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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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여자는 없었다. 분명히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억에서 사라져, 얼굴과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전방을 누비며 함께 싸우고 수많은 병사들을 구해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건 모욕의 말뿐이었다. 승리와 패배, 잔혹한 아픔으로 점철된 전쟁의 역사는 단지 남자들의 것이었다. ‘전쟁’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연상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대개 아이 손을 잡고 피난을 가는 여자들의 모습이나, 끔찍한 고통과 피해를 입거나 죽음 앞에 선 모습들뿐이었다. 이전엔 왜 이상하다 생각지 않았을까. 왜 군복을 입고 싸우던 여군들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적에 대항했던 여자들의 모습을 한 번도 떠올리지 못했을까. 물론 그 ‘수’와 ‘비율’에 있어서 남자에 비해 지극히 일부라는 이유를 들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의문은 따로 있다. 왜 우리가 여자 병사들을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그들은 언급되지도 않으며, 역사 속에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여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논픽션이다. 작가 스스로 ‘소설 - 코러스’라고 부르는 장르, ‘목소리 소설’이라 불리는 형식을 택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텍스트는 풍부한 목소리로 다가온다. 작가가 말하기를,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고 어떠한 의도도 없이 감정으로 인해 변해왔을 ‘그때’의 진짜 진실을 읽어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작가의 노력 덕분에 인터뷰이의 목소리에 함께 딸려오는 떨림과 어조까지 읽힌다. 울음을 머금고, 때로는 추억을 회상하듯 미소를 짓고, 울컥 올라오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수십 년을 견뎌왔고, 비로소 이 책을 통해 이름과 전쟁에 참여했던 청춘의 얼굴을 남겼다.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백만 명이 넘었던 소녀 병사, 그리고 책에서 목소리를 전하는 200명의 소녀였던 병사들이 전해주는 전쟁 이야기는 지금껏 들어왔던 것들과 확연히 다르다. 적의 전투기를 격추시키고, 총탄을 뚫고 기어가 육중한 몸의 부상병을 수없이 많이 구해내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그날의 경험을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또다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전장에서 터진 첫 생리의 기억, 포로를 연민했던 기억, 바닥에 깔린 시체를 바라보던 기억, 적의 포로가 되어버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기억, 어떤 여자가 임신한 몸으로 팔에 지뢰를 안고 달려가던 기억……. 너무도 적나라하게 재현된 전쟁의 민낯으로 이 책이 여러 번 검열을 당했다고 하니, 승리와 공훈을 우선적으로 전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꽤나 불쾌한 기록이었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검열은, 전쟁이 끝난 후 여자들이 당해야만 했던 냉대와 무관심, 모욕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용서하는게 쉬웠을거라 생각해? 당연히 그들의 눈물을 보고 싶었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기까지 나는 수십년이 걸렸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아군과 적군, 남자들이 뒤엉켜 홀린 듯이 서로를 죽이던 날. 포로가 된 독일 소년에게 빵을 건네주던 날. 생식기가 훼손된 독일 여자들을 발견했던 날. 적에 대한 혐오로 불타오르는 마음과, 생명을 가치있게 여기는 마음이 충돌했던 그날. 여자들은 그렇게 두 개의 본성과 싸우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담담히 넘어가야 하는 전장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전쟁은 사람을 이리도 비참하게 만든다.

 

얼마 전 우연히 한국전쟁 여성 의용군과 관련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이 일어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군 입대를 자원한 여자들이 가히 삼천 명에 육박했고, 우여곡절 끝에 500명의 여성 의용군이 탄생했다는 사실이었다. 큼지막한 군복을 접어 입고 남자들과 함께 가혹한 훈련을 받고 전장을 누비던 여성들. 여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색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은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결혼과 취업을 위해 오히려 여군 경력을 숨겨야 했다. 그들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여성 의용군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가 듣지 못한 ‘목소리’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 목소리를 들을 날이 올까.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 있다. 삶의 혼돈과 욕망이. 삶의 유일함과 불가해함이. 목소리 속에 이 모든 것들이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진짜 원본들이. 나는 우리의 감정들로 사원을 세운다…… 우리의 염원과 환멸로. 동경들로. 존재했지만 언제 슬그머니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것들로.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 일이 워낙 그렇다. 그렇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갔어.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었는데. 얼마나 어렸으면 전쟁중에 키가 다 자랐을까.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 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 햇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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