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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에 대한 시정과 향수,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토지를 먼저 읽어봤음 좋았을뻔했지만 박경리 작가의 미출간작인 이 책을 작가의 첫 책으로 읽게 되었다. 산뜻하고 세련된 표지가 끼워진 <그 형제의 연인들>은 60년대 작품이고 신문에서 연재가 되기도 했지만 연재본을 발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출간작으로 남아있는 작품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사랑과 형제에 대한 이야기인데, 통속적인 연애소설이나 불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의 많은 제약 속에서 이끌어가야할 사랑의 모습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
이야기는 인성과 주성 형제의 여인들, 그리고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그려내고 있다. 의심으로 가득찬 부인과 함께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인성과, 나이차가 꽤 나는 친구의 누이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주성. 그들은 비정상적인 사랑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관계에서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인지, 새롭게 등장하는 여인들에 대해 애정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애정을 표현하고, 기존에 있던 관계를 다시 도려내고, 사랑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그 형제는 서투르고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위태위태한 사랑을 이어갈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정리해나가면서, 보통의 정상적인 사랑으로 치부되는 관계 대신에 희생으로 일궈나가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밖에도 금기와 관습을 뒤로한 채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모습, 그리고 비정상적인 인물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욕망과 이기심을 표현해내고 있는 이 책은 단순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더욱 매력있고 진중하게 읽을 수 있다. 언젠가 토지도 꼭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따뜻한 피가 전신을 맴돌고 있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여자에게, 아니 인간에게 대하여 느껴본 일이 없는 강한 인력,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시정詩情이며 향수였다. 인성은 자기 자신 속에 그런 피가 세차게 잠을 깨고 있는 것에 스스로 놀란다. (73p)
- "노오랗게 나뭇잎이 물들고 그러지 않아도 마음이 센티해지는데 그이의 죽음을 봤을 때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어요. 뭔지 죽음이 아름다운 것만 같았어요. 나뭇잎이 굴러 떨어질 때 슬프지만 아름답다 생각하지 않으세요? 감상입니까? 감상이겠죠. 하지만 감상을 경멸만 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사람은 다 죽게 마련이지만 저의 경우에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깝고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아요. 어떻게 사느냐는 문제보다 조용히 곱게 죽을 수 있는 일이 더 절실한 문제만 같았어요." (98p)
- 그러나 허무해하는 감정을 빼버리는 일에 있어서 인성은 과연 의사일 수 있는지 그것은 심히 의심스런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문제에 있어서 인성 자신이 환자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 인생에 대하여 무관심하려 했던 인성이나 일종의 자학 의식에 사로잡힌 규희나 다 같이 육체보다 어떤 정신적인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 정신적인 환자들이 지금 서로 다가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103p)
- 한 생명이 방금 병원에서 마지막을 고했는데 그들 무생명체의 기계문명의 산물들은 마치 불사조처럼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듯한 환각이 인성의 머릿속에 스치고 간다. 인성은 그 무생명체들이 오만스럽게 그들의 활동을 개시하고 있는데 대하여 별안간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달려들어 그것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어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아, 나도 역시 저들 무생명체의 조직의 한 부분이 아니었던가." (184p)
- 중얼거리면서 주성은 남자와 여자의 커다란 차이점을 깨닫는다. 슬픔은 여자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고통도 여자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골수는 될 수 없고 바늘처럼 가늘고 매서울 수는 없다. 여자의 슬픔이 예리한 것이라면 남자의 슬픔은 둔중한 것이다. 여자의 고통이 국부적인 것이라면 남자의 고통은 전신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43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