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송년호(21호)는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 서평위원이 의견을 모아서 선정한 두 권의 '올해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외에도 8명의 서평위원이 나름대로 선정한 '나의 올해의 책'을 별도로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 책의 원제는 <Straw Dogs>이고, 부제는 '인간과 다른 동물들에 대한 사유들'이다. 저자가 이 책에 원제로 삼은 "Straw Dogs"는 노자의 <도덕경> 제5장에 나오는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그저) 추구(芻狗)와 같이 여긴다"는 문장에서 차용한 개념이다.

<Straw Dogs>가 원제인 작품은 이 책 말고도 샘 페킨파의 동명 영화도 있었다. 젊은 더스틴 호프만과 수전 조지가 나왔다. 고등학교 시절 이 영화를 본 인상이 하도 강렬해서 제목을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속어로서 '겁쟁이들', '쪼다'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 쪼다는 주인공인 더스틴 호프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를 능욕했던 시골 양아치들이었던 것으로 당시 나는 해석했다.

그러나 이 책이 취한 'Straw Dogs'는 노자의 <도덕경> 제5장을 직역한 '지푸라기 개(芻狗)'였다. 무심한 천지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돌멩이나 나뭇가지나 그저 '제사를 마치고 태워버리는 지푸라기 개' 정도로 여긴다는 노자의 생각을 저자가 전폭적으로 동감해 택한 것이다. 그런데 출판사가 대담하게도 '하찮은 인간'으로 개명했다. 책 내용이 하찮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불편하지만 매우 단호한 단정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이 경우에는 성공적인 개명이라 봐줘도 될 것 같다.


▲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 ⓒ이후
책은 인간이 죽자 살자 내세우는 여러 테제들, 이를테면 진보니 자유 의지니, 도덕성이니 역사의 법칙이니, 자아 개념이니 이성이니 따위에 기대어 스스로 매우 특권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근거들이 기실은 매우 반생명적인 것들이라고 통렬하게 밟아버리는 것으로 전개된다. 그것들의 허무맹랑함과 득의에 차 뽐내고 있는 인간의 눈부신 성취들의 보잘것없음과 장차 실현시키려는 다양한 꿈들마저도 기실은 인간종 우월주의에 바탕하고 있는 어리석고 헛된 노력들이라는 것이 저자의 인간관이다. 서양의 경우이지만, 오랜 시간 죽어라 신에 매달렸다가, 본디 실체가 없었기에 따로 사망 선고까지 내릴 필요도 없었지만, 신의 사망선고를 거쳐 휴머니즘에 열광하는 단계까지 도달했다가, 이제는 '과학 만능의 시대'를 향해 질주하는 인간종의 맹렬한 노력들이 인간 스스로에게나 이 행성의 다른 생명 공동체들에게 얼마나 심대한 해학을 끼쳤는가, 그 파멸적인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인간은 도대체 한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해보거나 반성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이 가벼운 책의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들이다.

이 도발적인 질문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는 불편하다 못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돼먹지 못한 주장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저자가 강조하는 사상은 '가이아 사상'이다. 그렇지만 가이아 사상을 들먹이며 "지구를 살리겠다"고 외쳐대는 패들에게도 저자는 가소롭다는 냉소를 표한다. 그 대의마저도 녹색으로 덧칠한 휴머니즘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묻는다. 언제 세상이 인간더러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애걸한 적이 있었느냐고? 아니, 세상은 도대체 구원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 어쩌자는 말이냐고? 저자의 주장은 간단하다. 그만 설쳐대고, 그저 다른 동물들처럼 필멸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비극적이지만 삶의 우연한 지속성에 감사하고, 잠시라 할지라도 겸손하게 삶을 누려라,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주장이다. 이 책은 에밀 시오랑의 다소 자학적이고 귀족적인 허무주의와도 또 다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노자를 제대로 이해한 서양인을 만나는 즐거움 같은 것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 독서 시장에서는 이 책이 하찮게 취급받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비극은 우리 사회가 인간의 실상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충언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주제를 이 세상의 어느 집단보다 더 난폭하게 묵살했다는 점이다. 전에 없던 끔찍한 자연 파괴가 그 어느 해보다 격렬하게 감행되던 해에 누구에게랄 것 없이 씨알이 안 '멕'히는 책이 조용히 출간되었으니,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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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故)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를 존경한다. 진심이다. 하지만 고인을 존경하는 것과 그분이 남긴 말과 글 전체를 지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고인이 남긴 글 가운데 일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정밀시계와 '추노'의 시대, 과연 부끄럽습니까"

고인의 삶을 구어체로 정리한 <대화>를 보면, 고인의 해외 여행 경험에 관한 대목이 있다. 과거 <프레시안>에서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와 진행한 대담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1600년대 말에 제조된 약 2m 크기의 정밀한 시계를 보았을 때 역시 같은 생각에 잠겼다. 시계의 정밀성이나 모든 부속품의 완벽성은 300년 후의 제품같이 완벽했다. 1600년대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만들었을까?"

고인은 '우리 것이 무조건 최고'라는 식의 국수주의적 태도, 세계사에 대한 무관심 등을 질타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1600년대는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고,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애쓰던 때다. 명에서 청으로 바뀌는 국제 질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혼란을 겪었던, 참 힘든 시기였다. 드라마 <추노>의 배경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반면, 2010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면에선 조선 시대의 왕보다 호사스런 생활을 누린다. 먹을거리가 넘쳐나서 비만을 염려하고, 교통수단의 발달로 운동 부족을 걱정한다. '정밀 시계'가 상징하는 근대 문명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게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1600년대 우리 조상들'을 탓하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조금은 불편함이 남는다. 정밀 시계가 없다는 이유로 폄하돼야 한다면, 유럽을 제외한 모든 문명이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 이게 과연 옳은 논리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일단, 이쯤에서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미안함',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노무현, 이명박 두 전·현직 대통령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경력을 갖고 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한미 FTA) 체결에 전력투구했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내세우는 이유도 같다. 수출이 활발해져서 이른바 '국익'이 커진다는 게다. '국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불분명하지만, 계산 방식에 따라서는 '국익'이 커지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이런 이익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특정 경제 주체의 이익과 다른 경제 주체의 손해를 합산했을 때 '플러스'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일 뿐이다.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 역시 누군가는 손해를 입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빠뜨릴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확실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근거는 뭔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그렇다면, 이익을 본다고 믿는 다수는 손해를 입는 소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가? 아무런 미안함 없이 그저 "이익과 손해를 합산했더니 '플러스'더라" 이것만으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가 과연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사회인가? 이런 사회에서 산다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어쩌면 정상적인 인간의 심성 아닐까.

하지만 한미 FTA를 지지하는 이들의 말과 글 어디에도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라는 낱말은 없었다. 물론 '그게 뭐가 문제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영원히 '다수'에 속하리라는 법은 없다. 매순간 '다수'에 포함되는 이는 오히려 '소수'다.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언젠가 한번쯤은 '소수', 그것도 '손해를 강요당하는 소수'가 될 날이 있다. 화려한 '스펙'을 갖춘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관료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 역사는 '근대'의 이전 일 뿐, 과연?"


▲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라는 말을 도무지 듣기 힘든 분위기에 대해 갸우뚱하다가 문득 떠올린 책이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이다. 조선 사회가 비록 '정밀 시계'는 없었을지언정 이 대목 만큼은 우리 시대보다 앞섰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선 '문명'에 대한 통념을 산산이 부순다. 조선 500년이 간단한 역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역사가 단계적으로 진보한다고 믿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조선 후기 사회가 자생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꽤 널리 퍼져 있는데,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이런 믿음이 잘 녹아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한 이유일 게다.

1980~9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읽던 역사책들도 상당수는 같은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예컨대 '동학'에 대한 관심이 그런 사례다. 동학 농민 운동을 유럽의 시민 혁명과 무리하게 등치시키려는 경향이 한때 있었다.

한편, 다른 어떤 이들은 조선 사회를 그저 폄하하기만 한다. 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사람답게 살게 된 것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된 뒤였다는 게다. 이들에게 일제 강점기 이전의 역사는 그저 암흑시대일 뿐이다.

이처럼 서로 엇갈리는 여러 편향에도,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근대'를 좋은 것,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판단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목표에 대해 어찌 실패와 성공이 있겠는가?"

하지만 <조선의 힘>은 이런 여러 편향 모두를 명쾌하게 반박한다.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사람들은 조선이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근대로의 전환은 시험에 합격, 불합격을 따지듯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일부만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조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명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목표나 결과에 어찌 실패와 성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길 가다 강도를 만나 상해를 당하면 그 사람에게 운이 없다고 하지, 그 사람이 실패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조선 '문명'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은 애당초 알함브라 궁전의 정밀한 시계를 부러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추구하는 가치와 내면 세계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그들을,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잣대로 재단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텔레비전 사극에 비친 모습으로 조선 사회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염치'의 문명

그렇다고 조선의 지식인들이 뜬구름 잡는 관념에만 골몰하고 이 땅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느냐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의 최대 관심사가 땅과 밥의 문제였다. 고려 말까지 기득권을 대물림해 왔던 거대 지주들의 반발에 맞서 과전법을 실시한 게 그들이었다. '글을 읽고 정치 활동을 하는 선비가 쌀 한 톨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밥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부딪혔던 것도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자들이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 500년의 틀을 잡았던 삼봉 정도전이 <경제문감>에서 내놓은 대답은 '선비가 밥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고민을 품기 때문'이라는 것. (농민의 고민을 품지 않는 선비는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런 답변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을 주도한 지식인들이 노동하지 않으면서 농민 위에 군림하는 삶, 한마디로 '기생하는 삶'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적어도 그들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알았다.

물론, 그들이 입에 올린 부끄러움, 즉 염치(廉恥)는 어쩌면 상당 부분 가식과 위선이었을 게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런 가식 없이 욕망을 쫓는 요즘 세태가 더 시원시원하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을 게다.

하지만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를 욕망에 적용하기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욕망은 너무 많이 충족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의 욕망은 짓밟히기만 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욕망은 아주 사소한 것도 가득 채워지지만,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마저 짓밟힌다. 그런데도 삼성 임원 가운데 누구 하나 '미안하다', '부끄럽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도 염치를 모르는 세상을 옹호할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알았기에 부끄럽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궁궐을 버리고 도망갔던 선조는 걸핏하면 울었다. 대부분 부끄럽고 미안해서였다. 어쩌면 빈말이었겠지만, 백성과 신하들에게 부끄럽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조선의 임금들, 지식인들이 남긴 글 역시 마찬가지다. 설령 가식일지언정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즘과 달리 눈물이 참 흔했다.

누군가의 욕망이 더 많이 채워지는 일, 욕망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은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조선의 지도자들은 같은 조건에서 '부끄러움'을 말했다는 점이다. 알함브라 궁전에 걸려있던 시계를 만들 능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선 문명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조선의 힘>은 부끄러움을 알고 약육강식의 논리를 경멸했던 조선 문명의 이모저모를 몇 개의 키워드로 짚어낸 책이다. 문치주의, 성리학, 실록, 대동법 등이 그 키워드다. 조선 시대 사상사, 제도사를 전공했으되 서양 현대 철학과 요즘 세태에 대한 관심도 늦추지 않았던 저자의 문장은 성리학에 별 관심이 없었던 독자의 입맛에도 착착 감긴다.

광해군은 조선의 이명박?

특히 정책 결정자를 꿈꾸는 수험생에게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의 4장인 '대동법, 혁신하는 시스템'은 조선 시대 관료들이 얼마나 긴 호흡으로 정책을 고민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현대의 관료들에게도 유익한 힌트가 될 게다.

조선 시대를 이해하는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이런 목적으로 읽는 독자라면, 6장 '부활하는 광해군'부터 읽기를 권한다.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부풀려진 광해군의 면모에 대해 균형 잡힌 이해를 할 수 있다. 광해군을 고루한 기득권 세력에 맞선 개혁 군주로 이해하면 잘못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데,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조선 문명이 가진 역동적 힘을 긍정하는 저자의 생각이 잘 반영돼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광해군이 꼭 이명박 대통령과 닮아 보인다. 원칙 없는 정치를 했으며, 무모한 토목 공사로 국가 재정을 낭비했다. 이를 '실용 개혁'이라며 옹호한다면, 이 대통령도 똑같이 지지해야 할 텐데, '광해군 개혁 군주론'을 주장한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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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송년호(21호)는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 서평위원이 의견을 모아서 선정한 두 권의 '올해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외에도 8명의 서평위원이 나름대로 선정한 '나의 올해의 책'을 별도로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교육 문제는 언제나 공부 잘 하는 아이들과 먹고 살 만한 부모들의 관심사이다. 물론 중학생들이 알몸으로 졸업식 뒤풀이를 했다는 사건처럼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관심을 끌 때가 있지만, 잠잠해지면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간다.

자신이 겪었고, 자식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일이므로 사람들은 한국의 교육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잘 알고 있는가. 내가 현장에서 실감하는 바이지만 오늘날 교육 현장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이어붙이면 꽤 놀랄 만한 파노라마가 만들어질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교사들 중에는 아이들이 전혀 통제가 되지 않으며, 수업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전문계 고등학교는 이런 현상이 정착된 지 꽤 오래 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다. 거의 모든 시간 아이들이 엎드려 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이야기되는 교육 문제는 수학능력시험, 논술, 입학사정관 따위의 입시 이야기이거나, 외국어고등학교 따위 특목고와 명문 대학들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교육을 둘러싼 사회적 욕구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욕구와 현실이 기이하리만치 어긋나 있다.


▲ <야만적 불평등 : 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문예출판사
올해 1월 한국에서 출간된<야만적 불평등>(김명신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의 저자 조너선 코졸은 40년 동안 미국의 빈민 지역에서 현장 교사로 일한 저명한 교육자이다. 그 자신 뛰어난 교사였으며, 또한 미국 공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한 교육운동가였다. 그가 미국의 30여 지역을 발로 누비며 미국 공교육의 야만적인 현장을 글로 옮겨놓았다.

첫 장부터 읽는 이들은 충격에 빠질 것이다. 일리노이 주 이스트세인트루이스 지역. 세계적인 생화학 기업 몬샌토의 공장이 자리한 이곳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아무런 희망 없이 잿빛으로 시들어가고 있다. 거리에는 오폐수가 질척이며 학교는 깨진 유리창에 바람이 드나들고, 수업 교구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며, 교사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인종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된 빈민 거주 지역의 흑인 아이들의 절반이 학교를 마치지 못한다. 여학생들의 임신은 일상화되어 있으며, 남학생들의 마약과 범죄는 자연스럽다.

물론 이것은 지역별 재산세로 교육 예산을 충당케 함으로써 이러한 구조를 온존시키는 사회 구조를 탓해야 하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이 철저하리만치 야만적인 정글과 다름없는 사회라는 사실이다. 미국 사회의 모순과 약자들의 처절한 삶의 조건은 많은 부분 교육에서 실현되고 교육을 통해 재생산된다.

물론 이 책에서 묘사하는 미국의 상황과 한국 교육은 그 양상 자체가 많이 다르다. 그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보듯, 중요한 것은 미국을 닮아가기 위해 맹렬히 질주하는 한국 사회에도 이런 현실은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만으로도 우리의 학교들은 큰 몸살을 앓고 있다. 교육을 둘러싼 총력전 속에서 아이들의 심신은 말할 수 없이 황폐화되어 가고 있고, 그 속에서 사회·경제적 격차는 곧장 아이들의 삶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의논하는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위기의 학교>(닉 데이비스 지음, 이병곤 옮김, 우리교육 펴냄)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으로 망가져버린 영국 교육의 적나라한 속살이 드러났고, <야만적 불평등>을 통해 미국 공교육이 발가벗겨졌다. 이들 나라들과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지만 이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한국 교육의 야만과 비참은 여전히 언어로써 드러나지 못하며, 사회적 담론의 그릇에 담겨지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올해 한국 사회에 던져진 <야만적 불평등>은 더욱 빛난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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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언론은 2010년을 대표하는 '올해의 책'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프레시안 books'는 이 책이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은 책이지만, 한계 역시 명백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한계는 많은 부분 샌델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에서 기인합니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프레시안 books'는 서평위원인 소설가 장정일 씨의 <정의란 무엇인가> 서평을 소개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뭔가 개운치 않았던 독자라면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칠 것입니다. 장정일 씨는 2011년 '프레시안 books'에 2010년 주목 받았던 책을 다시 읽는 연재도 시작할 예정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강의록이라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50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베스트셀러 현상이 늘 그렇듯이, 어느 책의 판매 부수가 그 책의 수준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듯, 베스트셀러란 사회 현상이다. 그래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은, 정작 그 책에 대한 정확한 독해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이다. 과연 이 책을 50만 부나 읽은 한국인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까?

사회 현상으로서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이명박 정권 들어 한국인들이 그만큼 부정의와 직면했다는 위기감을 나타내는 표지며, 정의에 목말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 쪽마다 잔뜩 검은 칠을 해놓거나, 흰 백지를 제본해 놓고 저 제목을 붙였어도, 거뜬히 50만 부를 팔아 치웠을 거라는 예감마저 드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무척 역설적이게도 이 열풍이 은닉한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책이 100일 동안 총인원 100만 명을 동원했던 2008년 촛불 집회에서 얻은 정의의 경험을 망각하고, 무력증에 빠져버린 시민들의 자기 위안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열풍을 일으키자, 여기저기서 이 책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봐라, 하버드 대학의 석학이 이렇게 얘기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마이클 샌델의 진의를 헤아려보려는 노력 없이, 안이하게 자신의 구미에 맞게 왜곡하거나, 지은이가 가리키고 있는 정치철학의 독소를 외면하고 희석했다. 내가 보기에 그런 식의 인용은 숱한 칼럼니스트들마저 <정의란 무엇인가>를 내용과 상관없이, 기표로만 허비했다는 혐의를 갖게 만든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마이클 샌델의 이 책은 제목과 달리 1) 정의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못할 뿐더러, 2) 지은이는 정의란 '딜레마'일 뿐,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뒤에 다시 설명되겠지만, 그는 안티고네보다 크레온의 손을 들어 줄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1)과 연관해서는 지은이를 변호해야 할 대목이 없지 않다. 원래 정의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했다고 지은이를 공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규정이 불가능한 정의의 잠재성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구하지 못하고, 정의를 '법'에 위탁했다는 것, 이게 한 번도 계급 혁명을 꿈꾸어 보지 못한 미국 예외주의자이자 소위 공동체주의자라는 마이클 샌델의 한계다.


▲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창의성 논문과 정리성 논문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이 책은 후자다. 지은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벤담·칸트·밀·롤스에 이르는 서양 정치사상가의 정의 개념을 일별한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로 되돌아간다. 어쩌다 대하게 되는 이 책의 평이 하나같이 판박이인 것은, 지은이의 논의와 주장이 그만큼 간단해 보이기 때문이다. 즉, 평자들은 이 책이 세 가지 정의론을 이야기했다고 요약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내세우는 공리주의자(벤담)의 정의관, '자유'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밀·칸트·롤스)의 정의관, 그리고 공동체에는 '좋은 삶'이란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

여기에 조금 살을 붙여보자. 우선 지은이는 공리주의(벤담)와 자유주의(밀)가 경제적 자유방임을 정의인양 떠받드는 현실을 비판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진창에 빠진 전자는 경제적 풍요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며, 후자는 자유와 동일시 된 소유권과 시장에서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같은 자유주의자이지만 칸트는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으로부터 도덕을 구하고자 '선험적 주체'를 제시했다.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자율적이고 이성적이고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선험적 주체는 훗날 보편 인권의 귀중한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고 곧잘 상상의 구성물로 떨어진다. 한 재벌 가문의 2세가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때리고서, 2000만 원의 '맷값'을 주었다지 않은가?

역시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법이나 계약을 만들 때, 모든 인간을 '원초적 입장'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각각의 개인을 만드는 부(富)·나이·재능·인종·종교·기술·성별·지식을 거부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법과 계약만이 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 한 대에 100만 원이라는 재벌 2세와 노동자의 비대칭적인 신분과 강요된 계약이 보여주었듯, 모든 인간을 원초적 입장에 되돌려 놓고 만들어질 수 있는 법이나 계약이란, 칸트의 선험적 주체만큼 허구적이다. 그래서 롤스는 '차등의 원칙'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통해 사회적이나 경제적인 약자에게 수혜를 주는 방법으로 출발선을 같게 하고자 했으니, 그것이 '원초적 입장'의 실현 가능성이다.

지은이에게 밀·칸트·롤스는 모두 자유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자유에 대한 세 사람의 이론과 지향은 모두 달랐다. 밀의 자유가 소유의 절대성과 시장의 자율성 편에 선 자유라면, 현대 정치에서 강조되는 보편 인권의 바탕을 놓은 칸트의 자유는 시장의 야만을 견제할 수 있는 진지 역할도 한다. 마지막으로 롤스는 사회적ㆍ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평등한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칸트의 자유를 실천 가능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분명코 평등주의를 편들지만,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올바른 배분은 정의로운 사회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정의로운 사회는 '배부른 돼지우리' 이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호명되는 것이다.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이처럼 간단한 정리와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저 간단한 개념 정리만 아니라, 개념 훈련을 위한 골치 아픈 사례들이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 책의 논리는 매우 쉬우나, 거기 나오는 사례들이 나를 혼돈에 빠뜨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엄살이 아니라, 책을 펼치자 마자, 독자들은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 지은이가 내놓은 숱한 사례이자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 가운데는 '경제적 정의'에 정향된 것도 있지만, 지은이 스스로가 '도덕적 딜레마'라고 부른 좀 더 추상적인 것들도 많다.

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의 기관사가 정상적인 궤도에서 일하고 있는 다섯 명과, 비상 철로에 있는 한 명 가운데 어느 쪽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정의인가?
② 망망대해에서 식량이 떨어진 조난자 가운데 처자식을 둔 건강한 세 명이, 열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을 잡아먹는 것은 정의인가, 아닌가?
③ 매복 중인 미군의 위치를 우연히 발견한 아프가니스탄의 염소 치기를, 미군의 안전을 위해 죽이는 게 정의인가, 아닌가?

나는 처음에, 저 사례를 놓고 '어느 쪽이 정의냐?'고 묻는 지은이의 정신 상태와 지적 취약을 의심했다. 그래서 이 책을 자신의 독서 리스트에 올려놓고 읽기를 벼르고 있는 친구에게 세 가지 사례를 얘기하고, 똑같이 물었다. 그러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대답이 돌아 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건 비극이라고 해야지, 정의가 아니다!"

지은이가 저 사례를 갖고서 학생들에게 습득시키고자 했던 게,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정의(관)'이라는 것은 물론 납득된다. 저 세 가지 사례 앞에, 항상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은 공리주의자고, 다수를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게 당연한 듯 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다. 그리고 지은이의 수업 중에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겠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겠다는 회의론자의 정의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모든 딜레마는 답이 세 개다.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태. 원래 딜레마가 딜레마인 것은, 딜레마 속에서는 그 어느 답이나 최선일 수 있고, 어느 것이나 차악일 수 있는 때문이다. 하므로 저 사례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정의란 이처럼 규정될 수 없는 것!'이며, 실제로 정의는 그렇게 나타난다. 이제야 말이지만, 이 책이 숱한 사례들로 넘쳐날 수밖에 없는 것은, 정의가 그만큼 파악하기 힘들다는 방증이었다. 내 생각에 지은이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율법주의자는 파악 불가능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엔 예로 든 도덕적 딜레마 뿐 아니라, 경제적 정의에 관한 딜레마, 합의에 관한 딜레마, 평등에 관한 딜레마, 자격과 목적에 관한 딜레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시된다. 지은이가 이처럼 '사례(딜레마) 신공'을 내뿜었던 이유는 1차적으로, 공리주의 정의관과 자유주의 정의관을 대조시켜, 두 정의관의 개념을 주지시키기 위한 소기의 수업 목표 때문이다. 지은이는 딜레마를 던져 놓을 뿐, 어느 것이 정의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간혹 어느 쪽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사례를 늘어놓고 어느 쪽이 정의라고 가르치는 것은 지은이의 목적이 아니다. 마술 카드를 꺼내듯 지은이가 숱한 딜레마를 펼쳤던 2차적 목적은 딜레마로 학생들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이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딜레마에 지치고 넌더리가 난 학생들을 정의가 아닌 법이라는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까지 간수된 것이 동성애와 낙태권에 대한 논란이다.

지은이가 정의에 관한 무수한 딜레마(사례)를 통해 학생들을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것은, 정의에 관한 딜레마가 정리되지 않을 때, 공동체는 분열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는 경고다. 예컨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동성애와 낙태권이 미국을 두 동강으로 내어 놓지 않았던가? 이제 진도는 공동체에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하며, '공동선'이 있어야 한다는 지은이의 주장을 향해 나간다.

이 뛰어난 산파술을 마이클 샌들은 당연히 희랍의 스승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이때, 이 책을 순진하게 읽은 사람은 지은이가 말하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과 공동선이 바로 '정의'일 거라고 환원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 책의 제목에 우리가 속은 때문일지도 모르며, 이 역시 똑같은 내용(책)으로 우둔한 제자와 명민한 제자에게 메시지를 달리 가르쳤다고 하는 희랍식 밀의(密意) 탓인지도 모른다.

지은이가 뜻하는 좋은 삶의 기준과 공동선이 곧 정의가 아니라 '법'이라는 것은, 이 책의 서두에 이미 나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부터 심사숙고해야만 무엇이 정의로운 법인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법은 좋은 삶을 묻는 질문에 중립적일 수 없다." (21쪽)

이 얼마나 놀라운가? 앞선 사례들에서 보았듯이 정의란 고작해야 규정할 수 없는 '딜레마의 영역'이지만, 법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샌델에게 법을 만드는 기준은 또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책의 입구격인 제1강에 "탈레반뿐만 아니라 노예제 폐지론자와 마틴 루서 킹 목사도 도덕적·종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정의에 대한 시각을 정립했다"(35쪽)고 일찌감치 써놓았다. 정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도덕적·종교적 이상'에 의해 확립되어야 한다는 지은이의 이와 같은 주장은 이 책의 마지막 문단 결구에서 재확인된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371쪽)

우리는 움직이는 생활세계를 다루는 정치가 고정된 도덕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 또 정치가 진리를 추구할 때마다 파시즘으로 급전직하했던 역사를 이미 잘 안다. 그런데도 샌델은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면서,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370쪽)고 천연덕스레 말한다. 삶에 필요한 정의의 규범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도덕적·종교적 이상이 필요하다는 샌델의 주장에 따르려면, 낙태와 동성애를 둘러싼 문화 전쟁은 물론이고 여러 종교들 간의 종교 전쟁마저 우리는 납득해야 한다.

정의의 유동적이고 편재적이며 전복적인 잠재성 대(對) 법의 고착적이고 집권적이며 지배적인 가시성은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가 잘 드러내 준다. 크레온은 법으로 금지하지만, 안티고네가 선택한 것은 윤리 즉 정의다. 안티고네의 저항이 크레온을 끝내 파멸시켰듯이, 정의가 움직일 때 법은 패퇴하게 되어 있다.

<안티고네>가 식상하다면,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 <배틀 로얄>도 좋은 예가 된다. 이 영화 속의 '베틀 로얄법'은 무인도에 부려놓은 학생들에게 '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 법에 충실하고자 서로를 죽이는 살육 게임에 돌입 하지만, '우리 같이 살아서, 이 섬을 나가자'라고 말하는 일부는 그 법을 와해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이런 법과 정의의 대결을 늘 치른다. 법이 도로교통법을 내세워 시민의 시위 권리를 원천 차단하려고 들 때, 시민은 도로를 무단 점거한다. 1960년 4·19, 1980년 5·18, 1987년 6월 항쟁, 2008년 촛불 집회 등 한국사가 고비마다 경험했던 바로 그것이, 유동적이고 편재적이며 전복적인 정의의 잠재성이자 가능성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귀했던 경험들을 팽개치고자 한다는 말인가?

샌델은 제목을 잘못 지은 저 책에서, 좋은 삶과 공동선을 위해서는 도덕적·종교적 이상에 근거한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유대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안티고네>가 모범을 보이고 <베틀 로얄>이 반복했듯이, 법이 중지되는 순간은 연약한 시민(안티고네)과 피실험자(학생)들의 정의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처럼 정의에 의해 법이 중지되는 순간, 비로소 법은 그 자신의 폭압적인 전모를 드러내며, 수수께끼가 풀린 스핑크스처럼 벼랑으로 사라진다.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만, 충직(연대)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 제9강을 원용하면, 앞서 인용한 세 개의 도덕적 딜레마가 쉽게 풀린다. ①의 경우 한 명이 어느 궤도에 서 있든 그가 미국인이고 다섯 명이 외국인이라면 기관사는 다섯 명이 있는 궤도로 전차를 몰아야 한다. ② 역시 세 명이 미국인이고 열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이 외국인이라면, 그 외국인을 식량으로 삼아 미국인이 사는 게 정의다. 하므로 ③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런 선택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의 '영광'을 그들에게 부여해 주지는 못하지만, 애국심이 자연적 의무(살인하지 말라)마저 넘어서는 미덕일 수도 있다는 지은이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위의 예가 거칠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 평등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분배·자유·권리라는 가치에 집착하면서 '서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공동체의 영광', '도덕적 가치'에 대해 중립을 취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근본주의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귀 기울여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다종다양한 생활세계에 정치와 법이 하나의 기준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지은이의 공동체주의적 정의(正義)는, 그것이 얼마든지 '국가 신학'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품게 한다.

올해 최대의 국내 소식을 꼽으라면 마땅히 천안함 침몰이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을 수위에 놓고 싶다. 까닭은 이 책이 인문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려서거나, 정작 읽게 된 이 책의 수준이 고작 맥도날드 매장에서 고등학생들이 햄버거를 먹으며 할 수 있는 잡담에 불과했던 때문은 아니다.

진실은 처참하다. 2010년 한 해 동안, 한국인들이 '정의'라는 기표에 목매달고 또 목말랐다는 사실. 실은, 그게 올해 최대의 국내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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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머리 2011-05-0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 좋은 데 기사 제목 그지같이 다는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우주의 역사 150억 년을 1년으로 줄이면 인류가 역사를 만들어 온 시간은…1초."

한 구절씩 화면에 뜨던 글자들이 문장으로 완성되는 순간 저절로 소름이 돋는다. 마지막 '1초'는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도드라져 더욱 강렬했다. 이 영상의 제목은 '1초'다. 교육방송(EBS)의 간판 프로그램 <지식채널e>의 첫 번째 작품이다.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씨 클라우드'에서 이 영상을 다 보고 나서 누군가 "나로선 솔직히 좀 지겹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2005년부터 3년 동안 <지식채널e>의 연출을 맡아 '1초'를 비롯해 270여 편의 프로그램을 만든 김진혁 EBS PD다.


▲ <감성 지식의 탄생>(김진혁 지음, 마음산책 펴냄). ⓒ마음산책
그가 KT&G 상상마당과 <프레시안>이 함께 여는 '어쿠스틱 인문학' 두 번째 주인공으로 초대돼 40여 명의 청중과 만났다. '저자와의 만남'을 표방하는 자리에 김진혁 PD가 초대된 이유는 그가 그간의 제작 경험과 못 다한 이야기를 담아 지난 7월 <감성 지식의 탄생>(마음산책 펴냄)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단순히 인기 프로그램의 탄생 비화나 영광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 곱씹은 생각들을 얘기한다. 그래서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 <지식e :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지식>(북하우스 펴냄) 시리즈보다 깊고 내밀한 독서 경험을 독자에게 안긴다.

책에선 홀로 총대를 멨지만 프로그램은 완벽히 공동 작업이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생각나는 사람 없느냐"고 묻자 한 사람이라도 빠뜨릴세라 작가·제작진의 이름을 댄다. 이날 진행을 맡은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가 "김진혁 PD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도 그 점 때문이다. PD라는 자리의 역할을 설명할 때도 그는 몸을 한껏 낮춘다.

"PD의 역할은 제작진 전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의 공유 여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한 배에 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채널e> 팀이 탔던 배는 어떻게 시동을 걸고, 방향키는 어디로 쥐었을까? 어떤 암초를 만나 왔을까? 출항지 격인 '1초'에서부터 두 번째 어쿠스틱 인문학이 시작됐다.


▲ 김진혁 PD와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무관심 속에서 탄생하다

이권우 씨가 "첫 편의 제목처럼 '1초 만에 사라질 프로그램 아니냐'는 얘길 듣진 않았는가"라고 묻자 김진혁 PD는 "처음엔 아무도 관심조차 안 가졌다. 그래서 (제목이) 1초이든 2초이든 상관없었다"며 고개를 젓는다.


ⓒEBS
무관심 속에서 '1초'를 만들 당시 그의 머리엔 "이 프로그램, 제발 좀 띄워보자"라는 생각뿐이었다. '수능 방송'이라는 이미지에 갇힌 EBS의 한계, 전례 없는 형식이라는 실험성을 극복하고 채널 인지도 제고를 담보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과제였다.

"EBS 공중파 채널에선 이미 10년 전에 수능 관련 수업 방송이 빠졌는데 아직도 채널 13번을 틀면 칠판이 나올 거라 생각하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이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 계기 중 하나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지식채널e>로 붙였다. EBS가 수능 채널이 아니라 '지식' 채널임을 강조하기 위해."

<지식채널e>는 늘 시청자의 피드백에 목말라했던 김진혁 PD 개인의 도전이기도 했다. 2002년 입사해 <직업 탐구>, <효 도우미 0700>, <미래의 조건> 등을 연출했지만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던 그는 "이름을 말했을 때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프로그램", "파괴력을 가진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니 재미를 줄 수 있어야 했다. 김진혁 PD는 "재미는 방송 프로그램의 숙명"이라고 강조하며 "소위 교양 프로그램이 취하는 재미에 대해 절제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표현방식을 고민했고, 영화 예고편과 뮤직비디오처럼 상업적 영상의 방법을 혼용하는 사이 자연스레 <지식채널e>의 스타일이 만들어졌다"고 덧붙였다.

'1초'는 그 바람과 고민의 총체다. 당연히 탄생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애초 <지식채널e>는 기존에 방영됐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요약해서 보여준다는 기획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이 의도는 시작도 전에 폐기된다. 보기에 그럴듯한 고속 촬영 기법으로 촬영된 <마이크로의 세계>(2004년)를 편집해 짧게 만들었더니 알맹이 없는 화면 나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면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이번엔 지식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는 문제에 놓였다. 그 때 그를 구원(?)했던 것이 위의 문장이다. 작가가 가져온 '우주의 역사 150억 년을 1년으로 줄이면, 인류가 역사를 만들어온 시간은…1초'라는 문장을 끊어 읽는 순간 그는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혔다.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작가가 가져온 문장들 가운데 마지막 문장을 발견했고, 그것이 주는 직관적 느낌이 좋았단 이유만으로 거기에 맞춰 영상을 완성하게 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1초'는 '1초 안에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고속 촬영 영상과 그것을 단순히 설명하는 자막으로 보여준 다음 마지막 문장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게 된다. 김진혁 PD에 따르면 이는 인간의 '사고의 흐름'에 따르는 구성이다. 핵심 문장에 무게중심을 두고, 단순한 정보보다 '깨달음'의 영역에 있는 지식을 은근하게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지식채널e>의 이러한 전달 방식의 정체는 2005년 '스페셜' 편에 등장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지식은 암기하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이고 현학적인 수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다."

카타르시스가 아닌 무엇

'1초'를 만들며 깨우친 프로그램 방향은 김진혁 PD의 평소 생각과도 일치했다. 그는 계몽적인 메시지로 선동·선전하기보다 상대방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것이 교양 프로그램을 만드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봤다.


▲ 김진혁 PD. ⓒ프레시안(최형락)
"기존 교양 프로그램은 계몽적이었다. 제작자가 메시지를 정확히 걸러내서, 시청자에게 완성된 요리를 떠먹여 주는 방식이었다. 그에 비해 <지식채널e>는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사실 전달에 집중한다. 최대한 다양한 식재료들을 찾아 잘 정리해 놓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요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청자의 개입 여지를 늘려 놓는다."

그는 <지식채널e>가 대중과의 소통에서 성공한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분석한다.

"다른 프로그램들이 지식 안에 결핍돼있던 감성이란 부분을 주사 놓듯 보강했다면 <지식채널e>의 경우는 오히려 빠져 있었던 지식을 복원함에 따라 그 지식을 시청자가 마음껏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어떤 것도 억지로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계몽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대의 흐름에 잘 부합했던 것 같다."

93학번인 김진혁 PD는 대학 시절에도 이른바 '운동권'의 방법인 직접적인 가르침에 우려를 갖고 있었다. "혹시 대학생 때 운동권이었느냐"는 이권우 씨의 질문에 그는 "그 정반대라고 볼 수 있는 학군단 출신이다"라고 응수해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며 이렇게 말했다.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운동권 선배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의 단점인 과도한 계몽성은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작품에) 반영됐다."


▲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 ⓒ프레시안(최형락)
이권우 씨는 갑자기 "대학 시절 브레히트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김진혁 PD는 "따로 공부한 적은 없다"고 말했지만, 이권우 씨의 설명을 듣다 보면 왜 그런 질문이 나왔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브레히트는 극작가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극중 환경을 통해 인위적으로 감정을 '배설'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각성을 이끌어내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진혁 PD는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자가 아니라 시민의 각성을 스스로 유도하게끔 만드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맥락에서 대중과의 소통 방법이 브레히트와 통하는 게 있지 않나 싶다." (이권우)

사회에서 소외되는 '소외 문제'

직접적인 비판을 경계하고, 사실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지만 많은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지식채널e>나 김진혁 PD는 '사회적 문제의식이 강한 프로그램/PD'다.

김진혁 PD는 "출발은 아무런 상관이 없더라도 만들어놓고 보면 꼭 사회적 관점이 들어가 있었다"며 "그것이 단지 'society' 카테고리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지식채널e>를 관통하는 정신이 '소외'에 대한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잊혀진 대한민국' 시리즈 중 '철거민' 편이다.

'철거민' 편은 '왜 TV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 늘 똑같은 화면을 보여줄까? 행복한 그림이 아닌 고통스럽고 힘들어 보이는 그림이 나온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된 기획이었다. 김진혁 PD는 이 편을 구성하던 중 과거에 찍었다가 묵혀 둔 영상을 떠올린다. 2004년 여름, 다른 프로그램 촬영 중 우연히 흘러들어갔던 동대문 운동장 안쪽의 '풍물 시장'의 모습이었다.

"동대문 운동장 안 상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밀려난 노점상들을 위해 임시로 마련된 '풍물 시장'. 하지만 난민촌으로 밖엔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철거민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그 자체보단 대형 쇼핑몰이 즐비한 서울 동대문 한복판에서 아무도 모르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명색이 방송국 PD인 내가 이 일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EBS

김진혁 PD가 충격에 휩싸여 찍어 두었던 영상은 1년 동안 보도되지 못한다. 당시 서울시와 노점상의 협상이 진행 중이라 섣불리 서울시를 비판하기 어려웠다는 핑계도 있지만 결국엔 일종의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고 그는 털어놓는다. 철거 상인의 현실은 1년이 지난 시점에도 변함이 없었고, 그때서야 '철거민' 편을 통해 전파를 탄다. 김진혁 PD는 이 일화를 통해 <지식채널e>가 '소외'를 자주 다루는 이유를 깨닫는다.

"아이템이 매번 '사회적 관점'으로 발전하게 된 이유도 단순히 '소외'가 만연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고 있던, 그래서 매번 충격을 받던 '나 자신' 때문이었다. (…) 그러니까 결국 모든 소외의 공통분모는 그것을 모르고 있던 자기 자신이다." (<감성 지식의 탄생>, 136쪽)

그는 이러한 무지와 관련해 "언론이 사실 보도라는 기본적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철거민의 비극이 만천하에 알려진 용산 참사에 대해서도 그는 "사전에 언론이 용산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라도 보도를 더 많이 했더라면 극단적 상황을 막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채널e>의 진화

이어서 2007년에 제작된 '두 명의 대통령' 편과 '거대 우주선 시대' 1편도 상영됐다. 내용도 형식도 다른 두 편의 공통점은 지식채널e의 '진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EBS
진화의 한 축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지식, 즉 신화와의 싸움이다. '노예 해방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이 사실은 노예 해방에 반대했었다는 이야기를 다룬 '두 명의 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는 "신화는 일부의 사실을 보여주고 나머지 사실은 가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며 이렇게 지적한다.

"그(링컨)가 노예를 해방한 가장 큰 이유는 비인간적인 노예 차별을 혐오해서라고 나와 있다. 하지만 링컨이 쓴 편지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 그가 수차례나 노예들을 비하하는 말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노예를 해방한 이유가 오직 '휴머니즘'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휴머니스트로서 링컨의 이미지는 일부일 뿐 결코 '전부'일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전기만 읽고 그를 '휴머니스트'라는 틀로만 이해하면 링컨은 그 자체로 '신화'가 된다." (<감성 지식의 탄생>, 170~171쪽)

나아가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모두가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는 것은 아니라며, 외부의 사실을 받아들일 때 언제나 '프레임'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정 사실이 어떤 프레임 위에 올라와 얘기되는가가 중요하다"며 "<지식채널e>는 잘못된 프레임을 깨도록 하기 위해, 제 3의 프레임을 제시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시도를 해 왔다"고 덧붙였다.

"누군가의 프레임을 바꾸려는 의도는 없었다. 보는 사람 스스로 문제를 바꿔야겠다는 판단이 안 선 상황에서 프레임을 바꾸려 들면 오히려 역효과가 크다. 다만 누구든 프레임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와 제3의 프레임의 존재를 인지하길 바랐다."

한편, 진화의 또 다른 한 축은 드라마 장르로의 확장이었다. 에필로그를 포함해 7편으로 구성된 '거대 우주선 시대'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 시리즈는 거대 우주선이 지구 상공에 머물러 있다는 콘셉트를 바탕으로 갖가지 자료 화면과 자막을 스토리라인에 따라 배치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픽션을 만들기 어려운 환경인데다 내용이나 형식 모두 일종의 모험이었으나 김진혁 PD는 의욕을 불태웠다. "원래부터 영화 일을 동경했고, 드라마에 미련이 있었다"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가 이야기를 원한다. 대중에게 어떤 주장, 감성을 전달할 때도 결국엔 이야기로 풀어 줄 수밖에 없다. '대중성'을 <지식채널e>에 접목하고 싶었다. <지식채널e>의 원래 형태도 다큐멘터리를 차용한 것이지 정통 다큐멘터리는 아니었다. 이미 '정통'의 의미가 무색해진 상태고, 결국 유사 드라마 장르 혹은 장르 혼용을 통한 새로운 포맷으로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탄생과 진화, 그리고…

진화를 거듭하며 함께 성장해 온 <지식채널e>와 김진혁 PD는 2008년 8월 이별을 맞는다. 현재 그는 EBS 편성 기획부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특집 형태의 짧은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

프로그램과 PD 모두 인기 절정에 있었을 때 결정된 하차였기에 김진혁 PD의 하차 당시 '보복성 인사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첨예한 주제였던 광우병을 다룬 '17년 후' 편이 한 차례 결방되면서 외압 논란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진혁 PD는 "<지식채널e>를 만들면서 구체적 압력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특정 아이템을 다루느냐 마느냐의 문제이지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정치적 압력이 있다면 PD가 특정 아이템을 외면하는 등 자기 검열 하도록 하는 간접적인 요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추적 60분> 결방 사례처럼 누군가 '방송 하지 마'라고 얘기한 게 사실이라면 그건 압력이 아닌 범죄"라고 덧붙였다.


ⓒ프레시안(최형락)

여전히 <지식채널e> 하면 '김진혁 PD'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프로그램을 정립하는 시작 단계가 중요한 법이다. 그러나 대중은 언제나 PD보다 먼저 변화하기에, 시작한 이후가 훨씬 더 중요했다.

그는 "(제작진이) '우리가 변화해야 해'라고 느낄 땐 이미 늦은 시점이다. 끊임없이 시청자들의 눈치를 보고 있어야 한다"며 시청자와 프로그램 사이를 연인 관계에 비유했다. 계속 바라보고 있다 보면 상대가 원하는 변화가 자연스레 서로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지식채널e> 팀에게 "프로그램이 5년은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며 "계속 새로운 포맷을 시도해 달라"고 격려했다.

이제는 1인 미디어의 영향력을 갖게 된 인기 PD로서 그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카타르시스가 아닌 은근한 깨달음을 강조하는 그이지만, 혹시 방송국을 벗어난다면 좀 더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한 청중이 "마이클 무어처럼 영향력이 강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런 욕망은 다른 부분에 집중하다 보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다른 부분이란 "10년이 지나서 다시 봐도,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는 사람이 봐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접점을 만드는 것"이다. 점점 보편성을 포기하고 작가의 관점과 개입을 강조하는 최근 다큐멘터리 제작 풍토에 보기 드문 고집이다.

향후 계획은 속 시원히 들을 수 없었다. 이권우 씨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하고 싶은 일보다는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 내게 주어진 걸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말한다. 알 듯 말 듯한 대답이지만, 그가 3년간 <지식채널e>를 만들며 깨달았다는 궁극적 메시지와 연결 지어 보면 자못 심오하다.

"함께 사는 것, 그것이 스스로를 구하는 것!"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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