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아케이드 게임장에 가곤 한다. 어느 날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우연히 누군가의 게임 화면을 보게 되었다. 이제 막 'complete' 단어가 부상하고 있었다. 나는 말로만 듣던 게임 완료 화면을 처음 봤다. 그 게임의 주인공은 그 화면을 확인하더니 곧 유유히 그 곳을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그가 떠난 뒤 게임 기록이 화면에 표시되었는데, 슈팅 정확도(accuracy)가 85%였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신이다!'라는 경외감이 일었다. 나에게 그런 정확도는 새로움 이상이었다. 나의 슈팅 정확도는 겨우 40% 정도였고, 다른 게임 플레이를 감탄하며 구경했을 때도 보통 그들의 정확도는 60% 수준이었다.
게임장에는 게임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구경꾼도 많다. 누군가의 게임을 흥미롭게 지켜본다는 것은 그 게임 행위가 발생시키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축구나 야구만이 아니라 <스타크래프트>도 관전한다. 플레이어의 경기를 보는 것으로 관중들이 동시에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어떤 미감(美感)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만약 내가 슈팅 게임-총이나 비행기 같은 무기로 가상의 적과 장애물을 제거하는 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면, 또는 (아주 많이) 관전한 적이 없다면 '85'라는 숫자에 감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게 단지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만큼의 무게인 것이다. '무게'는 '존재'를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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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의 문화 코드>(이동연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게임 사용자로서 그리고 게임 관중으로서, 내가 읽은 이동연의 <게임의 문화 코드>(이매진 펴냄)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발상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게임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자료를 기반으로, 철학과 문화인류학의 여러 이론을 게임 분석에 적용하려 한 시도 때문이다. 그는 게임이 단지 시간을 때우거나 의미 없는 오락물로 여겨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게임은 하나의 사회적 가치를 담은 의미 있는 문화 텍스트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게임에 대한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고, 게임 중독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아주 쉽게 퍼지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게임과 관련된 어떤 논쟁들이 있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고 그 논쟁의 지점이 어디인지도 잘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자신의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저자의 해석이 다소 선언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당초 저자의 의도는 자신의 해석을 관철하려는 목표를 지향했다기보다는 게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그러한 저자의 시도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 그의 희망대로 게임에 대한 연구와 담론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면, 그의 책은 출발점이 될 만하다.
'게임 중독' 을 정의하는 일
이동연은 게임 중독 자가 진단 설문 문항들이 그 자체로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70쪽). 게임 중독 자가 진단법은 마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처럼 보이지만 개별 문항들을 살펴보면 상당한 편향을 담고 있다.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게임을 한 적이 있다" 또는 "게임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과 싸운 적이 있다"라는 항목을 보자. 그런 일이 게임 사용자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은 사실일 게다. 그런데 그런 일은 과연 게임 행위에서만 발생하는 것일까? 다음으로 "누군가가 게임을 얼마나 했느냐는 질문에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또는, "게임 접속 시간을 숨기려 한 적이 있다" 항목은 게임 사용자의 중독 증상 측정에 유효성이 있다기보다, 오히려 사회적인 인식-게임에 대한 부정-때문에 발생하는 부수적 행위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자가 진단 항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게임 중독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게임 중독의 판정은 게임 사용자의 단독 행동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게임 사용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정의된다. '게임 중독자'가 저기 어딘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게임 중독자'로 정의되는 것이다. 게임 중독에 대한 정의-또는 기준-는 게임만큼이나 가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그 정의는 사회적이고 합의적인 것이다.
왜 사람들은 게임에 빠지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책은, 게임이 주류 문화의 장으로 진입하지 못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세대 의식의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특히 세대 의식은 게임을 비롯한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청소년 세대를 향한 부모 세대의 불안과 공포의 반영이다(218쪽). 그렇다면 그들의 불안과 공포는 실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데올로기적 학습에 의한 것인가?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다. 더 세심하게 살펴볼 일이다.
가상과 현실의 이분법에 대해
사람들은 많고 많은 일들 중에서 왜 게임에 중독될까? 이것은 몰입의 즐거움, 반복이 주는 명쾌함이고, 새로운 역량을 이끌어내려는 추동력과 관련 있다(83쪽). 다수 게임 사용자의 반복적 행위는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그 세계를 가상 세계라고 말해왔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단지 가상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게임의 기술적 조건이 '읽는 텍스트(readerly text)'라면 게임의 플레이는 '쓰는 텍스트 (writerly text)'다. 게임에서 '쓰는 텍스트'는 텍스트를 게이머의 창조물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쓰는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게이머들은 각자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대로 게임의 가상 현실을 창조한다. 게이머들이 창조하는 가상 현실은 가상 현실의 기술적 조건 속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가상 현실의 가상 현실'이다. '쓰는 텍스트'는 게임의 가상 세계를 현실보다 더 실재적으로, 게이머의 현실을 가상 현실보다 더 가상적으로 만든다. (92쪽)
이동연은 최근 유행하는 게임 중 하나인 <세컨드 라이프>의 가상 세계가 전적으로 '위조'나 '허구'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생산자에 의해 이미 결정된 텍스트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일 뿐이며,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의미를 창조하기 때문이다(235쪽). 나는 저자의 주장에 동조한다. 게임은 가상 공간과 현실 공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임에 대한 연구는 그래서 게임의 물질성과 존재에 대한 탐구로 향하고 있다.
21세기 신예 군대는 비행 조정 연습이나 사격 훈련을 시뮬레이션으로 진행한다. 이것은 가상의 훈련이 실재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경험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능력 사이에 일정한 전환 관계가 발생한다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 어딘가에 중첩 지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게임에서 습득한 어떤 능력은 현실에서의 어떤 능력으로 발현될 수 있다. 저자는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사고하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다중 인지력과 멀티 플레잉이 필요하다'(109쪽)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그런 능력은 게임의 미덕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에서도 요구되고 있다.
다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상 공간은 안전하고 편리하며 순종적이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의 가상성이 현실의 다양한 욕구를 더 부드럽게 채워줄 수 있다(113쪽). 가상과 현실, 두 공간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라기 보다는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리터러시'가 던지는 의미
이동연은 '게임 리터러시(game literacy)' 개념을 내놓는다. 여기서 게임 리터러시란, 게임이라는 특정한 매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즉, 역동적인 게임의 체계를 읽고 쓰고 행동하는 능력, 컴퓨터의 풍부한 공간들을 차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세상을 건설하고 복합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조정하는 능력, 협동적인 P2P학습에 참여하는 능력이다(172쪽).
그런데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게임 중독에 대한 정의 문제와 게임 리터러시 개념의 도입은 연관되어 있다. 게임의 사행성과 과몰입을 향한 경계가 강하기 때문이다. 게임 리터러시라는 개념을 사용하자는 것은 그 자체로 게임을 우리의 사회·문화적 요소로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는 게임을 오락 행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게임 중독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게임을 공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배제의 대상으로 본다.
게임에 대한 인식이 극단적인 이유는 게임이 상당한 시간을 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임의 유희를 경험하는 수준에 오르려면 게이머는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게임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면 시간의 소비는 필수적이다(133쪽) 그런 점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게임에 투여되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래서 게임 중독을 정의하는 일만큼이나 게임 리터러시 개념이 수용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할 것 같다. 그것은 사회·문화적 인식의 틀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이 개념을 명시적으로 소개하고 전달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한 번 '인식의 경기장'에 던져진 이 개념은 생명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게임의 생애주기론 : 너무 신속한 판단
이동연은 게임에 대한 극단적 주장을 극복하고자 게임의 생애주기론을 제시한다. 프로이트로부터 영감을 받은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의 '생애주기론'은 인간의 정체성 발달을 단계적으로 구분하고, 양극단의 공존을 인정한다(157쪽). 저자는 생애주기론의 장점을 채택하여 게임에 적용할 메타 이론을 만들고자 한다.
게임 시간을 생애주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금 게임을 지나치게 하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시적인 순간에 게임 시간을 지나치게 사용하려는 심리를 조절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게임 시간을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획하고 조절하려는 생각 말이다. (167쪽)
저자는 게임에 대한 극단적 대립을 해소하고 좀 더 유연한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가 줄곧 게임을 문화적·인류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려 했던 것과 달리 생애주기론은 심리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저자의 본래적 취지와 잘 어우러지기보다는 맥락적 혼란을 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생애주기론은 '너무나도 신속한 선언'이다. 저자는 '도박 대신에 놀이, 반복 대신에 차이, 중독 대신에 몰입, 가상 대신에 현실이라는 대체 언어들이 게임을 문화적으로 이해하는 중요 코드'라고 말해왔다(58쪽). 그리고 게임 연구가 게임의 존재성과 물질성을 탐구하기를 기대했다(216쪽). 그의 문제 제기와 지향을 상기해 본다면, 그의 생애주기론은 오히려 후퇴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그것이 그의 문제 제기와 지향을 연결하는 든든한 다리가 될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나의 이론적 배경으로 인해 문화 연구자인 저자의 고유한 맥락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을 수 있다. 게임은 예술-기술-사회의 '잡종적 구성물'이다. 그러므로 그 해석은 쉽지 않고, 단일한 것으로 수렴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새로운 시도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