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대해 쓰기 위해서, 내가 들었던 말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걱정과 빈말로 포장한 모욕적인 말들을 다시 되짚으면 기분만 나빠진다. 자존감을 건드릴 정도의 큰 타격을 받은 적도 있고, 여자라면 한번씩 들었을 사소한 말들을 나도 꾸준히 듣고 자랐다. 가까운 사람에서부터 '아는' 사람 불문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분 나쁜 말들은 보통 여성성과 외모와 옷차림과 태도에 관한 과한 참견과 관심의 말들이다. 너나 잘해, 하고 싸가지 없이 욕 한번 시원하게 해버리고 싶지만 관계를 망치거나 시끄러워질까봐 '허허허' 웃거나 '네네' (알았으니 얼른 가세요) 속말은 삼키고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기 일쑤였다. 이건 착한 사람 콤플렉스나 각자의 성향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위치 때문에 속시원하게 말할 수 없는 현실이다.

<썅년의 미학>은 저스툰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웹툰을 재구성해 출간된 책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페미니즘과 관련된 만화지만 딱히 '페미니즘 만화'라고 이름 붙이진 않았다. 그저 여자들이 겪은 수많은 에피소드를 한 컷, 한 컷에 간략하게 담고 나서 상상력을 가미했다. 여자들이 별별 행동과 말들로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입을 때 당당하고 거침없이 거절하는 모습을 담았다. 각 장의 만화 뒷편에는 저자의 짧은 단상이나 실제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기억에 남는 저자의 경험담은 지하철 쩍벌남에 일침을 가했다는 이야기다. “지가 다리 벌려 놓고서는 왜 나한테 X랄이야?” 라는 말에 놀라 일어선 남자가 다시 통화를 하는 척 욕설을 내뱉자, “지금 나한테 미친년 이라고 한 거야?”라고 크게 웃으며 모든 승객들의 시선을 주목시킨 일이다.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저자 또한 친구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저자의 경험담이 섞인 만화를 보다보면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말하라고 알려주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게 거절하고 받아치지 못하는 여자들이 바보 같거나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잘못은 먼저 폭력적인 언행을 한 그 남자에게 있다.

 평생을 옭아매는 성 고정관념, 갑갑한 브래지어와 생리대의 괴로움, 성폭행과 성희롱, 범행의 표적이 된다는 불안, 데이트 폭력과 안전 이별, 나이에 따른 결혼의 압박과, 임신과 육아, 일터에서의 차별적인 대우. 사회가 오랜 세월 동안 방관해왔던 여자가 당하는 거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하나 하나 짚어주는 느낌의 만화다. 얼마 전 읽었던 <악어 프로젝트>가 길거리에서 여자들이 당하는 폭력에 대해 집중한다면, 이 책은 더 범위를 넓혀서 조금 더 가볍고 알기 쉽게 전해주는 느낌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항하는 방식이나 전략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코르셋의 범주에 관해서도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성 개인에게 가해지는 압박도 제각각이고, 그 때문에 그걸 벗기 위한 노력의 정도나 한계도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적은 모두 같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찾는 것이다.” (234쪽)

책의 마지막 문장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처럼 생겼다”는 말에 마음이 갔다. 만화를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탈코르셋을 하지 않고, 내 취향이 어디서 왔는지를 연구하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대로 살아가자는 주의다. 발췌한 글이,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 저자의 합리화로 볼 수도 있겠으나, “진정한 페미니스트의 외모를 나누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고 정답은 없다”는 저자의 말에 어느 부분 동의를 하고 있다. 나는 아직 페미니즘 입문서를 고작 몇개 읽은, 지금 뜨겁게 일어나는 페미니즘 운동에 발도 채 담그지 못한 애송이라서 뭐가 맞는지 틀린지 확신할 순 없다. 그래서 이런 저런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성들에게 감사하는 마음 뿐이다. 많은 정보들을 접하고 공부해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고심해보는 중이다.

73쪽,
"야한 걸 좋아하지만 너랑은 안 해."
이걸 말하기까지, 내가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뭐 어쩌라고.
결국, 지금에서야 페미니즘을 접한 우리들의 인생이란, 자신의 지난날을 끊임없이 후회하며 이불을 차다 "아니야, 역시 그 새끼들이 개XX다." 하고 잠드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오늘 밤만이라도, 온전히 그 개-새끼들을 탓하며 잠들 수 있기를. 모두 굿 나잇.

93쪽,
그들은 여성의 가장 사적인 순간, 즉, 여성이 배설하는 장면을 보거나 여성의 생식기를 보는 행위를 통해 비틀린 지배욕을 맛본다고 한다.제 아무리 잘난 여자라도 이런 곳에서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놓고 ‘몰카‘나 찍힌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낌다는 것이다. 여성의 수치심이 곧 자신의 흥분제가 된다는 것. 아아, 도대체 어떤 지질한 인생을 살기에 겨우 그런 거로 흥분하는 걸까? (아, 물론 너희 인생 따위 전혀 안 궁금하다.) 근데 있지, 우리 하나도 안 창피해. 우리는 인간이라서 생식기도 달려 있고 오줌도 싸고 똥도 싼단다. 그래서 그게 하~나도 안 창피해. 창피해야 하는 건 너희들이야. 겨우 그런 걸로 비정상적인 쾌감이나 느끼고 딸딸이나 치는 이 범죄자 X끼들아, 너희들은 우리를 한 번도 지배한 적 없었고, 앞으로 지배할 일도 평생 없을 거야.

103쪽,
남성이 피해자인 불법 촬영물이 유출되면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지만, 여성이 피해자인 불법 촬영물이 유출되면 음란 사이트 검색어 1위가 된다. 이 비뚤어진 운동장을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들 "여자가(는)"라는 말은 행동을 제한할 때 쓰이고, "남자가(는)"라는 말은 행동을 합리화할 때 쓰인다고 한다. (…) 아마 여기서부터 바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여자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니", 남자도 "감히"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공평하게, 서로 "그러지 말자"고.

223쪽,
우리에게, 페미니즘에, 여성에게 공감은 필요 없다. 어차피 사람은 타인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한다. 몰라도 괜찮다. 손잡아주지 않아도 되고, 눈물을 닦아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 정말 정말, 그래도 돕고 싶다면, 좀 닥치고 있기를 바란다. 여성의 입을 막지 말고, 여성의 앞길을 막지 말고, 여성의 인생을 막지 마라. 돕겠답시고 나대지 마라.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 아군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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