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에 관한 르포
하재영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전 서울 여의도 근처에서 육견협회의 생존권 시위가 있었다. 나는 이 소식을 언제나처럼 뉴스 기사로 접했다. 사진에서는 시위에 동원된 여섯 마리의 개들이 제 몸보다 작은 철창에 끼어있는듯 어정쩡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비가 한참이나 내리던 날이었다. 사방이 뚫린 철창 속에서 개들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고함과 난동을 부리는 현장 속에서 비까지 맞으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개들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동물보호단체 사람들도 곁에 있었지만, 약하디 약한 동물보호법에 쓰인 한 줄 (긴급 격리 조치) 조차 실행하지 않는 처참한 현실 앞에서 개들을 다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개들은 아마 더욱 끔찍한 곳으로 갈 것이다. 소란스러운 거리와 수많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환경보다 더욱 끔찍하고,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집단 수용소 사진들이 보여주는 것은 연합군이 진군해 들어갔던 바로 그 순간뿐이다. 어떤 장소에 대해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곳이 삶의 공간이었던 사람뿐이다.”(82쪽)

종종 SNS를 통해 유기견과 식용견, 번식견의 삶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다. 자꾸 찾아보니 추천 데이터로 뜨는지 더 자주 보게 된다. 내 개가 부드러운 흙과 잔디를 밟고 하수구 철망에 발이 끼지 않으려고 길을 돌아가거나 점프를 할 때, 평생을 철망 위에서 온 힘을 다하여 버텨야 하는 개들이 있다. 내 개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깨끗한 패드에 배변을 할 때, 평생 물 한 모금 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그 자리에서 배변을 해결해야만 하는 개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사진과 영상과 이야기들로, 단편적으로 접한 것들 너머엔 순간 너머의 ‘삶’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 있지 않은 누구도 그 삶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종종 이와 관련한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는 문장들이 등장하는데,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 또한 그러하지만 철창에 구겨져 이용을 당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동물의 삶 또한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에 전혀 연관 없는 것이라 보이지 않는다. 책의 제목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나치 관련 소설과 유사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대한민국에 사는 개들의 현실을 신랄하게 꼬집은 르포 형식의 책이다. 개 산업 구조 위에 놓여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개를 살리려는 사람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파악한다. 사람에게 이용당하기 위해 태어나 사람에게 버림받는 개들의 끝은 참혹하다. 강간과 불법 수술이 만연한 번식장, 새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경매장, 고통에 힘겨워하는 동물을 보조금 때문에 방치하는 보호소, 피의 냄새가 진동하는 도살장…… 매일 수많은 개들이 죽고 수많은 개들이 상상도 못할 속도로 생산된다. 작가는 바로 이 시스템 자체가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저 동물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데려온 이들이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 우리의 시스템 안에서 동물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들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질문하는 일이 오로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89쪽)

이런 이야기를 하면 늘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다. “닭은 불쌍하지 않아? 소는?” 그럼 “당신은 채식만 해야겠네”라고 힐난하는 말들. 작가는 이 세계의 모순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 싸워 얻은 결론을 침착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거대한 공장 사육으로 수많은 동물들이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굳이 종 하나를 추가해야 하는가, 이것이 생명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리고 작가 스스로에게도 던졌을 질문을 던진다. 이 막막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데는 어떤 자격도 필요치 않으며, 완벽하게 실천할 수 없다고 해서 단 하나의 도움과 실천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작가는 재차 강조한다. 우리는 유리 상자 속 예쁜 강아지 너머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 개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쉽게 사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우리의 삶은 온갖 동물의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덧붙이고 싶은 말>

+ 보호소 안의 안락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편안한 안락사가 아니다. 자연사 또한 말그대로의 자연사가 아니다.

+ 개시장은 오로지 현금장사다. 그리고 간이과세자다. 연간 6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간이과세자라는 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그들의 생존권은 허구다. 쓰레기를 먹이면서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도살하며 월 수천만원의 돈을 버는 그들은 생존권을 논할 자격이 없다.

+ 개고기의 항생제 잔류치는 최고도, 세균과 바이러스가 득실댄다고 한다. 우리는 개고기의 위해요소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더러운 환경에 자라고 도살되며 같은 동족의 내장이나 고기까지 먹은 개들의 고기가 어떤 위해요소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전세계의 개 식용 인구가 소수이니 만큼 데이터도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먹고 싶은가?


● 52쪽,
동물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생활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삶의 방식을 재고하기보단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모순을 찾아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싶어한다. 동물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평범했던 일상이 딜레마로 전환되는 일이다. 나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외부의 적인 아닌 스스로의 모순과 싸우는 일이다.

● 79쪽,
그 모견은 이미 삶을 포기한 상태였어요. 내가 자기를 들어올리든 물속에 집어넣든 아무 반응도 없었어요. 온몸이 축 처진 채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게 있기만 했어요. 숨만 붙어 있을 뿐 어떤 움직임도, 최소한의 반응도 없었어요. 시체를 만지는 기분이었어요. 더이상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도 명확하게 느껴졌어요. 아, 개도, 동물도 극한 상황에서는 차라리 죽고 싶어하는구나. 사람이면 벌써 자살했을 거예요.

● 118쪽,
제가 번식장에서 봤던 어떤 어미는 새끼를 지키려다 못해 도로 뱃속에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 모견들이 허다해요.

● 149쪽,
동물에 대한 연민을 낮잡아보는 사람들이 많잖아. 우리가 구하는 게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는 이유로, 응원은 고사하고 비난을 받을때도 있잖아. 나도 인터넷에서 그런 댓글 많이 봐. 개새끼들 도와줄 여력 있으면 사람이나 도와주라고. 불쌍한 사람도 많은데 개새끼가 대수냐고.
하지만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군가를 위해 자기 인생을 걸어본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 여기 돕지 말고 저기 도와라, 얘를 구하지 말고 쟤를 구해라, 그런 소리는 누구도 구해본 적 없고 누구도 살려본 적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 226쪽,
누군가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전제한 뒤 이 세상에는 ‘더 고통 받는 동물’과 ‘덜 고통받는 동물’이 있다고, 그러므로 모든 동물을 ‘더 고통받는 동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평등은 아무 가치도 없다. 그것은 모든 동물을 고통의 수레바퀴에 밀어넣으려는 궤변일 뿐이다.

● 247쪽,
사람들은 인육이 아닌 이상, 먹는 것 가지고 뭐라 하면 불쾌해합니다. 저도 압니다. 음식은 복잡한 문제입니다. 문화, 습관, 그것을 함께 먹었던 사람들과의 기억, 그밖에도 많은 것이 들러붙어 있지요.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모든 동물은 먹어도 된다, 사람만 안 먹으면 된다, 이런 생각도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게 인간 말고는 다 잡아 죽이자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그게 다른 종을 대하는 우리의 도덕입니까? 인간은, 우리는, 그래도 되는 걸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