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1일 '프레시안 books' 창간호가 나온 지 꼭 5개월이 지났다.

처음 '프레시안 books'를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주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신문, 잡지들이 앞 다퉈 연예, 게임, 여행, 쇼핑, 패션, 미용 등에 지면을 할애하는 때에 책이라니…. 한 언론의 기자는 적극적으로 말리면서 아예 연예를 다루는 새로운 매체를 권했다. "강 기자 드라마, 연예인 좋아하잖아? 이름은…'에로시안' 어때?"

기자가 보기에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이폰, 아이패드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충격 속에서 어느새 대세가 되어버린 모바일 디지털 환경에서 책이 설 자리는 더욱더 좁아질 게 뻔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모바일 기기의 충격에 잔뜩 위축된 출판계의 모습도 불안을 부추겼다.

한편, 다른 흐름도 눈에 띄었다. 2010년 초부터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펴냄) 등처럼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책들이 트위터 등을 통해서 많은 독자와 만나는 모습은 여전한 '책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출판사가 단테를 읽는 모임을 열었더니, 수십 명의 독자들이 매주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에서 단테의 <신곡>을 매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하려는 이들이 수십 명이나 되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던가? 여전히 책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매개하는 강력한 수단인 것이다.

이런 기대와 불안 속에서 '프레시안 books'를 만든 지 5개월. 그리고 21세기의 다음 10년이 시작되는 2011년이 밝았다. 새해에는 책과 사람들이 빚어내는 상호작용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또 그 안에서 책은 자신의 존재감을 어떤 식으로 보이며 진화할까?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놓고 책 동네의 '고수' 4인이 모였다.

지난 4일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의 사회로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장은수 민음사 대표, 이홍 웅진씽크빅 리더스북 대표가 만났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좌담은 애초 예정된 시각인 4시를 훌쩍 넘긴 6시에야 끝났다. 이들은 그 후에도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책과 한국 사회에 관한 온갖 얘기를 쏟아냈다.

그들의 '격정 대화'의 주요 내용을 두 차례에 걸쳐서 소개한다.

책의 위기인가, 책의 변신인가?


▲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새해가 밝았다. 2011년은 21세기 첫 10년을 정리하고, 다가오는 10년을 시작하는 해라서 더욱더 각별하다. 이참에 지난 10년간 책 동네에서 있었던 일들을 점검해보고, 다음 10년을 전망해보는 일이 의미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또 최근 들어서 어느 때보다 '책의 위기'라는 말이 회자된다.

김학원 : 책의 위기라…. 가시적으로 보면 분명히 위기다. 지난 수십 년간 TV, 컴퓨터 등의 등장과 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책은 계속해서 지식 정보 전달과 같은 자신의 역할을 다른 매체에 내주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책의 황금시대는 이미 20~30년 전부터 조금씩 쇠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난 20~30년간의 변화와는 다르다. 지금은 이전과는 또 다른 근본적 전환기인 것 같다. 지난 수십 년간 책의 위기가 말해졌지만, 여전히 최근까지 책의 공간이 곳곳에 있었다. 예를 들자면, 지하철도 그런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지하철은 책과 <메트로>와 같은 무가지가 경쟁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책은 지하철에서 사실상 퇴출되었다.

이제 지하철에서는 책 대신 스마트폰이 무가지와 경쟁한다. 책이 지배권을 행사하던 마지막 공간 중 하나를 스마트폰에 내준 것이다. 지하철만 그런 게 아니다. 침대는 어떤가?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있었던 사람도 침대에서는, 수면제 대신 사용하는 용도더라도, 책을 펼치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런데 이제 침대에서도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영화를 본다.

즉,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책이 온전하게 지배력을 부분적으로라도 행사하던 공간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이미 지하철, 침대는 책의 공간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책의 위기는 과거에 말해졌던 위기와 질적으로 다르다. 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홍 : 1992년 말 출판사에 처음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책의 위기'라는 말을 듣지 않았던 해가 없었다. 책을 만들고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출판계는 항상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었다. 도대체 단군 시대에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기에…. (웃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말하는 책의 위기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책의 위기가 조금 더 위태롭게 들리는 것은 그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책의 위기=출판의 위기=읽기의 종언'이라는 등식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낙관론자에 가깝다. 종이책이라는 한정된 매체만 본다면, 분명히 위기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종이책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읽는 것을 그만둘까? 종이책의 생존이나 소멸과 읽기의 문제는 출판인들과 달리 일반 사람들에게는 별개의 문제다.

사람들은 종이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읽을 것이다. 당연히 종이책을 읽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읽기가 등장할 것이고 새로운 규범과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종이책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읽기는 축소되겠지만 소멸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가장 오래된 미래'인 책의 지위를 유지시켜줄 것이다. 새로운 읽기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콘텐츠 산업으로서 출판의 지평은 확대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 위기는 곧 새로운 기회의 여명이다.

이권우 : 김학원 대표와 이홍 대표의 의견이 충돌하는데….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미 책은 문화 생태계의 가장 밑으로 전락했다. 책 만드는 사람들은 드라마 때문에 책을 안 읽는다고 푸념하는데 또 드라마 만드는 사람들은 게임 때문에 드라마를 안 본다고 푸념하는 상황이니까.


▲ 이홍 웅진싱크빅 리더스북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김학원 : 글쎄,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사용하다, 잠이 들 때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면서 잠을 재촉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가능성이 열릴 수 있을까? 오히려 위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뭔가 대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홍 대표의 말대로 테크놀로지가 추동하는 새로운 미디어의 순기능이 분명히 있다. 활자 신문이 처음 등장하자 그것은 책과 충돌하기는커녕 상호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신문을 보고 또 신문을 보는 사람이 책을 읽고. 책의 황금시대는 신문과 함께 간 측면이 있었다.

컴퓨터, 인터넷이 등장할 때도 처음에는 혼란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책과 출판 산업 입장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예전에는 비가 오고, 눈이 오면 서점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책을 훑어보고, 구매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스마트폰과 책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생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스마트폰과 책은 서로 충돌하는 중이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지하철, 침대 등 지금까지 책의 공간이었던 곳에서 책이 사라졌다. 반면에 스마트폰에서 유통되는 콘텐츠는 과거 책에 실렸던 것과는 다르다. 종이책의 콘텐츠를 스마트폰에 그대로 올린다고 해서 이전처럼 혹은 그보다 더 많이 책을 접할까?

장담할 수 없다. 책이 처한 위기 상황을 제대로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대응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막연히 낙관할 때가 아니다.

이홍 : 역사적으로 등장해 지분을 확보한 주요 매체들이 맥없이 소멸되거나 대체된 예는 많지 않다. TV가 등장하면서 영화가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예측되었고 실제 그런 시간들도 있었지만 지금 영화 산업의 규모는 역대 최대이다. 같은 영상이지만 분명한 차별화, 특히 콘텐츠의 차별성은 우월적인 지위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정점에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가 사람들의 시선을 완고하게 붙잡고 있지만, 그 반대편인 대학로의 소극장들에서 오프라인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꾸준함도 명맥만 유지된다고 폄하될 수준은 아니다. 영상의 시대가 왔을 때 소리만 들리는 라디오가 아직도 멀쩡하게 강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거라 예상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지금 책과 출판의 위기를 말하면서 던져야 할 질문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생존해서 번창하고 있는 모든 매체들의 공통점은 진화와 변신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좋은 시절 갔다고 징징거리지 않았다. 그럼 종이책은? 진화를 받아들이고 대체될 수 없는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게을렀던 것이 지금의 위기를 낳은 게 아닐까?

종이책이 길을 찾아 자기 진화에 성공한다면,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생존할 것이다.

진짜 두려워해 할 것은…


▲ 장은수 민음사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장은수 :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자. 사실 책이 미디어의 한 주류가 된 이래, 지금과 같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처음으로 맞은 것은 아니다. 이미 20세기 초에 사진, 영화, 라디오 등 그때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디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것이 소설, 회화 등 종래의 미디어들에 큰 충격을 준 적이 있다.

1930년대에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바로 이런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근대적 지식의 생산-소비 구조를 근본적으로 성찰했다.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나 '사진의 작은 역사' 등은 그 성찰의 결과이고, 그 덕분에 우리는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낸 새로운 미디어를 인문학적으로 전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 순간 기술은 인문학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어떤가? 계속해서 책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정작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극히 드물다. 기술의 충격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의 부재는 시민들에게 기술 만능주의자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게 했고, 그것은 다시 시민들의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을 이끌어 냈다.

책의 위기, 출판의 위기는 어쩌면 그 결과가 아닐까? 지금 출판이 위기라면, 이야말로 그 진면목이 아닐까?

이권우 : 책의 위기는 곧 인문학의 위기다?

장은수 : 그렇다. 새로운 매체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칸트를 이야기하지만, 칸트의 철학으로 스마트폰을 사유하지 못한다. 베냐민은 오래된 사유의 전통과 최첨단 매체의 등장을 하나로 이음으로써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인문학적인 눈을 만들었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관련해서 최근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게 전자책이다. 그런데 전자책의 '충격'은 있는데, 전자책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부족하다. 스마트폰 또는 전자책이 위기를 불러오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위기가 생긴 게 아닐까? 현재 전자책에 대한 담론이 단말기 생산업자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전에 신문이나 음반 또는 영화가 디지털화하는 과정에서 유통 쪽의 논리를 고민 없이 따라간 결과 콘텐츠 산업의 기반이 붕괴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 모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 이게 진짜 출판의 위기다. 이런 식으로는 위기를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기 어렵다.

김학원 대표가 얘기하듯, 최근의 매체 환경 변화는 책의 근본적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지금까지 종이책의 장점 중 하나는 '이동성(mobility)'이었다. 그런데 모바일 매체의 등장과 함께 종이책의 이러한 장점은 절대 우위에서 비교 우위로 바뀌었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규칙으로 책을 만들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지금 책에 대한 어떤 새로운 규칙이 필요한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지금 그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생각보다 파멸적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요즘 음악 기획자는 많은 경우 콘텐츠 생산자에서 콘서트 기획자가 되었다. 이제 음악 자체를 기획하지 않고 춤이나 공연 같은 음악 외적인 것에 관심을 쏟고 있다.

출판인들도 잘못하면 콘텐츠에 대한 관심을 잃고 이벤트 기획자나 광고 기획자로 전락할 수 있다.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인다. 가령, 책은 공짜로 주고 돈은 강연회로 벌자, 콘텐츠는 무료로 제공하고 비용은 광고에서 충당하자 등과 같은…. 이는 음반은 공짜로 주고 돈은 콘서트로 벌자, 이런 음반의 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콘텐츠 자체에 대한 고민, 즉 콘텐츠의 '고유성(originality)'에 대한 고민은 사라진다. 그런데 고유성을 포기하면 콘텐츠 산업은 지속 가능할 수 없다. 일본 출판이 위기를 맞은 것도 이 때문이다. 매년 8만 종 정도의 책을 내지만 그중에서 고유성이 있는 콘텐츠는 아주 적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대부분의 책은 다른 책의 내용을 복제하거나 단순 변형함으로써 생산되고 있다. 한국은 고유한 콘텐츠를 생산할 능력도 없으면서 고유성을 강화하기보다는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그 결과는 어떨까? 10년 후에 한국 출판은 고유한 콘텐츠는 찾아 볼 수 없는, 완전한 지식 수입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외면당하는 책, 이유는?


▲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책의 위기를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문학의 위기로 나아갔다. 그런데 지금 독자들이 인문학을 외면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성찰적 지식도 부족하지만 대안적 지식도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독자들이 갈구하는 것을 책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다른 매체로 눈을 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장은수 : 사실 성찰적 지식과 대안적 지식은 길항한다. 고유한 성찰적 지식이 없으면 현장에서 대안을 얘기한다고 해도 기존에 있었던 말들의 동어반복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장의 문제의식에서 멀어지면 성찰적 지식이라 해봐야 자기 독백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독백은 근대적 지식의 근본적인 특징이자 약점이다.

근대적 지식은 모두 독백으로 이뤄져 있다. 책은 혼자 쓰고 혼자 읽는다. 독백으로 쓰이고 독백으로 읽는다. 그것이 근대적 책의 규칙이다. 그런데 이런 근대적 지식과는 반대로 전근대 지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화 속에서 탄생했다. 소리 내어 읽기는 근본적으로 대화적이고, 타자의 존재를 의식함으로써 성립한다.

근대적 지식은 대화에 기반을 둔 지식에 의해 견제당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폐로 떨어질 수 있다. 근대적 지식이 혼잣말을 하지 못하도록 균형을 잡는 게 바로 편집자의 역할이다.

이홍 : 산업사회의 중심은 생산자였다. 정보사회의 중심은 누구인가? 권력은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이동했다. 대세이고 거스를 수 없다. 그런데 출판은 아직도 생산자 중심의 사고를 고집하고 있다. 방금 장은수 대표가 지적한 근대 지식의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책이란 여전히 저자가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전하는 것이고 출판은 이런 구조를 독점해왔다. 정보화는 기본적으로 지식이나 정보의 생산뿐만 아니라 관계의 피드백을 통해 비판되고 수정되고 교체되어야 하는데 종이책은 이 문제에 대단히 비탄력적이다. 그러므로 자기 진화의 핵심은 종이책과 구조로서의 출판이 탄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난 아직도 여전히 대안 부재의 상황이라 생각한다. 스마트한 매체들이 활성화되어서 꼭 종이책이 아니더라도 텍스트를 읽는 게 가능해졌다. 그럼 이런 전자 텍스트를 열심히 읽는 사람은 종이책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들일까, 아니면 새로운 소비자들일까? 도대체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가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텍스트를 읽을 것이라는 시장 판단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안 읽은 게 아이패드가 없었기 때문인가?

디지털 콘텐츠 환경에 대비한다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데, 어떤 것을 보면 '이건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이지 굳이 책이라고 할 게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장은수 : 이홍 대표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 출판에서 가장 고민이 덜 된 부분이 바로 '사용성(usability)'에 대한 고민이다. 가령, 전자 산업의 예를 들면 휴대폰의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그 사용이 불편하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한다. 애플의 성공은 이 부분을 파고든 덕이 크다.

그렇다면 책의 절대 우위가 사라진 시대에 출판은 다시 사용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종이책이 모바일 기기들보다 읽기에 편하지 않다면 독자들이 지금처럼 책을 선택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사용성에 대한 고민 없이 책의 미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민 지식인' 혹은 '독서 세대'의 등장?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방금 인문학 위기가 얘기가 되었지만, 2010년에는 '인문학 열풍'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현상이 출판계에 있었다.

장은수 :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시민 지식인의 등장이다.

예전에는 인생 후반전은 공부 없이 살 수도 있었다. 우리 부모 세대만 해도 보통 10대 후반에 사회적 교육에서 배제되고 나면, 그동안 공부한 지식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20대 이후로는 지식의 적극적 축적이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살았고,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출판계에서는 사십대 이후 분들은 사실상 없는 걸로 생각했다. 법정 스님 책을 찾아서 읽으면 대단한 거고. (웃음)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강단 지식인들과는 구별되는 수많은 시민 지식인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들은 학교의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으로 자기가 관심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탐구한다. 정규 교육과 관계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부족한 부분은 각종 강좌를 찾아가거나 토론 모임 등을 통해서 보충한다. 이런 시민 지식인들이 진화한 형태가 바로 파워 블로거, 또는 마니아들이다.

그들의 관심은 책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구축하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사회는 그들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것을 끝없이 요청한다.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의 사회적 삶은 점점 길어지고 있으며, 지속적 학습 없이는 그들은 그 시간을 충만하게 채울 수 없다.

2010년에 있었던 독서 흐름도 이런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들은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공감의 시대> 등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인문학 열풍이라기보다는 30~40대에 포진해 있는 수많은 시민 지식인들이 이번에는 인문학을 선택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고, 미래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책들을 읽는다. 가령,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아웃라이어>, <잉글리시 리스타트> 등. 올해 그들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따라서 작년 독서계에 나타난 현상은 인문학 열풍이라기보다는 독자들의 사회적 좌절 혹은 사회적 열망이 그런 책의 소비로 나타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어느 언론에 '올해의 책'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추천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그건 도서 구매를 통한 집단적 항의 시위라고. (웃음)

이권우 :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김학원 대표는 어떻게 보았나?


프레시안(손문상)
김학원 :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이 인기를 끈 것은 인문학 열풍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1970~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한국 사회의 이른바 '독서 1세대'가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들이 아이를 낳으면 한국 출판 시장에서도 어린이, 청소년 시장이 열릴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최근 온갖 강좌,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것도 이들 '독서 1세대'의 영향 덕분이다. 사실 이들은 자의든, 타의든 대학을 다니는 내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세미나를 했었다. 이들이 바로 지역의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각종 강좌 등에 등록해서 바로 예전에 자신들이 했던 그런 모습을 재연한다.

그들이 권하는 책을 읽고 성장한 아이들이 이제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이 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지난 2008년 여름에 촛불을 들었던 '촛불 세대'와 겹치고. 나는 이들이 잠재적인 '독서 2세대'라고 생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이런 독서 1세대와 2세대가 서점, 광장, 특강의 강의실에서 만나며 10대에서 50대까지, 여성과 남성을 넘나들면서 더 광범위한 독서 세대를 형성해온 시장의 물적 토대 속에서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랬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고 나서 생각을 정리하던 참에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가는 아이한테 최근에 읽은 책을 물었더니 똑같은 책 두 권을 언급했다. 부모와 아이가 즉 독서 1세대와 2세대가 같은 책을 읽은 것이다. 즉, 부모가 아이와 같이 입시 설명회도 가지만, 서점에서 같은 책도 고르는 것이다.

이렇게 독서 1세대와 2세대가 결합되는 상황을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의 욕구를 얼마나 사로잡느냐에 따라서 향후 10년간의 한국 출판계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1세대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책과 또 책을 매개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마련하고 더 나아가 잠재적 2세대를 확실한 2세대로 안착시켜야 한다.

이런 일이 성공하면 새로운 매체 환경 속에서도 기존의 책으로 대표되는 콘텐츠가 살아남을 수 있고, 더 나아가 3세대, 4세대가 차례로 등장해 한국의 독서 인구가 많아지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이 2010년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인기가 던지는 화두다.

이홍 :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히트가 인문학에 대한 본질적인 부활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 열풍'의 진정성을 확인하려면 특히 고전 읽기의 흐름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징후는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다른 책으로의 확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한계는 명백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은 수십만 명의 독자들이 다른 인문·사회과학 책을 얼마나 찾을까? <정의란 무엇인가>가 50만 부가 넘게 나갔다지만 그 중에 80% 이상, 혹은 그 이상의 독자가 다른 책을 찾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편으로는 지난 10년간 쏟아졌던 인스턴트 지식 책에서 이탈한 독자들의 실망을 반영한 측면도 있다. 경제·경영서가 대표적이다. 1980~90년대에 한국의 CEO와 비즈니스맨들의 손에는 마쓰시다 혹은 소니의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에 관한 책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겅호>와 <펄떡이는 물고기처럼>을 돌려가면서 읽었고 잭 웰치의 신화와 피터 드러커의 사상이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몇 책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책들은 시류를 따라 무분별하게 동어 반복된 책들이고 심지어 그냥 복제된 경우도 많았다.

이마저도 2007~8년 외환 위기와 신자유주의 붕괴를 겪으면서 세상에 미안한 책들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실망한 독자들이 각성하고 인문학이란 바탕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문제를 보자는 일련의 흐름이 생간 건 사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을 읽으면서 그런 반발에 동참한 것 아닐까?

문학의 침체 또는 노화?


ⓒ프레시안(손문상)
이권우 : 오늘 얘기의 한 주제가 인문학인데, 지난 10년간 문학 특히 한국 문학의 침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도 눈에 띄었다. 장은수 대표가 보기에는 어땠나?

장은수 : 최근 상황은 '한국 문학의 침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다. 2010년에도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황석영의 <강남몽>, 조정래의 <허수아비춤> 등과 같은 대형 베스트셀러가 나왔고, 김훈, 박민규 등도 나름대로 선전했다. 따라서 침체라는 말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문학적 성취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베스트셀러 리스트에는 지난 10년 동안 등단한 작가의 베스트셀러가 거의 없다. 최근 한 대형 서점에서 지난 10년간의 베스트셀러 500종을 꼽았는데, 그 안에서 지난 10년간 등장한 소설가의 작품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황석영, 조정래, 김훈, 신경숙 등 이전 세대의 작가들은 모두 자기 세대의 독자들은 대량으로 확보하고 있는 반면에, 지난 10년간 등단한 작가들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럴까?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이는 새로운 작가들이 자기 세대와 비동질성, 혹은 비동시성을 보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혼자 뒤쳐져 있거나 혹은 혼자 앞서 나가고 있다. 어쨌든 그들이 동세대들에게 광범위한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이런 문제에 주목한다면 분명히 지난 10년간 한국 문학은 쇠퇴 혹은 침체했다. 수많은 문학 편집자들이 이런 정체를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다. 가령, 단편보다 장편을 권장한다든지, 인터넷 공간을 소설 연재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든지,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만든다든지 등….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상황이다.

물론 2010년에도 황정은, 김혜나 등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했지만 있었지만 모두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문학적 한계라기보다는 확산의 한계 같은…. 이런 상황이 계속될지, 또 다른 괴물이 등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김학원 : 아이돌 스타들이 활동하는 모습처럼 베스트셀러 작가들 몇몇이 바통 터치하듯이 릴레이로 등장하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 더구나 이런 스타 작가들의 작품도 계속 재미나 문학성 양쪽에서 다 예전보다 못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상황 아닌가? 이런 상황이 계속되다가는 어느 순간에 독자들이 더 이상 한국 문학을 찾지 않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작가뿐만이 아니라 몇몇 스타 작가에만 의존해온 출판사 역시 책임이 크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마치 대중음악에서 홍익대학교 앞이 그런 공간이듯이 한국 문학의 인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작가들이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세대의 문제의식을 마음껏 발산하는 작품을 투고할 문예지 또 정기적으로 독자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출판사나 작가들이 스타 시스템으로 만든 대중 공간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공간을 확보하는데 관심과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 출판사나 작가들 역시 대형 서점에서 독자들을 사인 행렬에 줄을 세우는 것만 아니라 다섯 명 열 명이라도 독자와 눈 맞추며 작품을 이야기하며 보다 깊게 소통하는 언더그라운드 활동의 영역과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스타들에 대한 졸업 현상이 오기 전에 이런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히 필요하다.


▲ 오른쪽부터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 장은수 민음사 대표,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 이홍 웅진씽크빅 리더스북 대표. ⓒ프레시안(손문상)

장은수 :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사실 그런 언더그라운드는 답답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1990년대 초에 기존의 문학 제도에 반발한 이들이 <리뷰>, <이다>, <상상> 같은 잡지를 무대로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고, 그런 노력이 모여 <문학동네> 같은 잡지가 등장했다. 지금 스타 작가로 꼽히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러한 언더그라운드를 통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새로운 문학적 시도를 하려면 기존의 문학적 틀이 답답한 작가들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그런 언더그라운드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이 부재하니까 기존의 문학 권력 혹은 편집자의 관리로 만들어진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작가들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지금 편집자들이 제일 우려하는 현상은 '문학 졸업 현상'이다. 역량 있는 예비 작가들이 문학이 아니라 드라마, 영화 등으로 눈을 돌린다. 그렇게 되면 한국 문학이 더 활력을 잃게 되고, 그것은 결국 한국 문학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접어들 수도 있다.

이홍 : 나는 문학 분야에 대해서는 관전자에 불과하다. 그런 입장에서 봐도 한국 문학, 특히 문단의 폐쇄성은 대단히 지겹고 고루하다. 전통인지 뭔지는 몰라도 등단 제도가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한국인데 자기들끼리 권력 만들어서 짬짜미하고 키워주기 하는 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폐쇄성이 싫어서 서클을 벗어나는 순간 선배 작가들에게는 물론 언론과 출판사로부터도 왕따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숨통이 막힌 구조에서는 실력 있는 신진이라 해도 비즈니스를 못하면 변두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새로운 작가들의 언더그라운드로 기능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마저도 최근에는 몇몇 기성 작가들이 장악하면서 신문, 잡지와 같은 오프라인의 권력이 온라인까지 이어지는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독자들은 교체되었는데 작가들이 교체되지 않고 있다. 대가들이 생존하는 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떠나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대중은 이야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소설과 문학은 출판의 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틀과 구조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게 된다. 한국의 작가들도 이런 흐름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일본의 소설을 보면, 한국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와 기발한 이야기 구조가 돋보인다.

막막한 서정성의 과잉이나 끝없이 사변적인 자기 독백, 의미 없는 성장 이야기에 졸렸던 독자들을 읽기의 재미에 빠지게 해준 것이 사실이다. 천편일률적인 폐쇄성을 걷어내고 훨씬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통한 독자 서비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단은 모르겠으나 문학 출판의 미래는 어둡다.


책을 통해서 2011년 한국 사회를 전망해보는 4인 좌담의 나머지 내용은 오는 14일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 23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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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화인가 사유화인가?

조선 왕조에서 식민지 통치 그리고 다시 박정희식 개발 독재에 이르는 국가 폭정에 치를 떠는 민주주의자라면 당연히 국가(國家)보다는 민간(民間), 관(官)보다는 민(民)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국가 관료 지배 하의 국영 기업보다는 민간이 주인인 민영 기업이 더욱 민주주의에 가깝지 않을까?

한국에서 국영 기업 민영화가 본격화된 것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후인데, 당시 민영화를 추진한 사람들은 실제로 "관치 경제 타파"를 통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병행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민영화에 임했다. 그리고 10년 전만 해도 한국의 많은 진보 지식인과 진보 언론 역시 국영 기업 민영화를 당연시했다.

그렇지만 민영화란 정확히 말해서 '사유화(privatization)'이다. 즉, 국민 모두가 공동으로 이용해온 공유 재산을 소수 개인의 사적 재산으로 전환시키겠다는 것이 본래 의미이다.

'사적(private)'이란 영어 등에서도 좋은 뜻을 가진 말이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 매우 친밀하고 애정 어린 것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만일 모든 사람의 생존에 공통적으로 필수적인 공유 재산을 갑자기 몇몇 친한 사람끼리 사적으로 소유하여 독점하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국민 개개인 모두의 건강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수돗물과 전기, 가스, 의료, 노후 보장 등을 위한 공공 재산이 소수 사람들의 사유 재산으로 되어 그들만의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면?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황당한 일들이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에서 일어났다. 더구나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 취약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등의 가난한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한국보다 훨씬 더 민주주의와 문명이 앞선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번에 소개하는 책, 미헬 라이몬과 크리스티안 펠버의 <미친 사유화를 멈춰라>(김호균 옮김, 시대의창 펴냄)는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진행된 사유화(privatization)가 얼마나 가식과 거짓에 가득 찬 '미친 짓'이었는지에 관해 잘 정리된 기록이다.

사유화의 덫


▲ <미친 사유화를 멈춰라>(미헬 라이몬·크리스티안 펠버 지음, 김호균 옮김, 시대의창 펴냄). ⓒ시대의창
이 책의 독일어 제목은 "사유화 흑서(Schwarzbuch Privatisierung)"이다. 얼핏 '흑서'란 '백서'(white book, 정부의 공식 활동 보고서)의 반대말인 같은데, <위키피디아(Wikipedia)>에 따르면 '흑서(black book=Schwarzbuch)'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가 행한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 보고서를 말한다. 이 독일어 제목을 통해 저자들은 오늘날 '민주주의' 정부들이 행한 '사유화'를 나치의 인류 대학살에 비유하는데, 실제로 책을 읽는 독자들은 '사유화'가 어떻게 수천만 명의 생명과 생존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훌륭한 책의 저자인 미헬 라이몬과 크리스티안 펠버는 30대 후반으로 모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가 활동 무대이다. 라이몬은 <행동의 시대 :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그 반대자들>(2002년)의 저자이고, 펠버는 <세계 무역의 숨겨진 게임 규칙(Die geheimen Spielregeln des Welthandes)>(2008년) 등의 저자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비유되는 '흑서'라는 독일어 제목, '미친 사유화'라는 이 책의 한글판 제목만 보게 되면, 이 책은 신자유주의 비판서가 흔히 그러하듯이 불쾌하고 참담한 현실에 대한 무거운 보고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서평의 필자 역시 그런 첫 인상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기까지 마음이 거북했던 것이 사실이다.

독자들은 염려 푹 놓으시라. 이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독자들은 저자들의 화려하고 경쾌한 글 솜씨에 놀라게 된다.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다 읽어 버리게 될 정도로 저자들은 밝고 명랑한 분위기로 독자들을 이끈다. 저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펠버가 화려한 '춤 솜씨'를 자랑한다고 하는데, 이 책의 글 흐름은 경쾌하고 즐거운 비엔나의 왈츠 또는 남아메리카의 살사 댄스를 생각나게 한다. 더구나 역자 김호균의 훌륭한 번역 솜씨 또한 이 책을 술술 읽히게 만든다.

이 책의 서술 방식은 1997년에 출판되어 한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세계화의 덫>과 매우 유사하다. <세계화의 덫(Die Globalisierungsfalle)>은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고 중도 좌파 잡지 <슈피겔>의 기자 겸 편집자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이 공저했고 강수돌이 번역했었다.

이 서평을 쓰는 나 역시 1999년경에 <세계화의 덫>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주창하고, 뿐만 아니라 1990년대 후반에 전 세계를 휩쓸던 세계화(globalization) 현상에 대한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만큼 <세계화의 덫>은 독자들에게 읽기 쉬우면서도 풍성한 읽을거리를 제공한 훌륭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미친 사유화를 멈춰라>의 서평을 쓰면서야 비로소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사유화에 대한 포괄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그만큼 이 책 역시 독자들이 읽기 쉬우면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하는 좋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라면 이 책의 제목을 <세계화의 덫>의 후속편, 즉 <사유화의 덫>이라고 짓고 싶다.

철도, 전기, 건강 보험, 연금을 사유화하면…

한국에서도 1993년 이래 '공기업 민영화'라는 이름 하에 사유화가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진행되어 온 사유화 논의와 정책은 통신과 철도, 전기, 가스, 상하수도 등 이른바 네트워크 기간산업에 국한되어 온 측면이 크다.

물론 이 책 역시 철도(영국), 전기(미국, 노르웨이), 상하수도(프랑스와 독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의 사유화와 그것이 초래한 비효율과 비극적 결과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갖는 장점은 사유화 논의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여 사유화된 건강 보험, 사유화된 교육 주식회사, 사유화된 적립식 연금 제도 등도 다룬다는 점이다.

저자들은 건강 보험, 교육, 연금 제도를 사유화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공정'하다고 주장하는 주류 학자와 논객의 논리를 복지 제도, 금융 시장, 국가 재정 등 복잡한 제도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설득력 있는 관점을 가지고 반박한다. 따라서 이 책의 많은 분석과 서술은 일반 독자만이 아니라 건강 보험과 연금 제도 등을 다루는 전문가도 참고할 것이 많다.

사유화의 덫, 선진화의 덫

더구나 이 책이 우리나라 독자에게 더욱 매력적인 것은 이 책의 저자들이 들고 있는 사례들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선진국인 영국,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는 서울대학교 박세일이 주창한 '선진화'를 말하며, 이명박 정부는 아예 선진화를 국정 모토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선진화는 사실상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신자유주의화이며, 그 선진화의 일환으로 공기업 민영화와 함께 의료 산업화와 교육 산업화 즉 건강 보험, 교육, 연금 제도 등의 시장화가 추진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되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나라 보수 세력이 추진하는 '선진화'의 최종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미 영국,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 20여 년 전부터 일어난 '선진적인'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공기업은 특권과 부패? 사유화가 더 효율적?

이 책이 가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강점은 사유화가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구체적 증거를 들이대며 지적한다는 점이다. 흔히 주류 학자들은 국영 기업이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게다가 특권적인 관료와 공무원들, 게다가 노동조합 및 정치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까닭에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한다.

우리의 진보 세력 내부에도 "공무원 및 공기업 노동자의 철밥통을 깨는 것"이 민주주의이며, 그것이 '특권'과 '반칙'을 분쇄하고 '공정 사회'를 이룩하는 길이라는 시각이 큰 호응을 얻어 왔다. 특히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김대호 같은 이들은 '개발 독재' 시절에 구축된 거대한 마피아(관료, 공기업 임직원, 변호사, 의사, 노동조합 등)가 만든 '부패와 특권의 온상'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이라고 보면서, 그들의 반칙과 특권을 분쇄하는 것이 진보의 가장 큰 과제라고 본다. 그리고 이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개발 독재'의 유산을 분쇄하는-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마저도 훌륭한 '진보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과연 철도와 전기, 가스의 사영화(민영화), 그리고 더 나아가 건강 보험 및 교육의 사유화, 노인 연금 등의 사유화가 과연 더 효율적이고 더 투명하며, 더 '공평'하고 더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는 길인가? 이 책이 잘 보여주듯이, 공기업 및 공공 부문의 사유화, 민영화야말로 오히려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비효율의 극치이며, 더구나 공공 재산을 몇몇 소수의 사유 재산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사익(私益)을 둘러싼 부패와 특권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마피아가 생성된다.

미국의 전력 산업 사유화 과정에서 부상한 엔론(Enron)의 경영진이 어떻게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 신용평가회사와 유착하여 소액 투자자와 직원을 등쳐먹었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또 이 책은 영국의 철도 사영화 과정에서 등장한 새로운 철도주식회사의 주주들이 영국 정부와 국민을 어떻게 등쳐먹었는지, 얼마나 많은 특권과 특혜가 그들 투자자에게 제공되었는지도 잘 보여준다. 또 이 책은 상하수도 민영화/사유화 과정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파적인 만델라 정부와 볼리비아 문민 정부의 정치인들이 얼마나-세계은행 및 IMF의 후원 하에-특권화되었는지도 잘 보여준다.

사유화 과정, 더 나아가 시장주의화 과정 일반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마피아의 존재와 이해관계는 왜 세계 최고의 경영 효율성을 가진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을 왜 굳이 한국의 일부 관료와 정치인이 사영화/민영화하려 애쓰는지 그 숨겨진 이해관계를 짐작하게 해준다.

미국식 선진화와 유럽식 선진화가 다른가?

더구나 유럽인에 의해 쓰인 이 책은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 역시 신자유주의와 사유화 물결에 깊게 침식되어 왔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전기와 가스, 상하수도 등을 공급하는 유럽의 사영화된 (과거의 공기업이었던) 서비스 업체들이다. 그리고 수익 극대화를 지상 목표로 하는 이들 서비스 대기업의 이해관계가 유럽연합(EU)의 대외 통상 정책에 매우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는데, 이것은 한국과 EU 간의 자유무역협정(FTA) 역시 한미 FTA보다 더 한국에 불리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비벤디(Vivendi) 등 프랑스의 상하수도 기업들이 세계 각국 정부에게 상하수도 사영화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사례는 한국-EU FTA 비준 이후 유럽의 수도 회사들이 한국 정부에 대해 상수도 사영화를 집요하게 요구할 것임을 예고한다. 또 이것은 우리나라의 삼성엔지니어링, 두산중공업 등 상하수도 플랜트 업체들이 서울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에너지 및 상하수도 사업의 사영화를 위한 제도적 틀(규제 완화 및 사영화)을 성사하고자 EU 및 미국과의 FAT 협정을 밀어붙이는 사정도 짐작케 한다.

FTA와 사유화 : 왜 윤증현은 '서비스업 규제 완화'를 말하는가?

마지막으로 이 책은 사유화와 관련하여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하의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S)의 문제점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FTA를 했을 경우 논쟁의 핵심은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이다.

한국의 제조업 국제 경쟁력은 이미 상당 수준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 따라서 한국-EU FTA가 되었건, 한미 FTA가 되었건, 자동차와 전자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수출 증대와 수입 증대 효과, 그 상쇄 효과 등의 득실을 계산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더구나 그 상쇄 효과를 각종 계량경제학 모델을 이용하여 추산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한국이 유럽 및 미국과 FTA를 했을 경우 정말로 중요한 피해는 서비스업 영역에서 발생한다. 특히 이것이 역진 방지 조항 및 투자자 국가 소송제와 결합되어 있을 경우에는 치명적이다.

그런데 서비스업이란 바로 상하수도, 철도, 우편, 가스, 전기, 의료, 노인 연금, 금융 등 국민들 개개인의 일상적 삶과 생존을 좌우하는 필수재이며 국민들 개개인에게 봉사/서비스하는 공공 인프라이다. 그런데도 재정경제부 장관 윤증현은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도 서비스업의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이 점이다. 상층의 특권적 관료 세력은 건강 보험의 사영화와 공교육의 사유화 강화 등을 위해 FTA를 이용한다. 이것은 대형 할인점 규제를 완화하기 위하여 한국 정부가 유럽과의 FTA 협상을 핑계 대는 것과 같다.

만약 유럽 및 미국과의 FTA가 국회에서 비준될 경우에도 한국의 제조 기업은 여전히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FTA는 모든 국민 개개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서비스 공공재의 사유화를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하게 만들 것이고, 그리하여 일부 특권적 엘리트를 제외한 이 나라 국민들의 삶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국민들 상당수에게 상하수도와 전기 공급이 중단되고, 의무 교육과 건강 보험 혜택이 중단되는 일이 다반사가 될 것이다.

FTA의 문제는 우리 경제의 국제 경쟁력 약화라기보다는 국민들 개개인의 '삶'이다. 그 삶이 위협받는다. 이것이 바로 '사영화의 덧'이고, 따라서 '미친 사유화를 멈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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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화폐전쟁>의 저자로 잘 알려진 쑹홍빙 중국 환구재경연구원장은 앞으로 미국 경제가 과거 90년대 '잃어버린 10년'으로 통칭되는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전망했다. 나아가 그는 앞으로 40년 후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할 수도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미국경제가 이처럼 위기를 맞은 원인으로 그는 지나친 달러 공급을 지적했다. 대안으로 그는 금을 대안통화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美 경제, 인플레-자산부실화 이중고 겪을 것

쑹홍빙 원장은 27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SBS 주최 '서울디지털포럼2009'에 참석해 이와 같이 밝혔다.

쑹 원장은 먼저 향후 미국경제가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과 자산 디폴트(채무불이행) 급증이라는 이중고를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앞으로 잠시 경제가 안정되더라도 시중에 과다하게 풀린 유동성을 흡수하기가 쉽지 않다"며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1~2년 내에 인플레이션 문제가 본격화되리라고 본다"고 했다.


▲서울디지털포럼 제공. ⓒ프레시안
또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한 지난 2007년 정크본드 디폴트율이 1.4%였는데 작년에는 7.7%까지 올라갔다. 올해 말에는 이 수치가 18%를 넘어설 것으로 본다"며 "상당히 위험한 트렌드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실업률이 급증해 자칫하면 미국의 400만 실업자가 26주간 수령할 수 있는 실업수당을 받지 못할 상태에 놓이게 돼 채무불이행이 연쇄 급증하는 사태가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쑹 원장은 특히 미국 소비 급감이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미국 전체 고용자의 1/3이 베이비부머인데 올해 이들이 평균 48세를 맞는다. 미국인이 평균 가장 많은 소비를 하는 나이가 48세"라며 "결국 내년부터 미국의 소비에 전환기가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최소 10년 간은 미국인들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릴 것"으로 내다봤다.

그 결과로 "오늘날 미국이 과거 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던 일본과 유사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전망은 매우 어둡다"고 말했다.

세계 금융계에 대표적 비관론자로 알려진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에 비해 훨씬 암울한 전망을 내놓은 셈이다.

40년 후 미국 자본주의 종말?

쑹 원장이 최근 세계 대부분 경제전문가들의 시각과 달리 부정 일변도의 전망을 내놓은 근본 원인은 달러 과다 공급이다. 지난 수십년 간 달러화가 지나치게 많이 공급돼 자산가격 거품이 발생했고 실질 성장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그는 "'누가 경제를 죽였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 중 하나는 미국 달러화"라며 "지난 1971년 브레튼우즈 시스템이 붕괴한 직후부터 최근까지 추세를 보면 미국의 성장률보다 광의통화(M2) 공급증가율이 훨씬 높다. 실물경제보다 통화가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이라고 했다.

쑹 원장에 따르면 이처럼 달러화 공급이 급증한 까닭은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미국의 통화공급 시스템 모니터링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쑹 원장은 이와 같이 지나친 달러 공급이 자산가격 상승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산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미국의 저축률은 점차 줄어들어 1980년대만 해도 10%대이던 저축률이 2007년에는 사실상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자산 중에서도 주택가격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며 "미국 대신 아시아의 저축자금이 미국 금융시장에 투입돼 자산가격은 더 부풀어올랐고 그 결과 미국 가정의 소득수준보다 자산가격 증가 추세는 더 가속화됐다"고 평가했다. 자산가격이 급증하자 부채도 따라 증가하기 시작했다. 소득 상승률이 상대적으로 정체되면서 부채증가율이 소득증가율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사태도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의 하나로 봐야 한다는 게 쑹 원장의 분석이다. 그는 이와 같은 진단을 근거로 기존 자본주의 질서가 완전 붕괴할 수도 있다는 섬찟한 주장을 내놨다.

쑹 원장은 "지난해 1년 동안에만 미국의 부채가 4조 달러 늘어났다. 미국 국채 보유자들은 과연 미국이 이 돈을 갚을 수 있을지를 우려하기 시작했다"며 "앞으로 40년이 지나면 미국의 총 부채는 586조 달러에 달할 것이며 이자만 35조 달러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자비용이 국내총생산(GDP)보다 더 커진다. 장담하건대,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40년 후 이 시스템(미국식 자본주의) 전체가 붕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울디지털포럼 제공. ⓒ프레시안
유럽·아시아도 문제…달러화 대안은 금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경제도 안전하지 않다고 쑹 원장은 지적했다. 근본적으로 같은 경제시스템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쑹 원장은 "디폴트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지금까지 드러난 부실채권 규모가 전체의 절반에 불과하고 유럽은 훨씬 심각하다. 겨우 20% 정도만 노출됐다고 본다"며 "아시아의 경우는 미국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 역시 문제가 심각하다. 이제까지의 경제개발 철학을 전면 수정하지 않는다면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쑹 원장은 단기적 대안과 장기적 대안을 내놨다.

단기적으로는 "일단 미국 정부가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 구제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그 돈으로 과다한 개인부채를 탕감해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며 "주요 은행의 국유화는 필요하다고 보고 조만간 그리 되리라 생각한다. 일단 개인들의 디폴트 문제를 해결해주고 완전 새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다만 "미국 정부가 금융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아 쉽지 않을 것"이라며 "어찌보면 더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걱정되고, 실제로 그리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장기적 대안으로는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인 현재의 달러화 체제 자체를 교정해야 한다고 쑹 원장은 강조했다.

그는 "대안통화로 추상적 개념일 뿐인 달러화 대신 세계 모든 곳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금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며 "이 조치를 통해 통화나 교역시스템이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일단은 교역수단에서 달러의 비중을 줄이고 일부를 금으로 대체해 달러화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그는 언급했다.

일각에서 거론되는 위안화의 달러화 기축통화지위 대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쑹 원장은 내다봤다. 다만 금이든 위안화든 간에 달러화를 대체할 수단은 강구돼야 한다고 그는 재차 강조했다.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너진다면 세계 경제가 일시에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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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제대로 된 에세이를 만났다. 물론 '모처럼' 또는 '제대로'란 표현이 거슬릴 수도 있겠다. 쏟아지는 수필집을 모두 읽은 것도 아니고, 에세이를 보는 눈이 저마다 다를 텐데 단정적 표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인정한다. 그래도 이 책이 반가운 것은 반가운 거다. 일상에서 비상을 찾는, 책의 한 구절을 빌자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는 필자의 색다르고 따뜻한 시선 덕분이다. 이 책을 통해 좋은 시와 책을 만나는 것은 글쓴이가 시인이자 출판사 대표이니 그럴 법하다 치자. 그런데 지은이를 따라 국립국악원이며 인왕산·지리산, 그의 고향 거창과 전시회 등을 두루 다니다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천둥 같은 깨달음도 얻게 된다.

'내일을 믿다가 20년'이란 글에는 천상병 시인의 '편지'라는 작품이 소개된다. 함께 남한산성에 올랐던 지인이 "사람의 일생을 결정적으로 망치게 하는 두 글자가 뭔지 아나?"라고 물은 뒤 "내일"이라 자답한 사연에 지은이가 화답한 시를 귀띔한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스런 적도 없지 않았다. / 그걸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 배부른 내가 /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 나는 / 자네에게 편지를 쓴다네."


▲ <인왕산일기>(이갑수 지음, 궁리 펴냄). ⓒ궁리
좋았다. 시에 담긴 시인의 생각이 너무 맘에 들어 이 시를 안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나치다 싶은가.

그럼 웃어보자. 지은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누가 서울에서 가장 가깝노!'를 접하면 누구라도 웃음이 나올 게다. 초등학생 시절 추운 겨울날 송판으로 만든 교사 벽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어느 동네가 좋은지를 놓고 핏대를 올리는 일이 벌어졌단다. 막터, 오무, 오류골, 완대 사는 아이들이 서로 자기 동네 자랑하느라 바쁜 판에 가장 북쪽인 돗골 아이들이 한 방에 평정해 버렸으니 "야, 씨바, 누가 서울에서 가장 가깝노!" 한 마디 였다나. 어릴 적 미국과 소련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를 놓고 입씨름 벌이던 일이 떠올라 절로 웃고 말았다.

중국 여행 중 장강 지류에서 잡히는 훼이위(飛魚) 튀김을 대하는 지은이의 감상은 웃음과 페이소스가 함께 깃들어 있다. 손님에게 생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 비어를 두고 "우리의 메기 비슷한 비어는 입맛을 다시는 우리 일행 앞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물고기는 강에서는 강도 모르고 물도 모르고 살다가 수족관에서 잠시 대기할 때 비로소 강의 존재를 알고 그리워했을 것이다…특별한 물고기라 생각했는지 카메라 플래시가 몇 방 터졌다…체념한 물고기는 별다른 포즈 없이 그저 눈만 껌벅거렸다…좀전의 비어는 죽어서 밀가루 수의를 입은 채 벌건 양념을 두르고 있었다. 튀김장(葬)을 당한 것이었다." 얼굴은 달아나고 없는 비어를 보며 "지금껏 나는 죽을 태세는 갖추었지만 아직 나의 죽음은 새까맣게 잊고 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바삭바삭한 '수의'까지 함께 오드득오드득 씹어 먹었다는 지은이가 "맛? 글쎄, 그걸 굳이 내입으로 말해야겠냐?"라고 마무리하니 찡한 가운데 입가엔 웃음이 맴 돈다.

가볍게 넘길 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빈차'를 표시하는 빨간 등을 켜고 달리는 택시에서 슬픔을 본다. "그 빨간 등을 켠 사람은 젊은이가 아니다. 대부분 나이도 많고 식구들을 대롱대롱 거느리고 있는 가장들이다. 거친 인생을 헤쳐 나와 오늘, 여기, 택시 안에 존재한다. 그가 엄연히 타고 있는데도 차는 '빈 차'이다. 영업하는 동안의 그는 '없는 사람'인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런가 하면 지하철 경복궁 역 부근의 고급 한정식집 앞에서 '풍채 좋은 사람들'을 맞는 이들이 차문을 열어주는 광경을 보고는 "귀족은 태어나자마자 은퇴한 사람들"이란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을 떠올리며 '대리인생' '불구의 삶'이라 짚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열어야 할 문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이쯤에서 고백하자. 필자는 글쓴이를 알고 있다. 아니, 알고 있다란 표현이 어폐가 있다.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전화해서 "언제 밥 한 번 먹죠" 하며 1년에 두어 번 만나는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좋은 사람, 더 알고 싶은 이란 생각은 늘 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얼굴에, 상대를 배려하는 조심스런 말투도 그랬고, 시속에 구애 받지 않고 뚝심 있게 펴내는 책에서 받은 인상도 그랬다. 이번 책을 읽고는 그의 참모습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겉보기보다 훨씬 재미있고, 생각이 깊은 글을 접하면서 '아, 내게는 속내를 보이지 않았구나' 하는 만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책을 평하는 데 사감이 작용한 것은 아니다. 글쓴이를 아는 만큼 글이 더욱 와 닿긴 했지만 글은 글대로 분명한 특장이 있다. 책을 읽으며 새롭거나 중요한 구절엔 밑줄을 긋기도 하지만 해당 구절이 있는 페이지의 귀를 접을 때도 있다. 이번 책은 후자였는데 읽고 보니 접어놓은 데가 하도 많아 책 두께가 두 배로 불어났을 정도니까.


▲ <빛으로 그린느 신인왕제색도>(이갑수 지음, 도진호 사진, 궁리 펴냄). ⓒ궁리
이유를 곰곰 생각해 봤다. 취향 탓이 컸다. 형용사와 부사로 범벅인 감상적 글은 꺼리는 취향이 작용했다. 그런 글은 글재주만 자랑하는 듯해 공허하게 느껴져서다. 남들이 못한 경험, 이를테면 오지 여행을 한 뒤 뭔가 혼자만 아는 듯한 글도 싫다. 시샘도 없지 않겠지만 사실 보기만 해도 글이 절로 나오는 경우라면야 남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읽는 사람의 머리 위에서 한 수 가르치는 글도 마땅치 않다.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나도 나름 생각이 있는데…'란 거부감이 앞서는 탓이다.

그의 글은 다르다. 담백하고 솔직하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주변에서 늘 접할 수 있는 현상과 사물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평소 보여준 성품대로 잰체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품격과 무게를 잃지 않으니 맘에 들 수밖에.

마지막으로 사족. 책 제목과 달리 인왕산에 관한 글이 아니다. 인왕산 이야기가 더러 나오긴 하지만 그보다는 인왕산 자락에 사는 지은이가 일상에 관한 단상을 모았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인왕산 이야기를 들으려면 지은이가 함께 펴낸 <신인왕제색도>(도진호 사진, 궁리 펴냄)를 보면 된다. 인왕산의 속살을 꼼꼼하면서도 정겹게 그린 에세이 모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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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텐더, 시민운동가, 텔레마케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언뜻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이 직업군은 한 가지 '치명적인' 닮은 점이 있다.

한국에서 이들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통상 3년 안에 자신의 일을 그만둔다. 2008년 한국고용정보원의 직업 세분류별 고용 구조 조사 결과를 보면, 403개의 세분류 직업군 중 바텐더는 1.1년으로 평균 근속 연수가 가장 짧았고, 그 뒤로 시민운동가가 1.7년으로 2위, 텔레마케터는 2.7년으로 10위를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숙박 시설 서비스원, 중식 조리사, 경비원은 어떻게 묶일 수 있을까? 이들은 전체 직업군 중에서 주당 평균 노동 시간이 가장 긴 1~3위의 종사자들이다. 각각 순서대로 72.3시간, 67.4시간, 65.8시간을 기록하고 있다(실상은 통계보다 노동 시간이 더 길면 길었지 짧진 않을 것이다). 단순하게 계산해 봐도 1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10시간 가까이 일해야 저 노동 시간을 간신히 채울 수 있다.

노동 시간이 가장 짧은 직군은 무엇일까? 바로 주당 19.9시간을 일하는 대학 시간 강사다. (연구 시간을 뺀 강의 시간을 노동 시간으로 넣었겠지만) 이들은 사실 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가 없다. 보통 한 대학 내에서 수업 시수가 정해져 있는 까닭에 이 대학 저 대학 옮겨가며 강의를 하는 데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노동 시간이 긴 숙박 시설 서비스원의 수입(한 달 평균 173만 원)이 시간 강사의 그것(월 163만 원)과 비슷한 사실도 기억하자.

비정규직의 문제는 이제 새롭게 말하기가 진부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주위에 흔하게 누군가는 텔레마케터로, 조리사로 또 경비원으로 팍팍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짧은 기간 일할 수밖에 없고, 일을 시작하면 하루 중 가장 길게 일해야 하는 이웃의 노동자들이고 우리 자신이다.

2

어김없이 2010년이 가고, 2011년 새해를 맞이했다. 한 설문 조사 결과에서 새해 해돋이를 보며 가장 많이 하는 결심으로 '취업'이 '가족 건강'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는 '좋은 곳에 취직하라'는 어른들 말씀에, 취업 준비생이 맞닥뜨린 현실은 추운 겨울만큼이나 이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 '좋은 곳'은 텔레마케터 같은 직업들이 아닌데, 위의 통계를 더 자세히 보면 정규직 노동은 이제 '소수'며 오히려 불안정 노동-비정규직이 '대세'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생은 노동 시장에 나가는 순간, 대기업 정규직이나 교사, 공무원 같은 소수의 일자리를 제외하고는 불과 몇 년 만에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직장과 휴일 없이 10시간 넘게 일해야 하는 노동 조건과 맞닥뜨려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취업은 밥벌이의 수단을 획득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해 덕담과는 관계없이 취업 재수생을 포함하여 대학,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이들은 새해를 맞이하는 각오가 남다를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2011년 취업 전쟁에, 새로 열린 노동 시장에서 이들은 긴 줄을 서게 됐다.

지금쯤 한정된 일자리를 앞에 두고 벌이는 전쟁에서 일부는 전장에 나가기 전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거나, 혹은 이미 반쯤 포기한 채 텔레마케팅이나 주유소, 식당 알바 따위의 비정규직을 선택하고 다음 '도약'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게임방 전전하기나 방 한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나 그 어떤 것이라도 선택을 해야만 (혹은 선택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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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강준만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강준만의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 한국 실업의 역사>(개마고원 펴냄)는 이러한 취업 전쟁이 최근의 현실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래 줄곧 우리는 이러한 취업 전쟁을 지속적으로 치르고 있는데, 다만 그 양상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던 1950~60년대와 달라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1950~60년대라면 양질의 일자리였을 식당이나 편의점, 주유소 알바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는 있지만, 2011년의 취업 준비생이 원하는 일자리는 아니다. 지금 우리가 좋은 일자리라고 부르는 것은 의식주를 해결하며 식구를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적절한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을 정도의 월급을 제공하는 일자리이다.

그러나 그러한 좋은 일자리는 사회·경제적인 조건의 제약을 받는 것이어서 어느 사회에나 부족한 것이고, 이를 제공하는 것은 역대 정권에서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하는 정책 과제이기도 했다.

저발전된 농업 국가였던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넉넉하지 않았을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오히려, "해방 당시 1614만 명으로 추산되던 남한 인구가 북한 인구의 유입으로 1949년에 2017만 명에 이르러, 해방 정국은 실업 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14쪽) 1950년대 이승만 정부에서 실업을 해소해주었던 유력한 사회적 장치는 바로 군이었다. 즉, 가장 강력한 고용기관으로서 "(한국)전쟁 직전 5만에서 6만5000명 규모이던 한국군은 휴전 직후 65만5000명 규모로 확대되었고, (이후) 육군 66만 1000명, 해군 1만 6000명, 해병대 2만7000명, 공군1만6000명으로 편성된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군대가 되었다. 한국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강한 군대를 갖고 있다는 '세계 4대 강국론'은 이승만이 기회만 있으면 역설해대는 단골 메뉴였다."(25쪽)

흥미로운 사실은 군대와 함께 우익 청년·학생 단체가 실업의 해소에 일조한 고용 기구로서 기능했다는 점이다. 1947년 당시 미군정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동맹이 296만 명의 조직원을 갖고 있는 것을 필두로, 한국민주당(한민당) 계열 대한독립청년단 11만3400명부터 월남인 그룹으로 구성된 1900명의 서북학생연맹까지 그 수가 엄청났다.

당시 우익 단체들은 테러 등을 동원한 집회에 상시적으로 동원되었는데, 특히 테러의 경우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1946년 8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합원에 대한 대한노총의 테러에 가담한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는데, 이때 전 산업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이 61원"(15쪽)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조직원은 가히 '고소득 비정규직'이라 칭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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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들어 실업의 양상은 일부 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학생 수의 증가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1945~60년 사이 대학생 수는 7819명에서 9만7819명으로 12배 이상 증가했다. 1952년에서 1960년까지의 대학생 연평균 증가율은 14.5%로 1960~70년 사이의 연평균 증가율 6.7%의 두 배 이상을 기록했다. 정부는 사학 방조 정책을 썼다. 재정적 기초도 없이 학생들의 등록금을 노린 대학 장사꾼들이 대거 등장했다. 학기 초 등록금 납부기에는 총통화량의 4분의 1 혹은 5분의 1이 학교로 들어갔다."(30쪽) 당시, 이러한 배경에서 '대학망국론'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을 나온다고 모두 취직이 되는 것이 아니었고, 많은 이들은 고학력 실업자가 되었다. 강준만은 책에서 4·19 혁명 역시 고학력자들의 실업이 그 발발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한다. 30%가 넘는 실업률로 인해 대학생 집단의 사회적 불만이 대단했고, 그 불만에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이 더해졌으니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960년대 전반도 내내 실업의 고통과 취업난 소식이 신문 지상을 장식했다. 취업 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서 수백 대 일이라는 이야기들, 취업 사기 사건, 실직으로 인한 범죄 사건이 줄을 이었다. 결국 실업 문제의 출구는 베트남에서 열렸다. "1964년 9월 이동 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견에서부터 1973년 3월 주월한국군사령부 철수에 이르기까지 10년간,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하고 평균 5만여 명을 상시 주둔시켰고, 이와 함께 한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총액 약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획득하여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71년)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했던 것이다."(41~42쪽) 하지만 그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주둔군 중 한국군 전사자는 5000여 명, 부상자는 1만 6000여 명에 이르고, 수많은 고엽제 후유증 피해자가 지금껏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베트남 특수 이후에도 한국을 먹여 살린 일자리는 바로 오일 달러로 흥청대는 중동이었고,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체제에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경제에서 실업은 급감 추세를 보였기에 (실업은) 상대적으로 뉴스 가치를 상실했다. 한국 경제는 여러 외부적인 조건에 적응하며 상대적으로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적극적인 투자와 산업 정책으로 인해 1980년대까지 고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1980년대의 3저 호황에 이은 고성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듯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 위기를 겪게 된다. 외환 위기로 한국 사회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평생 직장'이라는 말 대신,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의 급격한 도입으로 인해 모든 작업장에서 구조 조정은 상시화 되었고,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이태백', '사오정', '오륙도' 같은 유행어가 쓸쓸하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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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은 취업-실업의 현실을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책의 7장 '노동 시장 유연화와 노동운동 위기론'에서 노동조합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2004년 하반기, 노무현 정부에서의 이른바 '비정규직 법' 논쟁을 소개하고, 당시의 일자리 확대 문제에 있어 정규직 노동조합을 중요한 주체로 소개한다.

당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진영은 좌·우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는데,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고임금이 투쟁의 과실을 함께 나누지 않아, 중소영세기업 비정규·여성·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142쪽)는 비판과 함께 '강성', '귀족' 노동조합 때문에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동시에 들어야 했다. 강준만은 당시의 김대환, 이목희 등의 논쟁을 소개하며 장의 말미에서 "청년 실업과 자영업 과잉이 비정규직 문제와 무관치 않은 것이며, 이를 정면 대응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노동조합"(165쪽)이라고 전제하고 나서, 노동조합이 자본과 정부에는 강력 대응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승자독식주의' 문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이 부분에서 강준만은 일자리 확대가 가능한 조건을 만들 수 있었던 노동조합이 그 '공익적 기능'을 외면한 채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한 운동에 몰두했던 문제를 비판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러한 논의는 8장의 '노조 비리와 비정규직 논쟁'에서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간부가 채용 과정에서 비리를 저지른 사건을 소개하는 등 '귀족 노조'의 단면을 드러내는 부분에서도 이어진다. 저자는 민주노총과 같은 강력한 상급 노동조합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을 위한 싸움에 나섰어야 하고, 그랬을 때 일자리 확대에 기여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당시 민주노총의 노선이나 행태에 비판할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고, 저자의 관점이 모두 틀렸다고 보이진 않는다. 다만, 대기업 남성 중심의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도 지적되어야 하지만, 실업 문제 비판의 중심점이 노동조합이 되어선 곤란할 것이다. 책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1987년 이래로 수세에 몰려있었으며, 단적으로 노조 조직률이 2004년에는 10.6%를 기록하는 처참한 상태에 처해있었던 사실 역시 강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채용 비리와 같은 노동조합의 부정부패 사건은 그 자체로 비난받아 마땅하나, 2005년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의 폭력 사태는 노동조합 조직률 약화 등의 객관적 조건들을 보지 못하면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당시에 노·사·정 협상 테이블 복귀파를 실력 저지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했다.)

오히려, 한국에서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고 전반적으로 노동 조건이 악화되는 것은 노동조합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노동조합이 더 강력한 사회적 주체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정규직 노동조합 때문에 할 수 있는 기업이 투자를 안 하고 일자리가 늘어나지 못한다는 반대편 논리의 근거는 실증적으로 증명된 적이 없다. 저자가 바라는 것처럼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서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한 번도 유의미한 사회적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했던 노동이 확고한 자기 위치 위에서 자본과의 협상을 대등하게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조합이 산업예비군-실업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는 실업 문제에 대한 어떤 정치적 주장을 위한 책이 아니며, 실업의 사회·문화적 기술을 목적으로 한 저술임을 저자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건-사실의 취사선택에는 나름의 세계관과 미래 전망에 대한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로, 실업 문제는 단순히 스펙(specification)을 쌓고 취업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점증하는 계층 간 소득 격차와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양극화 문제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 역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영세 자영업자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고, 영세 자영업자의 문제가 바로 비정규직 문제와 청년 실업의 문제와 따로 떼어질 수 없다.

영세한 경쟁자를 규모의 경제로 경쟁에서 이기고 벌어들인 수조 원의 현금은 과연 노동자들을 비롯한 경제 주체들에게 얼마나 많은 혜택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대기업들이 생산 부문에 투자를 하지 않고 (혹은 못하고) 그 이득이 중소기업에도 분배되지 않으며,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는 현실은 성장-고용의 고리가 끊긴 만성적 지체를 보여준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가 실업 역사의 사회·문화적 기술을 목표로 했음에도, 그 이면에 작동하는 한국 경제의 여러 지체 현상을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 실패하고 있는 부분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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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준비생 대부분은 바텐더나 텔레마케터보다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직원 혹은 교사나 공무원 등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직업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미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고도화되어 우익 단체들을 통해 청년들을 임시 고용할 수도 없고(청년 인턴 제도가 이것의 변형일지는 모르겠으나), 1960~70년대의 월남전이나 중동 특수와 같은 변수를 통해 쉽게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도 없다. 반면에, 여전히 누군가는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고, 텔레마케팅을 통해 저비용 마케팅을 하거나, 주유소에서 알바를 하고 경비를 서야만 한다.

상투적인 결론이지만, 현재의 알바들과 미래의 비정규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기적으로 불안정한 노동 조건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그러한 일자리 자체를 좋은 일자리로 바꿔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희망 없는 우리 노동의 쳇바퀴는 계속 돌아가지 않을까? 시민운동가가 몇 년 후에 시간 강사로, 바텐더가 조리사로, 텔레마케터가 숙박시설 서비스원으로 직업을 바꾸게 되는 그런 상상의 쳇바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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