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윤기가 유려한 필치로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소개한 이래, 인문학적 관심을 가진 이들 중에 신화를 현실과 연결시켜 깊이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김원익의 <신화 인간을 말하다>(바다출판사 펴냄)도 그리스 신화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고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부자 갈등, 라이벌 관계, 부부의 사랑, 광기, 모험 등 테마로 분류해서 기술했다. 이런 다층적이고 현실감 있는 책의 구성만으로도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끌 것 같다.

판타지나 무협지를 연상케 하는 문체와 서술 방식도 신화라면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일반 독자를 유인하는 요소다. 마치 인터넷 소설을 읽는 것처럼 요즘 젊은이의 단어와 문장을 구사해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도 많다. 그러면서도 기성세대가 좋아하는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시나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고전에 대한 친절한 소개도 곁들인다.


▲ <신화 인간을 말하다>(김원익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저자는 문학 이론도 원용한다. 예컨대, '구출' 모티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 신화의 밋밋한 플롯을 지적한다. 주인공을 돋보이도록 하는 적대자(Antagonist)에 대한 언급이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또 박완서의 소설을 소개하는 등 한국 현대 문학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문학 속 등장인물과 신화의 인물을 연결하는 작업도 이미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아킬레우스의 입장을 영화 <트로이>를 통해 다시 조명해보는 대목, 영화 <빠삐용>과 오디세우스와 다이달로스의 탈출을 비교하는 대목도 신화와 다양한 장르를 연결해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 같다.

한편, 신화 속에 들어 있는 가부장제의 영향들 또 트로이 전쟁을 헬레네라는 한 여성에게 돌리려는 교묘한 정치 조작 같은 것을 세밀하게 지적하는 작업도 돋보인다. 그리스 신화의 예언가들 중 오이디푸스에게 바른 말을 한 테이레시아스에게서 김수환 추기경을 읽는 대목도 재미있다. 제도권의 시각이나 연구 방법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책과 문화에 접할 수 있는 자유로운 프리랜서 신화 연구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미덕이 아닐까 싶다.

사실 현대의 사건이나 현상들의 의미와 연결되지 않은 역사나 신화 그 자체를 위한 연구는 재미도 없거니와 학문의 다양한 가치도 덜하지 않나 싶다. 학문의 고갱이만을 상아탑에서 연구하는 학자도 필요하겠지만, 넓은 세상에서 자유로운 필치로 글을 쓰면서 일반 대중에게 과연 어떤 효용가치를 줄지 고민하는 김원익 같은 필자도 중요하다.

아쉽다면, 워낙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가 있어서 그 내용이 충분히 소화되기 전에 금방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깊이 있는 통찰보다는 다양한 정보를 일단 섭취하고 싶어 하는 바쁜 독자를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책의 주제를 오히려 조금 줄이고 긴 호흡으로 독자와 대화했다면 조금 더 넓은 지평을 보여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예컨대 '분노'를 다룬 장에서 조병준의 <정당한 분노>, 로버트 서먼의 <화>, 천안문에서 보여준 분노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보이는 분노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놓은 대목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다 만 느낌이 없지 않아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을 읽고 싶은 독자는 맛만 보고 말게 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제한된 책의 분량이 답답한 대목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심리 분석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신화 속 등장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원형적 패턴에 대한 좀 더 깊은 고찰을 하겠지만, 신화 연구가인 저자 김원익의 몫은 아니리라. 그러나 분석심리학자인 융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었던 조셉 캠벨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조만간 심리 분석은 물론 좀 더 다양한 방법론을 구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본다.

아쉬운 점 하나 더. 다양한 참고 문헌을 소개해 놓긴 했는데, 어떤 순서로 열거했는지 또 어느 대목에서 어느 쪽에 인용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참고 문헌으로서의 가치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보통은 한국 문헌, 외국 문헌을 가나다 순서와 알파벳 순서로 열거하는데, 저자는 어떤 분류와 정리 방법을 쓴 것인지 궁금해진다.

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인용 대목의 책을 소개하는 대신 저자만 명시해 놓은 것도 조금 아쉽다. 주석 따위는 귀찮은 독자의 입장을 고려해 책을 편집하는 이들의 의견이 반영되면서 오히려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경우는 사실 우리 출판계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끝으로 저자는 신화를 연구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다른 나라의 신화를 자국의 독자에게 소개하고, 두 번째는 신화를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는 것, 세 번째는 신화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우리 신화를 자국의 독자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에 소개하는 일이 빠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화 하면 자동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조금 책을 읽었다 해도 겨우 중국이나 중근동 지역 힌두교의 신화를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신화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일을 기록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극히 제한된 책만 남아 있다는 것이 핑계일 수 있다. 그러나 <동국이상국집>, <제왕운기>, <조선민담집> 등 우리 고전이나 <일본서기> 등 외국 서적에도 우리 신화는 다양하게 기술되고 있다. 또 무당들의 무가나 구전되는 민담 중에는 엄청난 양의 한국 신화가 담겨져 있다.

김원익의 <신화 인간을 말하다>의 주테마는 물론 그리스 신화이기 때문에 장황한 한국 신화에 대한 서술을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데군데, 한국 신화에 대한 언급도 조금씩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신화와 외국 신화를 연결시키는 작업의 질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쪼록 <동국이상국집>, <제왕운기>, <택리지> 등 신화가 소개된 한국의 고전과 더불어 이능화, 손진태, 김열규, 장주근 등 현대 우리 신화 연구가들의 다양한 책도 다음에는 참고 문헌에서나마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화는 민담과 달리 우주의 탄생과 한 민족의 태동을 다룬다. 신화 연구가 민족의 정체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만약 신화 연구가 자신의 신화를 다루지 않은 채 남의 신화에만 목매달고 그를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면, 연구자뿐 아니라 독자로서도 큰 결핍과 손실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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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진 목사가 쓴 <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리북 펴냄)를 읽으면서 참담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품은 교회 개혁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40여 년간 포기하지 않았는데,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 앞에서 어느덧 기득권자가 된 자신을 보며 부끄러웠습니다. 또 더 심화된 한국 교회의 문제를 보면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한국 교회를 개혁하고자, 2008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을 복구하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교회 문제를 새롭게 생각하고 참회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 한국 교회를 비판하고 자족하는 차원을 넘어서 실제적인 변화를 추동해야 하는 큰 부담도 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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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국 교회가 성경에서 벗어나 번영 신학과 세속주의에 물든 '신(新) 종교'로 변질되어서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했다고 고발합니다. 또 이런 상황을 책임져야할 목회자들이 탁상공론을 일삼고 이해관계에 얽혀 침묵하기 때문에 변화가 없다고 지적합니다. 동감합니다.

또 저자는 교회 문제의 현상과 그 원인을 놓고 단호한 진단을 하면서도, '우리' 문제로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합니다. 교회 문제를 남의 탓으로만 돌리면 새로운 갈등만 불러올 뿐, 교회가 성경대로 회복하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 <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권영진 지음, 리북 펴냄). ⓒ리북
저자는 교회의 변화를 위한 출발점으로 헌금 문제를 제기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원래 십일조는 소외 계층의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회보장제도의 성격이 컸고, 신자의 중요한 신앙고백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헌금을 강요하고, 헌금 사용처도 주로 교회 건물의 유지, 건축, 교역자의 사례비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런 헌금 문제의 뿌리에는 기복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긍정적인 사례가 강조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 북한 어린이, 환경문제 등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로 헌금을 활용하면 지금의 풍토가 바뀌지 않을까요?

이 책에 묘사된 일부 목사들이 누리는 엄청난 특권을 접하면서, 특권은커녕 생활 유지조차 힘든 한국 교회의 70~80%나 되는 미자립 교회 목회자의 고통이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다만 목회자에 대한 저자의 실랄한 비판은 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해 보입니다.

저자는 일부 목회자들이 교회 개척에 열심인 점을 돈, 명예,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요즘처럼 목회자들이 교회 개척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그런 분석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또 담임 목사 직을 대충 말만 잘하면 되는 것으로 묘사한 대목도 대다수 목회자의 고충과 헌신을 외면한 게 아닐까요?

저자는 한국 교회의 결정적인 문제인 분열을 역사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극심하게 대립하고 갈등하는 한국 교회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서구 선교사의 일제에 대한 지지와 복종, 근본주의적 신학이 한국 교회의 분열과 보수 우경화의 기초가 되었다는데 동감합니다.

그런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앞장선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 그리고 각성한 그리스도인이 전개한 산업 선교, 빈민 선교, 농민 선교, 청년·학생 운동 등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교회가 군사 정권과 야합했다고 오해할 여지를 준 대목은 아쉽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미국 교회가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을 명쾌하게 분석한 점입니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이 미국 역사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동했고, 그들의 신학적 배경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은 앞으로 한국 교회의 정치적 우경화를 극복하는데 구체적인 지침이 될 것입니다.

요즘 대형 교회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자도 같은 입장입니다. 저자는 대형 교회가 '성장 제일주의'와 '성공 목회'의 전형이고, 대형 교회가 되기 위해 무리하게 전도를 강요하는 것은 그들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형 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데에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삶을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로 보는 저자의 시각은 교회 개혁 운동의 소중한 목표입니다. 효율과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교회는 가장 낮은 곳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위로와 희망을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런 저자의 뜨거운 염원에 적극 지지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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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진 목사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 현실적인 제안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니 만큼,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더 많이 제시했더라면 더욱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한국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려면 교회와 지역 공동체가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은 지역에 어린이도서관과 카페를 세워 가난한 지역 주민이 사랑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사례를 인천과 전주에서 발표하였을 때 호응도 컸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는 공공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유화하는 것을 막지 않으면 한국 교회가 시민사회와 더불어 사회 변화를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점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같은 교회 연합 기관들이 교회의 공적 지원 체계가 될 수 있는 역할을 바르게 제시하면 유익할 것입니다.

이 서평을 쓰면서 "진정 회개할 자는 나 자신입니다" 이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 문제의 본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서 구조적 문제를 회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한국 교회가 실제로 바뀔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발로입니다.

그동안 많은 이들과 단체가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본의와는 달리 교회 개혁 운동가들이 자칭 의인으로 비치어 거부감을 주기도 하고, 목회자 운동 조직이 특정인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는 사조직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언제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를 나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아픈 마음으로 끌어안고 기도하며 나아가지 않으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개혁 운동의 지속성을 담보할 만한 조직이 강력한 개혁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 교회를 아끼며 비판하는 분이 마음을 비우고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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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의 평론집인 <문학과 시대 현실>(창비 펴냄)은 <혼돈의 시대에 구상하는 문학의 논리>(1995년)와 <모래 위의 시간>(2002년)에 이어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섬세하고 예리하게 성찰하고 있는 비평서이다.

근대 문학의 출발점에서 최근의 문학 현장까지 폭넓은 작품들을 아우르며 민족 문학과 리얼리즘, 민중성의 문제를 다각도로 논해왔던 저자는 이번 비평집에서도 날카롭고 예민한 현재적 문제의식을 통해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성찰하고 있다. 특히 문학사 연구와 문학 현장 비평의 영역이 별개의 것인 양 진행되는 최근 문학 연구의 흐름을 상기할 때 이 책이 갖는 입체적인 의미는 각별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염무웅의 비평이 보여준 리얼리즘적인 비평 시각과 민족 문학, 민중의 개념에 대한 섬세한 탐사는 이번 비평집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저자는 20세기의 역사에 국한해서 살펴볼 때 '민족 문학'이 갖는 개념적 유효력을 환기하면서도, 현재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 과정을 주시할 것을 강조한다.


▲ <문학과 시대 현실>(염무웅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저자는 현재의 관점에서 "적어도 해방적 삶을 지향하는 운동의 가장 적절한 이념적 지표를 민족 개념 안에서 구하기는 어려워졌"음을 토로한다. 저자가 시도하는 것은 근대 문학사의 창조적 해석을 통하여 민족 문학론이 예시했던 가능성과 한계를 점검하는 동시에, 국가적, 민족적 귀속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가능성으로서의 민중 개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경계를 넘는 연대와 보편주의의 문제가 활발하게 토론되는 최근의 비평적 주제들과 창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대 및 해방기의 문인들의 작업을 통하여 민족 문학론의 전사를 조명하고 성찰하는 의식적인 시도들은 저서의 곳곳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임화와 김광섭, 정지용 등의 작품과 비평을 통해 저자가 끊임없이 되살리는 것은 현재 우리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여기에는 서구 문학 이식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근대 문학의 탄생 과정을 입체적으로 독해함으로써 현재의 문학을 역동적으로 사유하려는 비평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임화 비평에서 "외국 문학과 자기 문화 간의 상호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한 변증법적 사고"를 강조하면서 그가 지적한 "축적된 자기 문화의 유산"의 실질적 내용을 현재의 우리가 어떻게 독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부분은 거듭 주목할 지점이다.

"문화 이식의 과정 자체 안에 이미 이식 문화를 해체하려는" 주체적 움직임이 내재해 있다는 맥락에서, 저자는 외국 문학과 고유 문화 간의 치열한 상호작용을 민족 문학의 역사적 전유(專有, appropriation)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문학사를 바라보는 이러한 창조적 시각의 강조는, 작품의 역동적 움직임을 배제한 자료사 수집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학계의 트렌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결국 비평의 정점은 작품과 대결하여 작품에 새겨진 현실의 복합성을 추출하는 동시에 그것으로 귀환하지 않는 균열들을 발견하는 지점에서 출현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을 읽는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들은 작가의 전기적 자료와 개인사, 그리고 시대 현실을 통과하여 남는 작품의 균열들, 모호하고 복합적인 잉여의 지점들을 추출해나가는 지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김기진이 꿈꾸었던 예술성과 운동성의 결합이 친일의 행로 속에서 유실되는 지점, 해방 후 임화가 제출했던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의 테제, 김광섭이 꿈꾸었던 협소하고 불안정한 민족주의의 길, 정지용의 시에서 부정할 수 없는 서구 문학의 침투 관계를 복합적인 서사의 문맥에서 엮어내는 생생한 서술 과정은 이 책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이 과정은 실증과 해석이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있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문학 비평의 뛰어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를 넘어 당대의 문학으로 돌아올 때, 염무웅의 비평에서 여전한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동시대를 살면서 현실에 대응해온 동료와 선후배 작가들이다. 고은, 신경림, 조태일 등 서정시의 현실적 응전력을 살리는 리얼리즘 시인들에 대한 비평가의 오랜 애정은 이번 비평집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1970~80년대 사회 현실과의 혹독한 싸움을 통해 단련된 이들이 이후 심오한 정신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섬세하고 따뜻한 시의 독법은 시를 살아있는 대상으로 대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상대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현실과 길항하는 서정적인 민중시 계보에 대한 애정적인 독법에 비교해서, 언어의 실험성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시들에 대한 조명은 잘 보이지 않는 아쉬움도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 진정한 자아의 인식은 그의 현실 인식의 철저성을 통해 드러난다"라는 믿음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영역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은 짤막하게나마 언어유희로 과대 포장된 일부 난해시에 대한 불만과 비판도 피력하였지만, 모더니즘 계보에 속하는 시인들의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은 유보되어 있다는 점에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유사한 맥락에서 2000년대 들어 쓰인 대부분의 평문이 문학사 해석과 시 비평에 기울어져 있는 것도 아쉽다. 이 책에서는 4부에 수록되어 있는 1990년대 중반 소설 문학의 동향에 대한 비평문들이 현장 비평으로서는 가장 생생한 육성을 드러내고 있는 셈인데 신경숙, 윤대녕, 김소진, 성석제, 최인석 등의 작가들과 호흡하며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드러낸 부분들이 이 시기에 국한되어 있는 점도 아쉬움을 남긴다.

이 현장 비평문들에서 새삼 확인되는 염무웅 비평의 매력은 현실지향적인 문학관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에 수렴되지 않는 낯설고 매혹적인 텍스트들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해석의 욕구를 드러내는데 있을 것이다. 근대 문학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비평들이 고답적인 해석에 갇히지 않고 생동성을 드러내는 것도 이러한 비평적 호기심과 해석 욕망에서 기인한다.

밀도 높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새삼 절실하게 다가온 것은 '오늘의 문학'을 어떻게 읽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치열하고 예민한 자의식이다. "민족 담론의 퇴조와 신자유주의의 진군"과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글로벌 현실의 속에서도 저자가 문제 삼는 것은 "문학 작품을 그것이 태어난 시대적 현실의 직접적인 소산으로 읽는 일"이 갖고 있는 중요한 비평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미래에 대한 회의와 비관이 비평적 전제처럼 깔려 있는 요즘의 비평 담론들을 상기할 때 염무웅의 비평이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근원적인 지점에서 문학 비평의 존재 의미를 사유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염무웅의 비평이 호소하는 문학의 공공성과 공동체 정신은 오늘의 우리 문학을 성찰할 때 도식적인 전망이 아니라 잠재성을 지닌 하나의 비전과 구상으로서 효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고은의 시를 거론하면서 소박한 공동체 정신이 갖고 있는 문학적 비유의 의미를 진솔하게 해석한 한 대목이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물론 이 두 시의 바탕에 있는 것이 소박한 공동체주의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런 수준의 공동체 정신은 현실을 끌고 나가는 힘으로 실재한다기보다 망가진 현재를 위한 '오래된 미래'의 비전으로서만 우리에게 빛을 발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대안의 구상을 위한 불가결의 초석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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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도서관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 요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한길사 펴냄)은 위와 같은 믿음을 가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최정태가 찾아다닌 자유로운 도서관, 그래서 스스로 민주주의의 요람이 된 도서관 열두 곳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로 자유로운 도서관이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키워 온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은 자유로운 도서관이 시민들에게 있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답을 들려준다.

이 책을 쓴 최정태는 이미 2006년에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한길사 펴냄)이라는 책을 펴 낸 바 있다. 이번에 펴낸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 도서관 순례의 결과물이다. 첫 번째 책이 전 세계를 다니며 그 도서관만의 가치와 이념을 지닌 곳을 찾아 나선 기록이었다면, 이번 책은 도서관들이 어떻게 그 사회 속에서 시민들과 만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성장해 왔는가에 초점을 둔 기록이다.


▲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최정태 지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사실 '이런 도서관이 위대한 도서관이다'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위대한 도서관에 대한 뚜렷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위대한 도서관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선 건물이 특색 있고 아름다워야 한다. 또 규모와 내용이 설립 목적과 균형이 맞아야 한다. 거기에 이용자 수준을 고려한 충분한 장서와 유용한 시설물이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위치 역시 중요하다. 교통이 편리해 접근하기가 쉬워야 하고, 주변 환경도 쾌적해야 한다. 또 지적 호기심을 주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적 이미지를 갖추어야 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열두 곳은 모두 이 조건을 충족하는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저자는 이들 도서관을 단순한 구경꾼처럼 바라보지 않았다. 도서관 전문가로서, 그리고 이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도서관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문제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고, 그 도서관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때때로 위대한 도서관을 향한 애정과 그 순례의 밀도가 너무나 '빡빡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저자가 단순히 아름다운 도서관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도서관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기 위해, 우리 공공 도서관의 미래를 찾기 위해 순례를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이렇듯 '매의 눈'으로 세계의 위대한 도서관을 뜯어 본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 도서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도서관으로 순천시에 있는 기적의 도서관을 꼽는다. 책에 따르면 기적의 도서관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도서관이 보여 온 권위적이고 도식화된 도서관 건축 방식을 극복해 친환경적이고 주민 친화적 건축을 선보였고, 전문직 관장과 유능한 직원들,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운영 방식 등 여러 장점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도서관이 세계적 도서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나라 공공 도서관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2008년 1월부터 2010년 6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이 발행하는 <도서관계>에 '도서관, 그 위대함이여!'라는 주제로 연재된 글을 엮은 것이어서,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도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 도서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과 구체적 정보, 도서관에 대한 애정과 전문가 시각이 반영된 사진들이 있기에 현장성이 두드러진다. 마치 저자와 함께 그 도서관을 직접 둘러보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발품을 팔아 순례한 도서관들을, 책 한 권 쥐고 편안하게 둘러 볼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즐거움이 크다. 그러나 책의 끝에서 만나는 저자의 간곡한 부탁에 이르러서는 너무 편하게 책을 읽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도서관이 즐비하다. 도서관에 관심 있는 우리 이웃을 위해서, 사서라는 직업을 가진 친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학문에 뜻을 품은 문헌정보학 학우들을 위해서, 누군가 '위대한 도서관 오디세이' 바통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도서관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다행히 최근에 들어서 도서관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 시민들이 새롭게 도서관을 보고 있고, 그 얘기를 책으로 풀어내고 있다. 유종필 전 국회도서관장이 쓴 <세계 도서관 기행>(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나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이 쓴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우리교육 펴냄) 등이 참고할 만하다. 이 책들도 같이 읽으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도서관이 어떻게 시민들의 삶 속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여러 도서관을 두루 살펴보는 것도 좋지만 한 도서관을 깊게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에 포함된 기적의 도서관에 대한 책인 <기적의 도서관>(현실문화 펴냄)의 일독을 권한다. 직접 도서관을 설계한 정기용 건축가가 최근에 펴낸 책이다.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위대한 도서관이 있어야 그 안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이념이 성숙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주주의 삶이 충실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속에서 다양한 문화가 태어나 자라고, 평등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나라 도서관 상황을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도 위대한 도서관을 가질 필요성과 자격을 확인하고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그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위대한 도서관은 정녕 어떤 도서관일까? 여기서 도서관의 3요소를 생각하게 된다. 장서와 시설, 그리고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 3요소가 모두 잘 갖춰진 도서관이 위대한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충분한 장서 보유나 도서관 건축, 설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개선 방안을 찾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요소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도서관을 운영하는 전문적인 책임을 부여받은 사서와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도 포함한다. 도서관은 시민들이 개인으로서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자치 역량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공공시설이다. 따라서 사람 요소가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고서는 도서관은 도서관다울 수 없다. 하물며 위대한 도서관은 결코 될 수 없다.

위대한 도서관은 위대한 사람이 만든다.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위대한 사서와 시민이 위대한 도서관을 만들 수 있다. 이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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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30일. 책도 쓰고 한국에도 여러 번 기웃거려 다소 정체가 알려진 한 일본인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온 목적은 서울시 산하의 기관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으니 '욘사마' 같은 환영은 못 받을지언정 내쫓기진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도 난데없는 법무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그대로 일본에 다시 보내졌다.

<가난뱅이의 역습>(김경원 옮김, 이루 펴냄)에서 '길거리에서 꽁치 굽기', '아무 소리나 질러대기 위한 선거 입후보' 등 기상천외한 저항 방법을 소개한 빈민운동가 마쓰모토 하지메(36)였다. 말이 빈민운동가지 그의 본업은 도쿄 고엔지(高円寺)에 위치한 재활용가게 '아마추어의 반란' 5호점 점장이다. 그의 숱한 이력은 '부자 타도' 한 마디로 요약하기로 하자.

하도 시끄러운 일을 벌여온 터라 일본에서는 동네 경찰서에서 하루 이틀 신세도 졌었다. 하지만 웬 한국 입국 거부? 이런 코미디 같은 사건의 배후에는 '음식물 쓰레기 내놓을 때도 나라의 격을 되돌아봐야 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가 있었다. 'G20정상회의경호안전을위한특별법'의 일환으로, 별의 별 사람이 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 <가난뱅이 난장쇼>(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이순 펴냄). ⓒ이순
이 사건으로 마쓰모토의 <가난뱅이의 역습>은 (출판사의 적극적인 반값 할인 행사에도 힘입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됐다. 2008년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 이후 두 번째로 정부가 만든 '대박' 책이 된 것이다. 이 소동 덕분에 마쓰모토가 한 매체에 연재하던 글이 또 한 번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번엔 <가난뱅이 난장쇼>(김경원 옮김, 이순 펴냄)다.

지난해 12월 말 마쓰모토가 새 책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아직도 블랙리스트가 힘을 발휘하는지 시험 삼아서 왔다는데, 다행히 그 리스트는 명을 달리한 모양이다.

하필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 크리스마스 연휴에 달랑 얇은 재킷 하나 입고 왔지만, 여기저기를 전전하면서도 얼어 죽지는 않았단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앞 농성 건물인 '두리반'과 해방촌에 있는 공동생활 공간 '빈 집' 등 서울에도 '아마추어의 반란' 같은 가난뱅이 집결지가 적지 않아서다.

마쓰모토와 12월 26일 서울 용산구 용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그와는 지난해 4월 처음 만나, 밴드 '밤섬해적단'과 함께 고엔지를 찾았을 때 신세를 지고 블랙리스트 사건을 기사화하기도 하는 등 인연이 적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간 노느라 못했던 진지한 얘기들까지 한 번 꺼내봤다.


▲ 2010년 10월 입국을 거부당해 일본으로 돌아간 마쓰모토 하지메가 자신의 가게에서 '안부 인증용'으로 찍은 사진. ⓒameblo.jp/tsukiji14

이명박 정부 선정 '블랙리스트'의 기습 강림

프레시안 : 이번에 한국에는 왜 왔어?

마쓰모토 : 목적이… 없어! 지난 9월 말에 오려고 했더니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있다면서 쫓아냈잖아. '혹시 한국에 다신 올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건 아닌가, 그건 곤란한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번에 규슈의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이벤트에 초대되어서 남쪽으로 오게 됐는데, 규슈는 부산에서 가깝잖아?

배로 한 번 가볼까 싶어서 시험 삼아 와 봤어. 이번엔 들여보내 주데. 그러니 며칠 머물러도 될 것 같아서 놀고 있는 중이야. 어떤 일정도 없었어.

프레시안 : 일정은 없었지만 여러 곳에서 환영받았지?

마쓰모토 : 응. 좋았지. 24일 밤에는 두리반 투쟁 1주년 행사인 '두리반 365, 막개발을 멈춰라'에서 밤새 놀았고 25일엔 <가난뱅이 난장쇼>를 펴낸 출판사에서 마련한 독자와의 번개 모임에 갔어. 오늘은 여기('빈 집'이 운영하는 카페 '빈 가게') 사람들이 주재하는 마을 회의를 구경하기로 했어.

프레시안 : 그런데 왜 블랙리스트에 오른 걸까? 그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마쓰모토 : 아무래도 G20 정상 회의 때문이겠지. 그게 끝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단 하나, 지금 이명박 정부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대기로 유명하잖아. '이거~ 아주 못 오게 되는 거 아냐?' 하는 걱정도 했지.

프레시안 : 마쓰모토 씨만 믿고 온 밴드 '펑크 록커 노동조합' 멤버들은 얼마나 당황했겠어. 휴대전화 로밍도 안 해 왔지, 한국어는커녕 영어도 못하지. 그런데 당신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못 오게 됐다니까 별로 걱정도 안 하데…. 인천공항에서 아주 재밌었다며?

마쓰모토 : 응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들어앉아서 호기롭게 구는 중국인 아저씨도 있었고, 여자애와 깔깔대며 작업을 거는 인도인 아저씨도 있었지. 다음날 아침엔 웬 젊은 공무원 한 명이 "오늘 아침 TV에 나왔어!"라며 말을 붙이기에 <가난뱅이의 역습>을 선물해주기도 했어. 기념 촬영까지 했더니 고엔지에 오면 우리 가게('아마추어의 반란')에 온다더라고.


▲ 마쓰모토 하지메. ⓒ프레시안(안은별)

만국의 가난뱅이들이여, 단결하라!

프레시안 : 한국에서 마쓰모토 씨의 두 번째 책 <가난뱅이 난장쇼>가 나왔어. 그 책 얘기 좀 해볼까?

마쓰모토 : 이 책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거야. 왜냐하면 여기 실린 글들은 <매거진9>라는 일본의 웹진(☞바로 가기)에 연재했던 거거든. 일본에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거니까 아무도 안사지. 어쨌든 이 연재물을 한국에서 책으로 내자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마침 입국 거부 사건이 터진 거야. 딱 기회다 싶었지.

<가난뱅이의 역습>과 비교하면 이번 책이 좀 더 구체적이야. <가난뱅이의 역습>은 '이런 일을 해보니 재밌더라' 하는 지침서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최근 2년간 벌어진 재밌는 일들을 전달자로서 소개했지. 이 책을 보면 일본의 얼치기들이 어떤 느낌으로 노는지 알 수 있을 거야.

프레시안 : 어떻게 노는지 썼을 뿐인데 외국에서 독자 팬 미팅까지 하다니 대단한 거 아니야? 한국에서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을까?

마쓰모토 : 그러게? 일본에서보다 유명할지도 몰라. 뭐, 환영받으면 나야 좋지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딜 가나 비슷한 놈들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세상 어딜 가도 나와 똑같은 짓을 하는 녀석들이 있더라고! 가난뱅이들을 모으고, 그들만의 장소를 만드는 일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하는 공간 '아마추어의 반란'이 프랑스 잡지에 소개된다든지, 미심쩍은 독일인들이 나를 베를린으로 초대한다든지 하는 일들도 있었지. 전 세계 어딜 가도 얼치기들이 꿋꿋하게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굉장히 안심이 되더라고. 역시 우리가 하는 일이 옳다는 걸 확인하게 돼.

프레시안 : 그러고 보니 지난 10~11월에 한 달이나 프랑스, 독일, 벨기에 투어를 했지? 고엔지에서 스무 명이 넘는 대 인원이 출동했다며? 재밌었던 일 소개 좀 해 줘.

마쓰모토 : <매거진9> 연재에서 이 책에 마지막으로 실린 글 바로 다음에 그 얘길 썼어. 번역이 안 되어 있으니 소개해 주도록 하지! 역시 가난뱅이들이 모일 수 있는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이야기가 가장 재밌는데, 유럽에선 그게 참 제대로 되고 있어. 걔네는 한 마디로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데 도가 텄어! 신축 슈퍼마켓을 스쿼팅(Squatting, 무단 점유)하기도 하더라고.

뭐가 굉장했냐면, 한 장소를 점유한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늘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선다는 점이야. 이미 자신들의 아지트가 된 어떤 장소를 방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쪽에서 먼저 공격도 하는 거지. 아지트 하나가 생겼다고 그걸 지키는 데 머물면 '가난뱅이의 역습'이 안 된다는 거야. 계속해서 다음, 다음 스쿼팅을 하는 거지.

요즘 유럽에서 스쿼팅이 점점 줄어든다고 하던데 그건 장소를 만드는 속도에 비해 장소가 사라지는 속도가 좀 더 빠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거지, 그 자체는 안 줄었대.

이상한 마을, 고엔지

프레시안 : 그런데 마쓰모토 씨, 일본에선 어떤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마쓰모토 : 한국에 알려진 대로, 젊은이들을 규합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인간들의 리더 격인 사람이겠지. 그밖에도 일본에선 나를 '마치오코시(町おこし, 마을 살리기 운동)'로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돼. 망해가는 고엔지의 상점가를 왁자지껄하게 만든 탓이지. 발길 뜸해진 지방 상점가에서 꽤 연락을 해온다니까.

프레시안 : 말한 대로 고엔지는 정말 독특하고 재밌어. 재밌는 가게들도 많고, 아무렇게나 거리를 어슬렁거려도 사람들이 인사를 해 오니까. 고엔지에는 언제 어떻게 정착하게 됐어?

마쓰모토 : 고엔지에 살게 된 건 5년 전쯤부터야. 원래는 신주쿠에 살면서 재활용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 대학 졸업 후에도 줄곧 시끄러운 일들을 벌여 왔는데, 딱히 사람들이 모일 장소가 없으니 주로 길거리 이벤트였어. 그러니 좀처럼 사람도 모이지 않고 준비하는 데 지치기도 해서 가게를 열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고엔지에 '아마추어의 반란' 1호점을 열었고, 매일 거기서 술을 마시다 보니 이사까지 하게 됐지.

왜 고엔지였냐고? 역시 중앙선 연선(沿線) 지역이 좋지.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고,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좋은 동네들이잖아. 도쿄를 가로지르는 중앙선(中央線, 츄오센)이 지나는 지역은 철도 발생 때부터 젊은 예술가들의 메카였거든. 거기서 왜 하필 고엔지였는가 하면, 그냥 우연이지! 술 얻어 마시러 놀러왔을 때 술친구가 좋은 매물이 있다더라고.

프레시안 : 지금 마쓰모토 씨가 점장 타이틀을 달고 있는 가게는 '아마추어의 반란' 5호점이잖아. 그럼 1호점은 어떻게 된 거야?

마쓰모토 : 1호점으로 사용하던 장소를 허물게 되면서 다른 장소로 이사했는데, 그 때 그냥 2호점이 되어버렸어. 그러니까 2호점은… 사기지. (웃음) 현재는 고엔지와 그 인근에 있는 '아마추어의 반란'만 18호점까지 있는데 실제로 운영 중인 가게는 10곳이야. 나머지 8곳은 없어지거나, 이사하면서 숫자를 바꾼 경우야. '아마추어의 반란'은 도쿄 말고도 전국에 퍼져 있는데 그건 따로 세. 교토 1호점, 교토 2호점 이런 식으로. 나도 전국에 '아마추어의 반란이 몇 개나 있는지 몰라. 원하는 사람 누구든 이 이름을 써서 가게를 열면 그만이거든.

프레시안 : <가난뱅이 난장쇼>에 이런 얘길 썼어. 중고품이란 단순히 물건을 소중히 여긴다는 차원에서 나아가 가까운 동네 경제를 뒷받침해준다고. 새 상품 매매는 광고에 돈을 퍼부은 기업에 고스란히 돈을 바치는 셈이지만, 중고품 매매는 마을 사람에게 사들이고 마을 사람에게 수리를 맡기고 마을 가게에서 팔리니 돈이 가게 근처에 머무른다는 얘기야. 극단적으로 위조화폐가 돌아도 꿈쩍 안 하는 경제가 됐다고 말했는데, 원래 그런 전복적인(?) 의도를 갖고 가게를 연 거야?

마쓰모토 : 그렇진 않아. 아무래도 일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거지. 물론 지역 통화나 자급자족적인 지역 경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그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생각하고 벌인 일은 아니었어. 그런데 재활용 가게를 하다 보니 진짜로 돈이 다른 곳으로 안 빠져 나가고, 우리 동네 안에서 돈다는 걸 실감하게 되더라고! 이거 꽤 괜찮은 일이구나 싶었지.

프레시안 : 혹시 동네에 수상한 녀석들이 들어왔다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고엔지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왔으면 하는 사람들, 구청 직원이나 경찰들하고 불화도 겪을 법한데.

마쓰모토 : 고엔지도 은근히 넓기 때문에 상점가마다 다 달라. 우리 가게가 위치한 기타나카(北中) 골목 사람들은 인적 뜸했던 곳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주니까 좋아하지. 물론 고엔지 전체적으로 보면 "저 놈들 뭐야", "흥! 눈에 띄는 짓 하기는!" 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렇지만 그들과도 고엔지 전체 마을 축제에서 만나면 '음, 적은 아니군!' 하는 느낌이랄까?

이래저래 다 한 다리 걸쳐 아는 사람들이니 마찰이 일어날 일은 전혀 없어. 가게 주변 상인들이 "쟤네들, 좀 시끄럽지만 나쁜 애들은 아니야!"라고 변호해준다더라고. 고마운 일이지. 다른 동네는 상인들끼리 별로 교류가 없대. 그런데 고엔지는 주민들부터 상인들까지 술을 엄청 마셔대니까 분위기가 좋아.

구청 쪽하고도 언제나 좋기만 한 건 아니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감정은 아니야. 경찰 중에서도 늘 불만투성이인 사람도 있고 사이좋은 사람도 있어. 데모가 뜸하면 오히려 그쪽에서 "요새 잘 지내? 좀 더 분발해야 하는 거 아냐?"라고 걱정해 주는 경찰도 있어.


▲ 마쓰모토 하지메 패거리가 자주 '난장쇼'를 벌이는 도쿄 고엔지 역 북구 앞 광장. 2010년 7월 8일 밴드 '밤섬해적단'의 공연이 끝난 뒤 국적도 사는 지역도 다른 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모여 앉았다. ⓒwrech.cc/album/robin90

두리반과의 인연

프레시안 : 아마도 그 점이 고엔지가 홍대 앞과 다른 점 같아. 인디 뮤지션이나 예술가가 많이들 모이는 거리라고 흔히들 두 곳을 비교하지만, 홍대 앞은 몇몇 대형 건설사들이 지배했거든. 임대료가 너무 올라서 이제 영세 자영업자는 내쫓기는 판이야.

마쓰모토 : 고엔지도 마찬가지야. 처음 '아마추어의 반란'을 열었을 당시엔 정말 주변에 가게들이 하나도 없었어. '아마추어의 반란'을 시작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가게들이 점점 늘어났지. 그랬더니 이번엔 집주인들이 임대료를 올리기 시작하는 거야. 한 50%쯤 올랐을 거야. 10만 엔이었던 게 15만 엔이 된다든지.

프레시안 : 그 정도면 양호해. 홍대 앞은 몇 년 사이 임대료가 7~8배 오른 곳도 많아. 여기 문제는 영세 부동산 소유주가 아니라 대형 건설사거든. 땅을 다 사버리고 월세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을 내쫓는 거지. 그 중 하나가 두리반이야. 24일 두리반에 두 번째로 들렀는데 느낌이 어땠어?

마쓰모토 : 두리반에 처음 왔던 건 농성 100일째인 지난 3월 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두 번째 방문인 어제는 농성 1년째라더라. 처음 보고 '우와, 엄청나게 좋은 곳이구나!' 이렇게 외쳤어. 물론 재개발 때문에 위협을 받는 입장이니까 상황 그 자체를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이런 장소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도 하고 재밌는 일을 잔뜩 한다는 게 정말 놀라웠어. 이번에 오니 그런 문화가 쇠하기는커녕 더 사람들이 많아졌더라. 또 한 번 굉장하다고 느꼈지. 상황이 어렵다 보니 힘들거나 질리면 사람들이 떠나게 되잖아. 그런데 하나도 안 그렇더라고.

프레시안 : 마쓰모토 씨는 뭔가를 하려면 장소가 정말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어. 그런데 한국은 방해 요소가 정말 많아. 서울은 어느 곳이나 땅값도 비싸고, 유럽에서처럼 아무 곳이나 스쿼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두리반도 사실 건설사 측으로부터 정당한 이주비를 지급받아 '없어지는' 것이 투쟁에서 승리하는 귀결이고. 이 사람들이 모일 장소를 잃게 될 것을 대비해, 모임을 이어갈 수 있는 팁을 알려준다면?

마쓰모토 : 역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수밖에 없어. 어떻게든 만들고자 하다 보면 다 되게 돼있어. 처음에는 데모를 신청한다든지 해서 길거리라도 좋으니 일시적인 장소를 몇 번이고 만들어야 해. 사람은 모이면 뭔가를 하잖아. 한 명이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면서 다음의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만들어지지.

그렇지만 그걸 유지시켜야 하니까 모이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까 고민하는 수밖에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유럽을 돌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걔네들은 장난이 아니야. 5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모여 빌딩에 돌입해 3일을 버텨 그 곳을 뺏어버리기도 하거든. (웃음) 물론 그걸 한국이나 일본에서 하면 큰일 나겠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본도 임대료 문제를 피해갈 수 없긴 하지만, 작은 장소들이 굉장히 많아. 그래서 지금은 하나의 커다란 장소에서 뭐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작은 가게 여러 군데에서 합동으로 무가지를 만든다든지 해서 네트워킹을 강화해 나가고 있어. 서울만 해도 두리반뿐 아니라 '빈 집' 네트워크가 있잖아.

프레시안 : 그럼 일시적인 거점을 두고 활동했을 때와 고엔지의 여러 가게에서 활동하는 지금을 비교하면 뭐가 달라?

마쓰모토 : 사람이 모이는 방법이 전혀 다르지. 일시적 장소는 사람이 모이는 데에 한계가 있어. 처음에 노력해서 100명 정도를 모았다면 다음에 오는 사람은 10명이나 20명 정도야. 가게가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냥 오는 사람도 꽤 많고, 일단 언제 방문해도 사람이 있으니까 부담 없이 올 수 있잖아. 그러니 친구 수가 굉장히 빨리 늘지.

책에서도 자주 언급된 무라카미 군(밴드 '펑크 록커 노동조합'의 보컬)도 처음엔 '아마추어의 반란'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아르바이트로 찾아 왔다가 합류해서 활약하는 케이스야. 도야마라는 시골 동네 출신인데, 상경해서 처음엔 도쿄가 엄청 지루했대. 그런데 '아마추어의 반란'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데모에 나가면서 밴드도 결성했어.

2009년 중의원 선거 전날에 도야마에서 이벤트가 있어서 간 적이 있는데 이 때 걸작이었지. 이 녀석이 멋대로 양복을 쫙 빼입고 등장해서는 자기 이름을 쓴 어깨띠를 두르고 하얀 장갑을 끼고 트럭에 올라가서 있지도 않은 유세를 하는 거야.

"세금 전폐(전폐)! 노동 폐지! 모두에게 생활 보호! 여러분께 이 세 가지를 약속드립니다. 그런데 입후보는 안 했어용!" (<가난뱅이 난장쇼>, 118쪽)

이유 있는 난장쇼

프레시안 : 그런데 이 모든 행동의 이유를 묻자. 왜 가난뱅이가 반드시 모여야 하는 거야?

마쓰모토 : 가난뱅이의 삶은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부분이 참 많다고 생각해. 생계 문제에서부터 놀이까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부자만 많은 세상 속에서 가난뱅이들이 혼자 있다면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수밖에 없어. 가난뱅이라는 건 돈이 없어 먹을 것을 구하기 곤란한 사람뿐만 아니라 매일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워킹 푸어' 족까지 포함하는데, 이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만든다면 삶이 더 잘 돌아가지 않을까. 만약 더 이상 일이 하고 싶지 않아졌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그래도 생계와 놀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 : 그렇군. 그런데 지금의 생각은 누구한테 영향을 받은 거야?

마쓰모토 : 딱히 누구한테 어떤 생각이나 사상 같은 영향을 받은 건 아니야. 아무래도 대학 생활에서 경험했던 게 컸어. 내가 다닌 호세(法政) 대학은 입학하던 당시(1994년)에 일본 중에서 굉장히 특수한 느낌의 대학이었어. 엄청난 자유가 있었다고 할까. 지상 8층, 지하 2층 정도의 건물이 있었는데 거긴 학교 정직원은 출입 금지였어. 학생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장소였는데 굉장히 재밌었지. 매일 여러 이벤트가 벌어지고 학생뿐 아니라 외부 아티스트들까지 들어와서 전시나 공연을 하곤 했어. 입학해서 엄청 놀랐지.

그런데 그걸 없앤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반대하기 시작한 거야. 그때부터 선배들로부터 '외국에선 장소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한다더라' 하는 얘기를 들었고, 내가 직접 그걸 실행하면서 중요한 일이라는 걸 실감해 나간 거지. 지금은? 호세 대학, 제일 '빡센' 대학이 되어버렸어. 수험생보다 대학 입학 정원이 늘어나니까 학교들끼리 경쟁이 심해져서, 호세 같은 중간 정도의 대학은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게 됐어. 그러니 학교가 점점 한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지.

프레시안 : 그런데 대학 가서 공부도 안 했다며. 왜 들어가려고 했던 거야?


▲ "책을 전혀 안 읽는다"는 마쓰모토가 추천한 유일한(?) 책. 에비 호프먼의 <이 책을 훔쳐라(steal this book)> ⓒameblo.jp/tsukiji14
마쓰모토 : 입학할 때까지 대학이 그렇게 재밌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냥 고등학교 졸업해 그 때부터 일하자니 그것보단 대학이 재밌을 것 같아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감각이었어. 전공은 법학. 지금은 법을 누구보다 많이 어기는 사람이지만. (웃음)

공부는 흥미 있는 부분에 한해 조~금 했어. 그것도 놀이를 겸하는 공부였지만. 여행을 좋아했는데 돈이 없으니 주로 중국이나 한국, 동남아시아 등 가까운 나라들에 놀러갔거든.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 얼굴이나 문화, 먹는 것 등이 일본과 공통적인 부분이 많더라고. 가깝지만 서로 잘 모르는 존재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 그래서 아시아의 역사라든가 전쟁에 대해 공부하곤 했어.

프레시안 : 부모의 영향은 없었어? 어떤 사람들이었어?

마쓰모토 : 하하하! 있었을 거라고 봐.

우리 아버지는-지금은 돌아가셨지만-작가였어. 내가 태어났을 때는 출판사를 하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더니 "자, 난 이제 작가가 될 거다. 수입이 없어진다" 이렇게 선언하는 거야. 그렇게 멋대로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뭐랄까…. 재밌었지.

우리 엄마는 아나키스트였어. 지금은 나가노 어디 산 구석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어. 둘 다 엄청나게 자기 멋대로였지. (웃음) 결국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혼을 했어.

보고 자라면서 어릴 땐 굉장히 화를 냈지.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나, 왜 저렇게 멋대로인가 싶었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고 본인들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걸 보여줬으니 좋은 교육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렴"이라는 말 따윈 안 했어. 그냥 내버려 뒀지. 아아, 물론 잘 곳이나 밥은 챙겨줬어.

가장 무거운 포탄은 마지막에

프레시안 : <가난뱅이 난장쇼> 월드 투어 중국 편에서, 중국에선 '반란'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벤트 장소 찾기에 난항을 겪었다는 얘기가 있어. 겨우 찾은 장소가 벽에 마오쩌둥 사진을 떡 하니 걸어놓은 '사회주의 만세' 계열의 장소였다고?

아니나 다를까 "빈둥거릴 것이 아니라 모두들 힘을 내서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도록 하는 게 옳지!"라는 말이 나와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며. 한국도 마찬가지야. 이른바 386(486) 세대가 있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 세대 중에는 마쓰모토 씨가 하는 활동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 '난장쇼' 같은 방법에 대해 잘 이해가 없는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마쓰모토 : 일본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이 있어. 딱 내 부모 세대, 50~60대 정도의 사람들이지. 그런 이들로부터 가끔 '좀 더 진지하게 할 수 없어?' 하며 한 소릴 듣지. 그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안보투쟁 하던 시대가 그랬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나라면 음…, 그렇게 하면 좀처럼 운동이 퍼지지 않을 거라고 봐. 진지한 마음으로, 죽을 각오로 하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 이게 정말 이기는가 지는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됐을 때 말이야.

기본적으로 늘 그렇게 죽을 각오로 해 버리면 일이 진행되지 못해. 누군가를 위한답시고 내가 죽 불행하게 사는 인생, 별로잖아. 우리들이 재밌기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도 조금은 즐거워야 해. 사람들이 다 즐거운 일을 하면 세상은 비교적 즐거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무리해서 참고 또 참고 하다보면 사람이 지쳐. 좀 더 장난스럽게 가는 것도 괜찮아.

프레시안 : 그런데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더라도 취직과 승진, 수입이 보장된 안정된 길을 가고 싶어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많아. 일본도 취업난이 심하다며. 한 번 '취직 낭인'이 되어버리면 평생 어디서도 나를 고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거지. '남들과 다른 길,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 준다면?

마쓰모토 : 해보면 안다고 생각해. 이쪽이 훨씬 재밌거든! 그런데 여전히 마음은 있는데 망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건, 역시 우리가 아직 약하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앞으로 좀 더 제멋대로 날뛰어야 할 것 같아. '보통의 삶의 방법'과 '좀 이상한 삶의 방법'이 아니라, '사는 방법'이 그냥 두 가지, 아니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러면 당연히 이쪽이 훨씬 더 재밌으니까 이 방법을 택하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을까. 이제 곧 이라고 봐. (웃음)


▲ 마쓰모토가 인터뷰가 진행된 '빈 가게'에 기증할 '고엔지 신문'을 그리고 있다. ⓒ프레시안(안은별)

프레시안 : 일본 경제가 안 좋지. 그럴수록 사람들 생존 욕구가 절박할 텐데 요즘 그 동네 어떻게 봐?

마쓰모토 : 일본은 자잘한 데 집착하는 사람이 많아졌어. 우리 활동과 관련해서 보면 담배꽁초 버리기나 포장마차, 가게 밖에 물건을 두는 것을 강하게 금지한다든가. 엄청 쪼잔해졌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일과도 같아. 금지가 많은 건 무엇보다 재미없는 일이지.

'적당히'와 '대충' 이런 것이 늘어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봐. 그러니 일본은 오히려 더 기회야. 경제가 엉망이 되어가는 중이니까, 자잘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어떤 의미로는 대기업도 그냥 망했으면 좋겠어. 세상은 좀 더 엉망이 되어도 좋을 것 같은데.

프레시안 : 이거 아주 위험한 사람이군! 한국에 남길 마지막 한 마디를 부탁해.

마쓰모토 : 나는 나라로 무언가를 못 박는 걸 아주 싫어해. 일본은 이렇다, 한국은 이렇다, 다른 나라는 어떻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서로 'OO놈이니까…' 하면서 국민성이 어쩌고, 경제가 어쩌고 하잖아.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는 사실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얘기야. 꼭 고엔지의 기타나카 골목이 아니더라도 자립적인 경제 사이클을 여러 곳에 만들 수 있게 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누가 미사일을 쏘든 그런 건 관계없어진다고 봐. 그러니 비슷한 녀석들, 분발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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