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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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의 책을 시작할 땐 마음이 편안하다.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집중력,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자연스레 따라온다. 추리력, 사실을 검증하고 정체를 밝히려는 호기심 또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런 것은 팩트고 저런 것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는 던져두자. 왜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고 따지지도 말자. 오로지 필요한 것을 하나만 정하라면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 아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될 것이다.

아, 그런데 이쯤에서 약간의 실수를 한 것 같다.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에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야 한다. 조금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아니면 무언가쯤으로 말해야 할까. 등장인물은 자그마치 외계인이다. 게다가 권태기가 와 떠나버린 전남친의 몸을 빌려 변신했다. 여러 의미로 괴상망측한 존재인 외계인은 주인공 ‘한아’를 이용하거나 농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단지 지구 저편에서 바라본 한아의 모습이 놀랍도록 사랑스러웠을 뿐. 세계를 파괴하기를 넘어 서로를 파괴하기까지 하는 인간들의 모습 속에서, 함께 공존하는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며 살아가던 한아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띄었던 모양이다. 한아의 삶의 방식은 그의 직업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환생’이라는 빈티지 샵을 운영하며, 누군가의 삶이 맞닿은 옷들을 섬세하게 살펴 추억을 보존한 채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소설 속에는 주인공 한아를 비롯해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지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들 속에서 지구를 살리려 노력해보는 사람, 더 넓은 세상이 궁금해 마땅히 도전을 감행하는 사람, 나만의 영원한 우상을 위해 평생을 사는 사람, 지구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면 유별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행복하다. 누구도 그들을 나무랄 권리는 없으니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소설 속에 가득 담겨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왜 경민이 얼굴로 왔어? 물론 처음에 널 봤으면 꽤 놀랐겠지만…… 정우성 얼굴로 올 수도 있었잖아!”

기발한 상상력과 표현력도 물론이지만, 정세랑 식 유머는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데 한몫을 한다. 현실에서 전혀 일어날 수 없을 법한 일들을 재치 있게 펼쳐나가는 뻔뻔함에 되려 기분이 좋아진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소설. 요즘 이런 소설은 정말 많지 않다. 비슷한 온도와 가득 힘을 준 문장들로 개성을 찾기 힘든 한국 문학 속에서 일관성 있게 자신만의 문학을 밀고 나가는 정세랑 작가는 한아의 모습과 닮아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왜 너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냐고 묻는다.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건전한 절대 명제,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어찌되었건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오는 날 보도블록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나 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다들 날아가서 부딪치면 좋겠다. 한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경민이 와준 건, 왠지 대놓고 인정하긴 싫었지만 행운이었다. 우주적 행운. 한 반광물 생명체의 획기적 진화. 대단한 희생을 기반으로 한 기적. 뭐라고 이름 붙이든 간에 한아는 망원경 앞의 저녁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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