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故)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를 존경한다. 진심이다. 하지만 고인을 존경하는 것과 그분이 남긴 말과 글 전체를 지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고인이 남긴 글 가운데 일부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정밀시계와 '추노'의 시대, 과연 부끄럽습니까"

고인의 삶을 구어체로 정리한 <대화>를 보면, 고인의 해외 여행 경험에 관한 대목이 있다. 과거 <프레시안>에서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와 진행한 대담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1600년대 말에 제조된 약 2m 크기의 정밀한 시계를 보았을 때 역시 같은 생각에 잠겼다. 시계의 정밀성이나 모든 부속품의 완벽성은 300년 후의 제품같이 완벽했다. 1600년대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만들었을까?"

고인은 '우리 것이 무조건 최고'라는 식의 국수주의적 태도, 세계사에 대한 무관심 등을 질타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1600년대는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고,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애쓰던 때다. 명에서 청으로 바뀌는 국제 질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혼란을 겪었던, 참 힘든 시기였다. 드라마 <추노>의 배경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반면, 2010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면에선 조선 시대의 왕보다 호사스런 생활을 누린다. 먹을거리가 넘쳐나서 비만을 염려하고, 교통수단의 발달로 운동 부족을 걱정한다. '정밀 시계'가 상징하는 근대 문명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게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1600년대 우리 조상들'을 탓하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조금은 불편함이 남는다. 정밀 시계가 없다는 이유로 폄하돼야 한다면, 유럽을 제외한 모든 문명이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 이게 과연 옳은 논리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일단, 이쯤에서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미안함',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노무현, 이명박 두 전·현직 대통령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경력을 갖고 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한미 FTA) 체결에 전력투구했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내세우는 이유도 같다. 수출이 활발해져서 이른바 '국익'이 커진다는 게다. '국익'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는 불분명하지만, 계산 방식에 따라서는 '국익'이 커지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이런 이익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특정 경제 주체의 이익과 다른 경제 주체의 손해를 합산했을 때 '플러스'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일 뿐이다. 한미 FTA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 역시 누군가는 손해를 입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빠뜨릴 수 없는 질문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확실한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근거는 뭔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그렇다면, 이익을 본다고 믿는 다수는 손해를 입는 소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가? 아무런 미안함 없이 그저 "이익과 손해를 합산했더니 '플러스'더라" 이것만으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가 과연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춘 사회인가? 이런 사회에서 산다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어쩌면 정상적인 인간의 심성 아닐까.

하지만 한미 FTA를 지지하는 이들의 말과 글 어디에도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라는 낱말은 없었다. 물론 '그게 뭐가 문제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영원히 '다수'에 속하리라는 법은 없다. 매순간 '다수'에 포함되는 이는 오히려 '소수'다.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언젠가 한번쯤은 '소수', 그것도 '손해를 강요당하는 소수'가 될 날이 있다. 화려한 '스펙'을 갖춘 대기업 임원이나 고위 관료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 역사는 '근대'의 이전 일 뿐, 과연?"


▲ <조선의 힘>(오항녕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미안함'과 '부끄러움'이라는 말을 도무지 듣기 힘든 분위기에 대해 갸우뚱하다가 문득 떠올린 책이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이다. 조선 사회가 비록 '정밀 시계'는 없었을지언정 이 대목 만큼은 우리 시대보다 앞섰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조선 '문명'에 대한 통념을 산산이 부순다. 조선 500년이 간단한 역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역사가 단계적으로 진보한다고 믿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조선 후기 사회가 자생적인 근대화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꽤 널리 퍼져 있는데,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이런 믿음이 잘 녹아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한 이유일 게다.

1980~9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읽던 역사책들도 상당수는 같은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예컨대 '동학'에 대한 관심이 그런 사례다. 동학 농민 운동을 유럽의 시민 혁명과 무리하게 등치시키려는 경향이 한때 있었다.

한편, 다른 어떤 이들은 조선 사회를 그저 폄하하기만 한다. 한반도에 사는 이들이 사람답게 살게 된 것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된 뒤였다는 게다. 이들에게 일제 강점기 이전의 역사는 그저 암흑시대일 뿐이다.

이처럼 서로 엇갈리는 여러 편향에도,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근대'를 좋은 것,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한 판단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목표에 대해 어찌 실패와 성공이 있겠는가?"

하지만 <조선의 힘>은 이런 여러 편향 모두를 명쾌하게 반박한다.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사람들은 조선이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근대로의 전환은 시험에 합격, 불합격을 따지듯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일부만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조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명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목표나 결과에 어찌 실패와 성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길 가다 강도를 만나 상해를 당하면 그 사람에게 운이 없다고 하지, 그 사람이 실패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조선 '문명'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은 애당초 알함브라 궁전의 정밀한 시계를 부러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추구하는 가치와 내면 세계가 근본적으로 달랐던 그들을,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잣대로 재단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텔레비전 사극에 비친 모습으로 조선 사회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염치'의 문명

그렇다고 조선의 지식인들이 뜬구름 잡는 관념에만 골몰하고 이 땅에서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느냐하면, 그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의 최대 관심사가 땅과 밥의 문제였다. 고려 말까지 기득권을 대물림해 왔던 거대 지주들의 반발에 맞서 과전법을 실시한 게 그들이었다. '글을 읽고 정치 활동을 하는 선비가 쌀 한 톨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밥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부딪혔던 것도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자들이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 왕조 500년의 틀을 잡았던 삼봉 정도전이 <경제문감>에서 내놓은 대답은 '선비가 밥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의 고민을 품기 때문'이라는 것. (농민의 고민을 품지 않는 선비는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뜻이 된다.)

물론 이런 답변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을 주도한 지식인들이 노동하지 않으면서 농민 위에 군림하는 삶, 한마디로 '기생하는 삶'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적어도 그들은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알았다.

물론, 그들이 입에 올린 부끄러움, 즉 염치(廉恥)는 어쩌면 상당 부분 가식과 위선이었을 게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런 가식 없이 욕망을 쫓는 요즘 세태가 더 시원시원하게 느껴지는 이들도 있을 게다.

하지만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리를 욕망에 적용하기란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욕망은 너무 많이 충족되는 반면, 다른 누군가의 욕망은 짓밟히기만 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욕망은 아주 사소한 것도 가득 채워지지만,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마저 짓밟힌다. 그런데도 삼성 임원 가운데 누구 하나 '미안하다', '부끄럽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도 염치를 모르는 세상을 옹호할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알았기에 부끄럽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궁궐을 버리고 도망갔던 선조는 걸핏하면 울었다. 대부분 부끄럽고 미안해서였다. 어쩌면 빈말이었겠지만, 백성과 신하들에게 부끄럽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조선의 임금들, 지식인들이 남긴 글 역시 마찬가지다. 설령 가식일지언정 '부끄러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요즘과 달리 눈물이 참 흔했다.

누군가의 욕망이 더 많이 채워지는 일, 욕망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은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조선의 지도자들은 같은 조건에서 '부끄러움'을 말했다는 점이다. 알함브라 궁전에 걸려있던 시계를 만들 능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선 문명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조선의 힘>은 부끄러움을 알고 약육강식의 논리를 경멸했던 조선 문명의 이모저모를 몇 개의 키워드로 짚어낸 책이다. 문치주의, 성리학, 실록, 대동법 등이 그 키워드다. 조선 시대 사상사, 제도사를 전공했으되 서양 현대 철학과 요즘 세태에 대한 관심도 늦추지 않았던 저자의 문장은 성리학에 별 관심이 없었던 독자의 입맛에도 착착 감긴다.

광해군은 조선의 이명박?

특히 정책 결정자를 꿈꾸는 수험생에게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의 4장인 '대동법, 혁신하는 시스템'은 조선 시대 관료들이 얼마나 긴 호흡으로 정책을 고민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현대의 관료들에게도 유익한 힌트가 될 게다.

조선 시대를 이해하는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이런 목적으로 읽는 독자라면, 6장 '부활하는 광해군'부터 읽기를 권한다.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부풀려진 광해군의 면모에 대해 균형 잡힌 이해를 할 수 있다. 광해군을 고루한 기득권 세력에 맞선 개혁 군주로 이해하면 잘못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인데,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조선 문명이 가진 역동적 힘을 긍정하는 저자의 생각이 잘 반영돼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광해군이 꼭 이명박 대통령과 닮아 보인다. 원칙 없는 정치를 했으며, 무모한 토목 공사로 국가 재정을 낭비했다. 이를 '실용 개혁'이라며 옹호한다면, 이 대통령도 똑같이 지지해야 할 텐데, '광해군 개혁 군주론'을 주장한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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