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노트 쏜살 문고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정지영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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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가출, 비밀, 우정, 격동의 파리…… 책을 읽기 전 간단하게 정리한 키워드는 흥미로웠다. 예민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의 두 소년이 품고 있는 비밀과, 그로 인해 서로 간에 쌓게 될 우정은 여태껏 감동으로 읽어온 청춘 성장 소설을 상상하게 했다. 이를테면 헤세의 작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속 주인공들의 우정과 『책도둑』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부딪쳐볼 수 없는 과거의 파릇파릇했던 마음들을 기억하게 할 잔잔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책을 열고나니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된 고전이었구나.

 

 1922년에 집필이 시작된 이 작품은 대하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 중 첫 권이다. 작가가 총 여덟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된 대하소설 속 7권 <1914년 여름>을 집필할 때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내로라하는 프랑스 대표 작가들에게도 많은 극찬을 받았다. 당시 문학의 흐름과 가치가 어땠을지는 모르겠으나, 오랜 사랑을 받은 작품이니 만큼 읽어볼 가치가 있었다. 단, 소설의 특성상 도입부가 되는 <회색 노트> 또한 마지막은 미완결이거나 열린 결말의 느낌, 아니면 이어지는 느낌으로 뭉뚱그려 그려질 수 있겠다고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책 속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두 소년의 가출 사건이다.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자크’와 ‘다니엘’은 회색 노트에 진지한 삶의 성찰과 이상을 풀어놓는다. 열정적으로 쓴 노트의 글 속에는 그들이 나눈 문학적 교류와 깊은 우정이 있다. 진심 어린 말들이 가득했지만, 실수로 회색 노트를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고 난 후에는 엄청난 논란이 인다. 때묻지 않은 우정의 글들은 어른들의 편견 어린 시선 속에서 문란한 것으로 둔갑된다. 충격을 받은 두 소년은 함께 가출하기에 이른다. 성향만큼이나 살아가는 환경까지도 달랐던 그들로 인해, 당시 엄격한 가톨릭 부르주아 집안과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대립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런데 고전 특유의 문체 때문일까. 영 따라가기 힘든 흐름과, 시대에 따른 주인공의 행동들이 때로는 불쾌감을 불러냈다. 청춘이기에 서슴없이 고민하고 갈망할 수 있는 회색 노트 속 ‘자크’와 ‘다니엘’의 편지는 아름다웠지만, 편지글을 벗어난 이야기 속에서는 뚜렷한 감정선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아, 어쩌면 내가 『티보 가의 사람들』이 아닌 두 소년의 우정 어린 <회색 노트>만 기대하며 읽어서일까.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 81쪽,
아, 아무런 기교도 부리지 말고 천성을 그대로 따를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이 창조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자각할 때는 자기가 가장 중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명을 띠고 있으며 완성해야 할 중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 그렇다! 성실할 것! 모든 일에, 그리고 항상 성실할 것! 아, 이런 생각이 얼마나 가혹하게 나를 쫓아다니는지! 천만 번이나 나는 나 자신 속에 모파상이 『물 위』에서 말하고 있는 가짜 예술가, 가짜 천재의 거짓을 발견하는 듯했어. 그러면 나는 구역질이 나는 걸 느끼곤 했지.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너를 나에게 주신 하느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몰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천분에 환상을 품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영원토록 얼마나 서로 필요한지.

● 91쪽,
습관과 규율의 영향 아래에서 개성을 잃은 대부분의 학생들 틈에서, 또 나이를 먹고 하루하루 판에 박힌 생활 탁에 정력이 다 소모되어 버린 선생들 곁에서, 이 볼품없는 얼굴의 게으름뱅이는 항상 솔직하고 강한 자기 의사를 폭발시키면서, 자기만을 위해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가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고, 위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며 모든 엉뚱한 모험에 서슴없이 뛰어들곤 했기 때문에 이 작은 괴물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의식적인 존경심마저 자아내게 했다. 다니엘은 자기보다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개성이 풍부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놀라게 하고 가르침을 주는 이 소년의 매력을 제일 먼저 느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그 자신 역시 무엇인가 격정적인 면이 있었고, 자유와 반항을 열망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 121쪽,
"있잖아." 그가 입을 열었다. 변성기에 있는 그의 목소리가 엄숙하고 나직이 울렸다 "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우린 헤어지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말이야, 난 전부터 네게 꼭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어떤 보증이라고 할까, 우정의 영원한 표지 같은 걸 말야. 너의 첫 시집을 내게 바치겠다는 약속을 해 줘……. 아, 이름을 쓸 건 없어. 그저 나의 친구에게라고만 써 줘. 어때?"



● 157쪽,
자크는 목구멍에서 울음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얼굴 근육 하나에라도 그 표정이 나타나지 않도록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턱을 가슴께로 바싹 끌어당겼다. 용서를 빌지 못한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으며, 자기도 다니엘처럼만 맞아 주었더라면 얼마나 따뜻한 눈물을 흘렸겠는가를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렇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에 대한 자기의 심정, 원한이 섞인 이 동물적인 애정,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돈 뒤로 오히려 더 복받치기까지 하는 이 동물적인 애정을 결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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