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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물먹은 보랏빛의 표지 그림을 보자마자 어떤 정보도 없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흔하디흔한 첫사랑의 추억을 다룬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따로 책 소개를 찾아보지 않은 채 책을 펼쳐 보았다. 의외로 분량은 적었다. 아이들의 그림책이 생각날 정도로 글밥도 많지 않았다. 여백이 많다는 건 무수한 설명과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고, 열려 있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독자라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책의 분량만큼이나 짧은 시간 동안 마지막까지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정말 묘- 했다. 어, 도대체 이게 뭘까. 신기하고 이상하다.
다양한 행동과 사건에 ‘첫’이 붙으면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설렘과 두려움, 황홀함, 두근거리는 다양한 감정이 함께 들러붙어서 느낌은 오묘해진다. 책 속에는 두 명의 소녀가 등장하고, 사춘기 소녀들이 으레 주고받을만한 얘깃거리로 대뜸 첫 장면이 시작된다. 다소 충동적이거나 불안하고, 신중하고 세심한 소녀들의 마음이 한 장의 그림들로 표현된다. 둘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도, 어떤 큰 사건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대신에 아주 일상적인 대화와 장면들만 뜨문뜨문 등장한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확실치 않은 그들의 마음들과 걱정과 두려움, 감정들을 조각조각 하나씩 보여줄 뿐이다.
순서도 없고,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 뜨문뜨문한 이야기가 꽤 어색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나에게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무수한 '처음'들을 기억하는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때로는 감정적으로 깊게 빠져들었던 상황을, 때로는 아무 의미 없이 던졌던 말들을, 때로는 그냥 같이 앉아 있던 일들을 무심코 떠올리듯이. 정말 내가 언젠가 겪었던 일들을 추억하고 연상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 짧은 책이 불러오는 긴 여운과 남다른 분위기는, 단순히 ‘첫’이라는 단어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건 아마도, 흐르지 않는데 책 속에서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음악'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내 감정 그대로를 담은 듯한 음악 한 곡을 감상하는 것 같다. 그림과 음악과 대사, 그리고 따뜻하고 서툴고 공감되는 감정들. 어쩔 수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조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