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 - 프랑스에서 부부 대신 파트너로 살기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24
이승연 지음 / 스리체어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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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시작하기 전부터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외로움을 심하게 타지 않는 성향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을 떠나서 왜 결혼과 출산이 의무여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문과 가문 사이에 오가는 어마어마한 자금들, 소속과 호칭의 변화, 무서울 정도로 다양한 간섭들 등, 많은 것들이 한여름밤의 꿈같은 결혼식 하루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게 어쩌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두려운 마음이 먼저였다.

 

하지만 이 생각이 언제까지나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배우자로 맞이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상, 아마 나는 비슷한 경로를 밟아나가지 않을까. 무수히 많은 것들과 싸우기보다는 순응하는 식으로. 한국이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사회적으로는 꽤 많이 닫혀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는 ‘팍스’라는 제도가 있다. 팍스는 두 성인이 서로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이며, 한국어로는 ‘시민 연대 계약’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68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고, 팍스는 원래 동성 커플을 위한 제도였다. “결혼한 커플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 제도를 제공하면서도 입양 허용 문제는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한다는 합의를 하고 탄생한 제도가 팍스다. (55쪽)” 프랑스에선 동거 상태로 지내는 커플도 많지만, ‘팍스’ 인구 또한 상당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동거나 결혼 대신 ‘팍스’를 선택하는 이유는 각종 증명서에 팍스 여부가 기록되고 배우자로서의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세금 공제 혜택과 재산 상속에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는 기특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며 (팍스) 파트너인 ‘줄리앙’을 만나게 되었고,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는 ‘동거’ 조차도 땅을 칠 일이었기 때문에 꽤 열심히 설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후 프랑스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하여 줄리앙과 ‘팍스’를 맺었다. 근사한 식당에서의 식사와 서명 한 번으로 둘은 파트너가 되었다. 둘은 여름이 되면 줄리앙의 부모님 댁에서 휴가를 보낸다. ‘팍스’를 맺은 그들이 자유롭게 부모님의 집을 오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가족 분위기 또한 화기애애하고 자유분방한 것도 특징이다. 식사 내내 가족들이 돌아가며 접시를 내오고, 각자가 필요에 의해 일을 하고,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자유롭게 대화하며 시간을 즐긴다. ‘시댁’이라고 할 수 있는 줄리앙의 집이 불편하지 않은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의 팍스 제도는 가족의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 국가가 다양한 가족을 제도 안에서 보호하는 울타리를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61쪽)

 

책을 통해 프랑스의 사회 복지 제도 일부분을 접하니 우리나라와는 달리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게 갖춰진 느낌이었다. 개인의 선택과 권리를 중시하는 프랑스는 성별과 관계없이 각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복지를 탄탄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복지제도를 이용하는 개인들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다. 프랑스에서 전업주부로 사는 여성은 전체 여성의 14퍼센트라 하고, 보육 시설도 무척이나 활성화되어 있다. 각자가 필요에 의해 일을 하며 육아는 부모 공동 책임으로 자유롭게 생활한다. 세심한 부분까지 고려한 국가의 복지 혜택과 그를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 책임감과 이해심을 갖춘 개인의 인식이 조화롭게 갖춰진 ‘그들이 사는 세상’이 어찌나 부러운지. 한국이 여러 방면에서 변화의 양상을 띠고 있지만, 보다 성숙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 큰 성장이 아닌 사소한 부분도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 17쪽,
결혼식을 올린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준비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혼 장소나 절차, 예복 등을 맞추다 의견 차로 다투기도 하고 가족들이나 친척들이 두 사람의 결혼에 개입하는 일도 많다. 이 모든 것을 수개월에 걸쳐 준비했더니, 결혼식 당일은 즐길 새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고 하는 커플도 있었다. 결혼이란 아름다운 일이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관습이라는 이유로, 전통이라는 이유로 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다.

● 49쪽,
그의 말처럼 팍스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제도라고는 말할 수 없다. 팍스를 맺고 사는 모범적인 커플이 있는 반면, 당연히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결혼 이외의 대안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현명하게 결정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함께 살며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 76쪽,
아이를 낳은 커플은 유급 휴가 외에도 매달 이틀의 휴가를 더 사용할 수 있다. 주어진 휴가를 다 쓰더라도 아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비워야 하면 회사와 원만히 협의할 수 있다. 내가 회사에 다닐 때도 많은 커플이 아이를 낳기 위해 육아 휴직을 사용했다. 아이 둘의 엄마가 되어서 일정 기간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회사 안에서 이들의 업무 방식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각자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업무를 배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아이가 자라면 회사로 돌아와 전일제 근무를 하면 된다. 고심해서 뽑은 사람이 아이를 길러야 한다는 이유로 회사를 떠나는 일이 회사에는 더 큰 손해다.



● 79쪽,
프랑사의 팍스나 스웨덴의 삼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동거가 곧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회에서 팍스나 삼보와 같은 느슨한 계약 관계는 다양한 가족 형태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문화는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사회 보장 제도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 105쪽,
한국의 가족관계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여전히 미완성의 관계다. 하지만 부모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혼식을 서두르는 커플, 결혼하고 나서 생활 습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커플들에 비교하면 어떤가. 극단적인 예시일지 모르겠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통과한다고 해서 연인, 가족 관계가 굳건해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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