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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굶주림(개정판)
크누트 함순 지음, 우종길 옮김 / 창 / 2012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꿈꾸다 <굶주림 - 크누트 함순>
주인공은 거리를 헤맨다. 그에게는 쓸모있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춥고 배가 고프다. 그러나 구걸하지 않는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얻을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 글을 쓰는데 필요한 집도 먹을것도 그에겐 없다. 어쩜 이런 처절한 소설이 다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은 굶주리고 찌든 주인공의 고뇌에 가득찬, 마치 반쯤 미친듯한 생각들이 가득하다. 거의 아사직전의 그는 너무나 처절하다. 그러나 더욱더 처절한건 그러한 상황에서도 신념을 놓지 않으려는 그의 '
자존심'이다.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인 食이 사라진 주인공의 삶은 그의 확고한 자아로 인해 갈수록 피폐해져간다. 도대체 그 순수한 자아가 무엇이길래 죽음을 예감하면서까지 지키려 하는 것인가! 배가 미친듯이 고픈 와중에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쓸만한 무언가를 팔아 남에게 적선하는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남들에게 보여지는 그의 비틀린 모습에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스스로 미치광이처럼 웃는다. '이 글만 잘 써지면 10크로네를 받을 수 있어.' 불확실한 것들에 집착하며 고통의 시간을 참는다. 그러나 아사의 시간이 계속해서 다가올 수록 그의 확고한 자아가 희미해져간다. 도덕성, 체면, 염치, 타인의 눈, 그것들을 하나하나 떨쳐내기 시작한다.
나는 사방에서 더할 수 없이 기이한 고통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머릿속에 스며들어 내가 가진 힘을 사바으로 흩어버리는, 의미 없고 하찮은 우연들과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들이 느닷없이 찾아들지 않고서는, 어디에든 한 발도 내밀 수가 없었고 벤치에 혼자 떨어져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개 한 마리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도, 어떤 신사의 양복 단추 구멍에 꽂힌 노랑장미 한 송이를 보아도, 내 생각들은 뒤죽박죽 되어서 오랫동안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한 일이 대관절 무엇있가? 나를 하필 이렇게 만든 것이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어째서 나란 말인가? - 35p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서 이부자리에 일어나 앉아, 침대 뒤의 테이블에서 종이와 연필을 집어들었다. 마치 내부에서 행운이 터져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한 단어에 이어 다른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단어들은 정돈이 되었고, 서로 연결이 되었고, 문맥에 어울리게 논리적으로 구성이 되었다. 줄거리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동작과 대사가 연이어 솟아났다. 야릇한 행복감이 느껴졌다. 나는 신이 들린 사람처럼 글을 써내려갔다. - 55p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너는 부끄럽지도 않은가! 정말로 그 사람에게 1크로네를 부탁해서 그를 다시 한 번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었나?' 나는 자신에게 지극히 가혹해져서 잠시 떠올렸던 뻔뻔한 생각에 대해 자신을 힐난했다. -127p
막다른 대장장이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박힐 수 있는 한 가장 깊숙이 들어가서, 뒤뜰의 허물어진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데서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고맙게도 그늘이 주위를 덮고 있었다. 나는 뼈다귀의 고기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말라붙은 피의 메스꺼운 냄새가 뼈에서 올라와, 곧 삼킨 것을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시 시도를 해보았다. 이 고기 한 조각을 속에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그 효과가 나련만... 고기의 살점들은 위 속에서 발효되자마자 도로 올라왔다 나는 미친 듯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비탄에 빠져 눈물을 흘리고, 귀신들린 사람처럼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도 울어서 뼈는 눈물로 젖어 더럽혀졌다. 나는 더욱 격렬하게 토해내고, 욕설을 퍼붓고, 갉아먹었다. 마치 심장이 터져버릴 듯이 울었고, 또 토해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온 세상의 신들에게 지옥에 떨어지라고 저주했다. - 203p
단순한 배부름으로 해결되지 않을 내면의 굶주림은 음식의 굶주림과 함께 그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사건도 플롯도 없는 이 소설 속에 빠져들게 하는 건 작가의 실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감정의 묘사이다. 상황 속에 빠져든것 처럼 나또한 처절함과 배고픔을 느껴서 울컥하는 부분이 있었다.
중간 부분에 그는 굶주린 와중에도 사랑이란 감정은 남아있는지 간절하게 여인을 갈구하기도 한다. 그의 체면이 벗어던지는 부분인데 책의 모든 서술 중 유일하게 정상적이게 보이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과연 이 주인공의 삶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일까. 정녕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나은것인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진정으로 꿈꿀 수 있는 것인가? 주인공의 선택은 결말에 나와있다. (난 그와는 다른 결말을 원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