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소설을 읽을 때마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힘이 쭉 빠져 있는 듯 연약하고 섬세한 듯 보이면서도, 굳세고 강인한 면이 조금씩 드러난다. 꾸밈없는 문장 속에서도 단어 하나하나가 은은하게 빛난다. 독서의 폭이 넓지 않아 편협한 감상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번 소설 또한 그동안 읽었던 일본 소설들의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평범함과 익숙함,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과장되지 않은 문장을 통해 편안하게 스며든다.


 소설의 시작은 신선하다. 어느 날 주인공인 ‘사야카’에게 도착한 편지에는 ‘그 집 마당에 귀중한 무언가가 묻혀 있다. 실례가 안된다면 마당의 흙을 파도 될까요’라는 조심스러운 메시지가 적혀 있다. 알고 보니 메시지를 보낸 이는 첫사랑의 주인공이자, 젊음과 청춘이라는 삶 속을 온통 채우고 있던 ‘이치로’. 그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행복한 기억과 끔찍한 사고의 기억을 동시에 떠올려야 하지만, 사야카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자신을 믿어주고 포용해주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병으로 죽어간 친구이자 남편 ‘사토루’ (그와 부부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 그가 꼭 자신의 일부로 남기고 싶어 했던 사랑하는 딸 ‘미치루’,  사야카에게 “친구로만 있어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가족이라는 이름들. 그들이 있어 사야카의 새로운 한 걸음은 절대로 두렵지 않다.

 <서커스 나이트>는 굉장히 신기한 소설이다. 발리의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일본 신사의 풍경, 사이코메트리 (사물을 만지면 기억을 알 수 있는 능력)와 신성한 믿음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어 특이한 인상을 지닌다. 그런데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소재와 배경 속에서 오히려 일상적이고 편안한 이야기가 두드러진다. 특히 사람과 사람의 마음과 대사들. 우리를 살 수 있게 만드는 따뜻한 마음들이 돋보인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온 힘을 다해 도우고, 어떤 사람이 소중한 말을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얼마나 소중한 마음들이 왔다갔다하고 있을까.

 

“할 수도 있잖아, 앞으로.”
“앞으로.”란 얼마나 좋은 말인지 생각하면서. (292쪽)

 

 가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연을 보이지 않은 끈으로 이을 수 있다면 우리 모두는 정말 모두가 이어져 있을 거라고. 수많은 끈들이 우리를 묶어주고 있을 거라고. 이 소설을 읽으면 이런 상상이 마냥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거라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 책의 분량에 비해 이야기의 흐름이 고요하고 잔잔하게 흘러가서, 느린 템포에 허우적대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읽고 나선 이런 예쁜 마음과 대사들이 기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러모로 신기한 소설이었다.

 



● 28쪽,
사람의 손이 사람의 손을 그렇게 꼭 감싸 쥐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을 소중하게 옮기는 듯한 그런 몸짓을 그는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미치루에게 해 주었다. 그런 순간마다 미치루에게 전해진 사토루의 힘을 나는 전부 보았다.

● 115쪽,
공간이 좍 좁아지면서 흐물흐물한 것이 밀려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기억의 기척 같은 것, 소용돌이치는 뭔가가. 그 소용돌이가 사토루를 잃은 나, 아기를 낳은 적이 있는 나의 마음과 강렬하게 공명했다.



● 178쪽,
정말 굉장하지, 사는 힘이. 그런 작은 일을 떠올리면 행복해진단다. ‘어머니, 이거 공항에서 사 왔는데, 살아날 수 있을까요? 힘들까요? 보통 식물은 검역에 걸리는데, 공항에서 산 나무는 괜찮다고 해서 가져왔는데.’ 그러면서 마카다미아 초콜릿이랑 같이 꺼냈어. 그 아이가 가방에서 꺼낸, 라벨이 구깃구깃해진 히비스커스도, 그때 그 웃음도 나는 꼭 품고 살 거야.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이 가슴에 꼭 안고.



● 273쪽,
별거 아닌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상이야말로 멋진 것, 평범함이야말로 존엄한 것,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특별한 하루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확고하게 쌓아 올린 토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