느낌을 주는지 (...) 보는 사람도 없다. 바로 이런 순간에 색채들의 조화가 가장 순수하고 멋진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 이 작은 세계에서 나타나는 색조들의 조화와 명암의 단계와 그림자들의 싸움은 단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저 아래 푸르스름한 조개껍질 같은 골짜기에서 저녁의 황금빛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저편의 산들이 공간 뒤로 더 멀찍이 물러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집을 짓고 허물며 숲의 나무를 심고 베어내고 창문틀을 칠하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을 보는 사람, 이 모든 행위와 일들의 관찰자인 사람, 이 담장들과 지붕들을 눈과 가슴에 담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그림으로 그리려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16p)
- 전쟁은 나로 하여금 내면의 병을 앓게 하는, 혹은 나 자신과 논쟁할 수밖에 없게 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 내면의 병 내지 불가피한 논쟁은 그 나름의 진행방향이 있으며, 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요즘 내가 일을 하는 사이사이에 뭔가 아름다운 것을 누리고 싶고 잠시 급박한 일에서 벗어나 의심의 여지없이 가치있는 무언가에 침잠하고자 할 때면, 나는 시를 짓지 않고 그림을 그립니다. 마흔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림 그리기는 내게 있어 시 쓰기와 거의 똑같은 일이며 종종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추구할 만하다고 여기는 유일한 영혼의 상태는 사욕이라곤 없는 내적 공감과 몰두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야말로 진정 예술적인 것이지요. 그리고 나는 그런 일, 즉 그림 그리기를 할 때면 여러 시간동안 그 상태에 도달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신의 왕국이 시작되며 '모든 것은 그분의 것'입니다. (140p)
- 현실은, 이 초라한 현실은 언제나 실망스럽고 황량하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거부하는 길밖에, 우리가 현실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 내 문학을 읽는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통상의 존중심이 내게 결여되어 있음을 흔히 아쉬워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면 나무들이 얼굴을 갖고 집들이 큰 소리로 웃거나 춤을 추며 때로는 울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나무가 자작나무인지 밤나무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비난을 나는 받아들인다. 굳이 고백하자면, 내게는 나 자신의 삶도 동화처럼 여겨질 때가 아주 많다. 종종 나는 바깥의 세계가 나의 내면과 조화로운 관계에 있음을 보고 느낀다. 그런 조화로운 관계를 나는 마술적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151p)
- 내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한 이 몇 년 동안 나는 문학에 대해서 점차 거리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 거리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는 그런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그림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여부는 거의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산업 세계와 달리 예술에서는 시간이 아무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끝에 이르렀을 때 내가 시도한 것이 일정한 집중성과 완전성에 도달해 있기만 하다면 상실된 시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시인으로서의 나도 그리 성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52p)
- 이 말을 들으면 독자들은 웃음을 터뜨릴지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작가들에게 글쓰기란 언제나 멋지고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은 일엽편주에 이야기 한 편을 싣고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혹은 우주 속에서 홀로 비행하는 것에 비견된다.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아내고 가능한 말 세 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짓고 있는 문장 전체를 감정과 귀에서 잃지 않는 것, 문장을 다듬고 자신이 선택한 구성 방식을 실현하고 구조물의 나사를 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장 전체 혹은 책 전체의 조화와 균형을 비밀스런 방식으로 부단히 감정 속에 현전시키는 것. 이 모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활동이다. 내 경험상 이와 유사한 긴장감과 집중은 오로지 그림을 그릴 때만 느낄 수 있다. 그림 그리기에서도 똑같다. 개개의 색깔을 이웃한 색깔과 적절하고 세심하게 조화시키는 것은 멋지고 쉬운 일이다. 얼마든지 배울 수 있고 금방이라도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아직 그리지 않아서 볼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그림의 전체 부분들을 정말로 눈앞에 불러내보는 것, 변화무쌍한 온갖 요소들의 아주 촘촘한 그물망을 지각하는 것은 놀랍도록 어려운 일이고, 성공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1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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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라인에 발췌한 글들을 읽으면
그가 글쓰기와 함께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