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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허혁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버스 기사님들에 대해선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크게 없다. 늘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보다 선명하게 남지만 크게 거슬리는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꽤나 무감각하게 타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가 있는데, 늦은 밤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버스를 탔던 날이었다. 어둑하게 조명을 최소한으로 한 버스가 고속도로를 지나고 정류장이 있는 시내로 들어오니 벨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각각 다른 사람들이 한 정거장에 두 번 울리는 일도 반복되었다. 버스 기사님은 하소연이 섞인 짜증을 내다가 ‘벨 좀 한 번씩 누르라’고 호통을 쳤다. 기사님의 업무 환경을 생각하면 소리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도 수긍이 가는데, 먼 거리를 이동하는 승객들이 정류장을 지나칠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누르는 것도 나쁜 마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상황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고요 속에서 불편한 냉기가 감돌았다.
이전에 알고 있던 책이지만 이 사건 때문에 다시금 급하게 책을 찾아보았다. 버스 기사님들의 업무와 생활 반경, 감정들이 궁금했다.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는 실제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입사 5년 차 기사님이 쓴 에세이다. 전주는 특히 버스 대수에 비해 노선이 많고, 승객들의 불편함 호소도 많은 지역이라 한다. 물론 지역에 상관없이 버스기사들의 악명 높은 업무 환경은 여기도 비슷한 수준인 듯 보인다.
저자는 하루 열여덟 시간씩 버스를 몰다 보면 착한 기사와 비열한 기사의 마음을 순식간에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한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참을 수 없고, 표정 관리가 격하게 힘들어진다. 끼니와 생리적 욕구 또한 신경 쓰기 힘들고, 연료 충전과 버스 청소 등 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업무를 넘어, 일상까지 버스의 속도로 달려야 하는 셈이다. 고작해야 한 시간 이하로 이동하는 일이 대다수인 시내버스 승객들은 수시로 일어나는 도로 위의 아찔한 상황과 기사들의 고충을 알 턱이 없다. 악의가 아니라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왜 내가 탑승한 시간에 기사가 불쾌감을 표출하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짜증 나고 당황스러운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꺼내놓고, 가끔은 툴툴거리며 당부하는 저자의 글은 재미있고 통쾌하다. 제대로 솔직해서 좋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책을 보는 느낌도 비슷하다. 읽다 보면 어느새 덜컹거리는 우리 동네 시내버스에 올라 있는 듯하다. 나는 정류장에서 버스가 오는 것을 살피고 티가 나는 수신호를 주고, 조금 더 세심하게 주변과 운전석을 살피고, 대답이 없어도 눈치 보지 않고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심코 지나치던 누군가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건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상황을 모르니까 그냥 지나치고, 이유를 모르니까 억울하다 (서로 시비를 걸고 싸우는 건 보통의 일이 아니라는 전제를 두고).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이 배려가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또한 승객과 기사 사이의 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해결돼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육체와 감정을 넘나드는 노동 현실의 개선을 넘어 저자가 전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삶 전반의 속도가 조금 더 낮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다.
● 22쪽, 윤리적 판단을 하기 시작하면 바로 운전대 놔야 한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라도 그러려니 하며 무심하게 빠져나갈 수 있어야 운전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인지라 서서히 화는 쌓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던 길이 막히면 화가 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운전할 때 유독 짜증이 심해지는 것이 인격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 76쪽, 외진 도청 앞에서 목이 빠져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던 가난한 승객들에게는 양심이 준 선물이다.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잔뜩 열이 받아 있는 승객이 화를 풀 길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기사밖에 없다. "어이 기사, 이 버스 몇 시 차여. 여기서 얼마를 기다렸는지 알어?" 눈물 나서 대꾸도 하기 싫다. 대꾸도 않는다고 또 시비다. 앞차를 빼먹은 동료도, 항의하는 승객도 그 어떤 누구도 잘못이 없다.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는 옳고 자기 인식 수준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삶이 징그럽게 외롭고 고독한 대목이다.
● 79쪽, 산다는 건 리듬을 타는 일이다. 그 리듬으로 한 사회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고 본다. 저상버스가 휠체어 탄 승객을 싣기 위해 리프트를 펴는 잠시 동안에도 ‘빵빵‘ 거리며 도로가 난리가 난다. 버스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속도가 지금보다 확실히 낮아져야 한다.
● 116쪽, 시간에 대한 삶의 태도가 제각각인 시내버스에는 운행 정시성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현실은 간단치 않다. 적폐기사와 공정기사, 적폐승객과 공정승객이 마구 뒤섞여 있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다. 항상 타는 시간에 버스를 탈 수 있어야 삶의 질이 높아진다. 기사의 운전습관이나 도로 사정에 따라 운행 중간지점부터는 10분 이상 차이가 날 수 있다. 버스가 많은 노선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버스가 귀한 노선은 한 번 놓치면 몇 시간이라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 160쪽, 버스기사는 운전원이면서 동시에 승무원이고 청소원이다. 운전은 기본이고 승무원의 역할이 더 강조되고 있다. 운전하려고 취업했지 스튜어디스 하려고 온 것 아니다. 당신 같으면 하루 세 번 이상 혼자 사무실 청소 다 하고 수시로 민원인들 상대하가며 생명을 담보한 주 업무는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언제나 친절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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