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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그의 세설을 통해 문장을 만끽하다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김훈>
After Reading
옛날부터 눈에 담아두고 있던 이 책은 이상하게도 내게 빨리 들어오지 않았다.
몇년 전 이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에는 '나중에 사야지' 미루고 있다가 '사야겠다'하고 마음먹은 날에는 절판 상태가 되어버려서 중고책방을 뒤졌더니 가격이 거의 두배가까이 올라있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나중을 기약했고, 이 책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사히 내 책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어쨌든 이런 수고를 통해서, 읽고 싶은 책은 빨리 거둬들이라는 교훈을 나에게 안겨준 책이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라는 문구가 낯익다. 이 책은 원래 이런 제목으로 나왔었다. 김훈 작가가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아 묶어낸 책인데, 1990년대 - 2000년대 사이의 사회 이슈들을 보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을 즐길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칼의 노래>를 읽고 작가의 문체에 홀딱 반해버린 나는 이 세설을 통해서 빛나는 문장을 발견하리라는 바람을 갖고 읽었다. <칼의 노래>때 느꼈던 담담한듯 휘몰아치는 유려한 문장들을 기대했다. (김훈 작가의 글은 내게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왠지 우아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책의 앞부분에서 나는, 건조하고도 날이 선 또다른 그의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쪽으로 갈수록 에세이 느낌이 강해져서 내가 바라던 그 모습들을 쉴새없이 발견할 수 있었지만, 어찌됐든 그 앞의 논평느낌이 나는 글들도 꽤 매력있다. 두 부분의 공통점은 사회의 불완전한 세태에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는 작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는 것.
아들들에게 거침없이 평발을 내밀지 마라고 외치는 김훈도, '두보'의 시를 읊으며 자신의 감성을 술술 풀어내리는 김훈도 나는 참 좋다.
Underline
- 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쓸쓸했지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세계는 무수한 측면을 갖는다. 그 측면마다 하나의 독립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 삶 속에서 그 유효성을 검증할 수 없었던 거대하고 모호한 의미의 단어들을 만지기가 겁이 난다. 결국 끌어다 쓰지 못한다. 사전에 나와 있는 말들 중에서 끌어다 부릴 수 있는 말들은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듯이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고작 한 옴큼이다. 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 가난이 오히려 편안하고 가지런하다. (58p, 말하기의 어려움)
-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옛 미국인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운운한 말이 2백년 후의 한반도 남쪽에서 요란한 각광을 받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이 가파르고 다급한 말은 무의미한 수사에 불과하다.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한 뜻은 알겠으나, 정부와 신문 양자간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수사는 근본적으로 공허하다.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이 양자택일을 인간의 현실에 적용시켜서 이쪽이다 저쪽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별로 쓰잘데없는 말 쪼가리를 이미 권력으로 쪼개져버린 현실에 대입시켜 가면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우습고 꼴같지 않아서 대답하지 못한다.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지성이다. 제발 이러지들 말라. (78p, 개수작을 그만두라)
- 설이 지나서 나는 쉰네 살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죽음을 내 불가피한 귀결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도 덜 살아서 그런지,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일회성을 감당해 낼 만한 마음의 힘이 없다. 인연이나 업장의 소멸이 무섭고, 불구덩이나 흙구덩이도 무섭지만 그 무서움을 인식하는 나 자신이 이미 증발해 버려서, 무서움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 대책 없는 적막은 더욱 무섭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인식이란, 삶은 살아 있는 동안의 느낌의 총화일 뿐이라는 정도다. 비천한 생사관일 테지만, 그 너머를 말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몸의 실존을 배반하는 거짓말일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의 슬픔이나 기쁨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적막에 비하면 그래도 내용이 있지 싶다. (121p, 대문 밖의 황천)
- 글을 쓰면서, 연필을 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는 일은 가슴 아프다. 글을 쓸 때, 손은 말을 만지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지지도 못한다. 손은 다만 연필을 쥘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가엾은 손은 만질 수 없는 말들을 불러내서 만질 수 없는 세상을 만지려 한다. 세상은 결국 만져지지 않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연필을 쥔 손은 무참하다. (155p, 인간의 몸과 손)
- 아이놈들이 옆집 마당의 꽃핀 매화나무를 매우 부러워해서 우리도 마당에 매화나무를 사다가 심자고 조른다. 꽃은 주인이 따로 없고 눈으로 보는 사람마다 다 주인인 것이어서, "옆집에 매화가 있으므로 구태여 돈 주고 나무를 사다가 심을 필요가 전혀 없으며, 옆집 마당의 매화는 돈도 안들고 키우는 수고도 안들면서 오히려 눈부시니 얼마나 더 기특한 나무냐"라고 아이들에게 말해주어도 다 큰 녀석들이 이 쉬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놈들은 나무를 뽑아서 제 집 울타리 안, 제 방 창문 앞에 옮겨 심어 놓기 전에는 꽃핀 매화나무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평안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아직 아이일 수밖에 없다. 봄날의 이 비린 시간들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다 제쳐놓고서 천지간의 꽃잎을 모조리 휘몰아 사라지는 것이며 모든 꽃은 마침내 인간의 몫이 아님을 알게 되기까지, 반찬투정을 하듯이 꽃투정을 하는 이 어린 것들은 수많은 봄을 겪어야 하리라. (212p, 꽃 몸살 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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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작가가 진정한 아름다움, 여성들의 화장, 그리고 과일을 얼마나 색다르게 표현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책 속에서 나오는 여름 꽃들에 대한 단상은 특히나 너무 표현이 아름다워서,
수국 꽃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미친듯이 써서 날려줬다는. 쓰느라 힘들었지만.
(이번 리뷰는 팬심이 가득한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