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언론은 2010년을 대표하는 '올해의 책'으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프레시안 books'는 이 책이 경청할 만한 대목이 많은 책이지만, 한계 역시 명백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런 한계는 많은 부분 샌델의 정치적, 철학적 입장에서 기인합니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프레시안 books'는 서평위원인 소설가 장정일 씨의 <정의란 무엇인가> 서평을 소개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뭔가 개운치 않았던 독자라면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칠 것입니다. 장정일 씨는 2011년 '프레시안 books'에 2010년 주목 받았던 책을 다시 읽는 연재도 시작할 예정입니다. |
하버드 대학교의 강의록이라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50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베스트셀러 현상이 늘 그렇듯이, 어느 책의 판매 부수가 그 책의 수준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듯, 베스트셀러란 사회 현상이다. 그래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은, 정작 그 책에 대한 정확한 독해가 사라져버리는 현상이다. 과연 이 책을 50만 부나 읽은 한국인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까?
사회 현상으로서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이명박 정권 들어 한국인들이 그만큼 부정의와 직면했다는 위기감을 나타내는 표지며, 정의에 목말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이런 상황에서는 누군가 쪽마다 잔뜩 검은 칠을 해놓거나, 흰 백지를 제본해 놓고 저 제목을 붙였어도, 거뜬히 50만 부를 팔아 치웠을 거라는 예감마저 드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무척 역설적이게도 이 열풍이 은닉한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책이 100일 동안 총인원 100만 명을 동원했던 2008년 촛불 집회에서 얻은 정의의 경험을 망각하고, 무력증에 빠져버린 시민들의 자기 위안물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열풍을 일으키자, 여기저기서 이 책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봐라, 하버드 대학의 석학이 이렇게 얘기하지 않느냐!' 그러면서 마이클 샌델의 진의를 헤아려보려는 노력 없이, 안이하게 자신의 구미에 맞게 왜곡하거나, 지은이가 가리키고 있는 정치철학의 독소를 외면하고 희석했다. 내가 보기에 그런 식의 인용은 숱한 칼럼니스트들마저 <정의란 무엇인가>를 내용과 상관없이, 기표로만 허비했다는 혐의를 갖게 만든다.
결론삼아 말하자면, 마이클 샌델의 이 책은 제목과 달리 1) 정의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못할 뿐더러, 2) 지은이는 정의란 '딜레마'일 뿐,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뒤에 다시 설명되겠지만, 그는 안티고네보다 크레온의 손을 들어 줄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1)과 연관해서는 지은이를 변호해야 할 대목이 없지 않다. 원래 정의는 규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했다고 지은이를 공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규정이 불가능한 정의의 잠재성으로부터 정치의 가능성을 구하지 못하고, 정의를 '법'에 위탁했다는 것, 이게 한 번도 계급 혁명을 꿈꾸어 보지 못한 미국 예외주의자이자 소위 공동체주의자라는 마이클 샌델의 한계다.
|
▲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
창의성 논문과 정리성 논문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이 책은 후자다. 지은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벤담·칸트·밀·롤스에 이르는 서양 정치사상가의 정의 개념을 일별한 다음, 아리스토텔레스로 되돌아간다. 어쩌다 대하게 되는 이 책의 평이 하나같이 판박이인 것은, 지은이의 논의와 주장이 그만큼 간단해 보이기 때문이다. 즉, 평자들은 이 책이 세 가지 정의론을 이야기했다고 요약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내세우는 공리주의자(벤담)의 정의관, '자유'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밀·칸트·롤스)의 정의관, 그리고 공동체에는 '좋은 삶'이란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
여기에 조금 살을 붙여보자. 우선 지은이는 공리주의(벤담)와 자유주의(밀)가 경제적 자유방임을 정의인양 떠받드는 현실을 비판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진창에 빠진 전자는 경제적 풍요의 바깥을 사유하지 못하며, 후자는 자유와 동일시 된 소유권과 시장에서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같은 자유주의자이지만 칸트는 공리주의와 자유방임으로부터 도덕을 구하고자 '선험적 주체'를 제시했다.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자율적이고 이성적이고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선험적 주체는 훗날 보편 인권의 귀중한 토대가 되기도 했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가능성일 뿐이고 곧잘 상상의 구성물로 떨어진다. 한 재벌 가문의 2세가 고용 승계를 요구하는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때리고서, 2000만 원의 '맷값'을 주었다지 않은가?
역시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법이나 계약을 만들 때, 모든 인간을 '원초적 입장'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각각의 개인을 만드는 부(富)·나이·재능·인종·종교·기술·성별·지식을 거부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법과 계약만이 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 한 대에 100만 원이라는 재벌 2세와 노동자의 비대칭적인 신분과 강요된 계약이 보여주었듯, 모든 인간을 원초적 입장에 되돌려 놓고 만들어질 수 있는 법이나 계약이란, 칸트의 선험적 주체만큼 허구적이다. 그래서 롤스는 '차등의 원칙'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통해 사회적이나 경제적인 약자에게 수혜를 주는 방법으로 출발선을 같게 하고자 했으니, 그것이 '원초적 입장'의 실현 가능성이다.
지은이에게 밀·칸트·롤스는 모두 자유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자유에 대한 세 사람의 이론과 지향은 모두 달랐다. 밀의 자유가 소유의 절대성과 시장의 자율성 편에 선 자유라면, 현대 정치에서 강조되는 보편 인권의 바탕을 놓은 칸트의 자유는 시장의 야만을 견제할 수 있는 진지 역할도 한다. 마지막으로 롤스는 사회적ㆍ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평등한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칸트의 자유를 실천 가능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분명코 평등주의를 편들지만,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올바른 배분은 정의로운 사회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정의로운 사회는 '배부른 돼지우리' 이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호명되는 것이다.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이처럼 간단한 정리와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저 간단한 개념 정리만 아니라, 개념 훈련을 위한 골치 아픈 사례들이 병렬적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이 책의 논리는 매우 쉬우나, 거기 나오는 사례들이 나를 혼돈에 빠뜨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엄살이 아니라, 책을 펼치자 마자, 독자들은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 지은이가 내놓은 숱한 사례이자 질문 앞에 서게 된다. 그 가운데는 '경제적 정의'에 정향된 것도 있지만, 지은이 스스로가 '도덕적 딜레마'라고 부른 좀 더 추상적인 것들도 많다.
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의 기관사가 정상적인 궤도에서 일하고 있는 다섯 명과, 비상 철로에 있는 한 명 가운데 어느 쪽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정의인가?
② 망망대해에서 식량이 떨어진 조난자 가운데 처자식을 둔 건강한 세 명이, 열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을 잡아먹는 것은 정의인가, 아닌가?
③ 매복 중인 미군의 위치를 우연히 발견한 아프가니스탄의 염소 치기를, 미군의 안전을 위해 죽이는 게 정의인가, 아닌가?
나는 처음에, 저 사례를 놓고 '어느 쪽이 정의냐?'고 묻는 지은이의 정신 상태와 지적 취약을 의심했다. 그래서 이 책을 자신의 독서 리스트에 올려놓고 읽기를 벼르고 있는 친구에게 세 가지 사례를 얘기하고, 똑같이 물었다. 그러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대답이 돌아 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건 비극이라고 해야지, 정의가 아니다!"
지은이가 저 사례를 갖고서 학생들에게 습득시키고자 했던 게,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정의(관)'이라는 것은 물론 납득된다. 저 세 가지 사례 앞에, 항상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사람은 공리주의자고, 다수를 위해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게 당연한 듯 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다. 그리고 지은이의 수업 중에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겠지만,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겠다는 회의론자의 정의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모든 딜레마는 답이 세 개다.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태. 원래 딜레마가 딜레마인 것은, 딜레마 속에서는 그 어느 답이나 최선일 수 있고, 어느 것이나 차악일 수 있는 때문이다. 하므로 저 사례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정의란 이처럼 규정될 수 없는 것!'이며, 실제로 정의는 그렇게 나타난다. 이제야 말이지만, 이 책이 숱한 사례들로 넘쳐날 수밖에 없는 것은, 정의가 그만큼 파악하기 힘들다는 방증이었다. 내 생각에 지은이는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율법주의자는 파악 불가능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엔 예로 든 도덕적 딜레마 뿐 아니라, 경제적 정의에 관한 딜레마, 합의에 관한 딜레마, 평등에 관한 딜레마, 자격과 목적에 관한 딜레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제시된다. 지은이가 이처럼 '사례(딜레마) 신공'을 내뿜었던 이유는 1차적으로, 공리주의 정의관과 자유주의 정의관을 대조시켜, 두 정의관의 개념을 주지시키기 위한 소기의 수업 목표 때문이다. 지은이는 딜레마를 던져 놓을 뿐, 어느 것이 정의라고 명시하지 않는다. 간혹 어느 쪽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사례를 늘어놓고 어느 쪽이 정의라고 가르치는 것은 지은이의 목적이 아니다. 마술 카드를 꺼내듯 지은이가 숱한 딜레마를 펼쳤던 2차적 목적은 딜레마로 학생들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이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딜레마에 지치고 넌더리가 난 학생들을 정의가 아닌 법이라는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까지 간수된 것이 동성애와 낙태권에 대한 논란이다.
지은이가 정의에 관한 무수한 딜레마(사례)를 통해 학생들을 깨닫게 하고자 했던 것은, 정의에 관한 딜레마가 정리되지 않을 때, 공동체는 분열이라는 대가를 치른다는 경고다. 예컨대 대통령 선거 때마다 동성애와 낙태권이 미국을 두 동강으로 내어 놓지 않았던가? 이제 진도는 공동체에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하며, '공동선'이 있어야 한다는 지은이의 주장을 향해 나간다.
이 뛰어난 산파술을 마이클 샌들은 당연히 희랍의 스승들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이때, 이 책을 순진하게 읽은 사람은 지은이가 말하는 좋은 삶에 대한 기준과 공동선이 바로 '정의'일 거라고 환원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 책의 제목에 우리가 속은 때문일지도 모르며, 이 역시 똑같은 내용(책)으로 우둔한 제자와 명민한 제자에게 메시지를 달리 가르쳤다고 하는 희랍식 밀의(密意) 탓인지도 모른다.
지은이가 뜻하는 좋은 삶의 기준과 공동선이 곧 정의가 아니라 '법'이라는 것은, 이 책의 서두에 이미 나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부터 심사숙고해야만 무엇이 정의로운 법인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법은 좋은 삶을 묻는 질문에 중립적일 수 없다." (21쪽)
이 얼마나 놀라운가? 앞선 사례들에서 보았듯이 정의란 고작해야 규정할 수 없는 '딜레마의 영역'이지만, 법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샌델에게 법을 만드는 기준은 또 무엇일까? 이 점에 대해서도 지은이는 책의 입구격인 제1강에 "탈레반뿐만 아니라 노예제 폐지론자와 마틴 루서 킹 목사도 도덕적·종교적 이상을 바탕으로 정의에 대한 시각을 정립했다"(35쪽)고 일찌감치 써놓았다. 정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도덕적·종교적 이상'에 의해 확립되어야 한다는 지은이의 이와 같은 주장은 이 책의 마지막 문단 결구에서 재확인된다.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371쪽)
우리는 움직이는 생활세계를 다루는 정치가 고정된 도덕의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 또 정치가 진리를 추구할 때마다 파시즘으로 급전직하했던 역사를 이미 잘 안다. 그런데도 샌델은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면서,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370쪽)고 천연덕스레 말한다. 삶에 필요한 정의의 규범을 만들기 위해 정치에 도덕적·종교적 이상이 필요하다는 샌델의 주장에 따르려면, 낙태와 동성애를 둘러싼 문화 전쟁은 물론이고 여러 종교들 간의 종교 전쟁마저 우리는 납득해야 한다.
정의의 유동적이고 편재적이며 전복적인 잠재성 대(對) 법의 고착적이고 집권적이며 지배적인 가시성은 소포클레스의 희곡 <안티고네>가 잘 드러내 준다. 크레온은 법으로 금지하지만, 안티고네가 선택한 것은 윤리 즉 정의다. 안티고네의 저항이 크레온을 끝내 파멸시켰듯이, 정의가 움직일 때 법은 패퇴하게 되어 있다.
<안티고네>가 식상하다면,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 <배틀 로얄>도 좋은 예가 된다. 이 영화 속의 '베틀 로얄법'은 무인도에 부려놓은 학생들에게 '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 법에 충실하고자 서로를 죽이는 살육 게임에 돌입 하지만, '우리 같이 살아서, 이 섬을 나가자'라고 말하는 일부는 그 법을 와해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이런 법과 정의의 대결을 늘 치른다. 법이 도로교통법을 내세워 시민의 시위 권리를 원천 차단하려고 들 때, 시민은 도로를 무단 점거한다. 1960년 4·19, 1980년 5·18, 1987년 6월 항쟁, 2008년 촛불 집회 등 한국사가 고비마다 경험했던 바로 그것이, 유동적이고 편재적이며 전복적인 정의의 잠재성이자 가능성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그 귀했던 경험들을 팽개치고자 한다는 말인가?
샌델은 제목을 잘못 지은 저 책에서, 좋은 삶과 공동선을 위해서는 도덕적·종교적 이상에 근거한 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유대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의 한 자락에 지나지 않는다. <안티고네>가 모범을 보이고 <베틀 로얄>이 반복했듯이, 법이 중지되는 순간은 연약한 시민(안티고네)과 피실험자(학생)들의 정의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처럼 정의에 의해 법이 중지되는 순간, 비로소 법은 그 자신의 폭압적인 전모를 드러내며, 수수께끼가 풀린 스핑크스처럼 벼랑으로 사라진다.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만, 충직(연대)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는 제9강을 원용하면, 앞서 인용한 세 개의 도덕적 딜레마가 쉽게 풀린다. ①의 경우 한 명이 어느 궤도에 서 있든 그가 미국인이고 다섯 명이 외국인이라면 기관사는 다섯 명이 있는 궤도로 전차를 몰아야 한다. ② 역시 세 명이 미국인이고 열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이 외국인이라면, 그 외국인을 식량으로 삼아 미국인이 사는 게 정의다. 하므로 ③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이런 선택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바의 '영광'을 그들에게 부여해 주지는 못하지만, 애국심이 자연적 의무(살인하지 말라)마저 넘어서는 미덕일 수도 있다는 지은이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위의 예가 거칠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또 평등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분배·자유·권리라는 가치에 집착하면서 '서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공동체의 영광', '도덕적 가치'에 대해 중립을 취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근본주의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분석도 귀 기울여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다종다양한 생활세계에 정치와 법이 하나의 기준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지은이의 공동체주의적 정의(正義)는, 그것이 얼마든지 '국가 신학'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품게 한다.
올해 최대의 국내 소식을 꼽으라면 마땅히 천안함 침몰이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을 수위에 놓고 싶다. 까닭은 이 책이 인문서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려서거나, 정작 읽게 된 이 책의 수준이 고작 맥도날드 매장에서 고등학생들이 햄버거를 먹으며 할 수 있는 잡담에 불과했던 때문은 아니다.
진실은 처참하다. 2010년 한 해 동안, 한국인들이 '정의'라는 기표에 목매달고 또 목말랐다는 사실. 실은, 그게 올해 최대의 국내 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