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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2월
평점 :
저녁에
- 이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눈에 띄는 샛노란 표지와 가로로 된 제목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책의 초반에 나오는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광섭의 시도 참 좋았습니다. 아마도 이 시에서 제목을 따온 듯 한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라는 구절은 노래와 영화, 책 수많은 곳에서 쓰여진 사랑받는 구절이더군요. 역시 무언가 익숙한듯 했습니다. :-) 책 뒷편에는 '아름답고 담백하고 쓸쓸하다'라는 글귀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이 말처럼, 그리고 '저녁에'라는 아름다운 시처럼 이 책이 어떤 느낌을 줄지 책표지의 노란 색깔처럼 상큼한 느낌을 줄런지 궁금해하면서 읽었습니다.
기껏해야 십 초 정도밖에 안 되는 드라마였다. 그러나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주연배우였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녀는 자기 존재를 완벽하게 개진했다. -17p 플레이보이지가 눈앞에 계속해서 아른아른 거리던 그날, 주인공은 대학교 음악감상실에서 박은영이란 여자 처음 만납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해서, 비밀스럽지만 매력적인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의미있는 사이가 되진 못합니다. 그 후 여러번의 우연한 만남을 가지게 되고 그들은 많은 시간동안 서로를 기억속에서만 바라보게 되죠.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70년대의 시간을 넘고 서투르고 흔들리는 젊음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성숙해진 주인공은 어떤 한 청년을 만나 박은영을 진하게 추억하게 됩니다.
어둠이 짙으면 밝음에 대한 기대가 망상 수준으로 커진다. 내가 그랬다. 나는 대학을 숭배했다. 대학은 절망한 나를 이끄는 깃발이자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정작 대학생이 되자 그 깃발은 금세 찢겨버렸다. 우주는 여전히 침묵하는 우주였고, 나무들은 그저 저 홀로 잘 자라거나 말라 죽었으며, 세상은 더 많은 모순과 억압으로 나를 위협했다. 그나마 두들겨패는 교수가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 40p
밤하늘의 별들처럼, 세상은 얼마나 많은 여로의 경연장인가. 지지를 상실한 권력이 헛된 무당춤을 추고, 새로운 질서를 원하는 시민들이 전국의 거리를 가득 채운 그 시절에도, 이방의 여행자 조 후버가 있었고, 나에게 사랑의 신호를 보내는 당차고 귀여운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라고 불리는 별자리에는 한스 뮐러도, 조 후버도, 귀여운 그 여자도, 나도 없다. - 72p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내 종로의 한 레코드가게에서 산 피터, 폴 앤 메리의 테이프를 들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화음 위로 박은영의 목소리가 겹쳤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그들을 듣고 있다 사랑과 평화와 행복의 꿈을 호소한 그들의 아름다운 노래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여전히 현실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립고 여전히 슬프다. -119p
이런 생각이 든다. 별들이 이토록 많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내가 매일 밤 아파트 옥상이나 더 높은 산정이나 혹은 인적 없는 깜깜한 바닷가에서 죽을 때까지 이름을 붙여준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름 없는 별들이 무궁무진할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 정말이지 그들이 고맙다. -161p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수도 없이 되뇌었다 나는 그 '언제'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우주가 우리를 한 무대에 불러주어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도 나도 무엇인가 되어, 더이상 청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 되어, 우리가 결코 알지 못했던 어떤 낯선 무대에서 만나게 될 텐데 말이다. 무엇인가 되어 다시...... -60p
젊음을 은은하게 추억하는 이 책을 청춘이란 시점에 읽고있는 저는 미래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내가 나중에 커서 지금 내 모습을 바라보면 어떨까. 지금 인연들이 나중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어떤 것이 끊어지고 어떤 것이 이어갈까. 우리는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까?
사실 이런 생각들은 평소에도 가끔 드는 생각이고 너무나 궁금한 호기심입니다. 이렇게 평소에 추억하던 것들을 떠올리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를 읽으니 삶의 소중한 한 가지는 추억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를 바라보며 하는 추억.. 그 중 청춘의 기억은 특히나 조금 더 깊기도 하고 더 쓰고 달콤할 것 같습니다. 책 속에서 그려졌던 70년대 사회, 대학생, 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 우연한 만남, 인연, 플레이보이, 사랑 그리고 이별, 폴앤 메리의 노래, 데미안, 오르페우스와 같은 청춘의 모든 기억들. 그것과는 다르지만 어쩌면 비슷한 감정을 가졌을, 지금 제가 만들고 있는 이 청춘의 기억들이 어디서 무엇인가 되어서 다시 추억하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친구.. 가족, 형제, 그리고 사람들, 설레임, 좌절, 실패와 성공, 부끄러움, 새로운 경험들... 그것이 달콤한 추억이든 씁쓸한 추억이든, 그 기억을 곱씹고 추억할 나이가 되거든 아마도 모든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