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엘레지 읻다 시인선 2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지음, 최승자 옮김 / 읻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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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어로 쓰인 ‘시’를 번역한다는 건 어떤 문학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시를 잘 몰라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과, 초점이 맞춰진 순간과, 행간의 리듬을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 이 책이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었으며, 작가와 텍스트와 번역가로 이어지는 흐름을 오랜만에 깊이 느껴보았기 때문이다. 낯선 시인의 시를 익숙한 시인이 이어준다. 게다가 둘의 ‘케미’가 너무 좋다는 게 느껴진다. 조금 든든한 기분이 든다.

빈센트 밀레이라는 이름은 낯설었지만 알고 보니 다른 시 모음집에서 그의 시 한편을 마주친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일부 암송되는 시가 있었다. 한국의 여성 시인이 자신의 책에서 시를 거론한 적도 있었다. 이리도 낯설고도 가까웠던 빈센트 밀레이는 20세기 미국의 대표 시인이자 여성 최초의 시 부문 퓰리처상 수상자였으며, 생전엔 자유를 갈망하는 페미니스트와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시가 페미니즘 색채를 띤 것은 아닌데, 오히려 시에서 계속 반복되는 언어들은 슬픔과 죽음에 가까우며 전체적인 이미지는 고요하고 웅장하다.

인생은 그 자체가

빈 술잔, 주단 깔리지 않은 층계.
해마다, 이 언덕 아래로,
사월이 재잘거리며, 꽃 뿌리며
백치처럼 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 18쪽, <봄>


죽음과 허무, 슬픔의 언어들이 많이 보인다. 그러나 시는 죽음의 고통이나 어두운 부분에 대해 깊게 집중하는 것 보다도, 언젠가 찾아오게 될 죽음을 통해 삶을 각성시키는 듯한 몸짓으로 느껴진다.
“삶은 계속되어야 해. 정확히 그 이유는 잊었지만” <비가>라는 시 속의 문장으로 이 몸짓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실과 고독과 슬픔을 부르짖으면서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어디론가 나아가야 하는 시인이다. 이유 모를, 삶에 대한 의지는 계속된다. 거의 안간힘에 가까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어느 순간 많은 의미를 품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삶의 모호함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아름답고 사소한 것들이 서서히 쌓이고 쌓인다. 의지는 아마도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의 경우엔 사소한 무언가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 이 계절에 읽기 좋은 시집이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함께 느껴지니 신기하고 몽롱한 기분. 그래서 이상하게 반복해서 읽게 된다. 곱씹을 수록 더욱 차갑고 뜨거워진다.

 


 

● 12쪽, <슬픔>
사람들은 옷을 차려입고 시내로 간다.
나는 내 의자에 앉는다.
나의 모든 생각들은 느리고 갈색이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아무래도 좋다. 어떤 가운을 걸치든
혹은 어떤 구두를 신든.

● 89쪽, <죽음>
아늑하고 고요하게 누운 채로,
만일 내가
그 속에 앉아서
주의 깊게 듣고 엿보는
감각할 수 있는 나를 가진
감각할 수 없는 물질일 수 있다면,
나는 죽는다는 것과
흥정을 시작할 수도 있으리라.

● 104쪽, <눈 속의 수사슴>
눈 속의 수사슴을 무릎 꿇게 하고 가지 쳐진 그의 뿔을 꿇게 하는
죽음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이냐.
지금쯤엔 아마도 일 마일 떨어진 곳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의 깃털을 떨어뜨려 제 무게를 조금씩 없애는 묵직한 독미나리 숲 아래서,
그 암사슴의 눈으로 주의 깊게 본다면,
얼마나 이상한 것이냐, 삶이란.

● 126쪽, <당티브 곶>
나는 뭍보다는 바다 편인지라, 밤에 폭풍우에 세차게 채찍질당했던 나의 부루퉁한 마음은 그렇게 빨리는 가라앉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들 속으로, 둔중한 울림과 함께
바다는 철썩철썩 밀려왓다
물러간다.
잔잔한 낮에 내 곁에 있을 때조차도 심란해진 지중해는 묵직한 큰 파도와 함께,
새들이 재잘대는 해변으로 기울어져 부딪친다.




● 130쪽, <유년은 아무도 죽지 않는 왕국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죽은 살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다.
그들은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차를 마시지도 않는다.
생전에는 차가 낙이라고 말했으면서도.
(…)
너의 차는 이젠 차갑게 식었다.
너는 그것을 선 채로 마시고
그리고 집에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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