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아케이드 게임장에 가곤 한다. 어느 날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우연히 누군가의 게임 화면을 보게 되었다. 이제 막 'complete' 단어가 부상하고 있었다. 나는 말로만 듣던 게임 완료 화면을 처음 봤다. 그 게임의 주인공은 그 화면을 확인하더니 곧 유유히 그 곳을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그가 떠난 뒤 게임 기록이 화면에 표시되었는데, 슈팅 정확도(accuracy)가 85%였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신이다!'라는 경외감이 일었다. 나에게 그런 정확도는 새로움 이상이었다. 나의 슈팅 정확도는 겨우 40% 정도였고, 다른 게임 플레이를 감탄하며 구경했을 때도 보통 그들의 정확도는 60% 수준이었다.

게임장에는 게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구경꾼도 많다. 누군가의 게임을 흥미롭게 지켜본다는 것은 그 게임 행위가 발생시키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축구나 야구만이 아니라 <스타크래프트>도 관전한다. 플레이어의 경기를 보는 것으로 관중들이 동시에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어떤 미감(美感)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만약 내가 슈팅 게임-총이나 비행기 같은 무기로 가상의 적과 장애물을 제거하는 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면, 또는 (아주 많이) 관전한 적이 없다면 '85'라는 숫자에 감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게 단지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만큼의 무게인 것이다. '무게'는 '존재'를 지시한다!


▲ <게임의 문화 코드>(이동연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게임 사용자로서 그리고 게임 관중으로서, 내가 읽은 이동연의 <게임의 문화 코드>(이매진 펴냄)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발상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게임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자료를 기반으로, 철학과 문화인류학의 여러 이론을 게임 분석에 적용하려 한 시도 때문이다. 그는 게임이 단지 시간을 때우거나 의미 없는 오락물로 여겨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게임은 하나의 사회적 가치를 담은 의미 있는 문화 텍스트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게임에 대한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고, 게임 중독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아주 쉽게 퍼지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게임과 관련된 어떤 논쟁들이 있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고 그 논쟁의 지점이 어디인지도 잘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자신의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저자의 해석이 다소 선언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당초 저자의 의도는 자신의 해석을 관철하려는 목표를 지향했다기보다는 게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러한 저자의 시도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 그의 희망대로 게임에 대한 연구와 담론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그의 책은 출발점이 될 만하다.

'게임 중독' 을 정의하는 일

이동연은 게임 중독 자가 진단 설문 문항들이 그 자체로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70쪽). 게임 중독 자가 진단법은 마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처럼 보이지만 개별 문항들을 살펴보면 상당한 편향을 담고 있다.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게임을 한 적이 있다" 또는 "게임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싸운 적이 있다"라는 항목을 보자. 그런 일이 게임 사용자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은 사실일 게다. 그런데 그런 일은 과연 게임 행위에서만 발생하는 것일까? 다음으로 "누군가가 게임을 얼마나 했느냐는 질문에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또는, "게임 접속 시간을 숨기려 한 적이 있다" 항목은 게임 사용자의 중독 증상 측정에 유효성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사회적인 인식-게임에 대한 부정-때문에 발생하는 부수적 행위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자가 진단 항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게임 중독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게임 중독의 판정은 게임 사용자의 단독 행동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게임 사용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정의된다. '게임 중독자'가 저기 어딘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게임 중독자'로 정의되는 것이다. 게임 중독에 대한 정의-또는 기준-는 게임만큼이나 가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 정의는 사회적이고 합의적인 것이다.

왜 사람들은 게임에 빠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책은, 게임이 주류 문화의 장으로 진입하지 못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세대 의식의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특히 세대 의식은 게임을 비롯한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청소년 세대를 향한 부모 세대의 불안과 공포의 반영이다(218쪽). 그렇다면 그들의 불안과 공포는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데올로기적 학습에 의한 것인가?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다. 더 세심하게 살펴볼 일이다.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에 대해

사람들은 많고 많은 일들 중에서 왜 게임에 중독될까? 이것은 몰입의 즐거움, 반복이 주는 명쾌함이고, 새로운 역량을 이끌어내려는 추동력과 관련 있다(83쪽). 다수 게임 사용자의 반복적 행위는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그 세계를 가상 세계라고 말해왔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단지 가상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게임의 기술적 조건이 '읽는 텍스트(readerly text)'라면 게임의 플레이는 '쓰는 텍스트 (writerly text)'다. 게임에서 '쓰는 텍스트'는 텍스트를 게이머의 창조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쓰는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게이머들은 각자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대로 게임의 가상 현실을 창조한다. 게이머들이 창조하는 가상 현실은 가상 현실의 기술적 조건 속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가상 현실의 가상 현실'이다. '쓰는 텍스트'는 게임의 가상 세계를 현실보다 더 실재적으로, 게이머의 현실을 가상 현실보다 더 가상적으로 만든다. (92쪽)

이동연은 최근 유행하는 게임 중 하나인 <세컨드 라이프>의 가상 세계가 전적으로 '위조'나 '허구'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생산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일 뿐이며,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의미를 창조하기 때문이다(235쪽). 나는 저자의 주장에 동조한다. 게임은 가상 공간과 현실 공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임에 대한 연구는 그래서 게임의 물질성과 존재에 대한 탐구로 향하고 있다.

21세기 신예 군대는 비행 조정 연습이나 사격 훈련을 시뮬레이션으로 진행한다. 이것은 가상의 훈련이 실재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경험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능력 사이에 일정한 전환 관계가 발생한다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 어딘가에 중첩 지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게임에서 습득한 어떤 능력은 현실에서의 어떤 능력으로 발현될 수 있다. 저자는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사고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다중 인지력과 멀티 플레잉이 필요하다'(109쪽)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그런 능력은 게임의 미덕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에서도 요구되고 있다.

다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상 공간은 안전하고 편리하며 순종적이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의 가상성이 현실의 다양한 욕구를 더 부드럽게 채워줄 수 있다(113쪽). 가상과 현실, 두 공간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라기 보다는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리터러시'가 던지는 의미

이동연은 '게임 리터러시(game literacy)' 개념을 내놓는다. 여기서 게임 리터러시란, 게임이라는 특정한 매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즉, 역동적인 게임의 체계를 읽고 쓰고 행동하는 능력, 컴퓨터의 풍부한 공간들을 차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세상을 건설하고 복합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조정하는 능력, 협동적인 P2P학습에 참여하는 능력이다(172쪽).

그런데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게임 중독에 대한 정의 문제와 게임 리터러시 개념의 도입은 연관되어 있다. 게임의 사행성과 과몰입을 향한 경계가 강하기 때문이다. 게임 리터러시라는 개념을 사용하자는 것은 그 자체로 게임을 우리의 사회·문화적 요소로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는 게임을 오락 행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게임 중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게임을 공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배제의 대상으로 본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극단적인 이유는 게임이 상당한 시간을 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유희를 경험하는 수준에 오르려면 게이머는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게임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면 시간의 소비는 필수적이다(133쪽) 그런 점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게임에 투여되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래서 게임 중독을 정의하는 일만큼이나 게임 리터러시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할 것 같다. 그것은 사회·문화적 인식의 틀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개념을 명시적으로 소개하고 전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한 번 '인식의 경기장'에 던져진 이 개념은 생명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게임의 생애주기론 : 너무 신속한 판단

이동연은 게임에 대한 극단적 주장을 극복하고자 게임의 생애주기론을 제시한다. 프로이트로부터 영감을 받은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의 '생애주기론'은 인간의 정체성 발달을 단계적으로 구분하고, 양극단의 공존을 인정한다(157쪽). 저자는 생애주기론의 장점을 채택하여 게임에 적용할 메타 이론을 만들고자 한다.

게임 시간을 생애주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금 게임을 지나치게 하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시적인 순간에 게임 시간을 지나치게 사용하려는 심리를 조절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게임 시간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획하고 조절하려는 생각 말이다. (167쪽)

저자는 게임에 대한 극단적 대립을 해소하고 좀 더 유연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줄곧 게임을 문화적·인류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려 했던 것과 달리 생애주기론은 심리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저자의 본래적 취지와 잘 어우러지기보다는 맥락적 혼란을 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생애주기론은 '너무나도 신속한 선언'이다. 저자는 '도박 대신에 놀이, 반복 대신에 차이, 중독 대신에 몰입, 가상 대신에 현실이라는 대체 언어들이 게임을 문화적으로 이해하는 중요 코드'라고 말해왔다(58쪽). 그리고 게임 연구가 게임의 존재성과 물질성을 탐구하기를 기대했다(216쪽). 그의 문제 제기와 지향을 상기해 본다면, 그의 생애주기론은 오히려 후퇴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그것이 그의 문제 제기와 지향을 연결하는 든든한 다리가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나의 이론적 배경으로 인해 문화 연구자인 저자의 고유한 맥락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을 수 있다. 게임은 예술-기술-사회의 '잡종적 구성물'이다. 그러므로 그 해석은 쉽지 않고, 단일한 것으로 수렴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새로운 시도를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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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탐험'이라는 말에 대해 늘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지닌다. 말 그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고 조사하는 일, 탐험. 사람들의 가슴이 들뜨는 이유는 이 말의 방점이 '위험'이라는 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탐험은 어쩌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가 방문을 열고나서는 순간부터 인생은 말하자면 탐험의 연속이다. 늘 처음 보는 것들 앞에서 부딪치고 넘어지고, 때로 넘어서고 좌절하며 그것이 기억을 통해 기록되는 것이 곧 삶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나이가 들수록 따뜻한 방 안, 잘 차려진 식탁, 안전한 궤도를 벗어나는 일상 밖의 세계 앞에 때로 너무 나약하다. 때문에 정작 탐험이란 멀고도 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 일쑤다.

사람들이 탐험가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다. 탐험가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판타스틱한' 세계요, 그런 세계로 걸어 들어간 이들은 미지와 위험 앞에 굴하지 않는 진정한 '용자'이겠거니 하는 게 오늘도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는 우리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라도 한번 쯤 컴퓨터 앞에 앉아 '구글 어스(earth.google.com)'를 열면 나오는 둥근 지구를 이리 저리 돌려본 경험이 있으리라. 그들도 언제 어디에선가는 장래 희망에 '탐험가'를 적어 낸 적이 있었기에.


▲ <마지막 탐험가>(스벤 헤딘 지음, 윤준·이현숙 옮김, 뜰 펴냄). ⓒ뜰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된 이른바 탐험의 시대는 산업혁명을 거치며 절정에 올라 20세기에 이르러 종지부를 찍는다. 흔히 말하는, 지도의 공백 지대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에 대한 문화상대주의적 논쟁은 일단 차치해두고라도, 일단의 탐험가들이 남긴 콘텐츠들은 대중의 흥미를 부를 수밖에 없다. 자서전 <마지막 탐험가>(윤준·이현숙 옮김, 뜰 펴냄)를 쓴 스벤 헤딘(1865~1952년)은 그런 면에서 성공한 탐험가다.

열두 살 때 처음 탐험가가 되기로 결심한 저자는 오로지 탐험을 위해 이후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 대학 시절, '실크로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프레디난트 파울 리히트호펜에게 사사 받으며 아시아의 마력에 사로잡히고, 당시까지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 서구에 잘 알려있지 않던 아시아 대륙을 두 발로 걸으며 50여 년간 10여 차례에 걸친 탐험에 나선다.

그 탐험 기간 동안 동시대를 주름잡았던 다른 탐험가, 아문센이나 섀클턴처럼 조난사하지도 않고 리빙스턴처럼 열병에 걸리지도 않은 채 둘러볼 곳 다 둘러보고 쓸 것 다 쓰고 할 말 다 하다 작위까지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미수(米壽)까지 살다 갔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들은 아직까지도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으니 이만한 탐험가의 삶이 또 있으랴.

스벤 헤딘의 업적(?)은 다양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실크로드 서역 남로의 중계 거점이었던 고대 도시 국가 누란을 발견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우랄 산맥, 파미르 고원, 티베트 등을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여정에서 발견한 이 유적은 고대 중앙아시아 문화를 밝히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 지도 제작을 위해 탐사했던 타림 분지에서 고비 사막까지의 여정, 유럽 첫 트랜스 히말라야 탐사 등 당시의 열악한 정보와 장비를 극복하고 살아 돌아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는 건 어쩌면 그 걸음이 지닌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최고의 성공이었는지 모른다.

책은 흥미진진하다. 700쪽이 넘는 두께에 대한 부담보다는 그저 신드바드의 모험을 읽듯 다음 장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술술 넘어간다. 그러나 한편으론 스벤 헤딘의 이런 활약과 무용담이 과연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필요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왜 계속 탐험을 하는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만큼 내게 매력적인 것은 없다."

언뜻 지금의 탐험가들이 늘 텔레비전에 나와 이야기하는 말과 다를 바 없는 탐험의 이유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어릴 적 꿈을 향한 평생의 열정과 걸음이 '정복'이라는 단어로 점철되기엔 세상은 너무 넓고 또 다양하다. 스벤 헤딘의 탐험 성과와 달리 그가 말년에 정치적으로 친나치 성향의 기고와 저술 활동을 해 비판받았던 것이 저 정복이란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고도 생각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누가 누구를 정복했으며, 또 누가 누구를 탐험했는가. 어느 날 파미르 고원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작은 마을에 한 무리의 당나귀와 낙타를 끌고 나타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백안의 사내는 과연 탐험한 것인가, 탐험 당한 것인가.

아니, 죄르지 루카치의 말을 빌자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차라리 행복했던 것인가.

지금 장래 희망에 의사, 판사, 대통령이 아닌 무언가를 적어낼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차라리 일상의 굴레, 스펙(specification) 바깥의 세상을 향해 그 미래가 어떻건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숙제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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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은 살인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정상적인 인물이 자기를 방어하려다가 사람을 해쳤을지라도 경악하고, 상대방이 살아있기를 바라면서 흔들어 본다.

그런데 살인이 숭고한 의무가 되는 단 하나의 경우가 있다. 전쟁이다. 또 전쟁은 하려고 해서 하지 않는다. '터진다.' 전쟁이라는 운명에 휘말린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군대가 되어 전쟁터에 나가 적을 궤멸시키고, 징발하고, 진지를 구축한다. 그러니 어째야 할까? 오, 하느님, 전쟁이 터지지 않게 우리를 보우하소서!

아니다, 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베르타 폰 주트너는 당대에 자신의 조국인 오스트리아와 그 나라가 속한 독일 연방이 치렀던 네 차례의 전쟁을 민간인으로서 겪고, 참전 군인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하고, 신문 기사와 협정문 등을 모으면서 전쟁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추상화 과정을 되돌려 놓았다. 살인으로, 약탈로, 파괴로.


▲ <무기를 내려놓으라!>(베르타 폰 주트너 지음, 정지인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무기를 내려놓으라!>(정지인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의 전쟁에 대한 묘사는 도대체 전쟁을 다룬 다른 많은 소설들은 왜 딴 소리를 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적나라하고 비통하기 그지없다. 전쟁은 범죄다. 인류가 개인들 간의 이해 충돌을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을 정도의 문명에는 도달했지만, 집단으로는 아직도 야만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은 벌어진다. 이것이 주인공들이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가며 깨닫는 바다. "뭐? 야만? 이렇게 세련된 문화를 지닌 우리가?"하고, 주인공의 친구들마저 웅성거린다. 이어지는 다음 대사는 이렇다. "19세기 말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 소설은 120년 전에 출간됐다. 당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켜 반전 문학의 대표작이 되었고, 저자는 평화 운동의 선구자로서도 헌신했다. 저자가 죽은 이듬해에 그가 우려했던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그이후로도 수없이. 그럴수록 이 소설은 낡을 새가 없었던 셈이다. 21세기 초에 사는 우리가 "뭐? 야만? 이렇게 고도의 과학기술 문명을 가졌는데?"라고 코웃음 친다면, 19세기 말보다 더한 착각이다. 책을 덮고 싶도록, 전쟁은 똑같다. 규모가 커졌을 뿐. 1870년에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도서관에 4분에서 5분 사이에 19만3722발의 총알이 쏟아졌다고 한다. 오늘날 쏟아지는 것은 총알이 아니다.

모든 전쟁은 정당 방어이다. 어느 나라도 자기가 먼저 공격이나 침략을 했다고 하지 않는다. 다 방어만 했는데 전쟁이 일어나는, 이 수수께끼를 소설은 풍부한 역사적 자료로 파고든다. 알고 보니 정당 방어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구나!

부당하고 폭력적인 적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려면, 망설이다가 최적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때론 먼저 선제공격해야 한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칼을 뽑아든 자들을 (아직은 달려들지 않더라도 이쪽에서 먼저 달려들어) 칼로써 죽게 하는 것이다. (463쪽)

전략적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전쟁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새를 (그것이 남의 땅에 있을지라도) 확보해두어야 한다. (550쪽)

실제로 19세기 말에 이런 이유로 자신을 정당하게 방어하려는 나라들이 다른 나라로 밀고 들어갔다. 최근에는 미국이 이라크로, 중국이 티베트로. 그런데 적이 얼마나 '부당'하고 '폭력'적인지, '최적'의 시기란 언제이고 '전략'적으로 그 요새가 '필수불가결'한지 어떤지를, 일반 국민들은 모른다. 전쟁은 통치자가 결정하며, 전쟁에 관련된 대부분의 정보는 보안 사항이다. 설령 정당 방어를 위해 전 세계를 점령해야 한다고 할지언정, 국민들은 반박할 정보가 없다. 어쨌거나 전쟁이 개시되면 수행하는 건 국민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정부의 말을 고스란히 믿은 것뿐. 그리고 지금은 이 불행을 누가 초래했는지 따지고 비난하며 흘려보낼 시간이 없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모든 힘과 모든 정신력을 동원해 그 침략을 막아내야 하고, 아니면 초연한 자기희생으로 함께 몰락해가는 수밖에 없소."(542쪽)

전쟁이 끝나고 한두 해만에, 전쟁이 시작될 때 모든 인구가 함께 느꼈던 증오와 흥분, 적대감과 승리의 희망 같은 감정은 다 씻겨 버린다. (283쪽)

인류 역사상 있었던 그 많은 전쟁의 이유를 누가 기억할까? 기억한다 한들 그게 정말 이유였다고 누가 믿을까? 전쟁의 이유야 언제라도 생길 수 있다. 전쟁은 머리 위의 폭발물처럼 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준비하고, 누군가가 박수치며 분위기를 몰아가고, 누군가가 승인을 해서 생기는 일이다.

"놀라운 것은, 민중이 전쟁에 저항해 봉기하지 않는다는 사실, 사회 전체가 '전쟁'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선장이 난파를 피해야 할 의무가 있듯이, 모든 통치자는 전쟁을 피할 의무가 있다. (…) 국민들이 그런 사실을 이해한다면, 자신은 이유 없이 죽지 않겠다고 거부한다면, 전쟁도 사라질 것이다" (기 드 모파상) (533쪽)

19세기 말에 저자가 꿈꾸었던 '국제 중재 재판소'(국제형사재판소)와 유엔(UN)이 있는 오늘날에도, 전쟁은 끊이지 않는다.'단번에 법으로써 야만적인 무력을 영원히 대체'한다는 것은 여전히 요원한 꿈이다. 그러나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지당하다. 전쟁 아닌 다른 방법을 준비하고 있어야만 한다.

'상비군은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 (…) 다른 나라들을 자극하여 한계라고는 모르는 그 무장의 규모를 서로 능가하려고 겨루게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평화를 위해 군비에 사용되는 비용이 끝도 없이 부담스럽게 늘어가고, 그것이 짧은 전쟁을 치르는 비용보다 더 부담스러울 지경이 되며, 상비군 자체가 그 비용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칸트의 < 영구 평화를 위한 예비 조항들> 셋째 조항) (489쪽)

너무 이상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미국 군수 산업의 재고 적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전혀 사용하지도 않을 그것들을 만드느라 그 모든 비용을 들인다는 건가요?"라고 이 소설은 묻고 있다. 무기 아닌 다른 수단을 찾아내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평화를 위한 전쟁 같은 형용모순 말고, 평화를 정착시켜서 전쟁을 막는 방안들.

흥미롭게도 저자는 전쟁 시에 사람들이 조국이든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몰입에서, 희망을 본다. 인간에게는 개인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는 건, 우리 인류에게는 숭고한 사랑의 능력이 아주 많다는 것, 다만 그 능력을 해묵은 적의의 도랑에 쏟아 붓고 있다는 것." (542쪽)

개개인들 위에 조국이나 민족이라는 더 넓은 개념을 놓을 수 있다면, 그보다 한 단계 넓은 개념도 놓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인류.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 전쟁하는 쌍방이 형제고, 양쪽 다 훼손되어서는 안 될 문명이다.

연평도 포격으로 우린 매우 충격을 받았다.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다신 그런 사태가 벌어져서는 안 될 텐데, 최선의 방지책은 평소에 꾸준히 남북 간에 평화를 일구는 것이다.

우리 후손에게 가장 고맙고 자랑스러운 조상이 어떤 조상이겠는가? 전쟁을 물려주지 않는 조상 아닐까? TV에 자주 보이는 자주 국방의 당당한 무기들, 믿음직하지만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또한 무기, 살인의 도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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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의 <정의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악셀 호네트의 <정의의 타자> 등 국내 출판업계에서도 '정의'를 다루는 수많은 서적들이 풍성하게 번역되어 나왔다. 그러나 무수한 논의와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정의 불감증에 걸려 있다.

정의를 갈구하거나 부정의에 분노하기보다 정의의 문제에 무감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억울한 죽음, 국제적으로 심각해지는 양극화 현상, 일상에서의 성적, 종교적 차별 등 주변에서 우리는 수많은 부정의와 불평등을 목격하지만 '내 집 마련'의 소시민적 욕망은 이 모든 부정의의 현상을 압도한다.

전 지구적 신자유화의 강력한 힘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기보다 보수화시키며 나아가 무력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실 앞에 정의에 대한 철학적인 담론은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 왜 정의에 대한 규범적 담론은 부정의한 현실에 대항하기 위한 실천의 길을 열어주지 못하고 있는가?


▲ <지구화 시대의 정의>(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이런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차분히 모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낸시 프레이저의 <지구화 시대의 정의>(김원식 옮김, 그린비 펴냄)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프레이저는 이 책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익숙한,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질문과 씨름하는 데서 시작한다.

혹자는 이에 대해 정의란 경제적 재분배의 문제라고 대답한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20세기의 운동들은 대부분 경제적 재분배의 요구를 제기해왔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오늘날의 많은 사회운동은 경제적 재분배만으로는 소수자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종교적, 문화적, 성적 정의의 문제는 재분배의 요구가 아니라 "인정"의 요구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는 분배의 문제인가 인정의 문제인가? 이에 대해 프레이저는 일찍이 <분배냐, 인정이냐>에서 악셀 호네트와의 논쟁을 통해 정의는 인정의 차원과 경제적 재분배의 차원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지구화 시대의 정의>에서 프레이저는 이에 한 발 더 나아간 대답을 제시한다. 즉, 그녀는 이제 정의론을 삼차원적인 것으로 구성한다. 정의론은 경제적 분배, 문화적 인정의 차원과 더불어 "정치적 대표"의 차원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제시하는 세 번째 정의의 차원인 "정치적 대표"란 어떤 것인가?

프레이저에 따르면 정치적 차원은 정당한 분배와 상호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범위 안에 "누가" 포함되고 배제되는지를 말해주는 차원이며, 의사 결정을 위한 규칙을 확립함으로써 경제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 모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절차"들을 설정하는 것과 연관된다.

프레이저가 정치적 대표를 경제적인 분배나 문화적인 인정과 별도의 차원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후자의 두 가지 문제와는 개념적으로 명확히 구별될 수 있는 부정의들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 참여를 방해하는 독특한 정치적 장애물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은 국가 정의에 관한 논쟁에 참여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방식 속에서 부정의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정의를 삼차원적으로 확장하는 이러한 시도는 이 책의 서두일 뿐이다. 이 책에서 프레이저가 더욱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그 동안의 정의 담론의 스케일이 더 이상 지구화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정의의 문제들이 이미 초국적이고 지구적인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의에 대한 담론은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스케일을 전제로만 진행되어 왔고 따라서 비판이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레이저는 후자를 "케인스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Keynesian-Westphalian frame)"이라고 명명한다. 그녀에 따르면 지금까지 정의에 대한 전형적인 논쟁들은 이러한 틀 속에서 진행되었다. 즉, 지금까지의 정의의 담론들은 근대적인 영토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시민들의 관계만을 다루고, 국가 단위의 공중들 내부의 토론에만 관련되었다. 재분배를 요구하는 정의의 담론들은 국가의 부를 공정하게 분배할 것을 호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상호 인정을 요구하는 정의의 담론들은 국가 내부의 신분적 위계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베스트팔렌적 틀 안에서의 정의 담론은 정의 문제의 정치적 당사자를 오직 개별 국가의 시민으로만 제한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정의의 문제들은 일국의 스케일, 시민의 스케일을 넘어선다. 일상을 규정하는 사회적 과정들이 영토적 경계들을 넘어 진행되고 있다. 초국적 기업들, 국제적 환투기 세력들, 대규모 기관 투자가들이 국경을 넘어 국내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정부 차원과 비정부 차원 모두에서 초국가적, 국제적 조직들이 점차로 성장하고 있다.

재분배의 요구를 국민국가에만 집중했던 노동조합은 점차로 국제적 동맹을 모색하고 있으며 사파티스타 운동에 고무된 빈곤한 농민과 원주민은 그들의 투쟁을 초국적기업의 약탈과 지구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들과 결합시켜 나가고 있다. 인정 투쟁 운동도 점차로 국가의 지평을 넘어서고 있다. 여성주의자들은 가부장적 관습에 반대하는 투쟁들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국제법을 개혁하려는 운동에 매진하고 있으며, 한 영토 국가 내부에서 차별받는 종교적이고 종족적인 소수자들은 국제적 여론을 동원할 수 있는 초국적 공중들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프레이저는 이제 정의의 담론은 지구적 스케일에서의 정의가 어떻게 모색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탈(脫베)스트팔렌적 틀"로 명명한다.

흥미롭게도 프레이저는 이러한 "탈베스트팔렌적 틀"을 지향하는 대표적인 사회운동의 사례를 여성주의에서 찾고 있다. 오늘날 젠더 투쟁의 최전방은 일국의 차원이 아니라 유럽 혹은 세계사회포럼과 같은 초국적 공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여성주의 제2의 물결의 역사를 세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68 혁명과 함께 폭발했던 첫 번째 국면에서 여성주의자들은 젠더 문제를 배제했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도전하였다. '사적인 것'을 정치적 주제로 만들면서 그들은 사회·경제적 재분배를 넘어서서 가사 노동, 성, 출산이 정치적 문제의 핵심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이 국면에서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젠더 평등의 문제가 복지 국가라는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국면에서 여성주의자들은 젠더 평등보다는 젠더 차이를 인정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프레이저는 이러한 관점의 변화를 당시의 경제적인 변화와 연관시킨다.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복지 국가의 토대를 붕괴시켰고, 정치·경제상의 부정의에 저항할 수 없게 되면서 여성주의자들은 문화적 가치나 신분적 위계 질서에 기초한 남성 중심주의의 해악들을 공격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인 투쟁을 문화적인 투쟁에 종속시키고, 재분배 정치를 인정 정치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여성주의자들은 그 사이 패권을 장악하게 된 전 지구적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주의는 이제 세 번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여성주의자들은 초국적 세력들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인식하게 되면서 젠더 부정의에 대해 적절하게 도전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여성주의 담론이 근대 영토 국가라는 틀 속에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에 여성주의자들은 지역적인 가부장적 관행에 대한 투쟁들을 국제법을 개혁하려는 초국적 운동과 결합시키고 있다. 즉, 그들은 초국적 정치 공간을 통해 평등주의적이고 성(性) 인지적인 사회복지와 관련된 보호 조치들을 창출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정의의 담론을 오늘날의 정치 실천과 연계시키기 위해서는 정의의 스케일을 지구화시켜야 하며, 정당성과 정치적 유효성을 창출하는 공론의 장 역시 초국화되어야 한다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오늘날 국내의 정의 담론과 사회운동의 나아가야할 지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최근 국내의 사회운동은 여전히 국가에 의한 재분배 요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용산 참사에 대한 국내 사회운동의 대응이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 집회는 시민들의 권리 박탈, 불공정한 소득 재분배, 이명박 정부의 무능력 등을 비판하는 데에만 집중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 역시 국제적 네트워크를 모색하기보다 국내의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물론 국내에도 프레이저와 같이 전 지구적 스케일에서 정의의 실현을 모색하는 운동 조직이 미약하나마 형성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출범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가 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이 조직은 지역적 문제들과 얽히면서 나타나는 지구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계 각 지역에 글로컬 포인트를 마련하고 이들 간의 초국적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의 스케일을 지구화해야 한다는 프레이저의 주장은 여전히 몇 가지 의문점을 남긴다. 우선 정치적 참여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초국적 공론의 장을 마련한다고 할 때 거기에 참여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모두인가? 아니면 이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인가? 누가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가?

그밖에도 프레이저가 주장하는 정의 담론은 다양한 스케일에서 발생하는 다층적인 부정의의 문제들이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부정의의 문제는 지구적 부정의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이에 대해 도린 메시는 "장소의 지구적 의미"라는 개념을 통해 지구적인 것이 지역적인 특징과 결합되어 독특한 지역성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프레이저가 말하는 초국적 정의의 담론은 가정, 지역, 국가 등의 다양한 스케일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다층적인 부정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러한 문제들이 앞으로 낸시 프레이저의 연구에서 심화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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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많은 직장인이 송년회 기피 대상 1위로 '폭탄주를 돌리는 선배', '술버릇이 나쁜 동료' 등을 꼽았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기피하고 싶어 하는 인물은 <불안 증폭 사회>(위즈덤하우스 펴냄)를 쓴 심리학자 김태형 같은 이가 아닐까?

"너희들, 지금 행복하냐?"

그는 <불안 증폭 사회> 서문에서 이런 질문으로 대학 동창회 자리를 썰렁하게 만든 일화를 전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 아래 현실을 잊기 위해 달리는 술자리나 명함을 돌리느라 정작 상대방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는 동창회에서 그는 자꾸 현실을 불러내고 사람을 직시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이를 치료하려면 먼저 병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많은 이들이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불안 증폭 사회> (김태형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심리학이 사회를 읽어내는 데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판단에 배움의 길을 택한 그였지만, 대학과 대학원의 '심리학과'는 그의 의지를 구현하기 적합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심리학계를 떠났던 그는 한동안 노동계에서 사회운동에 몰두하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 주류 심리학계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이론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심리학을 현실 위에 우뚝 세우고자 한다.

김태형에 따르면,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 인간 심리를 분석하는 진화심리학 역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동기"라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오류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그는 나이 많은 남성과 젊은 여성이 결합하는 이유를 번식 욕구로 설명한 곽금주(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나 중년 남성이 룸살롱에 가고 터치폰을 사는 이유를 수컷 특유의 '비벼대는 본능'에서 찾은 김정운(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등의 분석으로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마음의 병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이 70%라면 개인적 요인은 30%다"라는 말로 사회 현실과 개인의 행불행 사이의 연관성을 요약한다.

<불안 증폭 사회>는 이러한 전제 하에 "외환 위기라는 크나큰 정신적 외상을 겪은 한국인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보고서"로 쓰인 책이다. 그는 "오늘의 한국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우울하며 무기력하고 또 분노하고 있다"면서 책 구석구석 그 증거들을 전한다. 한국은 국민들의 희생을 거름 삼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 됐지만, 가입국 중 소득 격차 2위, 근로 시간·비정규직 비율, 이혼률과 자살률 1위(2009년 기준)라는 '불행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나라다. 이 책은 이런 수치들과 구체적인 사례들로 숨이 턱턱 막힌다.

경제 성장이라는 과업 속에서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국인들, 2011년에는 희망을 만들 수 있을까. 김태형이 2010년 세밑,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의 공저자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우석훈 소장은 몇 해 앞서부터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을 지적해 왔다. 비록 학문적 바탕은 다르지만, 경제학자인 우석훈의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 역시 심리학자 김태형의 비관적 입장과 비슷하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인의 마음을 만신창이로 짓이긴 신자유주의의 만행을 고발해야 한다"고 두 학자는 입을 모은다.


▲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김태형 씨(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심리학자가 사회 비평에 뛰어든 예는 많지 않다. <불안 증폭 사회>를 놓고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달라진 한국인의 마음에 주목한 심리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이런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김태형 : 외환 위기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경제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속에서 사람이 병들거나 망가지는 일에 등한시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심각하게 병들었다. 이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하면 사회 발전이 힘들 거라고 봤다. 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 책을 썼다.

우석훈 : 이 책은 그동안 심리학을 개인 차원으로만 환원했던 것에서 벗어난 시도라 반가웠다.

최근 한국 사회를 보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고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하나는 경제 근본주의고 하나는 개인 환원주의다. 후자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 심리에 돌리고, '너만 잘하면 돼'라는 식의 긍정적 사고를 해결 방법으로 삼는다. 말도 안 된다. 당장 입에 밥이 안 들어가는데 긍정적 사고가 뭘 바꾸겠나.

한국 사회의 미학, '삼성은 아름답다'

프레시안 : 얼마 전 김규항 씨가 고등학교 교사인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반 아이에게 사회 비판 의식을 길러주기 위해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게 했더니 의외로 "이건희처럼 되고 싶다" 이런 반응이 나왔단다. <불안 증폭 사회>에서 병인(病因)으로 진단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이기심, 경쟁 심리가 교실까지 지배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인 듯하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 <불안 증폭 사회> 저자 김태형 씨. ⓒ프레시안(최형락)
김태형 : 아이들의 이기심이 강한 건 그만큼 어린 시절부터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도 공동체 속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대학 시절 과 분위기만 해도 하나의 단결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다. 어린이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철저한 경쟁 구도가 펼쳐진다.

어른들은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들을 칭찬해 준다. 아이들은 가장 큰 행동 동기가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걸 얻기 위해 경쟁 구도 속에서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로 자라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 공동체 개념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석훈 : '다방구'를 모르는 세대들이 더하다. (웃음) 그런데 이건희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은 이기심 외에도 다른 것들이 겹쳐진 것 같다. 과거 한국에선 군인이 영웅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CEO가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시대다. 재작년인가 초등학생, 유치원생들 데리고 생태 캠프를 했는데 다섯 살짜리 남자애한테 "뭐 되고 싶니"라고 물었더니 "CEO 되고 싶어요"라더라.

그리고 1970년대부터 관찰된 현상인데, 한국엔 메갈로매니아(megalomaina, 과도한 권력욕)에 대해 미학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거대한 것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 강하고, 지금은 그게 돈에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돈 잘 버는 회장님을 볼 때 부러움을 떠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김태형 :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사회적 동기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게 가장 큰 동기라면, 그런 걸 체득한 사람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건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회라면 돈과 출세, 경쟁에서의 승리라는 동기가 강한 사회인 셈이다.

우석훈 : 내가 아는 어떤 삼성 직원의 부인은 TV에 이건희 회장이 나오면 고맙다고 절까지 한다고 한다. 연말에 보너스를 그렇게 많이 주니까 저절로 절이 나온다는 거다.

김태형 : 삼성은 직원들에게 특등 대우를 해주기 때문에 경제적인 불만을 가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석훈 박사가 얘기한 것처럼 회사가 무슨 봉건 영주처럼 회사원에게 시혜를 주듯 하고, 회사원들은 "감사합니다" 하며 받는 방식으로 관계가 유지되다 보니 권리 의식이 없다. '삼성맨'은 왠지 일은 귀신같이 잘 해도 창의성이나 활기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의존심이 강할수록, 권리 의식이 없을수록 그렇다.

"나 혼자 이 미친 세상을 어떻게 바꿔?"

프레시안 : 의존심은 비단 '삼성맨'들에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책에서도 많은 한국인들의 경제적 의존심을 지적했다.

김태형 : 한국인들이 암울한 군사 독재 시절을 겪고, 거기에선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정치 민주화 투쟁을 오랫동안 해온 결과 정치적 의존심은 많이 줄었다. 그런데 경제 문제에 대해선 싸운 경험이 없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력 끝에 민주노총을 만들었지만 기껏 시작의 시작일 뿐이었다. 서구에서는 이미 200년 전에 경험한 것이었다.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찾을 것이며, 한국이 어떤 경제 발전 노선을 택할 것이며, 거기서 노동자가 어떤 주체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자본가 계급과 밀고 당기기를 했어야 했는데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 경제 문제와 관련해선 의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재벌들이 있어야지, 국민들이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심리가 만연해 있다. 이런 심리는 경기 변동에 민감한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경기 변동은 주로 기업들이 주도하니까 거기에 대한 의존심이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우석훈 : 다른 나라보다 유독 한국에서 심각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서울 의존 현상이다. 프랑스도 중앙 집권 시스템이 강하지만 수도에 대한 의존도가 우리만큼 심하지 않다.

서울 외의 지방은 모조리 '디 아더스(the others)'인 기형적인 상황이다. 지방에선 그 곳에서 뭘 어떻게 생산하려는 고민은 없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토건 아니면 관광 산업에 매달리고 있다. 그런데 토건, 관광 다 경기 민감도가 굉장히 높은 사업이다. 경기가 좋을 땐 다 달려들지만 나빠지면 가장 먼저 거품이 꺼진다. 그렇게 경기 사이클을 심하게 타는 산업에선 사람들의 의존성도 강해진다.

김태형 : 사람에게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전기 충격을 주겠다고 말하고 충격을 주면, 처음에는 못 견디다가도 나중에는 견딜 수 있게 된다. '아, 이제 오겠구나' 하면서. 그런데 다음 충격이 1분 있다 올지, 10분 있다 올지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이라면 같은 충격이더라도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언제 고통이 올지 예측이 돼야 심리 통제도 가능한 거다. 경기 변동에 의존하는 산업을 여기에 비유할 수 있다. 누군가가 변동을 만들어 줘야만 되고 각자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고통스럽고 무력해지는 것이다.

하나 더 지적하고 싶다. 갈수록 의존심이 강해지는 이유는 외환 위기 이후 공동체가 모조리 붕괴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쟁 원리를 학교, 직장, 기층 공동체에까지 도입하면서 개개인이 외적 충격에 그대로 노출되게 됐다. 보호해줄 수 있는 공동체가 없으면 개인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의존심이 높아졌을 때,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면 거기에 모든 걸 맡겨버리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도 대중들의 경제적 의존심이 높아졌을 때 등장해서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나 홀로 볼링'은 미친 짓이다"

우석훈 : SBS 드라마 <자이언트>를 보면 기층 공동체가 붕괴되는 기간에 강남 공동체는 더욱 강화됐더라. 경제인류학에서 '우정'과 '환대'가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는 게 있는데, 없는 사람들한텐 우정도 환대도 없지만 부자동네에 가면 우정 두텁고 환대가 뜨겁다. (웃음) 이런 과정 속에서 보통의 공동체는 깨지고 지배층의 공동체는 강화되는 이원 구조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김태형 : 물론 지배층 공동체가 강화된 경향이 있지만, 그건 공동체라기보다 하나의 '동맹'이다. 속으론 욕하지만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겉으론 똘똘 뭉친다. 반면 기층 공동체는 갈가리 찢어졌다. 보호해주는 공동체가 없으니까 외부 충격을 고스란히 개인이 받게 됐다.

이 상황에서 무력감을 안 느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원래 자본주의 시스템은 공동체가 있기에 잘 돌아갈 수 있는 건데, 지금 같이 공동체가 다 붕괴된 상황이면 자본주의도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국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공동체가 탄탄해서였다고 보는 경제학자들도 있다던데….

우석훈 :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 나오는 동네를 보자. 중산층 비율 높고 백인과 교회 다니는 이들이 많은 동네인데 공동체가 굳건하고 자본주의 시스템도 제일 잘 돌아간다.

199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 수업 시간에 한국 경제를 분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한국 경제가 원래 상황이 비슷했던 아프리카나 중남미 국가들에 비해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곗돈' 문화가 거론됐다. 당시엔 동의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계는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누군가 창업을 한다고 하면 돈을 모아줄 수 있는 장치가 됐고, 그걸 통해 노동이나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김태형 : 그렇다. 사회를 이끄는 동력은 집단에서 나온다. 기업의 힘 역시 기업 집단 자체에서 나오는 거지 개인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공동체 복원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발전도 지체될 거라고 본다. 무한 경쟁 체제에서 나오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도 개인 간 경쟁을 치열하게 조장한 결과 경제 범죄가 치솟아서 그걸 해결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 있다. 기업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일하니까, 전부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우석훈 : 1990년대에 미국에서 <볼링 얼론>이란 책이 나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나 홀로 볼링>(로버트 퍼트넘 지음, 정승현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볼링이 원래 서로 골려먹거나 박수치는 재미로 다 같이 하는 게임인데, '나 홀로 볼링' 족이 그렇게 늘었다는 얘기다. 혼자 무슨 재미로 볼링 치나, 이거 이상하다 싶어서 봤더니 공동체가 붕괴돼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는 거다.

공동체가 깨지면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줄고 사회 전체적인 생동감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게 소위 좌파나 진보 세력에 국한된 게 아니라 보수한테도 중요한 문제다.

"진보여, '마음'을 보라"

김태형 : 이렇게 계속 외부 충격을 개인이 오롯이 흡수하는 상태가 계속되면,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의존심과 무력감이 파시즘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이렇게 못 산다!' 하면서 다 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후자로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혼자 당하지 말고 좀 단결해 보자는 자각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진보 진영이 지금까지 왜 사람들의 심리를 후자로 끌지 못했을까? 진보적 정책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뭘 바꾸려는 마음을 갖기엔 굉장히 지쳐있어서 그렇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인데, 우울증 환자한테 "어이, 나가서 운동도 좀 하지 그래?" 이렇게 해 봐라. 운동 할 수 있었으면 애초에 우울증 안 걸린다. (웃음) 그러니까 좋은 정책이 나오고 그게 좋은 줄 알아도 '운동'하러 나가지 않는다는 거다.

이런 문제들을 진보 세력에게 화두로 던지고 싶다. 정치 문제에 관심을 덜고, 긍정 심리학이니 엉터리 책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이냐. 그런 책 읽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지 않나. 차라리 진보 조직이 그걸 하자는 거다. 대중들한테 정치적 공약만 내세우지 말고 마음을 위로하는 일, 사람을 모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다.

우석훈 : 진보신당 창당 때부터 가까이에서 지켜봤는데, 당직자들이 요즘 가장 지쳐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수없이 깨지고 떨어지고 그랬는데 요즘처럼 지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지난 6·2 지방선거 때 나름 약진해서, 다음 대통령 선거 때는 TV 토론회에 후보를 낼 수 있게 됐는데도 말이다.

비슷한 현상이 시민단체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다. 개인적 삶에 여유가 없다 보니 새로이 뭔가를 하자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내부에서의 싸움만 커져 간다. 진보신당 게시판 같은 데서 '너는 프티부르주아다', '개량주의자다' 이러면서 서로 욕한다. 노선이 다르다면 당연히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서로 싸운다.

김태형 : 진보 세력이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한국인들의 자기 부정 심리가 계급 배반 투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버라이어티>의 영화평론가 데릭 엘리가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를 보고 "이런 유의 극단적인 가학과 폭력 그리고 그에 따른 극심한 자기혐오는 다른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최근 한국 영화엔 불편한 폭력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등장인물들도 악한이 아니더라도 동일시할 수 없는 사람들뿐이다.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좋아할까? 전혀 아니다. 사회에서 '루저'로 낙인찍힌 이들은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다. 여기서 탈피하려면 다른 걸 잡고 쫓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상 숭배, 중산층 모방 현상, 계급 배반 투표 현상이 나오는 거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루저'는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게 이익이지만 논리라는 게 통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싫은 감정,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동기가 먼저니까. 이들은 가끔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진보정당에 표를 준다. 그런데 조금만 잘못해도 돌아선다. 투표 이유가 사회 개혁이라기보다 자기 분노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이 교체돼도 위험한 거다. 정권이 바뀌니까 좀 나아진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면 점점 더 정치적 무관심으로 갈 수 있으니까.


ⓒ프레시안(최형락)

40대 남성들이 취미를 갖는다면…

프레시안 :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40대 남성들이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 특히 개인적 측면, 사회적 측면에서 모두 만족 수준이 낮다. 두 분 다 40대 남성인데 주변을 관찰해보면 어떤가.

우석훈 : 아까 시민단체에 활력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나마 요즘 잘 돌아가는 시민단체들은 주부들이 본진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학부모, 특히 엄마들이 주축이 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단체는 처음엔 될까 싶었는데 엄청 잘 돌아간다고 한다. 이에 비해 20대가 본진이 되는 시민운동은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잘 안 되고, 40대 남성이 본진이 되는 운동은 그냥… 우울하다. (웃음)

김태형 : 40대 남성들 문화 자체가 우울하다. 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제 얘기를 잘 못 꺼내 놓는다. 술 안 먹고 얘기할 수 있는 훈련도 안 되어있다. 회의 5분 만에 끝내고 '2차 가서 얘기하자'고 한다.

내 경우, 졸업 후 한동안은 고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었다가 뒤늦게야 한두 번 동창회에 나가 봤는데 서로 출세한 거 자랑하고 명함 주고받고, 나중에 뭐 이용해먹을 거 없나 눈치 보는 식이라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서 친구들한테 "너희들 행복하냐" 하고 물었더니 자리가 썰렁해졌다.

내가 자꾸 불편한 질문을 던지니까 다음에 자리에 나오는 애들은 항상 반으로 줄어들어 있더라. (웃음) 그런데 그런 속 얘기가 가능해진 사이는 정말 오래 간다. 못 해봐서 그렇지 남자 넷, 다섯 모여서 차 놓고 속 얘길 다 하면 분명 재밌고 대화 수준도 상당히 높을 거다.

우석훈 : 3년 전부터 "우리가 차를 마시면서 운동과 혁명을 논하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얘길 했었다. (웃음) 우리도 술 말고 차 마시면서 창당이나 집권에 대한 얘기 좀 해보자고. 어떤 조직에선 송년회 5시간 할 동안 결정한 게 2차 어디 갈지 딱 하나였다고 한다. (웃음)

프랑스 친구들이랑 만나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붙잡고 수다를 떠는 통에 지칠 지경인데 한국은 수다 떨 줄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 권력 있는 사람들은 아예 남의 말을 듣질 못하고. 사람이 말을 하고 듣기도 하고 반박도 해야 하는데 그런 테크닉이 떨어진다.

김태형 : 40대 남성들이 경쟁의 최전선에 몰려있다 보니 자기 마음 드러내거나 관계 맺는 일에 서툴다. 또 문화적 소양도 없고 대부분 취미가 없다. 거기서 유일한 취미가 바로 술이고. 이런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는 불우한 사회인데 지금 한국이 바로 그렇다.

책에서 지적한 심리 코드 중 하나인 쾌락주의도 한국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한국에서 남자들만 모인 술자리에서 1차, 2차로 올라가는 차수가 의미하는 건 자기학대의 강도 아니면 '터치'의 농도 둘 중 하나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 가서 현지 파트너들한테 '한국과 똑같은 곳으로 가자'고 요구하고, 상대방은 얼굴 붉히는 일들도 종종 벌어지지 않나.

왜 이럴까. 일제 강점기 때 요정 문화가 들어와 기득권 세력의 관행이 됐고, 보통의 사람들도 기득권의 문화를 추종하고 따라가면서 굳어진 거다. 한국 남자들이 딱히 더 쾌락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그런 곳들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손쉽게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외의 다른 문화를 모르는 거다.

우석훈 : 룸살롱이나 골프장 문화의 대안으로 나왔던 게 낚시였는데, 그것도 안 되겠더라. 낚시 가서 술 먹으니까. (웃음) 요즘 나도 그렇고 음악 듣는 취미를 가진 남성들이 늘었는데 그것도 좋은 대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기기 평가하려면 맨 정신이어야 하는데, 그러면 술 안마시니까. (웃음)

책 보고 습작 쓰는 목적으로 '주부 독서 클럽'이라는 모임을 갖고 있는데 여기 나오는 사람들에게선 우울증을 발견할 수 없다. 구성원들은 부자도 아니고, 중산층이라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 프랑스나 스위스에서 봤던 지역 단위의 작은 모임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문화적으로 풍성해져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불안 증폭을 멈춰라!"

프레시안 : 40대 남성들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불안 증폭'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태형 : 어떤 치료든 첫 단계는 병에 걸린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고,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내가 돌을 맞았는데, 돌 던진 범인이 누군지 안다면 그 사람을 잡든 경찰에 넘기든 문제를 바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는 돌 맞은 것과 달리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가 없고 원인도 잘 알 수가 없다.

일단 우리가 병에 걸렸고 이 병이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왔으며,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일단 알아야 한다. 원인을 알고 고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 그게 출발점이다. 그 다음, 병인을 제거하기 위해 치료의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그 단초가 바로 공동체다. 병인을 알아챘다 한들 해결은 혼자선 안 된다. 여럿이 함께 머리와 살, 가슴을 맞대야 마음을 빨리 회복할 수 있고 사회 활동에 참가할 수 있다.

궁극적으론 한국 사회가 발전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OECD 회원국이 되고 경제력 10위권이 됐는데, 그럼 다음 목표는 1위인가? 배고픔 면하자고 해서 앞만 보고 달려오고 선진국 만들자고 해서 장시간 노동 견디며 살아 왔는데, 돈을 63빌딩 높이만큼 쌓는다고 해도 사람이 병들면 아무 소용없다.

경제 발전을 위해 사람을 소모시키는 발전 노선은 버려야 한다. 경제 자체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나라당이 "이렇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번다"라고 주장하면, 야당이나 진보 세력이 "그게 아니야. 그렇게 하면 돈이 안 생겨"라고 반박할 게 아니라 "돈은 너희들이나 많이 벌어. 우린 돈만 먹고 사는 거 아니다. 다른 게 필요하다. 공동체를 돌려 달라!" 이렇게 나와야 한다.

우석훈 : 사람은 돈에 집착할수록 괴로워진다. 경제학자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돈을 탐할수록 부가 쌓이는 것도 아니다. 가령 1인당 GDP가 최고 수준인 룩셈부르크나 노르웨이 보면 사람들이 별로 돈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대충 산다. 돈에 집착하지 않는 사회가 더 풍요로웠던 예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많다. 우리 같은 사회, 아무리 아득바득 해도 지금 GDP 수준이 최대일 거다.

김태형 : 그리고 병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상황이 지금보다 나빠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사람들의 정서가 붕괴될 때 사회적 비용 역시 막강하다. 마음의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치고 심리 치료를 해야 하는데 심리 치료는 시간당 10만 원이다. 그리고 질환이 더 심해지면 심리 치료도 안 든다. 조승희(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총기 난사 사건 범인) 같은 사람들이 더 나오면 어떻게 할 건가. 계속 내버려 둘 건가.

우석훈 : <불안 증폭 사회>가 불안 증폭을 막는 브레이크가 되리라 믿는다. <88만 원 세대>를 내고 난 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지켜봤는데, 여전히 대학생들에게 무력감과 공포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뭘 하려고 해도 일단 밥 세 끼는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 순간 삐끗하면 세 끼 밥을 못 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내면화 되어있다. 그 공포감은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래도 변화는 올 것 같다. 일단 이대로만 있기엔 지금 경제가 너무 안 좋다. 실제로 '88만 원 세대의 새판 짜기'라는 부제를 달고 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펴냄)에 청년유니온 아이디어를 얘기했는데, 이렇게나 금방 나올 줄 몰랐다. 한국은 확실히 뭐가 빠르긴 빠르다. (웃음)

한국 사회가 뼛속깊이 무기력한 것 같아도 공동체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공통의 에너지가 생기면 실질적인 변화도 생기지 않을까,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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