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연인들 채석장 그라운드 시리즈
이광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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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연인이기만 했던 사람은 이제 배우자가 되어 나의 공간 대부분을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연애를 하는 오랜 시간 동안 다채롭고 많은 장소를 거쳐 왔고, 이제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자 여러 목적을 가진 집을 공유한다. 우리 둘 다의 소유이자 모든 욕구가 충족된 장소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면서, 가끔은 우리가 나다닌 장소를 생각하곤 한다. 주말에 다시 그곳을 거닐며 기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저 사랑뿐인 젊은 연인들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시금 느끼기도 한다.

 

연애 초기, 일이 너무 바빠 개인 시간이 많지 않았던 나는 연인과 자동차 안에서 무한하고 끈질긴 대화로 사랑을 키워나갔다. 주말엔 시끌벅적한 거리로 나가기도 하고, 우리만의 장소를 찾아 끝없이 헤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은 가림막도 비를 피할만한 지붕도 없었고, 사람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를 둘러싼 막이 존재했다고 여긴다. 사랑의 작동으로 이루어진, 우리만 아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 되었다.

「장소의 연인들」을 읽으면서 내가 사랑을 '수행했던' 모든 장소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되었다. 책 속에서 저자는 "장소가 연인들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수행성의 문제이다 (169쪽)"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연인들에게 장소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연인들의 장소는 일반적인 사회적 규정과 분류, 장소들의 위계를 무의미하게 한다. 연인들은 장소를 탄생시키고 발명한다. 연인들은 그들만의 장소를 찾아내기 위해 분투한다고.

 

저자는 다양한 장소와 예시가 될만한 문헌들을 통해 연인들의 사랑과 장소의 속성을 발견한다. (픽션인지 모를) 저자와 그의 연인이 만들어낸 특별한 장소도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연인이었던 우리의 장소와 경로를 되짚어보게 되었다. 어쩌면 사랑의 장소들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인문학적 시선으로 장소의 속성을 꿰뚫어보기도, 뒤집어보기도, 다시 낯설게 보기도 한다. 이 특별한 시선과 사유가 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정말 좋았다. + 중간중간 책과 글에 대한 사유의 문장도 근사했다.


연인들이 몸을 담는 순간 이륙하는 우주선이 된다는 욕조 (57쪽), 두 사람의 최소 공간이 만들어지는 우산 속 (69쪽),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정차한다면 방이 되기를 바라게 되는 자동차 (92쪽) 등, 연인들의 매력적인 장소는 저자의 인문학적 통찰로 더욱 남다른 장소가 된다. 저자의 경험을 통한 장소와 그가 관찰한 연인들의 장소들, 그리고 나와 연인의 장소가 비슷하다 할지라도 이는 같으면서도 다를 것이다. 사랑하다-의 감각 또한 다를 것이니까.


인문 에세이, 라고 되어 있지만 인문학을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한 책이다. 연인과 사랑에 관한 특별한 사유를 만나보고 색다른 시선을 살펴보고 싶다면 도움이 될 만한 책.

 

 

책을 찾거나 고른다는 것은 자기만의 종교를 찾기 위한 영혼의 편력이기도 하다. 자기만을 위한 일생일대의 단 한 권의 책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갈증을 이곳에서 채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서점은 바깥 세계의 번잡함과 계산들을 피해 숨어드는 동굴과 같다. 그 동굴에서 연인을 만난다면 서점의 영적인 뉘앙스는 한껏 부풀어 오른다.
- P81

기차역의 시간성은 가독성이 없다. 하나의 장소에는 하나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장소는 무수한 시간의 주름을 품고 있다. 기억 너머의 형언할 수 없는 시간은 캄캄한 침묵에 둘러싸여 있다. 기차역의 시간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현기증 나는 개발의 속도감은 시간의 입을 다물게 한다. - P112

떠나기 위해서만 잠깐 머무르는 환승 공항의 이미지는 연인들의 시간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공항 내부의 시간을 추상적으로 분절한다. (…) 공항에서는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몰려다니고 아무도 정체성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 이 기묘한 익명성이 공항을 무중력의 공간으로 만든다. - P115

어떤 슬픔은 수영장의 물처럼 귓속으로 들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흘러나오지 않고 온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가끔은 그 물들이 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내가 지금 사는 방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검은 방 하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그 방의 존재를 느끼지만 그 입구를 영원히 찾지 못한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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