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잃어버린'이라는 관형어가 붙는 말들은 어쩐지 미지의 것을 향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때는 우리의 것이었으나 언젠가 놓쳐 버린 무언가를 향한 안타까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에 최근 책이 추가되었다.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정규환 옮김, 민음사 펴냄)는 과거에 출간되었거나 쓰였으나 어떤 까닭에서인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책 또는 원고에 얽힌 사연들을 다룬다. 원제가 'The Book of Lost Books'인 이 책에는 호메로스에서부터 조르주 페레크까지 작고한 작가 80명의 유실된 작품 이야기가 오롯이 담겼다. 편집자이자 독서광으로 소개된 영국 작가 스튜어트 켈리의 폭넓은 독서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중국의 사상가 공자의 저작은 본래 6경이었으나 지금은 <시경>, <예기>, <서경>, <주역>, <춘추> 등 5경만 남아 전한다. 나머지 1경, 음악에 관한 가르침인 <악기>는 진시황의 악명 높은 분서갱유 때 멸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스튜어트 켈리 지음, 정규환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지금은 고작 일곱 편의 희극만이 남아 전하는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퀼로스는 생전에 모두 여든 편이 넘는 희곡을 썼다. 그 작품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본 <아이스퀼로스 전작집> 두루마리에 갈무리되었다. 아이스퀼로스가 죽은 지 200여 년 뒤,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이집트 왕위에 오른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할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를 기반 삼아 만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 목록을 검토하던 중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아테네에 있던 유일본을 필사본을 만든다는 핑계로 빌려서는 결국 돌려주지 않았다. 이 두루마리 책을 읽을 수는 있되 베낄 수는 없다는 엄명 아래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서기 640년 12월 22일, 당시의 이슬람 통치자의 지령을 받은 암루 이븐 엘아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들을 모두 불태운다. "하느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것들은 불경스럽거니와, 일치하는 것은 굳이 없어도 괜찮은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서였다. 유일본 <아이스퀼로스 전작집>은 그 불길 속에 허무하게도 잿더미로 돌아가 버렸다.

귀중한 책에 불을 지른 것이 권력자들만은 아니었다. 영국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1835년 자신의 주저가 될 <프랑스 혁명사>(전3권)의 첫째 권 원고를 친구인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건네주었다. 읽어 보고 의견을 달라는 것이었다. 밀은 이 원고를 자신의 여자 친구인 해리엇 테일러(당시는 유부녀였는데, 해리엇의 남편이 죽은 뒤인 1851년에 두 사람은 결국 결혼했다!)에게 맡겨 두었는데, 하녀가 원고를 폐지로 오인해 불쏘시개로 써 버리는 바람에 온전히 다서 써야 했다.

글을 쓰는 이라면 크든 작든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겠지만, 당시 칼라일이 느꼈던 낙담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내 생애에 그 어떤 시기에도 이보다 더 철저히 기댈 데 없고 낙담한 마음이었던 적이 없었으니…. 과연 일거리 중에서도 더없이 진 빠지고 괴로운 그 일을 다시 한다는 것은 그냥 불가능할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프랑스 혁명사>는 1837년에 출판되었고, 존 스튜어트 밀은 <런던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아첨기 가득한 서평을 실었다.

단테는 13년에 걸쳐 걸작 <신곡>(이 책에서는 <희극>으로 옮겼다)을 썼는데, 그가 죽은 뒤에 확인해 보니 작품의 절정에 해당하는 '낙원'의 칸토 열세 편이 빠져 있었다. 그의 두 아들 야코포와 피에트로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작품을 완성하고자 애썼지만 이 작품의 운(韻)과 수비론(數秘論)적 짜임이 워낙 촘촘해서 감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코포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들이 <신곡>의 누락된 부분에 대해 물으니 아버지는 자신이 오랫동안 침실로 쓰던 방으로 아들을 데려가 벽걸이 천으로 가려진 부분을 가리켰다. 잠에서 깬 야코포는 아버지가 가리켰던 벽걸이 천 뒤의 벽감에서 곰팡이가 핀 문제의 칸토 열세 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막내 알료샤가 수도원을 나오는 장면을 끝으로 미완으로 남았다. 도스토옙스키의 계획은 이러했다.

"내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예언적인 요소가 많은 것으로 보일 겁니다. 여기에서 알료샤는 수도원을 떠나 무정부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순수한 알료샤는 차르를 죽일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의 계획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1881년 1월 28일에 죽었다. 그해 2월 마지막 날,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암살당했다.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를 상대로 한 프랑스 주류 사회의 음모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팸플릿으로 맞섰던 에밀 졸라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쓸 계획을 세웠다. '정의'라는 제목이 붙은 그 소설이 완성되기 전에 졸라는 잠을 자던 중 구역질과 두통, 어지러움을 호소한 끝에 호흡 곤란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숨진 1902년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53년 신문 <리베라시옹>에 졸라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본 노인 독자 한 사람이 친구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하고 내 인부들이 옆집에서 수리 공사를 하면서 그 굴뚝을 틀어막았지. 워낙 출입이 빈번해서 그 북새를 틈타 졸라의 굴뚝을 찾아냈고 막아 버렸지. 다음 날 아주 일찍이 막은 걸 다시 터놓았지. 우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드레퓌스와 졸라를 매국노로 여긴 굴뚝 소제부들이 졸라의 명을 앞당기고 소설 <정의>의 탄생을 막은 셈이다. 게다가 검시관은 졸라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대중의 공분을 자아낼까 두려워했던 나머지 사인을 불의의 사고사로 기록했던 것.

<죽은 영혼들> 1부를 1842년에 출간해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던 고골은 이 소설의 2부를 쓰는 동안 종교적 광기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1845년, 5년 동안 쓴 2부의 원고를 한 차례 불에 태웠던 그는 1852년에 다시 하인을 불러 불을 피우라고 명령한 다음 그동안 쓴 2부와 3부의 원고를 한 장씩 그 불길 속에 집어넣었다. 하인의 만류를 무릅쓰고 손수 일을 끝낸 그는 십자가 성호를 긋고 하인에게 입 맞춘 다음 그 뒤 아흐레 동안 일체의 음식을 거부한 채 굶어 죽었다.

카프카가 자신의 원고를 모두 폐기해 달라고 한 유언을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무시함으로써 그의 많은 작품들을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하인리히 하이네와 실비어 플래스는 그런 점에서 카프카와는 정 반대되는 경우다. 하이네가 죽은 뒤 그의 동생 막시밀리안은 그가 쓴 회고록 가운데 가족들의 명예를 해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원고 500~600쪽을 소각해 버렸다.

실비어 플래스가 1963년 2월에 자살했을 때 그는 남편이었던 시인 테드 휴즈와는 갈라진 상태였으나 이혼 소송 절차가 개시되지는 않았었다. 유언장도 남기지 않은 그의 문학 유산 집행자는 법률상 남편이 되었고, 그 관리는 생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누이 올윈의 손에 넘어갔다. 실비어 플래스 사후 테드 휴즈가 편집해 낸 그의 시선집에는 플래스가 골랐던 41 편 가운데 27편만 들어갔다. 휴즈는 "사적으로 한결 공격적인 시들 얼마를 뺐다"고 밝혔다. 휴즈는 또한 플래스가 마지막 몇 달 동안 쓴 일기를 불살라 버렸으며, 130장 정도를 썼던 자전적 소설 <이중 노출> 원고는 어떤 경위로인지 '사라졌다'고 밝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원고 뭉치, 그리고 2000점 중에서 15편만을 발표했다는 이상의 <오감도> 연작 나머지 작품 등 한국 문학이 '잃어버린' 책의 행방에 대한 궁금증과 아쉬움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들이 책으로 수렴되었다가 다시 책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책벌레들에게는 이 '책에 관한 책'이 반가운 선물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는 결코 쉽고 편안하게 읽히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종횡하는 방대한 범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번역과 편집의 문제가 더 커 보인다.

한 쪽에서도 몇 번씩 되풀이되는 어미 '~ㄴ바'는 독자를 지치게 만들 정도인데, 그것도 'ㄴ 바' 식으로 불필요한 띄어쓰기를 일관되게 하고 있어 더 눈에 거슬린다. 딱히 오역이라기보다는 전달 능력이 떨어지는 듯한 문장들도 빈발한다.

"하지만 크세노클레스는 자신을 아주 파멸되도록 내맡기는 데 혼자가 아니었다."(96쪽)

"하지만 브루투스는 자기네 사명은 자신들의 안락을 구하는 것뿐 아니라 문명의 혜택을 몽매한 민족에게 전해 주는 일이다."(312쪽)

"의식이 명료한 때에 콜리지는 자기가 창백했던 상태에 대해 쓴 말은 우리 마음에 닿는 게 있다."(362쪽)

크고 작은 오탈자들 역시 책읽기를 방해하는데, 윌리엄 버로스(옮긴이는 '버로즈'라는 표기를 고집했다)를 다룬 장의 마지막에는 각주가 버젓이 본문 일부로 편집되어 있는 '대형사고'도 눈에 띈다(48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국적 기업인 지멘스의 경영자였던 독일의 베르네 슈반펠더가 중국의 고전 <손자>, <공자>, <노자>를 경영인을 위해서 또는 경영의 관점에서 풀이하는 책을 냈다. 우리말 번역서의 제목을 소개하면 <CEO를 위한 손자 : 전략의 고수>, <CEO를 위한 공자 : 중용의 고수>, <CEO를 위한 노자 : 느긋함의 고수>(이미옥 외 옮김, 한울 펴냄)이다.

이 시리즈는 정작 독일에서 베스트셀러의 축에 끼지는 못했지만 네덜란드, 포르투갈, 브라질, 러시아에서 번역되었다. 또 중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공중파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위해 지은이가 사는 고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중국의 호들갑스런 관심이 아마 내용의 깊이보다는 가십거리의 발견에 있으리라 짐작된다.

사정이 어떠하든 중국의 사상 문화를 대표하는 손자, 공자, 노자가 바야흐로 좁게는 중국 또는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넓게는 유럽과 기타 지역의 공유 자산으로 비춰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의 일이라 시샘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상 문화도 그런 기회와 날이 있게 되기를 바라본다.


▲ <CEO를 위한 손자 : 전략의 고수>(베르네 슈반펠더 지음, 이미옥 옮김, 한울 펴냄). ⓒ한울
화제를 끈 책이 관심을 받으려면 적어도 두 가지 물음을 통과해야 할 듯하다. 하나는 독일인 경영인과 중국 고전으로 짜인 조합이 탄탄하지는 않더라도 그럴 듯하다는 조건을 통과할까, 라는 호기심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 경영과 중국 고전의 연계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유효할까, 라는 의구심이다.

첫 번째 호기심은 저자가 늘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슈반펠더는 직무상 아시아 지역을 자주 방문하기도 했고 또 중국 관련 업무 부서에서 근무하면서 중국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업에만 열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중국의 역사, 중국인의 생활방식, 습관, 그리고 그들의 철학 사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여기서 관심의 확장을 '자연스럽게'라고 말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계속 사업에 머무르지 못하고 저술가와 기업 강연 전문 강사로 나가게 된다. 즉 그에게는 누를 수 없는 배움의 욕구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슈반펠더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척했다는 말로 첫 번째 호기심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친구의 도움에다 슈반펠더의 독학에 가까운 노력이 이 시리즈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왕성한 도전 정신을 따라 해서는 안 되는 만용이라고 하기 이전에 우려를 안은 참신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의구심에 대해서는 평자가 뭐라고 하기보다 해석의 사례를 직접 맛보는 쪽이 좋겠다.

먼저 <CEO를 위한 손자 : 전략의 고수>를 들여다보자. 슈반펠더는 <손자>의 '허실(虛實)' 편을 "조건을 기록한다 : 이를 통해 성공한다"로 파악한다. 이어서 그는 손자의 "전쟁에서도 강자를 피하고 약자를 공격해야 한다"는 말을 가상의 '자전거 주식회사' 경영에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경쟁사가 '자전거 주식회사'보다 먼저 마모가 없는 바퀴통을 시장에 선보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자전거 주식회사'는 경쟁사의 장점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지 의논했다. 경쟁사의 품질을 따라가지도 못한 채 많은 비용을 들여 결국 2등이 되는 것이 유리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바퀴통 분야에서 2등으로 머무는 대신에, 적의 약점을 찾아 다른 분야에서 1등이 될 수도 있다.

'자전거 주식회사'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하여 바퀴통에 대한 자체 노하우는 바퀴통을 연결하는 부품과 조립을 최적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과정 끝에 쉽게 조립할 수 있고 원가도 저렴한 보호 부품이 나왔는데 이 부품은 바퀴통의 수명을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켰다. 이 새로운 발명품은 많은 상인과 최종 소비자의 마음에 들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이 부품을 개선된 바퀴통보다 더 선호했다. (128쪽)

슈반펠더의 제안대로 하면 모든 경영이 성공한다고 할 수 없지만 전략을 세우는 데에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안을 보면 LG전자가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의 갤럭시가 주도하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뒤져서 맥을 못 추다가 보급형으로 승부를 걸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문제는 현실에서 경쟁사도 '자전거 주식회사'의 전략을 모른 채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손자와 슈반펠더의 해석으로부터 모든 해답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손자>의 13편을 경영자를 위한 열세 가지 '계명'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음으로 <CEO를 위한 공자 : 중용의 고수>를 들여다보자. 슈반펠더는 먼저 현대 사회에서 경영자의 신분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실태를 언급한다. 위기는 경영 수치상의 숫자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신뢰의 상실에서 온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결과 오늘날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많은 경영자들이 서슴없이 부를 챙긴다. 위기가 임박했음을 이런 징후로 알게" (66쪽)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경영자들은 점점 눈앞의 현실에 급급한 정신 자세를 갖게 된다. 이들의 행동 방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의해 규정된다. 그들이 계획하는 사업은 장기적인 비전을 갖기보다는 단시일 내에 수익을 내야 한다."(67쪽) 그는 이러한 실례로 다임러크라이슬러를 들고 있다.

그럼 오늘날 경영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슈반펠더는 먼저 <논어>의 구절을 제시하고 이어서 그 구절을 덕목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인자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논어> 9 : 28)

"덕목5 : 위기의 시기에도 경영자는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경영자는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67쪽)

마지막으로 <CEO를 위한 노자 : 느긋함의 고수>를 들여다보자. 슈반펠더는 경영인들이 많이 겪는 현상으로 번아웃(burnout, 소진)을 예로 들고 있다.

계속되는 절망감, 달성하지 못한 목표, 스스로에 대한 지나치게 높은 기대 등이 이 현상의 원인이다. 이는 우울증, 불면증, 두통, 위경련 혹은 다른 신체적인 증세로 나타난다. 여기에다 스스로가 충분히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의식까지 작용한다. 이렇게 지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처한 환경은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혼자 있을 생각만 한다. (59쪽)

슈반펠더는 번아웃을 벗어나기 위해서 먼저 가상의 자전거 회사 운영 방침을 제시하고 그것을 <노자>와 연결시킨다.

자전거 회사는 수년 전부터 자신이 해마다 꼭 이행해야 할 목표를 정해놓고 흔들림 없이 이행하는 관리자가 있었다. 그는 이 목표를 최우선시했는데, 그의 목표는 바로 1년에 한 번씩 수도원에 들어가서 명상을 하는 일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존재 가치의 핵심을 발견하고, 자신의 중심을 찾고, 그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힘과 활력을 다시 찾는다고 한다. 물론 그가 아직 최종 목적지까지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도에다가 너를 맡기라, 그러면 너는 도와 하나가 될 것이며 도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통찰에다가 너를 맡기라, 그러면 너는 통찰과 하나가 되면서 통찰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에다가 너를 맡기라, 너는 잃음과 하나가 될 것이며 잃음을 완벽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도덕경>, 23장)

이처럼 슈반펠더는 현대 사회에서 경영자가 처한 상황과 그 해결책을 <손자>, <논어>, <노자> 등 중국 고전에서 찾고 있다. 원래 그의 작업은 엄격한 학문적 토대가 아니라 응용의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타당성은 추론의 정당성보다 직관에 바탕을 둔 그럴듯한 설득력에 두어야 한다. 그 판단은 읽는 사람이 느끼는 감동과 동의로 맡기고자 한다.

한때 언론과 시민단체의 힘이 강해지자 언론과 시민단체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감시를 받는가, 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국내외적으로 경영자 또는 CEO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과연 그들은 누구의 감시를 받는가? 사실 공정 사회라면 어리석은 질문이다. 당연히 법의 지배를 받을 테니까.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하루가 멀게 경영자가 횡령과 부패 사건을 일으키고 심지어 비자금으로 경영권을 불법적으로 유지 세습하기도 한다. 이들도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재력으로 사법적 정의를 누른다. 예컨대 죄가 있어도 불구속 기소되거나 구속되더라도 조만간에 휠체어 탄 채 보석으로 풀려나거나 적절한 때에 사면을 받고서 원래의 자리로 보란 듯이 돌아간다. 국가 경제의 공헌이 크다는 것이 정상 참작의 되풀이되는 이유이다. 이러다보니 힘없는 자의 처벌에 신상필벌이 적용되는 것에 대비해서 유전무죄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린다.

이제 죄를 범하더라도 쉽게 빠져나온다면 주문이 하나밖에 없다. "범죄와 면죄의 짧은 입맞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제발 죄를 짓지 말라!" 아무리 윤리적 경영이니 사회적 책임을 소리 높게 외치더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더 크게"를 위해 발돋움하는 욕망의 현신인 기업인(企業人)이 스스로 윤리 의식으로 무장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 업은 업의 소멸을 말하는 불교의 업과 다른 뜻이다. 다르지만 서로 반대가 되지 않도록 제어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는 자발적 학습과 학습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이 책은 자발적 학습을 위한 첫걸음을 떼게 만들어준다. 아울러 세 책은 공통적으로 경영자가 자신이 가진 힘과 부를,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만능의 티켓으로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싫은 것을 피하게 하는 특권으로 생각하지 말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오만한 경영자가 아니라 겸손한 경영자가 되고, 현재에 도취해서 왕국을 건설하기보다는 변화하는 현실을 명민하게 읽어내는 학습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은이의 이력만큼이나 옮긴이의 이력도 독일어와 한국어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중국 고전에는 낯설다. 책의 출판 전에 중국 고전 전문가에게 한번쯤 읽혔더라면 쉽게 잡을 수 있는 오류가 그대로 남아있다. 예컨대 <易經>의 음을 '역경'만이 아니라 '이경'으로 제시하고 있다(<CEO를 위한 논어>, 45쪽). 그밖에 원문 번역도 한문 원문이 아니라 독일어 번역을 중역하느라 어색한 곳이 눈에 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어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 (179쪽)

네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말미에 실린 평론가 정여울의 해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스포일러 없는 비평이 가능할까?" 나는 오히려 이렇게 묻고 싶다. "이 소설에 대해 스포일러가 가능할까?" 말하자면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과 그것에 영감을 받은 알랭 레네의 영화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사이의 차이.

전자가 미로(혹은 림보)에 빠진 주인공을 그리는 전통적인 서사라면 후자는 그 자체로 보는(읽는) 이를 어지럽게 만드는 하나의 미로다. 위의 인용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최제훈이 의도한 것은 독자를 헤매게 만드는 미로이고, 네 개의 미로가 복잡하게 얽히며 만들어가는 미로이며, 출구 없이 폐쇄된 미로다.

그렇다면 질문. 미로에 대한 스포일러는 가능할까? 이를테면 왼쪽, 왼쪽 다음에 오른쪽 다시 왼쪽, 하는 식으로. 유용한 방법은 아니다. 혹은 아리아드네의 실. 하지만 당신이 직접 미로로 뛰어 들기 전까지 실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미로에서는, 그 실 역시 당신을 얽어매는 또 하나의 장애에 지나지 않는다. 목줄이 묶인 채 빙글빙글 돌던 개가 결국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것처럼.

그러니 기쁜 소식은 이 글은 결코 스포일러가 될 수 없을 거란 사실이다. 나쁜 소식은 별 도움 또한 되진 않으리란 것. 하지만 그것이 꼭 이 글만의 악덕은 아닐 것이다.

*

자, 이야기를 계속해봐. 잠이 들지 않도록. 이젠 지쳤어. 모르겠어.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도. 이렇게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면서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 글쎄, 최소한 지루하다는 느낌은 가질 수 있잖아.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니야. 매번 변하고 있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면서. (11쪽)


▲ <일곱 개의 고양이 눈>(최제훈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낯선 화자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여섯 번째 꿈'은 그러나 낯익은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눈 내리는 겨울, 외딴 산장에 여섯 명의 남녀가 모인다. 법대생, 무명 여배우, 가정주부, 피시방 주인, 레지던트, 스페인어 번역가.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이들은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웹사이트 '실버해머'의 회원들.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사이트 운영자인 악마의 초대장이다. 너무 직설적이라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아이디와 달리 초대장의 내용은 정중하고 친절하다.

"이번 주말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회원 몇 분만 제 별장에 초대하여 친목을 다지는 시간을 마련할까 합니다. 홈페이지에 차마 올리지 못한 희귀 자료도 공개하고, 재미있는 게임도 준비되어 있으니 꼭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술과 음식은 넉넉히 대접할 테니 몸만 오시면 됩니다. 약도 첨부합니다. 악마." (35쪽)

과연 장식장에는 각종 위스키와 브랜디가 가득하고,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악마를 기다리던 이들은 어색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꺼낸다. 잭 다니엘스 블랙, 카뮈 VSOP, 맥켈란 18년산과 조니워커 블루라벨, 거기에 레미 마틴 루이 13세와 리처드 헤네시까지. 약속과 달리 넉넉한 음식은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 풀어놓는 이야기를 안주삼아 술잔을 들이킨다.

그것은 물론 그들의 유일한 공통 관심사, 바로 살인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잭 더 리퍼, 존 웨인 게이시, 해럴드 시프먼, 에드워드 게인, 에드먼드 켐퍼, 테드 번디…. 위스키의 브랜드와 살인자의 이름을 함께 늘어놓는 최제훈의 방식. 말하자면 그들은 잭 더 리퍼를 안주로 잭 다니엘스를 마시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연쇄살인범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모두들 무엇엔가 마음을 빼앗기고 싶어 하잖아. 그래야 자기 마음을 물끄러미 오래 들여다볼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남는 건 단순한 취향의 문제 아닐까? 배스킨라빈스 매장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것처럼. (20쪽)

각종 기록과 멋진 플레이를 제시하며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가 최고라고 우기는 야구광처럼,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살인마가 최고라고 열을 올리던 이들은 여섯 개의 방으로 흩어진다. 아직 오지 않은 악마를 기다리며 잠이 든다. 밤새 내린 눈이 산장을 외딴 섬처럼 고립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들 중 누군가는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한 채. 그들은 다만, 아침과 함께 맞이한 한 구의 시체 앞에서, 뒤늦게 예감할 뿐이다. 그것이 산장에서 마주하게 될 마지막 시체는 아닐 것임을, 악마가 말했던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제 낯익은 무대만큼이나 익숙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폐쇄된 공간에서 서로 의심하는 사람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 부실한 대책과 불가피한 죽음. 최후가 다가왔다고 느끼는 순간 밝혀지는 비밀 혹은 게임의 규칙. (그것은 진실일까?) 그리고 꿈. 환상과 현실의 경계 자체를 무화시키는 꿈, 꿈, 꿈, 꿈들. 덧붙여 초대장에 적힌 악마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의외의 깨달음.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 공통분모를 알아내기 위해 서로의 신상을 공유하며 친목을 다지고, 홈페이지에 차마 공개하지 못한 희귀 자료를 직접 목격하며, 목숨을 건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신다. 한니발 렉터도 즐겨 먹었던 그 '음식'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의 차지다.) 하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질문. 당신에게는 물을 권리가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에 대해서, 책의 뒤표지에 당당하게 적혀 있는 추천사에 대해서. 그러니까 미로는 어디 있냐고. 눈을 감고도 더듬어갈 수 있는, 수백 번은 반복되어온 장르의 클리셰를 다시 한 번 반복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냐고.

대답은 이렇다. 이제 우리는 미로의 입구에 들어선 것뿐이라고. 앞으로 이어질 미로들에서 끊임없이 변주될 인물들과 사건들(꿈, 환상, 죽음 그리고 고립)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약도일 뿐이라고. 악마가 회원들에게 보낸 초대장에 첨부되어있다던 그 약도처럼. 혹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까? 잠들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화자의 입을 빌려 작가는 이미 소설의 초입부터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니야. 매번 변하고 있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면서. (11쪽)

그러니까 관건은 반복이 아니라 반복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는 변화, 변주다. '복수의 공식'(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스페인어 번역가가 번역했던 아르헨티나 소설의 제목)은 바로 이런 변주를 통해 독자를 본격적인 미로로 끌어들인다. 다섯 명의 인물이 돌아가며 등장하는 짧은 장들로 묶인 두 번째 중편은, '여섯 번째 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사(前史)인 동시에 후일담이고, 그것과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이며 앞선 이야기를 무화시키는 이야기이다. 각각의 장은 마주보는 거울처럼 서로를 참조하지만, 그 속의 인물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시간은 끊임없이 모습과 위치를 바꾸며 그들을 하나의 인물로, 인과로 포착하려는 독자의 시도를 종내 비웃는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기표들처럼, 인물과 사건은 하나의 본질로 고정되지 않은 채 유동성과 불확정성 위에서 유희하는 것이다.

먼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앞에는 복수의 상대가 전신이 마비된 채, 그러나 정신만은 또렷한 상태로 누워있다. 남자는 재킷에 뭉크의 '죽음과 소녀'가 인쇄되어 있는 슈베르트의 동명의 현악사중주 CD를 배경 음악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왼쪽 팔뚝에 새겨진 흉터의 내력을. 태어날 때부터 앓았던 간질, 잦은 발작으로 쌍둥이 여동생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야 했던 어린 시절, 자연스레 찾아온 죽음에 대한 강박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의대에 들어간 일, '여섯 번째 꿈'이란 영화의 오디션에 응시하기 위해 대본을 연습하던 여동생에 대한 추억, 그리고 찾아온 비극. 집안에 침입해 동생을 강간한 낯선 남자와 그 순간 찾아온 발작. 그리고 여동생의 자살. 남자는 여동생의 유골로 팔뚝을 그으며 복수를 다짐한다. 남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진실. 그게 뭘 바꿀 수 있는데? 진실이 쓸모없다는 건 아니야. 그저 박물관에 걸린 명화 같다고 할까. (…) 어차피 박물관을 나오는 순간부터 다시 때가 타기 시작하지. 그러나 흉터는 달라. 오롯이 나만의 것이지. 내 몸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상처를 잊지 말라고 속삭여주잖아." (83쪽)

다소 뜬금없이 들리는 남자의 말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세 번째 장에서다. 배우 지망생인 여자는 낯선 남자와 함께 모텔에서 눈을 뜬다. 클럽에서 만나 함께 밤을 보낸 남자라지만, 여자에겐 기억이 없다. 왼쪽 팔뚝에 스키장에서 얻었다는 흉터를 가진 남자는 자기가 킬러라고 한다. 아무 감정 없는 상대를 대신 죽여야 하는, 일종의 노동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대상 각각에게 어울리는 사연을 붙이고 살인의 순간에 그 사연을 읊어주는 킬러.

뭉크의 '죽음과 소녀'가 걸려 있는 샛강모텔 314호에서, 그런 남자에게 여자는 즉석 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간질을 앓는 쌍둥이 남동생의 이야기를. 도둑의 침입과 포박된 상태에서 동생이 일으킨 발작, 결국 토사물에 기도가 막힌 동생의 죽음을.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남자는 말한다.

"좋아. 다음번 작업 때 써먹어야겠어."
"페이소슨가 토마토소슨가 부족하다며?"
"어차피 각색을 할 거야. 주인공도 남자로 바꿔야 하고." (136쪽)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작가의 반문. "진실. 그게 뭘 바꿀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흉터다. 악착같이 달라붙어 끊임없이 속삭이는 흉터. 때론 쌍둥이의 모습을, 때론 나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흉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끝이 맞닿은 소설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며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복수(復讐)의 공식'은 '복수(複數)의 공식'이 되는 것이다. 반복할수록 더욱 복잡해지는 그런 공식이.

그리하여 세 번째 소설, '파이(π)'에서 복잡함은 최고조에 달한다. 에셔의 '서로 그리는 두 개의 손'을 닮은 이야기는 M에 대한 소설을 쓰는 '나'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나'에 대한 소설을 쓰는 M의 이야기이고, 바에서 만난 M을 따라온 한 여인의 이야기이며 또한 그 여인이 매일 밤 M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 하루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어디 그뿐인가. 산장에 갇힌 '실버해머' 회원들의 이야기는(일본어 번역가이기도 한 M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번역했고 지금은 '여섯 번째 꿈'이라는 소설을 번역 중이다) 종종 이야기를 침범하며 죽음에 대한 불안을 환기시키고, 그밖에도 앞서 나왔던 많은 모티프들은 (나비, 쌍둥이 남매, 발작, 흉터, 죽음, '죽음과 소녀', 샛강모텔 314호 등등) 끊임없이 변주된다.

더 이상 이 소설을 요약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시도한 요약 또한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무너지고, 소설 안과 소설 밖의 경계 또한 무너진다. 이제 남은 것은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뿐이다. 그리고 거기엔 어떤 출구도 없다.

"완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이야기. 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파이처럼."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게 바로 당신이 갈망하는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 아니었어?" (282쪽)

*

아직 한 가지의 질문이 남아있다. 복잡한 미로는 좋은 소설인가? 이 글을 쓰면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 (뒤표지에 적힌 "벼락처럼 찾아온 한국 문학의 축복", "한국 소설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낯설고 진귀한 물건" 같은 추천사의 진위 여부에, 벼락이 치면 따라오는 천둥처럼 주목받는 신인의 작품에 으레 따라붙기 마련인 형식적인 찬사들에 나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글쎄, 이렇게 생각해보자. 미로가 좋은 소설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좋은 소설이 된 미로들을 알고 있다. (이 자리에서 카프카나 보르헤스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적절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둘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단일한 주체와 서사의 붕괴. 사라진 진실과 그 자리를 차지하는 환상. 고정된 의미에 안착하지 않는, 추론이 불가능한 사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써야하는, 그리하여 쓰인 결과물 안에서 스스로 길을 잃어야 하는 작가의 운명. (두 작품의 중심에 소설가가 자리한다는 사실, 종종 그들이 쓰는 인물과 그 자신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미로.

둘 사이의 차이는? 폴 오스터는 미로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인물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서사를, 서사의 불가능성에 대한 서사를 다소 애통하게 그려낸다. 이때 그가 만든 미로는 인물이 처한 곤경을 인물과의 동일시, 혹은 관음증적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라는 행위 자체로 함께 경험하도록 하는 공감의 양식이 된다. 등장인물과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곤경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반면 최제훈의 미로는 유희의 장, 인물과 서사가 미끄러지고 변주되며 한바탕 난장이다. 겨울이면 펼쳐지는 시청 앞 아이스링크의 풍경이 그러하듯이. 최제훈에게 곤경은 이미 곤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정사실, 인간의 조건이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미로라는 건 모순된 공간이죠. 탈출하기 위한 곳이면서 동시에 헤매기 위한 곳인데, 그 두 가지가 합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미로와 같지 않을까요."

(불가능한) 탈출에 대한 강박에 빠져 좌절하는 우리들에게 최제훈은 헤맴의 미학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동시에 익숙한) 윤리학이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 하나의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글에서 어떤 결론도 내릴 생각이 없다.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어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
그걸,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2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깜짝 퀴즈. 이것은 무엇일까요?

힌트 하나. 16세기 밀라노 출신인 항해가 지롤라모 벤조니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보다는 돼지에게나 어울리는 음료인 것 같다. 그 나라에서 1년 넘게 있었지만 그것을 맛보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힌트 둘. 일부 유럽인들은 이것을 해열제나 각성제로 봤고, 다른 이들은 이것을 환각제나 최음제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16세기 유럽 약제사는 잠들기 전에 이것 한 컵을 마시면 어떠한 경우라도 성욕을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다.

처음 유럽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것은 '치료 효과가 있는 건강식'으로 통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것은 낭만적이고 순결한 사랑의 상징이 됐다. 정답은 바로 2월이면 유독 많이 팔리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화폐에서 최음제까지, 다양한 초콜릿의 쓰임새


▲ <나쁜 초콜릿>(캐럴 오프 지음, 배현 옮김, 알마 펴냄). ⓒ알마
<나쁜 초콜릿>(캐럴 오프 지음, 배현 옮김, 알마 펴냄)은 초콜릿을 둘러싼 역사서다. 제목이 노골적이어서 초콜릿이(정확히 말하면 초국적 초콜릿 회사가) 나쁘다는 지은이의 의도가 너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이 '제3세계의 아동 착취를 고발한 그렇고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초콜릿은 기원전 3000년부터 존재해 왔지만 그 의미와 용도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왔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초콜릿은 열량을 얻거나 변비를 줄이거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복용(?)됐다. 요즘의 초콜릿 이미지는 19세기 말에서야 비로소 굳어졌다. 영국의 대형 초콜릿 회사 캐드베리가 초콜릿을 '애정의 징표이자 기쁨의 표시'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렇게 초콜릿의 쓰임새는 그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여정을 거쳐 변했다. 초콜릿이 의약품으로 쓰였다는 사실은 그나마 덜 놀랍다. 고대 아스텍 제국에서는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가 화폐로 쓰였다. 16세기 에스파냐 인들은 식민지에서 마야 인들에게 카카오를 내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샀다. 그들은 "금은을 캐는 광부나 그것을 수송선에 실어 나르는 짐꾼들에게 지급하는 각박한 품삯으로, 귀족들이 저택을 짓기 위해 가로챈 땅에 대한 대금으로, 심지어 노예나 창녀를 사는 데도 카카오 원두를 지급했다."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착한 사장'의 결말은?

초콜릿이 서구 민주주의의 촉발제가 됐던 때도 있었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커피하우스나 초콜릿하우스, 살롱에 모여 평등과 자유를 토론하고 인권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위대한 '백인 인권 옹호가'들이 누리는 초콜릿과 커피가 노예들이 피땀 흘려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압권은 최초로 초콜릿에 낭만적 사랑의 이미지를 부여했던 영국의 초콜릿 회사 캐드베리의 이야기다. 노동자에게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해 주고자 했던 착한 자본가 캐드베리 형제는 빈곤과 악행을 없애고자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이윤을 침해받지 않는 선에서, 오직 자국민들에게만' 베풀어졌다. 캐드베리 형제는 노예 폐지론자로서 맹위를 떨쳤지만, 유독 자사의 카카오 조달처의 노예 제도에만 침묵을 지켰다.

그다음부터는 뻔하지만 충격적인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어떻게 초국적 기업이 제3세계의 정치·경제를 주무르고 지역민의 삶과 환경을 파괴했는지를 탐구한다. 특히 초콜릿을 둘러싼 코트디부아르 정부의 암투와 이를 파헤치려 했던 프랑스·캐나다 기자의 의문스러운 죽음은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한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초콜릿 때문에 전쟁도 났다.

일하다 병들면 아이 시체 내다버리기도…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특히 '꽂힌' 문제는 바로 노동 분야다. 노예 제도는 1849년에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까지 아프리카의 '노예 아닌 노예' 800만 명이 과로로 죽거나 주인에게 살해됐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아시아 '계약 노동자'의 자리는 오늘날 다시 가난한 아프리카 아이들로 채워졌다. 아프리카의 최대 카카오 생산국 코트디부아르 농민들은 1990년대부터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릴 때까지 일을 시켰다.

"아이들은 굶다시피 하며 밤중에는 자물쇠를 걸어 잠근 합숙소에서 자고 수시로 매를 맞았다. 등과 어깨에는 끔찍한 상처들이 있었다. 이는 무거운 카카오 포대를 옮긴 탓도 있겠지만, 그중 일부는 신체 학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카카오를 수확하는 아이들은 초콜릿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은 아무런 보호 장구도 없이 독성 있는 제초제와 곰팡이 살균제를 뿌리는 기구를 등에 지고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다. 농장주들은 노예 노동은 없다고 부인했지만 학대 행위는 존재한다고 시인했다. 즉, 공짜로 일을 시켰다. 일하다 죽은 아이는 길가에 버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낙엽 더미 아래 감춰진 무언가를 보았어요.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는데 그건 어린 남자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병이 들어 바지가 똥투성이였어요. 그자들(카카오 플랜테이션 감독관)이 들판에 아이를 버리고는 죽게 내버려둔 거죠."

초국적 기업 편에 선 가장 보수적인 보고서조차 어린이 28만4000명이 서아프리카의 카카오 농장의 유해 환경에서 일한다고 적었다. 분노한 시민단체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초콜릿 업계는 침묵을 지켰다.

마지막까지 불편한 '공정 무역의 진실'

이쯤 해서 독자는 불편한 진실이 어서 빨리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이제 '공정 무역', 혹은 '착한 초콜릿'이라는 카드가 나올 시간이다. 하지만 저자는 마지막까지 '공정 무역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말해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뒷이야기는 이렇다. '착한 소비자'들은 공정 무역 초콜릿에 기꺼이 그들의 쌈짓돈을 털어놓았다. 유기농 브랜드가 '돈'이 되자 다국적 기업이 유기농 초콜릿 회사를 인수 합병하고 나선다. 여기까진 좋았다. 초콜릿 회사를 비롯한 거대 식품 회사들은 정부를 압박해 '유기농 인증 기준'을 완화하려고 로비를 벌인다.

코트디부아르 인들은 여전히 일차 생산품인 원두를 재배하고, '여전히' 가난하다. 이들에게는 오직 돈 안 되는 카카오 원두만 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유럽과 미국이 높은 관세로 초콜릿 가공 사업을 막아 놓았다. 농민들은 카카오 원두 1파운드에 25센트를 받는다. 공정 무역으로 거래하면 80센트를 받는다. 초국적 기업들은 농민들에게 딱 '55센트'만큼의 이윤만을 허용했다.

어디 초콜릿뿐이겠는가. 극소수 부자들만 향유할 수 있었던 커피와 설탕, 바나나와 같은 식품이 대중화되는 데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국의 환경을 송두리째 망쳐놓는 대량 생산 체제와 가장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생을 떠넘기는 단가인하 제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 착취 상품'들이 거리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 집 건너 들어서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파는 5000원짜리 커피 한 잔에 들어가는 원두 값은 100원.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오는 데 드는 운송료를 제하면 농민들에게 얼마가 돌아갈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나머지 이윤은 어디론가 증발한다. 초콜릿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이제 우리들의 관심은 '착한' 초콜릿, 커피 타령을 넘어서 제1세계의 소비자의 기호 식품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땅을 혹사당하며 지금도 카카오, 커피 원두를 재배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한 손에 초콜릿을, 다른 손에 커피를 잡은 내 손이 유난히 섬뜩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인권의 날에 진행된 노벨 평화상 시상식은 감동적이었다. 시상식의 주인공 류사오보는 그 자리에 없었다. 류사오보는 중국 당국에 의해 '국가 정권 전복 선동죄'로 기소되어 법원에서 11년형을 선고받았다. 랴오닝 성의 한 감옥에 수감 중인 류사오보는 물론, 그의 가족도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노벨위원회는 빈 의자를 두고 시상식을 진행했다. 빈 의자에 놓인 상장과 메달은 중국의 인권 현실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 되었다. 중국 당국은 류사오보의 노벨 평화상 수상에 대해 "중국의 범법자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는 것은 노벨상 정신에 위배된다"는 말부터 "내정 간섭", "정치극", "냉전 시대 사고의 산물" 같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 와중에 노벨 평화상에 견준다며 '공자 평화상'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 주요 2개국(G2)으로 꼽히는 대국치고는 너무 옹졸했다. 중국 당국의 반발은 류사오보의 노벨 평화상 수상의 극적 효과를 높여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에서 그의 책이 한 권 나왔다.

(사)한국물가정보의 지식갤러리가 펴낸 <류사오보 중국을 말하다>(김지은 옮김)는 2011년 1월 20일 발행되었다. 책을 통해 류사오보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류사오보는 노벨 평화상 수상 이전에도 인권운동가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톈안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귀국해 시위를 벌였고, 이 때문에 시작된 수감 생활은 벌써 네 번째다.

책의 말미에 적힌 법원의 판결문은 류사오보의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국가 정권과 사회주의 제도의 전복을 목적으로 정보를 다양한 지역에 빠르게 전송하고 사회적 파장이 크며 대중의 주목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인터넷의 특징을 이용해서 자신이 저술한 글을 인터넷 사이트에 실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류사오보는 중국의 정권과 사회주의 제도를 비방하고 전복을 선동했다."


▲ <류샤오보 중국을 말하다>(류샤오보 지음, 김지은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 ⓒ지식갤러리
그래서 11년형이란다. 중국 당국 입장에서 볼 때, 류사오보가 성가신 존재였고, 어쩌면 그들의 주장대로 체제 안정을 위협하는 불온한 존재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오로지 말과 글로만 싸워왔다. 누구도 해치지 않았고 어떤 폭력도 쓰지 않았다. 그래도 가혹한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말과 글은 묘한 힘이 있다. 혹세무민하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만을 위한 체제 유지를 위한 신통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그게 무서워서였을까. 프랑스 혁명의 진원이 되었던 바스티유 감옥 재소자 중 3분의 1은 출판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작가나 신문 업자만이 아니라, 인쇄공, 제본 업자, 서적 행상인까지 잡아들였다. 볼테르도 바스티유에서의 고초를 피해갈 수 없었다.

봉건 왕조 시대의 왕권이 계몽주의자를 잡아가뒀던 것과 중국 당국이 류사오보를 가두는 것은 꼭 닮았다. 300년의 시간이 지났고, 한쪽은 봉건 왕조이고, 다른 한쪽은 봉건제는 물론 자본제를 넘어 공산주의로 가는 길을 열겠다는 공산당이 집권하는 '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 차이 때문에 류사오보의 구금은 더 야만스럽고, 더 끔찍한 인권 침해다.

1949년 건국 이래, 중국 혁명의 빛나는 위업을 계승한다는 중국 공산당의 실체가 겨우 이 정도였다.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 자유주의자의 인터넷 활동이 그렇게까지 무서웠을까. '공산당'의 엘리트들이 부르봉 왕가 수준의 야만을 저지르게 할 정도로 자신들의 체제에 자신이 없었을까. 그런 식의 졸렬한 선택이 성공하는 사례는 별로 없다.

중국 당국은 류사오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가족들에게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감옥에 갇혀 노벨 평화상 시상식 참석은 물론, 최소한의 의사 표현조차 금지 당했지만, 류사오보는 이전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

류사오보가 11년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위험한 사람인지도 의문이다. 이 책을 통해 생각의 일단을 드러낸 류사오보는 중국이 틀리니 미국이 옳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의 중국을 극복하는 과정의 고단함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의 일면에만 너무 깊이 빠져든 탓인지 모르겠지만, 중국과 미국,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냉전적 사고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이기 쉽다.

서구 중심주의, 특히 미국 편향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안목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은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웠다. 물론 핍박받는 운동가에게 좀 더 넓은 안목을 요구하는 것은 결례가 될지도 모른다. 목숨 걸고 투쟁하는 운동가의 약간 거친 언사나 투쟁 대상에 대한 분노처럼 비본질적인 파생 현상을 놓고 딴죽을 걸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류사오보가 진행하는 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도 몇 가지 조언은 하고 싶다.

중국만이 아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까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의 인권 문제는 늘 인권의 보편성과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의 충돌로 이어지곤 했다. 아시아적 가치는 주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 유포, 확산시킨 논리였다.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가치가 있는데, 일방적으로 서구의 가치를 주입하는 건 잘못이라는 거였다.

발뺌과 변명을 위한 것이지만, 대놓고 무시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근대 이후 서구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희생물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G2의 일원으로 부쩍 성장했지만, 그 깊은 내면에는 미국 등 서구에 대한 뿌리 깊은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류사오보도 이 같은 점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피해의식은 정치지도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민 대중에게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류사오보가 이런 점에 좀 더 유의했으면 어땠을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인권의 소중함을 위한 싸움을 벌여나가되, 중국적 가치를 반영한 인권 발전상을 제시하면 어땠을까?

중국인이 아니기에 공자가 중국에 미친 영향력이나 류사오보가 지적하는 '해악'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공자를 "'태평할 때 세상에 나오고 난세에는 숨는' 처세의 대가였고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며 "가장 교활한" 사람이라고 극단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교수의 책을 통해 "상갓집 개"로 몰아붙이는 대목 등은 아쉬웠다.

류사오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적지 않은 핍박을 당했던 김대중은 싱가포르의 리콴유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 논쟁하면서 동학의 인내천과 맹자의 역성 혁명까지 끌어다 유교적 왕권 정치의 인본주의 이념이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했다. 리콴유가 '문화는 운명'이라고 했을 때, 김대중은 '문화가 운명인가?'라고 되물었다.

중국 공산당의 공자 붐 조성에 반대에는 단호한 입장을 지니더라도, 공자에게도 배울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가르침이 있는데, 배타적 애국주의에 동원되어선 안 된다든지, 당국의 붐 조성은 공자를 제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는 논리를 펴나갔으면 어땠을까. 김대중은 늘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 감각을 아울러 갖춰야 한다'고 했다.

탄압하는 사람들도 어쩌지 못할 정도의 정교한 논리, 답답하기 짝이 없더라도 다만 반발 짝만 앞서더라도 대중과 함께 운동을 진행하는 지혜와 끈기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어쩌면 류사오보가 바라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현실에 가깝게 다가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부시 정권과 공화당이 흑인 국무장관 임명을 통해 흑인 지위 향상을 이뤄놓고, 이 때문에 오바마가 당선되었다는 식의 견강부회까지 치닫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한 누리꾼이 쓴 글 '미 제국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버려라'에 대해 그렇게까지 흥분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이런 조언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류사오보의 책은 종잡을 수 없는 논리의 비약도 많았지만, 이게 한 권의 책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라, 이곳저곳의 인터넷에 그때마다의 필요와 사정에 따라 쓴 글들을 묶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어쩌면 일관성이나 시종을 관통하는 논리 같은 게 부족해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점을 보완하는 게 바로 출판 편집자의 역할이다. 그가 최소한의 자유도 박탈당한 채 구금되어 있는 운동가라면, 필자를 이렇게 맨 얼굴로 독자와 만나게 하는 건 결례가 아닐까.

류사오보에 대한 책은 너무 빨리, 그것도 후다닥 나왔다. 노벨상에 유독 호들갑을 떠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속도전이었다. 하지만 후다닥 번역해 책을 내는 것 말고, 출판사가 보여준 성의는 거의 없었다. 고난을 겪는 인권운동가에게 최소한의 경외심이랄까 공감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책을 펴내지는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을 들였어야 했다.

류사오보에 대해 아예 새로운 책을 쓰거나 그게 아니라면 각주 수준을 넘어선 해제라든가, 적어도 옮긴이의 말이라도 들어있어야 했다. 그랬다면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출중한 인물일지도 모를 류사오보가 한국에서 출판된 그의 책 때문에 오히려 본래의 빛이 바래지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