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기억의 '정착제'가 아닌 '용해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After Reading
사람의 머리속에 새겨지는 기억들은 무엇보다도 주관적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장기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의 경우엔,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는다는 기분나쁜 기억들과 오래도록 머릿속에 지니고 싶은 행복한 기억이 거의 비슷한 저장기간을 갖는다. 그렇지만 정말 간혹가다가 그 기억들을 왜곡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과연 드물지 또 모르지만) 분명히 있다. 생각하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쪽팔린 짓을 해놓고서 '아, 그정도는 아니었어. 정상적이었어. 보통 사람들도 그럴껄.'하는 경우 혹은 가족이든 친구이든 독한 말을 퍼붓고서 '내가 언제 그랬지.'하는 경우. 그리고 가끔 그렇게 비슷하게 행동하는 주변 사람을 볼 때, 참 사람의 마음이란 의도치않게 제일 간사하고 무서운거라고 느낀다. (나는 정말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와 약속시간에 늦을 때. 그때의 합리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니다. 사람들은 정말 많은 것을 예감하고 (흔히들 여자들의 감이나 촉이나..) 운좋게 그것을 맞추기는 하지만 예감이 정확하게 맞는 경우는 당연히 드물다. 어쩌다 그 우연이 맞춰진 것을 예감이 정확했다 하고 여긴다면, 인생은 그렇게 복잡한 미로같이 어려운게 아니라 퍼즐처럼 어떠한 사건들이 맞춰져 있는 그런 스릴없고 재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주인공인 토니의 경우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인 그 말이 정확한 예감이 된 것처럼 그렇게 인생에서 뒤통수를 맞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우연히 누군가의 큰 사건의 불씨를 (후에 돌이켜봤을때) 피운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는 예감하지 못했다. 멍청한 그는 추측조차 하지 못했다.
이 책의 반전은 기대했던 것보다 충격적이어서 그리고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다가와서 나는 반전의 의미를 파악하느라 잠깐 멍해졌다. 책 속의 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그 책을 읽으면서 아무런 단서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게 갈팡질팡하고 답답하게 시간을 보낸다. 시간은 기억의 정착제가 아닌, 용해제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 속에서 이기적이고, 주인공인 토니의 기억도 모질고 모질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지금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은 지금, 인생의 끝자락에 갈 때 세상과 나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또다시 무섭고 겁나기 시작했다.
Underline
-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며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12p)
- "(...)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 단 한장의 문서, '엄마, 미안해'라고 쓴 한 장의 유서가 있습니다. 최소한 브라운이 한 말은 그렇습니다. 그 유서가 아직도 존재하나요? 폐기되었나요? 누구나 아는 동기나 이유를 넘어서, 롭슨에게 다른 동기나 이유가 있었나요? 그의 마음 상태는 어땠을까요? 뱃속의 아이가 그의 자식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사건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오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롭슨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의 여자친구도 사라져버리고, 어쨌거나 누구도 그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에, 어느 누가 롭슨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을까요? 문제점이 보이시나요, 선생님?" (35p)
- 누구나 그렇게 간단히 짐작하면서 살아가지 않는가. 예를 들면, 기억이란 사건과 시간을 합친 것도 동등하다고. 그러나 그것은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하다. 기억은 우리가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또한 시간이 정착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용해제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한들 뭔가가 편리해지지도 않고, 뭔가에 소용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무시해버린다. (112p)
-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183p)
- 나 자신이 아둔하고 굴욕적으로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 불과 이삼일 전에 나 혼자 명명했던 대로- '인간의 마음에 영구히 존재하는 기대심리' 때문이었다. 또한 그 이전에, '타인의 경멸을 극복한다는 것의 묘미' 때문이기도 했다. 평소 자만심 때문에 큰코 다칠 일은 없다고 생각해온 편인데, 사실은 스스로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혼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유증을 통해 내 소유물이 된 걸 찾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시작된 것이 변이를 거쳐서 뭔가 더 거대한 것, 뭔가 평생에 달하는 내 삶과 시간과 기억, 그리고 욕망과 연관된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나는 - 나라는 사람의 어떤 층위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 처음으로 돌아가서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를 역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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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반전이라 끝에가서 멍했다. 부커상 수상작이 너무 짧지 않냐는 사람들의 말에
작가는 '독자들은 200페이지나 되는 이 책을 끝에가서 다시한번 또 읽게 될 거라고' 했다.
역시 책을 다 읽은 지금, 나도 다시 읽으면 더욱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했던 것보다 책이 조금 어려워서 빨간책방의 힘을 빌렸다. 이동진, 김중혁 두 임자님의 해설은 정말 최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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