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던 중국 광저우에 촬영차 갔을 때였다.
광저우는 중국의 3대 도시답게 도심 한복판에 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밤이 되면 강변을 중심으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수많은 자전거 행렬과 우리의 1970년대 풍경을 상상했던 촬영 팀은 서울과 비슷한 도심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아마 이런 경험은 최근 20년 사이 광저우가 아니더라도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중국 도시에 다녀온 사람들이라면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렇듯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광저우를 본 촬영 팀은 그래도 옛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는, 서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멀지 않은 곳에 재래시장이 있다는 얘기를 접하게 됐다. 우리는 빌딩숲을 지나면서 과연 여기에 그런 시장이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의심 반 기대 반으로 시장을 찾았는데 그 시장을 둘러싼 골목에 들어선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세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그 골목엔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 청년부터 채소 담은 검정 봉지를 뒷짐 진 손에 쥔 채 집으로 향하는 할머니까지 다양했다. 내 두 발을 지탱하고 있는 바닥은 울퉁불퉁하긴 했지만 사이사이 돋아난 초록색 잡초가 이곳이 흑백영화 속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대나무 막대기에 각종 속옷들이 천의 탄성을 잃은 채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래, 여기야말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곳이군. 그나저나 여기도 조금 있으면 재개발이 된다는데 아쉽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은 보존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채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이런 내 생각을 뒤집어 준 광경이 있었다. 채광, 조망권은커녕 숨쉬기조차 힘들만큼 살인적인 광저우의 여름을 과연 이곳에서 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만드는 집들 때문이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 그 집은 빛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낮인데도 칠흑처럼 어두워 물건의 형체만 간신히 보였다. 집의 기능 중에 잠을 잘 수 있는 곳이란 걸 제외하곤 아무 기능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휴, 오래된 곳이니 이곳을 보존하자…, 참 이기적인 생각이구나.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지 않는, 그저 한낱 박물관 속 소품 정도로만 생각하는 이방인의 이기적인 생각. 어쩌면 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 속에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골목을 재개발할지, 보존할지는 철저하게 그곳에서 삶을 영위해온 주민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데 한국도, 중국도 결국은 나와 같은 이방인이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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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약진이다 : 늑대를 속여야 하는 한 남자>(류전원 지음, 김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
류전원의 <나는 유약진이다>(김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광저우에서 만난 사람들, 풍경 그리고 그곳의 냄새까지도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광저우의 풍경들이 책 속의 풍경과 무척 비슷했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역시 책 속 인물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주인공 유약진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줄곧 답답하면서도 한심한 행동들로 일관해 내 가슴을 여러 번 내려치게 만들었다.
"자신은 황효경과 십삼 년을 살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했고 그녀의 허리가 다른 허리와 다르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바로 그 허리가 마누라로 하여금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게 하고 자신을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 허리를 자신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갱생은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허리 때문에 유약진은 잘못된 사람이 되었고, 이갱생과 황효경은 옳은 사람이 된 것이었다."
작가는 유약진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긴 후에야 아내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나마 보통의 드라마처럼 아내를 빼앗기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아내의 매력을 제 때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그의 삶은 더 구질구질하다.
유약진은 아내와 이갱생이란 남자가 간통을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이갱생에게 벌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이갱생으로부터 온갖 폭행과 모욕을 당한다. 그리고 아내 황효경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양육권을 놓고는 온갖 자존심을 세우느라, 자신보다 경제력이 훨씬 좋은 황효경과 이갱생이 매달 주겠다는 양육비도 거절한다.
그래서 나는 유약진이 돈에 있어서만큼은 자존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읽다 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내의 새 남자인 이갱생에게 이혼을 대가로 6만 위안의 돈과 바꿀 수 있는 차용증을 요구한 것이다. 그에게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세만 있을 뿐 진정으로 자신을 세우는 자존심은 없어 보였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한 나의 감정은 다른 인물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남은 건 6만 위안의 차용증과 아들 밖에 없다고 여기는 아버지 유약진에게 아들 유붕거는 아버지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물론 아버지를 돈보다도 하찮은 존재로 취급한다. 유약진이 일하는 건설사 사장인 엄격은 공사장 인부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듯싶었으나 유명 여가수와의 불륜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기 위해 여가수와 동행하다 찍힌 사진 속 현장을 하나의 연극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그 곳에 있던 옥수수, 고구마 장수들에게 돈을 주며 연기를 요구한 것이다. 또 유약진과 동향인 한승리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에 따라 친구와의 의리는 안중에도 없는 인물이다. 이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도 나약하면서 자신보다 나약한 이들의 목줄을 움켜쥔 채 흰 눈동자를 드러내며 의기양양해 한다. 돈을 위해서라면 의리, 자존심, 목숨 따위는 중요치 않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돈이 많은 이들은 세련된 척하며 온갖 부정, 부패를 동원해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돈을 긁어모은다. 그리고 돈이 없는 이들은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위해 세련되지도 않으면서 역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돈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한 쪽은 호화 빌라에서 한 잔에 우리 돈 20만 원쯤 되는 차를 홀짝이지만, 한 쪽에서는 우리 돈 100원이 아까워 생수를 사서 마시지 못하고 역 근처 수도꼭지 밑에 입을 벌린다.
광저우에서 봤던 화려한 고층 빌딩과 그 뒤로 펼쳐진 남루한 골목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던 건 어찌 보면 필연이었던 듯싶다. 곧 재개발이 될 광저우의 골목과 재개발로 돈을 긁어모으는 책 속의 인물들, 속이 노란 고구마를 사먹었던 광저우에서의 기억과 엄격과 여가수가 사진에 찍힌 풍경 속의 고구마 장수, 철저히 이방인의 시각으로 그들의 삶을 재단하려던 광저우에서의 내 모습과 이건 내 삶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며 읽었던 독자로서의 나.
이렇듯 광저우에서의 시간은 1년간 생활했던 칭다오에서의 경험과 합쳐지면서 독자인 나를 책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책 속으로 빠져들었던 이유는 단지 중국 생활을 겪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이 곳 한국의 모습과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에게 풍요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광저우에선 많은 빈민가가 재개발되고 있었듯,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유약진과 같은 농민공들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신의 배만 불리는 책 속의 엄격과 인 씨, 가 씨가 있었듯, 불과 20여 년 전 경기장을 짓고 도시 미화라는 이유로 무참히 서민들의 삶을 밀어버렸던 1988년 서울올림픽이 있었고 가까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마저 앗아간 용산 참사도 있었다. 수십, 수백억 원을 횡령한 경제 사범들은 특사로 풀려나 다시 떵떵거리며 살지만 살기 위해 절도를 한 이들은 어둠의 굴레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한다.
학창 시절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며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될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보며 암담하고 답답함에 책을 덮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의 한 작가가 쓴 <나는 유약진이다>를 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아마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눈을 감는다고 해서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순 없듯 세상에 눈을 감는다고 해서 처절하기까지 한 현실을 벗어날 순 없다. 어떻게 하면 비를 피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 현실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편이 훨씬 낫다. 10년 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게 해 준 이 책이 참 얄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