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윤기가 유려한 필치로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을 소개한 이래, 인문학적 관심을 가진 이들 중에 신화를 현실과 연결시켜 깊이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김원익의 <신화 인간을 말하다>(바다출판사 펴냄)도 그리스 신화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고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부자 갈등, 라이벌 관계, 부부의 사랑, 광기, 모험 등 테마로 분류해서 기술했다. 이런 다층적이고 현실감 있는 책의 구성만으로도 독자의 흥미를 충분히 끌 것 같다.
판타지나 무협지를 연상케 하는 문체와 서술 방식도 신화라면 고리타분하게 생각하는 일반 독자를 유인하는 요소다. 마치 인터넷 소설을 읽는 것처럼 요즘 젊은이의 단어와 문장을 구사해 생생하게 묘사하는 부분도 많다. 그러면서도 기성세대가 좋아하는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시나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고전에 대한 친절한 소개도 곁들인다.
 |
▲ <신화 인간을 말하다>(김원익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바다출판사 |
저자는 문학 이론도 원용한다. 예컨대, '구출' 모티프를 설명하면서 그리스 신화의 밋밋한 플롯을 지적한다. 주인공을 돋보이도록 하는 적대자(Antagonist)에 대한 언급이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또 박완서의 소설을 소개하는 등 한국 현대 문학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문학 속 등장인물과 신화의 인물을 연결하는 작업도 이미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아킬레우스의 입장을 영화 <트로이>를 통해 다시 조명해보는 대목, 영화 <빠삐용>과 오디세우스와 다이달로스의 탈출을 비교하는 대목도 신화와 다양한 장르를 연결해서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 같다.
한편, 신화 속에 들어 있는 가부장제의 영향들 또 트로이 전쟁을 헬레네라는 한 여성에게 돌리려는 교묘한 정치 조작 같은 것을 세밀하게 지적하는 작업도 돋보인다. 그리스 신화의 예언가들 중 오이디푸스에게 바른 말을 한 테이레시아스에게서 김수환 추기경을 읽는 대목도 재미있다. 제도권의 시각이나 연구 방법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책과 문화에 접할 수 있는 자유로운 프리랜서 신화 연구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미덕이 아닐까 싶다.
사실 현대의 사건이나 현상들의 의미와 연결되지 않은 역사나 신화 그 자체를 위한 연구는 재미도 없거니와 학문의 다양한 가치도 덜하지 않나 싶다. 학문의 고갱이만을 상아탑에서 연구하는 학자도 필요하겠지만, 넓은 세상에서 자유로운 필치로 글을 쓰면서 일반 대중에게 과연 어떤 효용가치를 줄지 고민하는 김원익 같은 필자도 중요하다.
아쉽다면, 워낙 많은 양의 정보가 들어가 있어서 그 내용이 충분히 소화되기 전에 금방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깊이 있는 통찰보다는 다양한 정보를 일단 섭취하고 싶어 하는 바쁜 독자를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책의 주제를 오히려 조금 줄이고 긴 호흡으로 독자와 대화했다면 조금 더 넓은 지평을 보여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예컨대 '분노'를 다룬 장에서 조병준의 <정당한 분노>, 로버트 서먼의 <화>, 천안문에서 보여준 분노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보이는 분노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 놓은 대목은 흥미롭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다 만 느낌이 없지 않아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을 읽고 싶은 독자는 맛만 보고 말게 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제한된 책의 분량이 답답한 대목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심리 분석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신화 속 등장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의 원형적 패턴에 대한 좀 더 깊은 고찰을 하겠지만, 신화 연구가인 저자 김원익의 몫은 아니리라. 그러나 분석심리학자인 융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었던 조셉 캠벨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조만간 심리 분석은 물론 좀 더 다양한 방법론을 구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본다.
아쉬운 점 하나 더. 다양한 참고 문헌을 소개해 놓긴 했는데, 어떤 순서로 열거했는지 또 어느 대목에서 어느 쪽에 인용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참고 문헌으로서의 가치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보통은 한국 문헌, 외국 문헌을 가나다 순서와 알파벳 순서로 열거하는데, 저자는 어떤 분류와 정리 방법을 쓴 것인지 궁금해진다.
독자들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인용 대목의 책을 소개하는 대신 저자만 명시해 놓은 것도 조금 아쉽다. 주석 따위는 귀찮은 독자의 입장을 고려해 책을 편집하는 이들의 의견이 반영되면서 오히려 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경우는 사실 우리 출판계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끝으로 저자는 신화를 연구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다른 나라의 신화를 자국의 독자에게 소개하고, 두 번째는 신화를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는 것, 세 번째는 신화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요약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우리 신화를 자국의 독자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에 소개하는 일이 빠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화 하면 자동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조금 책을 읽었다 해도 겨우 중국이나 중근동 지역 힌두교의 신화를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신화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일을 기록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극히 제한된 책만 남아 있다는 것이 핑계일 수 있다. 그러나 <동국이상국집>, <제왕운기>, <조선민담집> 등 우리 고전이나 <일본서기> 등 외국 서적에도 우리 신화는 다양하게 기술되고 있다. 또 무당들의 무가나 구전되는 민담 중에는 엄청난 양의 한국 신화가 담겨져 있다.
김원익의 <신화 인간을 말하다>의 주테마는 물론 그리스 신화이기 때문에 장황한 한국 신화에 대한 서술을 담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데군데, 한국 신화에 대한 언급도 조금씩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신화와 외국 신화를 연결시키는 작업의 질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쪼록 <동국이상국집>, <제왕운기>, <택리지> 등 신화가 소개된 한국의 고전과 더불어 이능화, 손진태, 김열규, 장주근 등 현대 우리 신화 연구가들의 다양한 책도 다음에는 참고 문헌에서나마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신화는 민담과 달리 우주의 탄생과 한 민족의 태동을 다룬다. 신화 연구가 민족의 정체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만약 신화 연구가 자신의 신화를 다루지 않은 채 남의 신화에만 목매달고 그를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면, 연구자뿐 아니라 독자로서도 큰 결핍과 손실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