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던 중국 광저우에 촬영차 갔을 때였다.

광저우는 중국의 3대 도시답게 도심 한복판에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밤이 되면 강변을 중심으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수많은 자전거 행렬과 우리의 1970년대 풍경을 상상했던 촬영 팀은 서울과 비슷한 도심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아마 이런 경험은 최근 20년 사이 광저우가 아니더라도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중국 도시에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렇듯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광저우를 본 촬영 팀은 그래도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서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멀지 않은 곳에 재래시장이 있다는 얘기를 접하게 됐다. 우리는 빌딩숲을 지나면서 과연 여기에 그런 시장이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시장을 찾았는데 그 시장을 둘러싼 골목에 들어선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세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그 골목엔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 청년부터 채소 담은 검정 봉지를 뒷짐 진 손에 쥔 채 집으로 향하는 할머니까지 다양했다. 내 두 발을 지탱하고 있는 바닥은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사이사이 돋아난 초록색 잡초가 이곳이 흑백영화 속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대나무 막대기에 각종 속옷들이 천의 탄성을 잃은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래, 여기야말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곳이군. 그나저나 여기도 조금 있으면 재개발이 된다는데 아쉽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은 보존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채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이런 내 생각을 뒤집어 준 광경이 있었다. 채광, 조망권은커녕 숨쉬기조차 힘들만큼 살인적인 광저우의 여름을 과연 이곳에서 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만드는 집들 때문이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 그 집은 빛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낮인데도 칠흑처럼 어두워 물건의 형체만 간신히 보였다. 집의 기능 중에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란 걸 제외하곤 아무 기능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휴, 오래된 곳이니 이곳을 보존하자…, 참 이기적인 생각이구나.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지 않는, 그저 한낱 박물관 속 소품 정도로만 생각하는 이방인의 이기적인 생각. 어쩌면 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속에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골목을 재개발할지, 보존할지는 철저하게 그곳에서 삶을 영위해온 주민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데 한국도, 중국도 결국은 나와 같은 이방인이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었다.


▲ <나는 유약진이다 : 늑대를 속여야 하는 한 남자>(류전원 지음, 김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류전원의 <나는 유약진이다>(김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광저우에서 만난 사람들, 풍경 그리고 그곳의 냄새까지도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광저우의 풍경들이 책 속의 풍경과 무척 비슷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역시 책 속 인물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주인공 유약진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줄곧 답답하면서도 한심한 행동들로 일관해 내 가슴을 여러 번 내려치게 만들었다.

"자신은 황효경과 십삼 년을 살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했고 그녀의 허리가 다른 허리와 다르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바로 그 허리가 마누라로 하여금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게 하고 자신을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 허리를 자신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갱생은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허리 때문에 유약진은 잘못된 사람이 되었고, 이갱생과 황효경은 옳은 사람이 된 것이었다."

작가는 유약진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후에야 아내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나마 보통의 드라마처럼 아내를 빼앗기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아내의 매력을 제 때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그의 삶은 더 구질구질하다.

유약진은 아내와 이갱생이란 남자가 간통을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이갱생에게 벌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이갱생으로부터 온갖 폭행과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아내 황효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양육권을 놓고는 온갖 자존심을 세우느라, 자신보다 경제력이 훨씬 좋은 황효경과 이갱생이 매달 주겠다는 양육비도 거절한다.

그래서 나는 유약진이 돈에 있어서만큼은 자존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읽다 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내의 새 남자인 이갱생에게 이혼을 대가로 6만 위안의 돈과 바꿀 수 있는 차용증을 요구한 것이다. 그에게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만 있을 뿐 진정으로 자신을 세우는 자존심은 없어 보였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한 나의 감정은 다른 인물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남은 건 6만 위안의 차용증과 아들 밖에 없다고 여기는 아버지 유약진에게 아들 유붕거는 아버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물론 아버지를 돈보다도 하찮은 존재로 취급한다. 유약진이 일하는 건설사 사장인 엄격은 공사장 인부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듯싶었으나 유명 여가수와의 불륜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기 위해 여가수와 동행하다 찍힌 사진 속 현장을 하나의 연극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그 곳에 있던 옥수수, 고구마 장수들에게 돈을 주며 연기를 요구한 것이다. 또 유약진과 동향인 한승리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에 따라 친구와의 의리는 안중에도 없는 인물이다.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도 나약하면서 자신보다 나약한 이들의 목줄을 움켜쥔 채 흰 눈동자를 드러내며 의기양양해 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의리, 자존심, 목숨 따위는 중요치 않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돈이 많은 이들은 세련된 척하며 온갖 부정, 부패를 동원해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돈을 긁어모은다. 그리고 돈이 없는 이들은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위해 세련되지도 않으면서 역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돈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한 쪽은 호화 빌라에서 한 잔에 우리 돈 20만 원쯤 되는 차를 홀짝이지만, 한 쪽에서는 우리 돈 100원이 아까워 생수를 사서 마시지 못하고 역 근처 수도꼭지 밑에 입을 벌린다.

광저우에서 봤던 화려한 고층 빌딩과 그 뒤로 펼쳐진 남루한 골목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던 건 어찌 보면 필연이었던 듯싶다. 곧 재개발이 될 광저우의 골목과 재개발로 돈을 긁어모으는 책 속의 인물들, 속이 노란 고구마를 사먹었던 광저우에서의 기억과 엄격과 여가수가 사진에 찍힌 풍경 속의 고구마 장수, 철저히 이방인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을 재단하려던 광저우에서의 내 모습과 이건 내 삶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며 읽었던 독자로서의 나.

이렇듯 광저우에서의 시간은 1년간 생활했던 칭다오에서의 경험과 합쳐지면서 독자인 나를 책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책 속으로 빠져들었던 이유는 단지 중국 생활을 겪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이 곳 한국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에게 풍요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광저우에선 많은 빈민가가 재개발되고 있었듯,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유약진과 같은 농민공들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의 배만 불리는 책 속의 엄격과 인 씨, 가 씨가 있었듯, 불과 20여 년 전 경기장을 짓고 도시 미화라는 이유로 무참히 서민들의 삶을 밀어버렸던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었고 가까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마저 앗아간 용산 참사도 있었다. 수십, 수백억 원을 횡령한 경제 사범들은 특사로 풀려나 다시 떵떵거리며 살지만 살기 위해 절도를 한 이들은 어둠의 굴레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한다.

학창 시절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며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될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보며 암담하고 답답함에 책을 덮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한 작가가 쓴 <나는 유약진이다>를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아마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눈을 감는다고 해서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순 없듯 세상에 눈을 감는다고 해서 처절하기까지 한 현실을 벗어날 순 없다. 어떻게 하면 비를 피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 현실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편이 훨씬 낫다.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해 준 이 책이 참 얄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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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후반부터 성장 소설, 청춘 소설류가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 한 흐름은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2008년)에서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2010년)로 이어지는, 지나간 젊은 날에 대한 낭만적 회상의 이야기들이다.

이와 더불어 김려령의 <완득이>(2008년)로 시작된 청소년 문학의 흐름, 곧 청소년 세대의 감수성과 목소리를 충실히 대변하고자 하는 또 다른 성장 이야기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두 흐름을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은희경의 신작 <소년을 위로해줘>(문학동네 펴냄) 역시, 2010년 말 출판 시장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입시 지옥과 취업난으로 '성장의 대업'은 아득히 멀기만 하고 '빛나는 청춘'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성장 소설/청춘 소설의 인기는 무척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이런 현상에는 복잡하고 모순적인 사회·문화적 맥락이 뒤엉켜 있다. 한편에서는 젊은 세대가 처한 답답하고 출구 없는 현실에 대한 근심과 연민이 깊어져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돌 문화와 '동안 신드롬'으로 대표되는 젊음에 대한 동경과 예찬이 흘러넘친다.

청소년을 교육과 계몽의 대상으로 다루는 대신에 청소년들 자신의 이야기로 거듭나야 한다는 청소년 문학의 온당한 요구는 청소년이라는 새로운 소비자층을 발굴하고 이들을 타깃으로 삼는 마케팅 전략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최근 성장 소설들이 주는 '위로'의 힘은 어쩌면 다음 두 가지 방식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이 시대가 잃어버린 젊음을 '향수'로 재생산하여 소비하거나, 젊은 세대가 겪어야만 하는 지독한 현실을 '즐길 만한' 이야기로 변형하거나.


▲ <소년을 위로해줘>(은희경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은희경의 <소년을 위로해줘>는 확실히 위로가 되는 성장 소설이자, 세련되고 트렌디한 읽을거리이다. 소설 속 'G-그리핀'의 랩처럼 섬세하고 솔직한 열일곱 살 연우의 이야기는 내 안에도 들어 있는 '소년'의 감수성, "모든 불완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계인과 아웃사이더로서의 내면"을 건드린다.

힙합과 그래피티로 표상된 하위문화적 감수성은 "시스템 안에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이 걸어야 하는 '마이너의 길'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그 길은 이혼녀이자 옷 칼럼니스트인 연우 엄마 신민아 씨, 여덟 살 연상인 그녀를 애인으로 둔 문화평론가 재욱 형, 그리고 작사가 '노랑머리 깡'으로 자라난 연우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길이다. "시스템의 보호를 받기 위해 거짓으로 살아가는" 대신, 불안하고 외로워도 당당하게 자기다운 삶을 만들어가려 하는 이들의 모습은 사실 꽤 매력적이다.

"혁명이란 내가 나일 수 있는 세계",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더 이상 비겁해질 필요도 없는 세계"이며, 그런 세계가 정말 가능하다고 하는 이 소설의 메시지는 얼마나 마음 편하고 듣기 좋은가.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거나 '시스템 안'에 들어가려 안달하지 않고 자기 식의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시스템은 훨씬 더 폭력적이고, 거기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존 그 자체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생존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겐 쿨하게 '바깥'을 선택할 권한이 없으며, 그럼에도 언제든 울타리 바깥으로 밀려나고 배제될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것이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그려내는 '마이너의 길'은 별로 위험하거나 고달파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오히려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남다른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일지 모르고,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란 CF에나 등장할 법한 개성 있고 자유로운 삶의 이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 신민아 씨와 연우의 대화에서 무심결에 드러나듯,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우아하고 능력 있는 '한량'의 삶이랄까.

"연우야, 내가 바라는 너의 미래는 말야, 한량이야. 한량이라고? 응. 그거 어려운 거 아냐? 쉽진 않지. 돈 안 벌고 놀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우선 돈을 버는 방법부터 익히는 게 한량이 되는 첫걸음일 걸. 열심히 돈이나 벌어야 한다면 그게 무슨 한량이야? 왜 열심히 벌어, 쉽게 벌어야지. 쉽게, 어떻게? 실력이 있으면 돈 쉽게 벌어. 실력을 쌓으라는 건 결국 공부 열심히 하라는 거? 꼭 공부 얘기는 아니고. 그럼 공부 안 하고 실력 쌓는 게 뭔데?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지. 거기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이런 식이라면, 시스템에 충실한 수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바라는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을 위로해줘>는 '마이너의 길'과 '마이너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메이저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이 독자들을 조금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이유, '소년'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안락한 위로를 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테고 말이다.

채영, 태수, 마리와의 관계에서도 주인공 연우의 삶은 치명적으로 상처받는 일 없이 안전하게 보인다. 첫눈에 반한 소녀 채영은 연우를 만나기 전이나, 3년간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이후나, 오직 한결같이 연우만의 운명적인 첫사랑으로 존재한다. G-그리핀(선배 민기훈)의 그림자가 둘의 관계에 걸림돌이 되긴 하지만, 그건 단지 부질없는 오해였을 뿐이고, 채영은 한 순간도 연우를 배반하거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채영과 달리 '남자들의 로망'이 될 수 없는 캐릭터인 마리가 연우의 마음을 조금도 흔들어놓지 못하는 건 물론이다. "시스템이 틀렸을지도 모르잖아요", "잘못된 게 있으면, 그런 건 바뀌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 아녜요?"라는 마리의 목소리 또한 어느 결에 흐지부지 지워져버리고 만다.

소설 전체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인 태수의 죽음조차도, 의외로 담담하게 처리돼 있다. 태수의 죽음은 '인트로'에서부터 일찌감치 예고돼 있고, 못 말리는 '보이 기질'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처럼 묘사돼 있어, 독자에게도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 장(히든 트랙)에서 이 죽음이 연우의 입을 통해 "네가 이겨내지 못한 단 한 번의 충동과 잘못된 판단, 그것만으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행동하기 전에 그걸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정리되는 장면은 무척이나 씁쓸하기도 하다.

<소년을 위로해줘>는 전형적인 성장 이야기들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지만, 지금의 트렌드와 감수성을 적절히 배합하여 신선하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세상이 그렇게나 끔찍하진 않으며 네 멋대로 살아도 그럭저럭 괜찮다는 메시지는 '소년'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고, 우리 모두가 "낯선 우주의 고독한 떠돌이 소년"이라는 말은 '어른'들에게도 향수어린 만족감을 제공한다.

그러면 됐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하냐고 묻는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매력적인 성장 소설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지 의심하는 독자들에게 <소년을 위로해줘>는 이 시대 성장 소설이 지닌 모순과 딜레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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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이 '문장'으로 이미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평단의 인정을 넘어서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김훈이라는 이름이 한국 문학 시장의 몇 안 되는 파워브랜드가 된 것 역시 특유의 김훈 식 문장 때문일 것이다.

이때 이 '문장'의 의미를 단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적어도 그것이 최근에는 서사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용어가 되다시피 한 '스토리텔링'과 같은 것은 아닐 터이다. 엄밀히 말해, 김훈 소설의 문장들이란 시간적 선조성이 결부된 일련의 사건적 배치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등장인물들 간의 대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들을 이루는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1인칭 주인공의 의식이며 관념이라고 말이다. 김훈의 소설은 개성이 다른 인물과 인물 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사건을 빚어내고 전개해 나가기보다는, 1인칭 주인공의 의식과 관념을 통해 세계를 마주하는 주체의 시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그 시각을 통해 세계를 사유하고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사건은 인물의 외부, 세계에 있다기보다는 주인공의 의식 안에서 명멸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개별 작품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2000년대 한국 문학 시장에 김훈의 소설이 기여한 가장 의미심장한 바는, 그의 소설이 잘 쓰인 '문장'은 그 자체로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실상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문장을 생산해 내는 김훈 소설의 사유의 주인공들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관념을 끔찍하게 혐오한다. 즉, 김훈의 문장은 관념이자 사유 그 자체의 표상이지만, 이 관념과 사유는 관념적이지 않다. 그의 출세작 <칼의 노래> 처음 대목에서 이순신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은" 자들에 의해 형틀에 묶여 있으며,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자들의 "언어가 가엾었다"고 생각한다.

김훈의 주인공들이 감정이 있되 감상적이지 않으며, 원리로 환원할 수 없는 완강한 사실을 중시하고, 사태의 모순과 난처함을 견지하고 수락하며, 육신에서 배어나오는 냄새에 매우 민감하고, 삶 내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죽음의 물리적 형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등은 모두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훈의 문장이 품고 있는 관념은 복합적이되 복잡하지 않으며, 간명하고 지극히 유물론적이다(이 유물론적 시각이 남성의 언어를 입고, 여성의 육체를 감각화하는 방식에서 여성 독자들의 불편함이 생겨나기도 한다).


▲ <내 젊은 날의 숲>(김훈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김훈의 신작 <내 젊은 날의 숲>(문학동네 펴냄)은 그의 문장이 품고 있는 이러한 특이성과 더불어 그의 일련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던 면면들을 두루 포섭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연히 비무장지대 근처 민통선 내에 있는 수목원에 취직한 한 세밀화 화가의 1년의 생활을 다룬 이 작품은, 동시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화평고원'을 둘러싼 한국전쟁 당시의 전사를 첨가함으로써 일련의 역사 소설 속에서 보여준 인간사를 바라보는 작가 특유의 허무 의식을 도입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아버지의 죽음을 주요 에피소드로 다룸으로써 <강산무진>에 실린 몇몇 단편들에서 보여준 죽음에 대한 유물론적 탐구와 세속 세계의 관성이 지닌 완강함을 다시 한 번 탐구하고 있다. <공무도하가>에서 나타난 작가 특유의 취재 감각 역시 수목원의 직업인들의 일상과 의식을 통해 또 한 번 빛을 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내부적으로 횡단하는 여러 가지 통로가 있을 터이지만,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왜 하필이면 작가가 비무장지대 민통선 내에 있는 수목원이라는 흔치 않은 공간을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하였는가 하는 지점이다. 이 배경 설정의 의도를 짐작해 보기 위해서는, 이 공간의 주요 인물인 수목원의 실질적 책임자인 '안요한'과 수목원 내의 다종다양한 식물을 그려내기 위해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된 세밀화 화가인 '나'(조연주)의 의식 세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문장이 '나'의 의식과 관념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김훈 소설을 지탱하고 있는 문장 일반의 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안요한은 식물학자로서 그의 연구 목적은 수억만 가지의 색깔과 형태로 피어나는 꽃의 모양과 빛깔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비밀로만 존재하는 만상의 근원에 대한 '과학적'이고 원리적인 접근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꽃은 영원히 자신의 비밀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안요한이 쓴 책의 한 문장을 읽으며, 말을 해야만 살 수 있고 말로 해야만 안심이 되는 안요한(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을 가엾게 여긴다.

'나'가 보기에 꽃의 비밀은 애초부터 인간의 말과는 무관한 것이며, 그 비밀은 꽃의 내부의 비밀이 아니라 안요한 내부의 비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즉, 꽃에 대한 제 아무리 집요한 과학적 연구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꽃이 자신의 색깔과 구조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고 한들 그것이 꽃 자체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요한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지는 '나'의 세밀화 작업은 안요한의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세밀화 작업이 "원리나 개념으로는 파악이 안 되"는 식물들의 일반적 원리를 추상화하는 과학과는 달라 보이지만, 개별적 식물의 질감과 온도, 즉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그리는 일"은 안요한이 보기에는 궁극적으로는 종족의 일반성을 추출하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안요한의 욕망을 가엾어 하면서도, 역시 꽃의 실재를 세밀화 속으로 길어 올리기를 갈망한다(전쟁 전사자의 유해인 '뼈' 그림을 세밀하게 그리는 작업도 동일한 메타포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소설에서 세밀화 화가인 '나'의 시선에 의해 매혹적이지만 냉철하게 포착된 꽃들에 대한 소설적 묘사들은, 바로 세밀화 화가인 '나'와 문장의 묘사를 통해 대상의 실재에 가능한 근접해 보려는 작가 김훈의 욕망을 또한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인칭 주인공 '나'의 의식의 표상인 소설 속 문장들을 통해 드러나는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작가적 욕망에는 모순적인 면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실재를 길어 올리려는 작가의 언어적(예술적) 욕망과 대상과 인간의 언어는 무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사유가 길항하기 때문이다.

김훈 특유의 허무가 생겨나는 지점도 예술가적 욕망과 철학적 사유가 충돌하며 아이러니를 빚어내는 바로 이 지점이다. 수목원의 나무 해설가 '이나모'가 사람의 말로 나무의 시간을 설명하면서도, 언제나 그 해설의 마지막을 '인간의 시간과 나무의 시간은 다르다'는 말로 끝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속에서 꽃과 나무에 대한 작가의 치밀한 묘사는 주인공의 표현대로 "모든 개별적 나무와 개별적 존재가 겪는 시간이 제가끔"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모든 개별성의 표현과 만남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역설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주인공(작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풀과 꽃은 겨우 그릴 수 있지만 숲과 산은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숲은 다가가면 물러서고 물러서면 다가와서 숲속에는 숲만이 있었고 거기로 가는 길은 본래 없었다. 본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여야 보는 것일 터인데,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비 맞고 바람 쏘이고 냄새 맡고 숨 들이쉬며 여름을 보냈다."

김훈의 소설을 일반적 소설의 방식처럼 일정한 에피소드의 나열이나, 서사를 중심으로 읽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것도 한 독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김훈 소설을 읽는 가장 맥 빠진 독법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김훈의 신작 소설 <내 젊은 날의 숲>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에서 그동안 좀처럼 보지 못했던 로맨스, '사랑과 희망'의 가능성을 볼 수도 있을 터이고, 거세된 수컷의 말없는 처연함과 세속 세계의 완강한 생명력을 확인할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독법은 휴전선 이남의 산천을 떠돌며 길어 올린 이 집요하고도 매혹적인 문장과 문장 속 풍경과 그 풍경의 틈 사이에 배어 있는 작가의 사유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독법은 아니라고 보인다. 물론 이러한 독법이 이끄는 이 소설의 문장 속 풍경의 의식이란 작가의 후기대로 지극히 아이러니하기는 하다. 이 소설들의 문장이 품고 있는 풍경(의 의식)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 젊은 날의 숲>을 읽는 매혹적 독법 중 하나는,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망과 실재 사이의 간격을 끊임없이 견지하고 수락하면서 쓰인 예술가 소설로 이 작품을 읽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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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9일부터 2주간 멕시코 칸쿤에서 유엔(UN) 기후변화협약 제16차 당사국 총회(COP16)가 열렸다. 인류가 산업화 과정에서 배출한 온실 기체가 초래할 지구 온난화와 같은 위험에 맞서고자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회의는 지난해 덴마크 코펜하겐처럼 올해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데 실패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칸쿤 총회가 시작되기 바로 전, 한 프랑스 학자가 한국을 다녀갔다. 파리정치연구대학교 교수 브뤼노 라투르(63). 그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매년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인류 문화에 기여한 예술가, 이론가에게 수여하는 '백남준 국제예술상'의 올해 수상자로 결정돼, 한국을 방문했다.

브뤼노 라투르? 한국에서는 학계에서도 생소한 학자다. 그러나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사정이 다르다. 그는 사회(철)학자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학자다. 그가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고안한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 ANT)'은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환경학, 경제학, 경영학 등까지 그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백승욱 옮김, 창비 펴냄)에서 라투르 교수의 ANT를 기존의 사회과학에 도전하는 여섯 개의 새로운 접근 중 하나로 지목하기도 했었다. 이번에 백남준아트센터가 이론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라투르에게 백남준 국제예술상을 준 이유도 이런 라투르의 업적 때문이다.

왜 라투르가 주목받는가? 그는 인간(human)에만 초점을 맞춰온 사회과학의 그간의 경향에 반발하며, 현대 사회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수많은 비인간(nonhuman)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ANT가 인간뿐만 아니라 자동차, 세균, 온실 기체 등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수많은 비인간 행위자(actor)의 역할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이 때문이다.

라투르는 이런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비인간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앞에 닥친 생태 위기, 경제 위기 등의 전대미문의 불확실한 문제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리라고 믿는다. <프레시안>은 지난 11월 26일 서울 중구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그의 생각을 들었다.

과학기술학자 김환석 국민대학교 교수(사회학)가 인터뷰어로 나섰다. 김 교수는 국내에 생소한 라투르의 사상과 ANT의 문제의식이 지닌 중요성을 10여 년 전부터 강조해 왔다. 최근에는 라투르의 <사회적인 것의 재구성(Reassembling the Social)>(2005년) 등을 번역 중이다.


▲ 프랑스 파리정치연구대학교 브뤼노 라투르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과학기술 탐구야말로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열쇠"

김환석 : 당신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 STS)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학자 중 하나로서, 특히 행위자 연결망 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가?

라투르 : 과학기술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현대 사회가 형성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과학기술학이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전에는, 사회과학 안에서 과학기술은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종교, 법을 연구하는 것처럼 과학기술을 연구했어야 했는데도 이전에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과학기술학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행히 지난 30년간 과학기술학은 계속해서 성장했다. 장담하건대, 앞으로 과학기술학에 대한 관심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욱더 큰 문제로 다가올 생태 위기의 해법을 찾는데 있어서 과학기술학이 큰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환석 : 현재 서구의 사회과학계는 과학기술학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

라투르 : 학자의 숫자로 보면 과학기술학은 여전히 주변 학문이다. 그러나 다양한 학문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해명하고자 활발하게 토론을 주고받고 있다. 여성학(gender studies), 발전 연구(development studies), 식민지 및 탈식민지 연구(colonial and postcolonial studies) 등의 학제적 연구에서 과학기술은 핵심 주제다.

최근에는 경제가 과학기술학의 새로운 주제로 부상 중이다. ANT의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금융 시장의 메커니즘을 해명하려는 학자들,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미셸 칼롱이나 영국의 도널드 맥켄지가 그렇다. 더구나 이런 시도에 자극을 받은 각 학문 분야의 젊은 학자들이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를 탐구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과학기술학은 이미 주류다. 이렇게 과학기술학이 부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 더 강조하자면, 과학기술학은 오랫동안 사회과학이 외면했던 사물의 물질성(materiality)을 다시 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으로 끌어왔다. 예전에 마르크스주의가 했던-그것은 물질을 지나치게 관념론적으로 파악했지만-역할을 지금 과학기술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김환석 : 현재 한국의 사회과학계의 모습은 30~40년 전의 서양의 그것과 비슷하다. 어느 나라보다도 과학기술의 영향이 큰 사회지만, 과학기술학은 사회과학의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기술은 여전히 경제 발전의 도구로만 취급된다. 한국의 과학기술학자로서 10~20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이런 풍토가 바뀌길 바란다.

"과학과 예술, 서로가 필요하다"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이번에 백남준 국제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평소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나?

라투르 :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 둘 사이의 관계를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가 무엇인가? 바로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다. 잘 알다시피, 예술은 언제나 이 재현 과정에서 과학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과학의 사정은 다른가? 과학도 마찬가지다.

재현의 문제는 과학에서도 중요한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행한 연구 결과를 논문 등으로 발표하는 과정 역시 예술의 재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은 과학을 필요로 하고, 과학은 예술을 필요로 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역사적으로 과학과 예술의 교류를 시도했던 흐름이 많았다.

20세기 초반 건축과 예술의 조화를 추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의 시도도 그런 맥락이었다. 나 역시 2002년과 2005년에 독일 칼스루에의 ZKM(Zentrum For Kunst Medientechnologie)에서 두 차례 전시회를 공동 기획했는데 큰 반향을 얻었다.

내가 올해 '정치 예술(political arts)' 과정을 개설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자, 사회과학자, 예술가가 모여서 새로운 정치적 기획을 모색하는 시도를 해보았다. 과학과 예술, 정치철학과 예술 등의 공통 접점을 찾아보려는 좋은 시도였고, 새롭고 다양한 정치적 질문이 여러 개 나왔다.

김환석 : 프랑스에서 예술가와 과학자의 지적 교류는 활발한가?

라투르 : 그렇지 않다. 서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주제를 개척하며 교류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나의 경험을 염두에 두면 생태 위기를 매개로 이런 시도를 한다면, 과학자와 예술가 모두에게 생산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과 시도는 백남준이 애초에 추구했던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쑥스럽지만, 그것이 내가 이번에 상을 탄 이유가 아닐까?


▲ 김환석 국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우리는 '근대'였던 적이 없다"

김환석 : 방금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생각과 실천을 간단히 듣기도 했듯이, 당신은 1990년대부터 관심 분야가 과학기술학에서 좀 더 넓은 영역으로 넓어졌다.

특히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프랑스어 : 1991년, 영어 : 1993년)에서 근대주의(modernism),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논쟁에 비판적으로 개입해서 비근대주의(non-modernism)를 모더니즘의 대안 개념으로 제시했다. 비근대주의는 여전히 생소한 개념인데 자세히 설명하자면?

라투르 : 과학기술학의 성과가 계속 쌓였지만 대부분의 과학자와 사회과학자는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학자들은 나의 연구 성과를 포함한 과학기술학이 과학을 공격한다고, 그러니까 반(反)과학주의라고 오해하기까지 했다. 이런 반응의 이유는 무엇일까?

'근대(modern)', '근대화(modernization)', '서구화(westernization)' 등처럼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널리 통용되는 개념이 바로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의 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을까? 이런 깨달음을 정리한 책이 바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였다.

과학기술학이 탐구한 과학기술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 정말로 우리는 한 번도 '근대'였던 적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얘기되는 근대화와는 전혀 다른 경로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과학자는 근대화를 자연으로부터 사회의 해방, 그러니까 비인간(자연)과 인간(사회)의 분리로 이해했다.

즉, 자연/사회, 비인간/인간을 분리하지 못했던 비합리적인 전근대인과는 달리 근대인은 자연/사회, 비인간/인간을 분리함으로써 합리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지난 수백 년간 우리는 주로 과학기술을 통해서 인간과 비인간(사물)을 끊임없이 결합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과 같은 산업 문명이 등장하는 데는 석탄, 석유와 같은 비인간(사물)에 대한 의존은 필수 불가결했다.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 없이는 단 한 순간도 문명을 지속할 수 없는 처지면서 무슨 자연으로부터의 해방, 비인간/인간의 분리를 얘기하는가? 오히려 우리는 지난 수백 년간 비인간-인간의 잡종(하이브리드)을 엄청나게 양산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결과가 바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생태 위기다. 이 책을 처음 썼을 때도 이미 심각했던 생태 위기는 최근의 (화석연료의 산물인) 온실 기체가 초래하는 지구 온난화에서 알 수 있듯이 더욱더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근대화, 서구화 같은 개념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고자 내세운 용어가 바로 '비근대주의'다.

그러나 이 용어 역시 ('근대주의'에 강하게 결박된 탓에) 앞에서 설명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전달하는 데는 미흡했다. 최근에 내 입장을 '컴포지셔니즘(compositionism)'이라는 새로운 용어로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모더니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닌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예술가의 통찰에 기대를 거는 편이다. 19세기~20세기 많은 예술가들이 새로운 시대의 징후를 포착하고 그것의 본질을 작품으로 보여줬다. 그런 노력이 '근대'라는 개념이 정착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예술가들도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개념화하지 못하는 이 상황을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문제의식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용어라고 얘기했지만, 일단은 비근대주의라는 용어를 쓰겠다. 탈근대주의와 비근대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투르 : 우리가 한 번도 근대였던 적이 없는데, 근대의 다음을 뜻하는 탈근대 자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한 번 더 강조하자면, 국가/시장, 산업/상업 등 갈수록 세계의 모든 것이 통합되는 추세야말로 지난 수백 년간의 진짜 역사 아닌가? 그런데 개념으로서의 근대화는 (많은 사회과학자가 믿듯이) 모든 영역의 분화와 분리를 뜻한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정반대의 이론과 현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탈근대를 말하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을 더욱더 어렵게 할 뿐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는 일이다.

들뢰즈와 푸코,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

김환석 : 한국에서는 프랑스의 지식인 가운데 특히 푸코, 들뢰즈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들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라투르 : 들뢰즈가 현대 사회의 정체를 해명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아주 중요한 철학자라는 데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들뢰즈는 철학에서 비인간(자연)을 다시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 아주 훌륭한 철학자다. 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지금 현재 진행 중인 나의 연구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하다. 그와 나는 가브리엘 타르드 그리고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푸코에 대한 평가는 좀 복잡한데…. 물론 나는 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프랑스와 외국에서 푸코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프랑스에서 푸코는 (데카르트 이후 프랑스 철학의 특징인) 합리주의의 영향 하에 있는 전통적인 인식론자로 평가를 받는다. 그런 탓인지 인간/비인간을 같이 사고하는 나로서는 푸코의 사유로부터 얻을 게 많지 않다.

이런 질문은 아주 당혹스러운데, 사실 푸코, 들뢰즈와 나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끼친 영향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또 그들의 사상을 바탕에 두고 나만의 새로운 견해를 펼치려고 노력했고. 아마 현대의 프랑스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왜 '컴포지셔니스트'인가?

김환석 : 아까 잠시 언급한 최근의 입장을 얘기해 보자. 몇 달 전에 '컴포지셔니스트 선언'을 전면에 내세운 논문(An Attempt at a "Compositionist Manifesto")을 발표했다. 컴포지셔니즘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라투르 : 컴포지셔니즘은 '비판(critique)'을 넘어선 '대안(alternative)'에 초점을 맞춘다. 비판은 '근대'라고 이름 붙여진 시기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비판자는 문제뿐만 아니라 해법도 알 것으로 간주되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비판은 힘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생태 위기의 상황에서 그런 비판은 더 이상 불가능하며 쓸모가 없다. 모든 것이 이미 무너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에 비판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내가 제시한 컴포지셔니즘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전 지구적 문제는 완전히 새로운 문제다. 이런 문제에 대항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그간 우리 근대인들은 전통, 농촌, 가족 등과 같은 옛 것을 비판하고 그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 방향은 과연 맞는가?

과거로부터 도망가려던 우리 근대인 앞에 전혀 새로운 '가이아(Gaia)' 즉 지구의 문제가 딱하니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구 외에는 다른 행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근대주의는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만약 미국인처럼 전 세계인이 소비하고 살려면 다섯 개 이상의 지구가, 프랑스인처럼 살려면 두 개 이상의 지구가 필요하다. 한국인에게는 몇 개의 지구가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근대주의가 추구하던 '비판'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게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컴포지셔니즘이다.

김환석 : 올해 발표한 글의 '선언'이라는 표현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연상했다. <공산주의자 선언>과 '컴포지셔니스트 선언'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투르 : 둘 사이의 공통점은 바로 '공동인 것(the Common)'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 때 '공동인 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란 점이 중요하다. 1940~50년대에는 근대성의 확장으로 자연 또는 시장에서 쉽게 이것이 주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런 환상은 깨졌다.

물론 <공산주의자 선언>은 근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비판과 진보에 대한 절대적 믿음, 사전예방을 고려않는 과학기술에 대한 낙관주의, 과거와의 급진적 단절을 의미하는 혁명 추구 등에서 '컴포지셔니스트 선언'과는 큰 차이점이 있다. 나는 '공동인 것'은 당연시되어 모두에게 강요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이제부터 점진적으로 하나하나 구성(compose)해나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라투르가 제기한 컴포지셔니즘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자연의 정치학(Politics of Nature : How to Bring the Sciences into Democracy)>(프랑스어 : 1999년, 영어 : 2004년) 등에서 해왔던 주장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라투르는 그동안 인류의 눈앞에 펼쳐지는 전대미문의 문제들, 즉 지구 온난화, 생명공학의 영향, 인구 증가, 환경오염 등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이 문제들은 라투르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과학기술을 매개로 지난 수백 년간 만들어낸 수많은 잡종의 부작용으로 나타난 것들이다.

인류와 지구 자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라투르는 기존의 좌파, 우파의 접근으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전혀 새로운 정치적 기획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최근의 문제는 원인부터 해법까지 불확실성은 가득한 반면에, 제대로 된 해법을 제때 찾지 못했을 때의 피해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라투르는 새로운 기획의 한 예로서 '사물의 정치(Politics of Things)'를 제안한다. 우선 그는 그 동안 억압돼 왔던 모든 인간/비인간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도록 해서, 수많은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해 '논란'과 '협의'가 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문제의 우선순위가 결정되고, 거기에 부합하는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물의 정치'를 통해서 지구를 공유하는 인간/비인간은 그 동안 잡종의 양산으로 누적된 많은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면서 새로운 균형 상태, 즉 '공동 세계(common world)'를 찾을 수 있다. 새로운 '논쟁'을 만들고, 대안의 '해법'을 찾자는 컴포지셔니즘 역시 이런 기획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다. <편집자>

"'사물의 정치'가 필요하다"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과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묻고 싶다. '사물의 정치(Politics of Things)'와 같은 개념은 여전히 낯설다.

라투르 : 예를 들어서 얘기를 해보자. 시청에서 하는 중요한 업무는 무엇인가? 도시의 주택 관리, 교통 관리, 상하수도 관리, 토양 관리 등…. 이처럼 시청에서 하는 업무의 대부분은 사물의 정치다. 당연히 그런 업무의 방향을 결정하는 정치 역시 언제나 사물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갈수록 그런 사물의 정치가 중요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광우병 전파의 위험이 큰 쇠고기 무역을 둘러싼 갈등에서 알 수 있듯이, 쇠고기(사물)는 이제 정치의 가장 핵심적인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 내가 '사물의 정치',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환석 :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많은 이들이 헷갈릴 것 같다. 사물의 정치라는 것이, 실제로 의회에서 사물이 인간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한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쇠고기가 행위자라면, 그것은 자신의 의사를 어떻게 나타내는가?

라투르 : 아니다. 사물이 인간처럼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물의 정치다. 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가? 기후변화협약을 둘러싼 회의에서 과학자는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 기체를 대변해서, 혹은 온실 기체 탓에 변화하는 기후 때문에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을 대변해서 발언을 하고 로비를 한다.

과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산화탄소,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과 같은 '사물'의 대변인이다. 인간을 주체(subject)로 비인간(사물)을 대상(object)으로 구별을 하는 인식 속에서는 이런 접근이 낯설어 보이겠지만, 사실 이런 인간/비인간의 구분이야말로 인위적인 것이다. 북한과 남한 사이의 경계인 휴전선이 인위적인 것처럼.

김환석 : 다양한 사물이 자신의 목소리를 과학자를 통해서 낸다는 발상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과연 그들의 목소리를 잘 대변할까?

라투르 : 그 점은 사물과 인간도 똑같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떤 정책을 원하는가, 이런 질문을 놓고 정치인도 다양한 의견을 내놓지 않는가? 사물과 과학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과학자는 미국산 쇠고기가 위험하다고 하지만, 어떤 과학자는 안전하다고 말할 것이다. 기후 변화 문제를 보더라도, 온실 기체의 영향을 놓고 과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바로 이렇게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논란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논란이 다양한 인간/비인간사이의 토론을 통해서 협의가 되는 과정, 이런 전 과정이 바로 사물의 정치다.

"생태 위기, 하나의 만능 처방은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김환석 : 당신은 이미 20년 전부터 생태 위기를 계속해서 강조했다. 앞의 질문과 이어지는 것이지만, 지금의 생태 위기를 해결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이와 관련하여 당신이 주장하는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에 대해 설명해 달라.

라투르 : 과학기술학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자연(비인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분리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체 네트워크 안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런 통찰을 통해서 사회과학은 생태 위기의 본질을 좀 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흔히 우리는 '문화'하면 다문화주의로 다양하게 파악하면서 '자연'만은 마치 고정불변의 단일한 실재인 것처럼 취급하는 '단자연주의(mono-naturalism)'에 빠져 있다. 이 역시 인간(사회)/비인간(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사회와 분리된 순수한 '자연'을 생각해온 근대주의의 잘못된 관념에서 비롯된 오류다. 오늘날 자연은 이미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지역·나라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갖는다.

생태 위기를 해결하는 단일한 진단, 단일한 해법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런 통찰이야말로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까 '공동 세계'를 '구성(composition)'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인간/비인간의 목소리가 표출돼 토론을 하는 과정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자 중에서 일부는 이런 견해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생태 위기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단 한 가지 해결책(과학기술)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자신이 대변할 수 있는 사물의 목소리가 자연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한 데서 비롯된 오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시아는 운이 좋다. 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사회/자연의 분리와 같은 개념이 낯설지 않았나? 이런 잠재력을 염두에 두면 생태 위기와 같은 현재 제기되는 문제에 아시아가 서양과는 다른 접근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다만, 최근의 중국, 인도와 같은 나라의 상황을 보면 안타깝다.

이들 나라는 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축적해온 사회/자연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뒤로 하고 서양 특히 미국의 경제 이론을 흡수하면서 갈수록 제대로 된 상황 인식과 문제 해결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아시아는 지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지 상태에 놓인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세계화에 속지도, 그것을 믿지도 말라!"

김환석 : 생태 위기와 함께 또 생태 위기를 가속화하고 그것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중요한 문제가 세계화이다. 자유시장 중심의 세계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투르 : 나는 세계화를 믿지 않는다. 흔히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은 수많은 지방화가 네트워크를 통해서 확장하는 것일 뿐이다.

도대체 '글로브(globe)'는 어디에 존재하나? '글로벌(global)'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착각에 빠뜨리는 위험한 개념이다. 흔히 '전 지구적 관점(global perspective)'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거짓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provincial)에 갇힌 좁은 시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통찰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학자는 독일의 페터 슬로터다이크다. 그는 글로벌이 아닌 지방 차원의 '상호 연결(interconnectedness)'이라는 올바른 개념을 만든 유일한 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글로벌' 개념은 마치 물고기(인간)가 헤엄치는 거대한 수족관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작은 연못에서 헤엄치는 존재다. 이들 연못 중 일부는 연결돼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세계화를 믿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중요하다. 세계화, 근대화, 전자 미디어 등에 대한 근거 없는 열광을 막는 일이 중요하다.

김환석 : 실제로 2008년 금융 위기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위기를 맞고 있다. 현 상황의 출구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투르 : 그렇다. 오히려 좋은 기회다. 금융 위기를 계기로 이제 사람들이 그전에는 보지 않았던 시장, 조직들, 기술들, 과학 분야 등 네트워크의 모든 면을 보면서 그것의 문제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마치 경제가 '과학기술학(STS)화'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기존의 근대주의적 경제 이론이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위기가 계속될 가능성은 있지만 결국 이번 일을 계기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앞으로 세계에 정말 많은 변화가 생길 것이라 본다.


▲ 브뤼노 라투르 교수(왼쪽), 김환석 국민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분단 한국은 사회과학 연구의 보고다"

김환석 : 마지막 질문이다. 빠르게 발전한 국가이자 마지막 냉전의 대결지로 남아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당신의 이론이 어떤 함의가 있을까?

라투르 :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서 좀 더 오래 머물러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과학기술학자에게 또 사회학자에게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한반도는 아주 많은 연구 주제를 찾을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한은 전혀 다른 발전의 경험을 겪어 오지 않았나? 이는 근대성의 서로 다른 경로를 실험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이다. 내가 이런 한국의 상황을 연구하면서 배울 게 많을 듯하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다시 한국을 찾아서 생태적으로 전 지구에서 가장 잘 보존이 됐다고 알려진 비무장지대(DMZ)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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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의 '재발견'

지금 우리 사회는 극심한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원자화된 개인, 파괴된 공동체,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부자 되세요"라는 유행어는 이러한 공동체적 파괴와 민생 불안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해법을 압축하는 표현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 모순의 핵심을 '신자유주의'로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적 해법을 갈망하고 있다. 최근에 각광을 받는 장하준의 책이 경제학적 비판이라면, 미국의 정치학자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치(이념)적' 대안의 모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안의 방향은 매우 익숙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이념, 바로 '사회민주주의'다.

'경제 중심론'과 '정치 중심론'의 한판 대결


▲ <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셰리 버먼 지음, 김유진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이 책은 20세기 초에 상호 경쟁하는 이념이었던, 자유주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족사회주의(=파시즘과 나치즘)의 상호관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그 주요 무대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그리고 오스트리아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에 발간되고 산업혁명이 이 시기에 발생했지만, 자본주의가 본격화된 시기는 '제2차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1880년대 이후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맨 얼굴의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 이행 과정은 자연스런 과정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의 삶과 인간 공동체 조직의 파국적 뿌리 뽑힘을 동반"했다. 공동체는 파괴되고 개인은 원자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의 정치 이념과 정당 간에 새로운 도전과 응전의 역사가 펼쳐진다.

대립 전선의 핵심 축은 '경제 중심론'과 '정치 중심론'의 대결이다. 경제 중심론의 대표 주자는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한편으로 했고, 정치 중심론의 대표 주자는 '민주적 수정주의'(=사회민주주의)와 '혁명적 수정주의'(=민족사회주의=파시즘과 나치즘)였다.

이러한 접근의 일환으로 책의 구성은 사회민주주의의 발생-성장-집권(2, 3, 5장)과 민족사회주의의 발생-성장-집권(2, 4, 6장)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7장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높은 수준에서 실현되었던 스웨덴을 별도로 다루고, 8장과 9장은 전후 체제와 저자의 결론을 다룬다.

4대 독법 포인트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정치가 우선한다>가 특히 흥미로운 점은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바와 같이 '경제 중심주의'와 '정치 중심주의'의 대결 구도이다. 둘째,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정치적 무능력'에 관한 부분이다. 셋째, 민주화 상황에서 민족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한 배경과 비결에 관한 문제이다. 넷째,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공헌에 관한 부분이다. 이러한 4가지 지점을 중심으로 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경제 중심주의와 정치 중심주의의 대결 구도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반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지배적 이념은 자유주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 이념으로 등장한 것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엥겔스와 카우츠키로 대표되던 정통 마르크스주의였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었는데 양자 모두가 '경제 중심론'(=경제적 수동주의)의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적 최소국가론에,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자동 붕괴론을 주장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정당들에게 '정치'란, 자본주의의 파국을 기다리며 계급적 갈등을 고취시키는 선전선동의 공간이었을 뿐이다. 당연히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의 연합 정치에 대해 완고했고, 노동계급이 아닌 농민계급 등을 '몰락하는' 이들로 취급하며 배척했다. 그리고 정책적 비전 같은 것은 굳이 마련할 이유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이들의 노선은 '혁명적 대기주의'였는데, 당연하게도 '정치적 무능력'으로 귀결되었다.

'민주화 이전의' 사회주의, '민주화 이후의' 사회주의

둘째,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정치적 무능력에 관한 부분이다. 한국 사회 1980년대~90년대 학생운동은 대체로 민족해방(NL)/민중민주(PD) 정파 대립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들에게 사회민주주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회민주주의=개량주의'라는 등식일 것이다. 아직도 이러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진보파에게 <정치가 우선한다>는 많은 교훈점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자본주의 원형 시대에 드러났던 정통 좌파적 사고방식의 '원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엥겔스와 카우츠키 이론으로 대표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특징은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론으로 요약된다. 역사유물론은 자본주의 (자동) 붕괴론이 요체이고, 계급투쟁론은 자본주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급 투쟁의 격화가 요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화 이후' 국면에서 발생한다. 보통선거권의 쟁취로 특징되는 민주화 국면이 열리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몇 가지 정치 실천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실천적 쟁점들은 △의회를 대하는 태도(의회주의) △개혁주의 문제 △계급 교차(=연합 정치)를 통한 유권자 확대 △민족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실천적 문제들에 대한 고민 속에서 발생한다. 프랑스의 장 조레스, 독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이탈리아의 카를로 로셀리, 스웨덴의 닐스 칼레비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 등이 그러하다.

예컨대,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수정주의 논쟁이 벌어진 최초의 발단은 '농업 논쟁'이었다. 1890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되고 나서 치룬 선거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은 20%의 득표율을 올리며 제1당으로 등극하게 된다. 사회민주당은 공업 지대에서는 50%가 넘는 압도적 득표를 하지만 농업 지역에서 저조한 득표를 하게 된다.

대부분의 유럽이 그러했듯 당시 농민은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민 표를 받지 못하면 집권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 매우 자명한 것이었다. 이에 농민 표를 받기 위해 농업강령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제출된다. 그런데 당시 독일 농민의 다수는 자영농이었기 때문에 '자영농 보호=사적 소유 옹호'라는 논리적 딜레마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이론적 대부였던 엥겔스와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농민은 결국 소멸할 것이며, 사회민주당의 임무는 그러한 것을 농민들에게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의회주의, 개혁주의, 정치적 계급 연합

결국 독일 사민당은 1895년 브레슬라우 당 대회에서 새로운 농업 강령의 채택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한길사)를 번역했던 강신준 교수는 이를 '당의 정치적 자살'이라고 표현했는데, 바로 이 사건을 접한 이후 베른슈타인은 당내에 만연한 '교조적 사고방식'에 대한 총체적 비판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수정주의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사실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실천적 핵심은 간결하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노-농 정치 동맹' 노선의 채택 여부, 그리고 셰리 버먼의 표현에 의하면 '계급 교차적 협력'의 문제였다. 정통파는 '전략은 혁명, 의회는 전술로' 보았기에 개혁주의와 의회주의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노동계급 독자성과 교리주의적 사고방식이 가장 중요했다.

반면,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정치의 우선성'을 주목했기에, 의회주의, 개혁주의, 정치적 계급 동맹론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스웨덴을 제외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이 끝날 때까지도 당내에서 다수파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정통파적 입장은 '수사적 급진주의'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이론적, 실천적 해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프랑스 지부의 한 정치인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우리 당의 교리는 이제 성경책과 비슷하다. 우리는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믿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정당들의 정치 연합에서의 완고함은 민족사회주의자들이 집권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민족사회주의 정당'의 집권 비결

셋째, 보통선거권이 실현된 민주주의 상황에서 민족사회주의 정당(=파시즘과 나치즘)은 도대체 어떻게 선거를 통해서 집권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정치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셰리 버먼의 책을 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일단 민족사회주의 정당의 집권 배경을 이해하자면 당시에 부상했던 '민족주의/애국주의' 문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기도 했던 이탈리아의 경우 후발국으로서 열강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고, 독일의 경우 유럽의 강력한 후발 산업국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다.

그러나 민족사회주의 정당의 성장과 집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럽에서 주류적 정당들이 수행했던 역할들이 더욱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즈음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나라에서 모두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20~30% 정도의 비교적 많은 의석 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에 자유당(좌파)들은 이들과의 연립 정부를 적극 제안하게 된다. 그러나 계급 교차적 협력에 부정적이었던 이들은 '정통 교리'에 입각하여 연립 정부가 번번이 당내에서 부결되기 일쑤였다.

1918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이 실현되었지만 더욱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이 개혁주의와 의회주의에 대한 그간의 소극적 토대로 인해 막상 집권을 하게 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권력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자본가를 대변하고,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노동자를 대변했다. 그런데 이들이 수행했던 역할은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본질의 한 측면에 불과한 '갈등의 사회화'였다. 한마디로 이들 양자는 모두 '계급 분파주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구의 최대 다수파는 여전히 농민이었다. 농민의 경우 '불안'을 가장 극심하게 체감하던 계층이었음에도 자신들을 대변하는 정당은 없었던 셈이다.

민족사회주의 정당들은 농민 계급과 중간 계급을 집중 공략했다. 공황과 파업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는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정당 사상 최초로 '사회 통합'의 가치를 부르짖었다. 물론 그들에게 통합의 기초는 혈통 중심 민족과 국가였지만 말이다. 즉, 민족사회주의 정당은 (스웨덴을 제외하면) 현대 정치에서 최초의 '국민 정당'이었으며 정치적 기능의 또 다른 본질인 '사회 통합'을 제기한 정당이었다.

히틀러가 당수로 있던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선거 득표율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화려하게 급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나치당은 1928년 2.6%로 시작했지만 1930년 18.3%, 1932년 7월 선거에서 37.3%의 득표로 독일 사회민주당도 제치게 된다.

20세기 정치의 승자는 '사회민주주의'

넷째, 이제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공헌을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출현이 공동체적 가치의 파괴, 각종 사회 불안 그리고 원자화된 개인으로 특징되는 '사회적 뿌리 뽑힘'이 동반된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공동체적 가치의 복원'과 '정치의 우선성'이라는 측면에서 민족사회주의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들 양자의 결정적 차이점은 전자가 '민주적' 수정주의였던 것과 달리 후자는 '혁명적' 수정주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용적으로 볼 때 더욱 결정적 차이점은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해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정치 이념이었다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에 헌신적이었다는 점은 민족사회주의와의 차이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통 마르크스주의와의 핵심적인 변별점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의 완성은 사회주의이다." (장 조레스)
"자유주의가 영감을 불어넣는 이상의 힘이라면, 사회주의는 그 이상을 실현시키는 실천적 힘이다." (카를로 로셀리)
"민주주의는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민주적 수정주의(=사회민주주의) 흐름을 대표하던 프랑스의 장 조레스, 독일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이탈리아의 카를로 로셀리, 스웨덴 사민당의 닐스 칼레비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모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다만, 여기에서 이들이 말하는 자유주의는 소유권에 집착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명백하게 구분되는 '정치적 자유주의'였다.

그런 점에서 셰리 버먼은 20세기 전후 체제의 특징을 전체주의에 맞선 '내장된 자유주의(embedded liberalism)'로 해석하는 주류적 해석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20세기 전후 체제의 특징은 '사회민주주의'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절충'이 아니라, 이들 양자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며 '독자적'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셰리 버먼에 따르면, 전후 복지국가 체제의 핵심은 복지 정책과 사회 연대 등의 가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치 이념'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민주주의 정치철학'에 입각하여 세워진 나라가 바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이다. 이들은 민족주의 우파의 슬로건이었던 '국민의 집' 개념을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하는 전략적 유연성, 농민층에 대한 지속적 접근, 자유당과의 적극적 정치 연합(1917년~1932년), 마르크스주의적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 정책으로 1932년 선거와 1936년 선거에서 역대 최대 득표를 갱신하며 약 40년간의 민주적 장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이는 베른슈타인의 문제의식을 백안시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교조주의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이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에 지대한 이론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당내 이론가 닐스 칼레비(1892~1926년)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신들을 마르크스 유산의 진정한 관리자로 내세운다. 이 당은 한 가지도 독립적인 무언가를 창조해 내지 못했으며, 스승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것(그럼으로써 더 조악하게 만드는 것) 이상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다. 실제 과제들과 대면해야 했으며, 당내에서 행동을 위한 지침을 발견해 내기 위해 노력했던 자들은 끔찍이 실망하고 말았다. 반면 누군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실제 작업과 지적 생활을 연구해보면, 그 사람은 이론적 명쾌함과 독립성의 문제, 그리고 실제적 능력의 문제 모두에서 이 당이 독일 사회민주당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250쪽)

닐스 칼레비의 진단은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한국 진보 정치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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