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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서글픈 시선 <책상은 책상이다 - 페터 빅셀>
After Reading
'언어는 사회적 약속에 근거한, 일종의 계약이다.'
책상이 책상이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들은 왜 이 땅에서 한국어를 쓰고 있으며, 왜 우리들의 책상과 그들의 책상은 다르게 불려지는 걸까.
파고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는 언어학에 관련된 이야기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을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언어는 사회적 계약'으로써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 안에서, 그리고 그 속의 관계 속에서 언어는 형성된다. 만약에 한 사회의 언어를 파괴하려고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책상은 책상이다> 속 같은 이름의 단편은 이러한 언어의 특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가 책상이라고 부르는 책상을, 왜 책상이라고 불러야하는지, 의자, 침대, 사진을 왜 정해진대로만 불러야 하는지 의아해졌다. 그리고 그 규칙을 파괴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대하여 자신만의 이름을 붙인다. 그 결과는 어떨까. 새롭다. 자신만의 언어가 생겼다. 누구와도 말할 수 없다. 그는 고립되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낯익다. 중학생인 동생은 이미 교과서를 통해 최근에 읽었다고 한다. 나도 왠지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학교에서 언젠가 읽어본 모양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는, 우스꽝스러운 주인공의 모습이 재밌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끝은, 무섭다. 왠지 슬프기도 하다. 작가는 이 짧은 이야기 속의 아웃사이더에게 경고를 주는 동시에, 서글픈 시선을 던진다.
낯익은 단편 말고도 100페이지 안팎의 얇고 작은 책 한 권에는 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 기막힌 행동들을 하는, 어째 불쌍해보이기까지 하는 사회의 소외되고 고립된 사람들이다. 이 책의 독일어 원제인 kindergeschichten은 '아이들 이야기'라는 뜻이다. 짤막한 이야기 속 특별한 주인공들은 아이들의 관심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알고보면 이야기 속의 숨겨진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페터 빅셀은 이 책 이외에도 다른 작품들 속에서 사회 안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점점,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는 이 시대에 한번쯤을 돌아볼만한 작가인 것 같다.
Underline
- 그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몇 날, 몇 주, 몇 달, 몇 해가 지난 뒤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책상 앞에서 일어나 길을 떠나기만 한다면 훗날 책상의 반대쪽으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 사실을 알고 있다. (11p, 지구는 둥글다)
- 어느새 그는 이 새로운 언어로 가끔 꿈을 꾸곤 했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배운 노래들을 자기 언어로 바꾸어 그 노래들을 작은 소리로 혼자 불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처럼 자기 언어로 번역을 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옛날에 쓰던 언어를 거의 잊어버렸기 때문에 파란 공책에서 원래의 단어를 찾아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워졌다. 사람들이 이 물건을 뭐라고 부르는지 한참 생각해 봐야만 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래서 남자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31p, 책상은 책상이다)
- 그는 집에 돌아가 이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발명을 계속했다. 그는 종이를 가져다가 '자동차'라고 써놓고, 몇 주일씩 몇 달씩 계산을 하고 도면을 그려 다시 자동차를 발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에스컬레이터를 발명하고 전화를 발명하고 냉장고를 발명했다. 도시에 나가서 보고 온 모든 것을 그는 다시 한 번 발명했다. 그리고 매번 한 가지 발명을 마치고 나면 그 설계도를 갈기갈기 찢어 내던지며 말했다. "이건 벌써 세상에 나와 있어." (62p, 발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