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탐험'이라는 말에 대해 늘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지닌다. 말 그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고 조사하는 일, 탐험. 사람들의 가슴이 들뜨는 이유는 이 말의 방점이 '위험'이라는 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탐험은 어쩌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가 방문을 열고나서는 순간부터 인생은 말하자면 탐험의 연속이다. 늘 처음 보는 것들 앞에서 부딪치고 넘어지고, 때로 넘어서고 좌절하며 그것이 기억을 통해 기록되는 것이 곧 삶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나이가 들수록 따뜻한 방 안, 잘 차려진 식탁, 안전한 궤도를 벗어나는 일상 밖의 세계 앞에 때로 너무 나약하다. 때문에 정작 탐험이란 멀고도 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 일쑤다.

사람들이 탐험가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다. 탐험가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 법한 '판타스틱한' 세계요, 그런 세계로 걸어 들어간 이들은 미지와 위험 앞에 굴하지 않는 진정한 '용자'이겠거니 하는 게 오늘도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는 우리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라도 한번 쯤 컴퓨터 앞에 앉아 '구글 어스(earth.google.com)'를 열면 나오는 둥근 지구를 이리 저리 돌려본 경험이 있으리라. 그들도 언제 어디에선가는 장래 희망에 '탐험가'를 적어 낸 적이 있었기에.


▲ <마지막 탐험가>(스벤 헤딘 지음, 윤준·이현숙 옮김, 뜰 펴냄). ⓒ뜰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된 이른바 탐험의 시대는 산업혁명을 거치며 절정에 올라 20세기에 이르러 종지부를 찍는다. 흔히 말하는, 지도의 공백 지대가 없어진 것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에 대한 문화상대주의적 논쟁은 일단 차치해두고라도, 일단의 탐험가들이 남긴 콘텐츠들은 대중의 흥미를 부를 수밖에 없다. 자서전 <마지막 탐험가>(윤준·이현숙 옮김, 뜰 펴냄)를 쓴 스벤 헤딘(1865~1952년)은 그런 면에서 성공한 탐험가다.

열두 살 때 처음 탐험가가 되기로 결심한 저자는 오로지 탐험을 위해 이후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다. 대학 시절, '실크로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프레디난트 파울 리히트호펜에게 사사 받으며 아시아의 마력에 사로잡히고, 당시까지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 서구에 잘 알려있지 않던 아시아 대륙을 두 발로 걸으며 50여 년간 10여 차례에 걸친 탐험에 나선다.

그 탐험 기간 동안 동시대를 주름잡았던 다른 탐험가, 아문센이나 섀클턴처럼 조난사하지도 않고 리빙스턴처럼 열병에 걸리지도 않은 채 둘러볼 곳 다 둘러보고 쓸 것 다 쓰고 할 말 다 하다 작위까지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미수(米壽)까지 살다 갔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들은 아직까지도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으니 이만한 탐험가의 삶이 또 있으랴.

스벤 헤딘의 업적(?)은 다양하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실크로드 서역 남로의 중계 거점이었던 고대 도시 국가 누란을 발견한 것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우랄 산맥, 파미르 고원, 티베트 등을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여정에서 발견한 이 유적은 고대 중앙아시아 문화를 밝히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 지도 제작을 위해 탐사했던 타림 분지에서 고비 사막까지의 여정, 유럽 첫 트랜스 히말라야 탐사 등 당시의 열악한 정보와 장비를 극복하고 살아 돌아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는 건 어쩌면 그 걸음이 지닌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최고의 성공이었는지 모른다.

책은 흥미진진하다. 700쪽이 넘는 두께에 대한 부담보다는 그저 신드바드의 모험을 읽듯 다음 장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술술 넘어간다. 그러나 한편으론 스벤 헤딘의 이런 활약과 무용담이 과연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필요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왜 계속 탐험을 하는지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만큼 내게 매력적인 것은 없다."

언뜻 지금의 탐험가들이 늘 텔레비전에 나와 이야기하는 말과 다를 바 없는 탐험의 이유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어릴 적 꿈을 향한 평생의 열정과 걸음이 '정복'이라는 단어로 점철되기엔 세상은 너무 넓고 또 다양하다. 스벤 헤딘의 탐험 성과와 달리 그가 말년에 정치적으로 친나치 성향의 기고와 저술 활동을 해 비판받았던 것이 저 정복이란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고도 생각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누가 누구를 정복했으며, 또 누가 누구를 탐험했는가. 어느 날 파미르 고원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작은 마을에 한 무리의 당나귀와 낙타를 끌고 나타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백안의 사내는 과연 탐험한 것인가, 탐험 당한 것인가.

아니, 죄르지 루카치의 말을 빌자면,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차라리 행복했던 것인가.

지금 장래 희망에 의사, 판사, 대통령이 아닌 무언가를 적어낼 아이들은 얼마나 될까. 차라리 일상의 굴레, 스펙(specification) 바깥의 세상을 향해 그 미래가 어떻건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쌍수 들고 환영해야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숙제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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