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기자들이 발로 쓴 <한국의 워킹 푸어>(책보세 펴냄)를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오 마이 갓!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하는 거야? 안 망하고 살 방법이라는 것이 있는 거야?'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중산층이면 중산층인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나이가 들었으면 나이가 있는 대로, 고졸이면 고졸대로, 대졸은 또 대졸대로 다들 가난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게으른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살려고 고군분투를 하는데도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삶이 왜 이 모양이 된 것이지?

사실 우리 삶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많은 '언어'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딱 한마디로 정리하라고 하면 점점 더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역시 대답을 알고 있다. '보편적 복지'를 추구해야하며, 이것은 무너진 '공공성'을 다시 복원하고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모두 개인에게 던져져서는 안 되며 사회가 그것을 나누어 가져야하고 국가가 '복지'를 통해서 책임져야 한다.

만약 이 공공성이 공학적으로 '디자인'되기만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백가쟁명식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도대체 이 공공성이라는 것이 누구의 언어로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이다. 이것은 의자에 앉아 디자인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한 번도 공공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이미 공공성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공적인 울림이 있는 언어로 듣는 일이다. 이것은 책상에 앉아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귀 기울여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한국의 워킹 푸어 : 무엇이 우리를 일할수록 가난하게 만드는가?>(프레시안 특별 취재팀 지음, 책보세 펴냄). ⓒ책보세
<한국의 워킹 푸어>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많은 한국의 글쟁이들이 반짝이는 아이디어 혹은 기획 아이템을 가지고 현장에 가지 않고 검색을 통해 혹은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자료를 모으고 가공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근사하고 산뜻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제작 방식'은 아무리 아이템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는 재기발랄할지는 모르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한숨이나 한탄, 혹은 위로나 분노와 같은 그 어떤 정서적 반응, 감응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무식하게 말해서 이런 '기획된 아이템'은 얄팍한 정치적 선동으로 소비되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움직이는 울림이 없다. 책을 읽고 나서 '오마이 갓,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야?' 이런 말이 튀어나오게 하고 자기 주변을 돌아보면서 사회를 발견하게 못하는 글이 '정보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책은 나부터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하였다. 책을 읽고 있던 카페에서 이야기를 풀어보자. 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커피를 얻어 마시고 있는 내 앞에 앉아 있는 후배는 이 책의 3장에 나오는 '치열한 경쟁을 이유로 헐값에 팔리는' 문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명문' 대학을 나와 초국적기업에 취직해서 고액 연봉을 받았지만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경제 위기가 닥쳤고 회사에서는 정리 해고를 했다. 따르던 부장이 잘리는 것을 보면서 미련 없이 회사를 때려 쳤다.

이 후배는 지금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한 달에 얼마를 버냐고? 아무도 모른다. 극단은 늘 적자에 허덕이고 공연을 나갈 때마다 돈을 받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돈을 극단에 쏟아붓기까지 하였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알바'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하지만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언제 공연이 잡힐지, 그리고 그 공연 장소가 서울일지 지방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알바는 할 수도 없다. 책에 등장하는 드라마 보조 작가인 김국진 씨나 신동호 씨와 전혀 다르지 않다.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냐는 마음이었지만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뷔하려는 작가는 많고, 돈 안 주고도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은 줄 서 있는 것"은 뮤지컬 업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후배의 동생은 8장에 나오는 '지방대생'이다. 그것도 이름 있는 국립대학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잡대'로 분류되는 대학 출신이다. 몇 번이나 편입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고 그가 건진 것은 졸업하는 학생 숫자보다 교수 숫자가 더 많은 졸업 앨범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고 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다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다시 대학을 가는 것밖에 없었다. 취업이 잘 된다고 하는 물리치료학과를 가기 위해 다시 피땀을 흘려 공부를 했다.

다행히 근면 성실한 그는 편입에 성공하였고 작년에 무사히 졸업해서 지금은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수습 기간 동안 그가 받은 월급은 100만 원이 안 되었고, 지금은 150만 원을 받고 있다. 결혼? 언젠가 하긴 하겠지만 이 월급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은 젊고, 독신이고, 부양해야할 부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다. <프레시안>의 기자들이 만나고 들여다본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벗어날 가망이 별로 없는 빈곤의 나락에 빠져있다. 무엇보다 이들의 삶은 '빚'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대학생들은 등록금을 대기 위해 받은 학자금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빚꾸러기가 된다.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이혼까지 당하고 쪽방촌에서 살며 지하철역의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박연자 씨 역시 버는 돈의 대부분을 빚을 갚는데 쓰고 있다.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저임금 노동자들은 일을 해서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도 매달 33만 원의 빚만 늘어간다.

농민들 역시 다르지 않다. 한 공중파 방송에 나올 정도로 고소득을 올린다고 소개된 '미래가 촉망되는' 농민 역시 빚더미에 올라있다. 연 매출이 2억 원이라고 하지만 빚은 3억 원이다. 귀농한 농부 주경호 씨의 사례처럼 딸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야 하고, '아이스 딸기'와 같은 새로운 상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대형 냉장고를 들여야 하는데 그것도 고스란히 빚이 되어 돌아온다.

이 빚에 결박된 인생들에게 다가오는 가장 무서운 것이 '건강'이다. 아프면 끝장이다. 문제는 빈곤의 늪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치료비 때문에 빈곤의 늪에 빠진 사람들도 있고, 빈곤이 만들어내는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간 이식 수술을 받아 한 달에 병원비가 100만 원이 넘는 박 할아버지의 경우나 막노동판에서 다쳐 노동 능력을 상실했지만 4급 장애 판정을 받지 못한 아들을 수발해야하는 80살의 김순애 할머니, 그리고 지하철 청소를 하다가 감전 사고를 당했지만 돈 한 푼이 아쉬워 정상 근무를 하면서 병원비를 고스란히 떠맡은 박연자 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빈곤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 안전장치가 별로 없는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가 바로 삼성반도체의 황유미 씨와 박지연 씨의 경우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졸이라는 학력으로 삼성반도체라는 '꿈의 직장'에 취직하였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백혈병이었다.

이들은 생산되는 '제품은 보호하지만 노동자를 보호하는지는 않는' 작업 현장에서 발암물질들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 이들에게 들려준 답은 '모든 게 우연일 뿐,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국가 역시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국격'이 높아진 국가, 한국에서 산재 보험은 로또이지 결코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노동과 가난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더 이상 국가가 공을 들여 재생산하여야하는 생산의 파트너가 아니다. 노동은 과거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언제든 약탈을 통해 구할 수 있고, 대체 가능하며 나아가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되었다.

따라서 미래가 나아지기를 바라기는커녕 지금보다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보니 학교 운동부 코치들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처럼 사회적 약자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요구하기보다는 '지금의 시스템이 유지돼야 그나마 있는 자리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당연히 노동의 협상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약해졌다. 특히 운동 코치나 계약직 금융 노동자, 텔레마케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자기 업무뿐만이 아니라 잘리지 않기 위해 시키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돌아와 쉬는 시간에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노동자들의 시중을 들어야하는 이주노동자들처럼 말이다.

운동 코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일전 응원에 나가 아이들을 지도해야하고, '빠른 창구'에서 일하는 계약직 금융 노동자는 자기의 실적으로 셈해지지 않는 금융 상품 판매 실적을 쌓아 옆 '정규직 노동자'에게 상납해야 한다.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조폭 사회'이다. 누가 신분제가 철폐되었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노동이 철저히 위계화되어 있고, 그 위계의 벽을 넘나들기는 하늘의 별따기에 가까운 철저한 골품제도에서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항의를 한다는 것은 곧 해고를 의미한다. 해고가 불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을 견뎌낼 사람은 많지 않다. 설혹 법이 노동자의 편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곧 새로운 탈법이나 초법적 수단을 강구해서 다시 노동자들을 지리멸렬한 법정 투쟁의 덫에 빠뜨린다. 경기장 골프 보조원인 김은숙 씨의 사례이다.

대신 노동자들에게는 법과 원칙에 따라 '무관용' 원칙이 적용된다. 이 무관용 원칙이란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노동자들을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노동자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자비에 맡겨진 관용의 대상인 셈이다.

가난에 대한 정책마저 잔인하고 가혹하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20살이 되면 오롯이 혼자 살아야한다. 집도 절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자신을 거두어주던 쉼터나 그룹홈을 떠나야 한다. 행여 자식이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정되면 그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더라도 노인들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급여를 받을 수 없다. 그저 '못된 자식' 원망이나 하며 살아야 한다.

복지에도 경쟁을 도입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던 공부방들은 이제 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서류를 꾸미는 작업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 정부의 평가에서 최하위 5% 판정을 받으면 예산 전액 삭감이고, 5~15%가 되면 50%의 예산이 삭감된다. 최하위 판정을 받은 곳은 그동안 거두던 아이들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상태에서 시설을 폐쇄하는 방향으로 '유도'된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을 돌보는 시설에도 경쟁이 도입된 것이다.


▲ "몸'마저' 가난한 우리는, 이 약탈의 조폭 사회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자, 이 시스템에서 살아날 방법이 있는가? 과감하게 나는 예외라고 말을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아니,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야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그 답을 알려주시겠다고 한다. 헝그리 정신이다. 이 모든 일이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그 분의 진단이시다.

삼성의 황태자 이재용 씨는 삼성에서 가장 헝그리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셨다. 뭐, '정신'이 가난하다는데 할 말이 없다. 그걸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 그러나 당신은 정신이 헝그리한지 모르지만, 우리는 위장이 헝그리하다. 마음'만' 가난한 당신은, 참 행복할 것 같다.

몸'마저' 가난한 우리는, 이 약탈의 조폭 사회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한강다리 위에 기어오른다. 자식새끼를 끌어안고 쥐약을 마신다.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 있으니, 정녕 당신의 정신은 가난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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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편치 않다.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하니까. 무슨 말인가? 일단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 현상을 분석한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송연석 옮김, 갤리온 펴냄)의 저자인 클레이 서키 미국 뉴욕대학교 교수의 '완곡한 표현'으로 들어보자.

"기자라는 직업도 알고 보면 특정 생산 형태에 결부되어 있다. 기자처럼 오랜 세월 동안 고정된 범주처럼 보이던 것이 알고 보니 출판 비용 때문에 우연히 생긴 희소성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소셜 네트워크 기반의 온라인 뉴스 사이트인 <위키트리>의 발행인 공훈의 '소셜뉴스' 대표가 최근 펴낸 <소셜 미디어 시대, 보고 듣고 뉴스하라>(한스미디어 펴냄)의 한 줄이다. 좀 더 분명한 어조로 다시 들어보자.

"기자는 더 이상 전문직이 아니다!"


▲ <소셜 미디어 시대 보고 듣고 뉴스하라>(공훈의 지음, 한스미디어 펴냄). ⓒ한스미디어
한마디로 기자의 '밥벌이'인 취재나 보도가 전문적인 일이 아니며, 딱히 남들과 다른 재주나 능력을 가졌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듣는 기자 민망하게' 단언하는 공훈의 대표 역시, 실은 워싱턴 특파원까지 지낸 기자였다.


그러나 보통의 기자를 상상한다면 '노(No)'다.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던진 배경엔 '쓰는 사람'이란 정의에 다 담기 어려운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뉴스 생산의 물리적 환경이 변화하는 변곡점마다 중심에 서 있었다.

공훈의 대표는 핀셋으로 활자를 뽑아 활판을 만들던 시절인 1990년, 당시 생활과학부 차장으로 근무하던 <광주일보>에서 전산부 개발부장과 함께 16비트 퍼스널컴퓨터를 이용한 간이 '컴퓨터 조판 시스템(CTS)'을 개발했다. 2000년에는 지금의 온라인 매체와 같은 실시간 미디어를 표방하며 등장한 <머니투데이>의 온라인 기획·운영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2010년, 그는 트위터 상에서 가장 많이 링크되는 뉴스 사이트 <위키트리>를 꾸려나가고 있다. 이 행보라면 어떤 시점에서든 '낯설다'는 소리를 듣기 딱 좋다. 하지만 그는 요즘 언론 매체나 기업 앞에서, 이 낯선 것들을 설명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성들여 책까지 펴냈다.

이렇게 책까지 낸 이유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1990년엔 컴퓨터가, 2000년엔 인터넷이, 2010년엔 소셜 네트워크가 뉴스 미디어의 판을 바꾸고 있다. 그런데 이번 판은 10년 전, 20년 전에 비해 충격의 강도가 다르다."

심지어 그는 종이 신문이 2012년쯤 종말 할 거라고 내다본다. 이쯤 되면 듣는 기자들 열 받을 텐데?

미디어 환경 변화는 과거에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쌓아온 신문의 아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도대체 140자 단문 서비스가 어떤 충격을 주기에, 그토록 쉽게 신문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삐딱한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부디 내 책이 많은 기자들에게 읽히길 바란다"고 말하는 공훈의 대표를 18일 직접 만났다.


▲ 공훈의 <위키트리> 발행인. ⓒ프레시안(김하영)

"패러다임 시프트! 언론-독자 위상이 바뀌었다"

프레시안 : 책에서 주로 쓰이는 소셜 네트워크, 소셜 미디어, 소셜 뉴스, 소셜 모바일 등의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한다면?

공훈의 : '소셜'은 참여와 공유를 핵심으로 하는 개념이다. 누구든 참여해서 콘텐츠를 만들고 만들어진 콘텐츠를 누구나 공유하는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그 기반이 되는 인프라다. 대표적으로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있다.

소셜 뉴스는 뉴스를 중심으로 특화된 소셜 네트워크다.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 사용자들의 행위 가운데 기존 뉴스에 맞는 행위들도 소셜 뉴스에 포함된다. 또 그런 행위를 미디어로 확산해주는 게 소셜 미디어다.

소셜 모바일은 소셜 네트워크가 모바일 기기와 합쳐진 환경을 말한다. 앞으로 스마트폰 1000만 대 시대가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뉴스를 스마트폰으로 접할 텐데, 그러면 소셜 모바일이 뉴스 유통의 주 환경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 : 소셜 미디어/뉴스가 기존의 미디어/뉴스와 어떻게 다른가?

공훈의 : 언론과 독자 간의 구조가 바뀌었다.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난 것이다. 지금까지는 언론 매체에서 독점적으로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자가 그것을 받아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독자들이 스스로 뉴스를 생산하고 유통에도 직접 개입하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언론 환경에서 독자들끼리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뉴스에 대한 피드백은 매체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독자들끼리 매체를 통하지 않고 피드백을 주고받는다.

뉴스 접근 면에서 일어난 큰 변화는 각 언론사 제호의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신문을 직접 사서 기사를 읽던 시절엔 <조선일보>, <한겨레> 이런 선택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기사를 제호로 접근하지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많은 추천을 받은 기사, 자신이 구독하는 전문가가 추천해 준 기사를 읽는다. 기사에 접근하는 유통 경로가 달라진 거다.

<조선일보>가 자사의 스마트폰용 어플리케이션(앱)을 잘 만들었다고 홍보하던데, 별 의미 없다. 소셜 네트워크 세계에서는 제호 따져가면서 기사를 보는 게 아니니까.

기존 언론 매체들에 있어서 더욱 심각한 상황은 또 있다. 독자 자신들이 뉴스를 생산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고 일상적으로 대화를 할 뿐이다. 실제 관계에서 서로 만나서 하는 대화를 그대로 인터넷에 옮겨놓은 것이 소셜 네트워크다. 화재 현장을 찍어 소셜 네트워크에 올린 사용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뉴스를 생산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를 한다는 느낌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프레시안 : 지금의 소셜 붐은 10년 전 일어났던 인터넷 신문 붐과 무엇이 다른가.

공훈의 : 지금은 뉴스 생산자마저 다수가 된 상황이라는 점과 뉴스 생산에 돈이 전혀 안 든다는 점에서 다르다. 기존 매체든 인터넷 신문이든 뉴스를 생산하는 플랫폼, 동영상이나 사진을 담을 서버가 각 사마다 있는데 소셜 미디어에서는 그게 필요 없다. 공짜로 제공되는 단일 플랫폼들이 있지 않나.

사진은 플리커(flicker)로, 동영상은 유튜브(Youtube)로, 기사는 블로그를 이용하면 된다. 비싼 취재 도구들도 필요 없어졌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된다. 아이폰4는 HD 영상도 기막히게 찍는다.

"추석 폭우 사태, 6·2 지방선거는 '트위터 기념일'"

프레시안 : 독자가 뉴스를 생산하는 구조는 <오마이뉴스>가 시민기자 제도를 통해 이미 운영한 바 있다. 그것과 현재의 구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공훈의 : <오마이뉴스>의 경우도 스스로 기반 역할을 하는 포털 구조다. 기사 소스를 그 홈페이지에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독자들끼리 직접 반응을 주고받는다. 특정 매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내 친구들에게 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 그게 기존 뉴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프레시안 : 왜 강력한가?

공훈의 : 참여자가 많다. 각사 기자들, 아무리 많아봤자 300명 정도다. 그들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굉장히 좁다. 그런데 트위터는 사용자들이 모두 잠재적 기자들이다. 어마어마한 범위를 커버할 수 있다.

지난달 1일 부산 해운대 초고층 빌딩 화재 사건 때, 기존의 기자들도 포착하지 못한 화염 사진을 트위터 사용자가 세 장이나 찍었다. <부산일보>조차 못 찍은 사진이었다. 기존 언론들은 기껏해야 불꽃이 사라진 뒤에 연기만 찍을 수 있었다. 결국 많은 주류 매체들이 계정을 밝히고 트위터 사용자의 사진을 썼다.


ⓒ프레시안

프레시안 : 소셜 네트워크의 강력한 영향력을 입증한 사례로 지난 추석 연휴 첫날의 폭우 사태를 들기도 한다. 트위터가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고 하던데.

공훈의 : 그렇다. 당시 휴일이라 언론도 폭우 보도를 하지 않았다. <위키트리>는 트위터 모니터를 늘 하고 있으니까 오후 1시가 되기 전부터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사용자(@ytnetwork)가 "신월동 일대 전체가 홍수 피해 중입니다. 긴급 사태입니다" 이렇게 트윗을 날린 것이 시작이었다.

기상청은 뒷북이었다. 서울 지역에 호우주의보를 내린 게 트위터 상에서 이미 경보가 나온 뒤인 오후 1시 20분께였으니까. 그러고 얼마 안 돼 2호선 홍대입구역 앞에서 찍은, 허리까지 빗물에 찬 사람의 사진이 올라왔다. 그러더니 곳곳에서 어마어마한 폭우 사진들이 올라왔다.

그 때까지 국가 기간 통신사라는 <연합뉴스>조차 폭우 보도를 제대로 안 하고 있었고, 방송 뉴스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편성은커녕 자막 방송도 없었다. 트위터에는 "지금 재난 방송하는 채널, 하나도 없네요" 이런 항의가 빗발쳤다. 재난 방송은 오후 4시 20분께나 되어서야 겨우 시작됐다.

<위키트리>는 그보다 먼저 트위터에 올라온 정보들을 리캡(정리·요약)해서 다시 뉴스로 올렸다(☞바로 보기). 난리가 났었다. 그날 사이트가 두 번 다운됐다.

프레시안 : 지난 6·2 지방선거에서는 트위터의 영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났나?

공훈의 : 선거 하루 전, <위키트리> 회원 중 한 명이 '인증 샷 놀이'를 제안했다.

투표를 할 때 스틱에 인주를 묻혀 팔이나 팔뚝에도 한 번 더 찍어서, 그 사진으로 투표 인증을 하자는 것이다. 젊은 층의 투표율이 관건이었으니 재미있는 제안이었다. 경품을 내건 사람도 있었다. 화가 임옥상 씨는 인증 샷을 올린 젊은이 중 추첨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정말 인증 샷이 하나 둘 올라오더라.

그날 오전 투표율만 해도 그 전 지방선거 투표율과 비교했을 때 10포인트 정도 낮았다. 그런데 오전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만삭의 임산부가 신랑과 투표를 하고 나서 인증 샷을 찍어 날렸는데, 잠시 뒤 트위터에 다시 등장해서 투표 직후 병원에 가서 산통 끝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출산 인증 샷'과 함께 말이다.

그러자 이 트윗에 대한 리트윗(RT)과 함께 "이런데도 투표를 안 하면 사람도 아니다" 이런 코멘트가 돌아다녔다. <위키트리>가 그걸 기사화해서 다시 트위터로 던졌더니, 이번에는 그게 또 온 타임라인을 뒤덮었다. RT 수가 어마어마했다. 거기서 탤런트 박진희 씨가 투표 인증 샷을 올리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김제동, 이외수, 슈퍼주니어 김희철 씨 등 유명인들의 인증 샷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런 놀이 속에서 오후 투표율은 전 지방선거 투표율을 상회하기 시작했고, 오후 4~5시쯤엔 이미 10포인트 이상 높아진 상태였다. 투표소 현장 소식이 트윗으로 전해졌다. '투표소에 젊은이들이 몰리고 있다'고. 그 때 느꼈다. '이거, 완전히 판이 달라졌구나.'

프레시안 : 그런 소셜 네트워크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현재 몇 명 정도인가.

공훈의 : 국내 트위터 사용자는 200만 명이다. 6·2 지방선거 때 50만 명이었는데 반 년도 안 돼 4배로 치솟았으니 다음 선거 때는 얼마나 되겠나.

트위터 사용자 수는 스마트폰 보급 대수의 폭발적 증가와 관련이 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의 패러디인 '아이폰 놓고 트위터 모른다'라는 신종 속담이 있을 정도로 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 사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소셜 네트워크는 보통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 안에서, 점심시간에 밥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 짬짬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이 필요하고.

"소셜 생태계는 자정력이 강하다"

프레시안 :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다수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런데 <위키트리>라는 또 다른 새로운 매체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역할을 하나?

공훈의 :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수많은 정보가 오간다. 뉴스 스펙트럼이 상상도 못할 만큼 넓다. 그 정보들은 전부 조각나 있는데, 정보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하려면 관련 트위터를 전부 찾아봐야 하는 수고가 생긴다.

<위키트리>는 관련 트위터를 찾아 전후 맥락을 정리해서, 그걸 다시 트위터의 바다 속에 던지는 역할을 한다. 기존 매체들이 어떤 이슈들을 수집해서 가공한 뒤 정리해서 보도하듯, 우리도 트위터 상에서 불거진 이슈들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알려준다고 보면 된다.

트위터 사용자들 사이에서 이미 우리의 브랜드 가치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가공해 정리한 이슈를 던져주면 금방 확산된다. 중요한 기능이 바로 이거다. 이슈를 정리해서 확산시키고, 논쟁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기능은 기존 언론과 같다고 보면 된다. 다만 다루는 범위가 훨씬 넓은 거고, 트위터 사용자들이 제기하는 이슈이기 때문에 이슈 메이킹이 작위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위키트리>에 게재되는 기사들은 누가 쓰는 것인가?

공훈의 : 네 가지 소스가 있다. 첫 번째가 크라우드소스(crowed-sourced) 콘텐츠, 불특정 다수가 쓰는 기사다. <위키트리>는 현존하는 인터넷 뉴스 사이트 중 가장 개방적인 구조를 가진 플랫폼이다. 누구나 <위키트리> 기자가 될 수 있고 활동 실적에 따라 점수를 받는다.

기자가 쓴 뉴스가 트위터에서 RT된 횟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Like)' 클릭을 받은 횟수 등 소셜 네트워크에서 사용자들의 추천 빈도를 기준으로 '열매'(점수)가 쌓여나간다. 기사의 품질에 대한 평가를 사용자들의 손에 맡기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소셜 콘텐츠, 트위터나 페이스북 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는 기사다. 세 번째는 <위키트리>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원(original) 콘텐츠, 네 번째는 제휴를 맺은 다른 언론사로부터 얻어지는 제휴 콘텐츠다.

제휴 콘텐츠라고 뉴스를 전재하는 계약은 맺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뉴스를 그대로 갖다 쓰는 건 의미가 없다. 동영상도 잘라 붙여주고 QR코드도 달아주는 등 다양한 채널, 다양한 디바이스를 통해 최대한 가공한다. 제휴 콘텐츠를 아이패드나 스마트폰과 같은 각각의 포맷으로 바꿔주는 서비스가 제3의 뉴스 서비스가 될 수 있는데 미국 미저리 주(州) 컬럼비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뉴시'가 대표적이다.

프레시안 : 아무나 기사를 쓴다면 표절이나 명예 훼손이 일어날 소지가 있을 텐데. 기사의 품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

공훈의 :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일이 고치거나 다시 작성하지 않고 최소한의 관리만 한다. '콘텐츠 매니지먼트'라고 해서 명예 훼손이나 저작권 위배의 소지가 있는 부분만 걸러주는 역할이다.

기사의 완성도는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완전한 기사일수록, 다른 사람의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더 가치 있다. A가 쓴 기사를 B가 고칠 수 있는 위키 기반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와 다르다. <오마이뉴스>는 완성도 높은 기사를 기다리는 건데 우리들은 이미 나온 기사를 상호작용을 통해 여럿이 발전시키는 시스템이다.

그러다보니 참여의 진입 장벽이 낮다. 현재 2000명 정도의 회원이 있고, 하루 80~100건의 기사가 올라온다.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기사의 잘못된 부분은 결국 소셜 네트워크 사용자들이 걸러내게 된다. 이견 반영이나 평가도 마찬가지다. 모든 피드백이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이른바 '스마트 리더'들끼리의 자정 작용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자정력은 오보의 개념도 바꾼다. 17일 박태환 선수가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100m 자유형 결승에서 1위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우리가 경기도 하기 전에 '박태환 선수 1위 했다'는 기사를 올렸다. 우리 편집국장이 예선 영상을 다시 틀어주는 걸 잘못 보고 오해한 거다. 이건 명백한 오보다.

그런데 확인이 되자마자 '죄송합니다. 예선 영상을 보고 착각했습니다'라고 솔직담백하게 사과했더니 놀랍게도 괜찮다는 반응이 오는 거다. '얼마나 빨리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으면 그랬냐', '응원한다'는 사람부터 '이제는 예언까지 한다'며 가볍게 농을 던지는 사람까지. 모두 우호적이었다.

기존 매체가 이런 오보를 냈다고 생각해 보라. 아찔하다. 오보 개념까지 바꾸는 것이 바로 소셜 네트워크의 자정력이다.

"소셜 네트워크는 이른바 사이버 인격을 걸고 소통하는 플랫폼이다. 페이스북의 경우는 상당한 정도의 개인 정보를 내걸어야 그만큼 친구 관계가 넓어지는 특성을 갖는다. 트위터 역시 본인의 위치나 주요 관심사, 상당수의 경우 실명을 내건다. 본인 정보가 많을수록 더 신뢰를 받고 보다 많은 사람과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트위터에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허위 사실을 퍼뜨리고, 욕설이나 저속한 표현을 쓰는 예를 본 적 있는가? 답은 '없다'가 맞다. 실명 확인조차 하지 않고 한 사람이 몇 개의 계정을 열 수도 있으며, 심지어 남의 이름으로 계정을 열 수도 있는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악플 행위는 여간해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바로 '다수 대 다수'가 실시간으로 엮어있는 구조 덕분이다. 그 구조가 발휘하는 강력한 자정력 때문이다. 이는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생태계다." (<소셜 미디어 시대 보고 듣고 뉴스하라> 118, 119쪽)

소셜 네트워크 혁명과 사회적 순기능

프레시안 : 소셜 미디어의 수익 모델이 궁금하다. 기업들은 어떻게 참여하나?

공훈의 : 기업으로서는 광고를 만들어서 신문이나 방송에 배포하면 그게 끝이니까 누가 그걸 보는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별개의 조사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소셜 네트워크에선 효과를 알 수 있다. 소비자들의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오니까.

만약에 제품이나 광고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크다 해도 지금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라면 바로 대응하고 개선할 수 있다. 거기다 광고 단가도 훨씬 낮다. 그래서 기업들이나 광고주들이 소셜 네트워크 활용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일례로 삼성이 'SMNR(Social media news release)'이라는 획기적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S가 삼성(Samsung)이 아니라 소셜(Social)인 점에 주목해 보라. N은 뉴스(News)다. 굳이 언론매체에 맡기지 않고 소셜 네트워크에 직접 홍보와 광고 내용을 담은 뉴스 콘텐츠를 게재하고 그 흐름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과거엔 신제품이 나왔거나 보도할 내용이 있으면 보도 자료를 만들어 각 언론에 배포하고 보도 요청을 했다. 언론이 보도해주지 않으면 거액의 광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SMNR을 활용하면 언론 지면에 오르든 말든 상관이 없다. 기존 매체를 우회하는 방법이다. 이런 시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프레시안 : 기사마저 기업이 직접 작성한다면 상업성이 더 커지는 것 아닌가. 자칫하면 기사와 광고의 경계가 애매해지고, 기업 제품에 대한 비판 여론은 축출될 여지가 있다.


ⓒ프레시안(김하영)
공훈의 : 기업이나 우리 같은 소셜 미디어, 소셜 네트워크 사용자 개개인 모두에게 똑같은 제어 기제가 있다. 바로 평판 리스크(Reputation Risk)다. 이건 소셜 생태계 자정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말도 안 되는 광고성 기사를 내보내면 (평판이 나빠져) 순식간에 망할 수 있다. 수익만을 기준으로 아무 것이나 내보낼 수 없는 이유다.

아이폰4가 출시됐을 때 모든 언론이 최대 광고주인 삼성 눈치를 보면서 아이폰 비난 기사를 냈다. 그러나 아이폰 사용 후기가 삼성 눈치 볼 필요 없는 소비자들의 참여로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퍼졌다. 이런 사용 후기는 아이폰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졌다.

기사나 광고의 평판은 '진정성'이 가른다. 일단은 제품이 좋아야 하고, 광고나 기사에도 과장이나 소비자를 현혹할 소지가 없어야 한다. 소셜 광고는 다짜고짜 '우리 상품 좋다'고 내밀면 백전백패다. 그 상품을 만든 이유와 가치를 성실히 알려줘야 인정받는다. 이렇듯 사용자의 진정성이 그 사람 말을 받아들일지 말지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 소셜 네트워크의 순기능이다.

프레시안 : 광고뿐 아니라 뉴스 유통에서도 같은 기준이 적용될 것 같은데….

공훈의 : 뉴스 콘텐츠든 광고든 핵심은, 과거엔 어떻게 생산하느냐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어떻게 흘려보내느냐가 문제다. 예전엔 기사를 잘 만들어 발행하면 끝이었다. 그러나 현재 소셜 미디어에서는 발행하는 순간부터가 시작이다. 기사가 나오면 피드백을 통해 또 다른 이슈를 확산시키거나 부정적 반응에 대응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기업이나 뉴스 제공자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통이 중심에 오면서 기존 매체들로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앞으로 벌어질 거다. 편집국과 광고국의 기능이 똑같아진다. 지금까진 편집국이 뉴스 생산까지만 담당했지만 이제 절반은 유통 기능을 맡아야 한다. 포맷에 따라 뉴스를 보내는 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전부 다시 설계를 해야 한다.

포맷마다 차이가 있음을 모르고 뉴스를 아무 데나 한꺼번에 던지는 매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요즘 언론사들 인턴 앉혀놓고 아무 기사나 트위터로 날리지 않나.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에서 '벌크'는 곧 '스팸'이다. 마구잡이로 날려대면 '블락', '언팔' 당한다. 유통은 아주 정교하게 접근해야 한다.

프레시안 : 이런 상황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공훈의 : 사회 전체적으로 대단한 순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냉철하게 돌아보면 언론에 의한 여론 왜곡이나 조작이 적지 않았다. 거기에 따른 사회적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소셜 네트워크처럼 자정력이 강한 환경에서는 어느 언론 하나가 여론을 한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기업의 상품 판매에서도 마찬가지다. 과장 광고로 소비자를 현혹하기 어려워진다. 정치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소문이 다 나 버리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헛소리' 하기 어려워진다. 최대한의 다수가 만나 서로 지혜를 모으는 것이다. 결국은 선(善)이 살아남는다.

"뉴스 룸을 열어라"

프레시안 : 미디어 환경이 이런 식으로 변하면 기존 종이 신문이나 방송은 전멸할까? 공생은 불가능한가?

공훈의 :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앞으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플레이어가 나올 것이다. 10년 전 <머니투데이> 같은 새로운 플레이어가 나타나 '실시간 뉴스'라는 환경을 이끌었듯이, 소셜 미디어 환경에서는 그에 맞는 플레이어가 등장할 거다.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기존의 매체들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선 내부 혁신을 통해 그런 환경에 문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기존 매체들로선 어렵다고 본다. 관습화된 틀과 그동안 누렸던 기득권을 깨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일보>다. <조선일보>는 트위터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자신들이 쓴 기사가 정론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트위터를 미디어로 인정하지도 않는 태도 때문이 아닐까.

트위터에서는 다르다. <조선일보>보다 '독설(@dogsul·<시사IN> 고재열 기자)'이나 '미디어몽구(@mediamongu·1인 블로거 김정환 씨)'가 더 영향력이 있다.

프레시안 : 그럼 언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공훈의 : 첫 번째로 뉴스 콘텐츠를 재정의해야 한다.

역 피라미드 형식의 정제된 스트레이트 기사들, 이 형식은 누가 정했나. 독자들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공급자가 편하도록 만들어서 굳어진 거다. 제한된 지면에 엑기스만 잘라 전달하는 것에 독자들은 이미 염증이 나 있다. 여론조사, 동영상, 지도, 증강현실까지 공짜로 제공되는 옵션들을 끼워 넣어서 콘텐츠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뉴스 생산 과정을 열어라. 다시 말해 뉴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독자들을 참여시키는 거다. 뉴스 룸처럼 폐쇄된 곳이 없다. 뉴스 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세상의 지극히 작은 샘플이며, 거기서 세상을 재단하는 느낌도 착각에 불과하다. 뉴스 룸의 문을 활짝 열고 콘텐츠가 아닌 콘텍스트를 창조해 내야 한다.

그래도 체계적 탐사 보도는 여전히 전통적 저널리즘의 영역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탐사 보도 역시 뉴스 룸 안에서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자.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의 미디어연구소 '폴리스'의 찰리 베켓 소장이 저서 <슈퍼미디어>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일반 시민이 저널리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라."

그가 말하는 '네트워크 저널리즘'이란 뉴스 생산에 일반 시민과 각계 전문가, 기자가 서로 협력하는 체제를 말한다. 베켓은 시민 참여가 부가 서비스가 아니라 핵심적 부분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 참여, 여론 중시한다는 우리 언론은 과연 그 '핵심적 부분'까지 이양하거나 공유했는가? 자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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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 혹은 '생태운동'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이제는 <녹색평론>을 별난 사람들의 잡지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고, 웬만한 서점에서는 생태 관련 서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평자도 이 흐름에 공감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21세기에는 생태주의의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삶을 만들어갈 수 없으리라 확신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러한 이해가 단지 머릿속 추상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생태주의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만남에서 자라나는 사상이자 운동이다. 그런데 평자를 비롯해 우리 대부분은 도시인이다. 지구 위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생명으로서 자연과 만나지 않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리고 생태주의가 환기하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이겠지만, 도시인에게는 이러한 만남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도시인의 생태주의는 말만의 생태주의이기 십상이다. 뭔가 도시 바깥에서 비롯되는 충격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최근 나온 <강우근의 들꽃 이야기>(메이데이 펴냄, <들꽃 이야기>)는 바로 이런 자괴감에 신선한 틈새를 열어준다. 이 책은 다름 아닌 도시 안에서 도시 바깥의 자연과 조우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도시 '안'의 그 '바깥'. 강우근이 발견한 그 오묘한 만남의 상대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을 비집고 우리에게 얼굴을 내미는 잡초들, 들풀들이다.

도시 '안'에서 만나는 그 '바깥', 들풀들


▲ <강우근의 들꽃 이야기>(강우근 지음, 메이데이 펴냄). ⓒ메이데이
<들꽃 이야기>는 어린이책의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저자 강우근이 '노동자의 힘'이라는 노동 정치 조직의 기관지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세 쪽 정도의 짧은 글로 들풀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그 생김새를 알 수 있게 하는 컬러 삽화가 하나씩 따라붙는다. 지은이가 어린이책 작가라서 그런지 이 책은 알록달록 예쁜 표지서부터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별 생각 없이 책장을 쉬 넘길 수 있는 달착지근한 수필 유는 결코 아니다. 우선 이 책이 소개하는 식물들의 이름부터가 너무 생소하다. 진달래나 개나리처럼 아주 익숙한 이름도 있고 쇠비름이나 괭이밥처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도 있지만, 털별꽃아재비, 방가지똥, 선개불알풀 같이 대다수는 낯설기만 하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인데 사실은 이것들이 다 주택가나 도로변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그 잡초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들꽃 이야기>의 독자들은 "그 풀들에도 저마다 다 이름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어느 정도 공부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뒤늦게나마 그 풀들의 사연과 장기(長技)를 확인하며 그간의 무심함을 보상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 저자는 들꽃 이야기를 들꽃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들꽃을 바라보며 자연 전체를 바라보고 또 인간 세상을 바라본다. 장황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문장으로 식물들의 생태에서 인간 세계로, 다시 사람들로부터 들풀들로 자유롭게 시선을 움직인다.

그 시선이 멈추는 사람살이의 구석구석은 주로 춥고 그늘진 곳들이다. 그곳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현장이고, 이주 노동자의 도피처다. 이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 이름을 잃어 버린 들풀들만큼이나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때로는, 들꽃 이야기에서 갑자기 사람 이야기로 건너뛰어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대목들이 그렇게 눈에 도드라지지 않는 것은 그보다 더 자주 저자의 속 깊은 들꽃 철학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귀화 식물들에 대한 접근이 그렇다. <들꽃 이야기>의 독자가 새롭게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친근한 들풀들 중 상당수가 귀화 식물이라는 것이다. 오래 전도 아니고 불과 몇 십 년 전에 한반도에 상륙한 식물들.

지은이는, 목청 높은 외래종 박멸론자들과는 달리, 이들 귀화 식물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한반도 생태계에 기여해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연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우며 너른 품을 가졌음을 일깨운다. 그러면서 지은이는 자연스럽게 우리 곁의 이주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이것은 단순한 기계적 유추가 아니다. 생태계에 대한 안목이 인간사의 안목으로 이어지는 잡초 철학이자 생활인의 철학이다. 그 안에서는, 인간 세상의 어설픈 자유주의 철학과는 반대로, 얼핏 서로 모순되는 듯 보이는 '자립'과 '연대'가 서로 어우러진다. 그 한 대목을 소개해본다.

"들꽃은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 들꽃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생존 방식을 터득해 냈다. 또 한편으로 들꽃은 홀로 살아가지 않는다. 한 가지 식물만 자라는 곳은 사람이 가꾸는 밭뿐이다. 밭작물은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들꽃이 자라는 곳에는 여러 풀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 '스스로 서기'와 '함께 연대하기'. 들꽃들이 터득한 지혜가 우리 삶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 (210쪽)

생장하고 치유함으로써 승리하는 들꽃들

하지만 이렇게 결론만 떼어내서 이야기 하면 들꽃 철학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들꽃 이야기>를 손에 펴들고 집 근처 동네를 돌며 들꽃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깨워낼 때에만 비로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이 맛에 취해보길 바란다.

다만 사족처럼 덧붙이고 싶은 것은 평자가 마침 이 책을 마주한 것과 비슷한 때에 본 영화 한 편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회고전에서 본 데츠카 오사무(<우주 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를 만든 그 사람)의 만년작 <숲의 전설>이다. 이 영화에서 숲은 불도저를 앞세운 인간의 광기로 말살 일보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본의 증식력을 넘어서는 생명의 증식력이 승리를 거둔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난 덩굴 식물들이 기계를 덮치고 인간을 덮친다. 그래서 전체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의 생명 활동을 정지시킨다.

이것은 어떤 '보복'이 아니다. 자연 특유의 '치유'의 힘이 곧 승리하는 힘이 된 것이다. <들꽃 이야기>는 이 진실을 들꽃의 눈높이에서 좀 더 담담하게 밝힌다.

"망가진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는데,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처음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잡초들이다. 버려진 밭이나 폐허가 된 곳엔 망초 따위 한해살이 잡초 밭이 되었다가 여러해살이 쑥 따위가 들어와 망초를 밀어내고 자라나서 쑥대밭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여러 해가 지나면 작은 키 나무들이 들어와 자라고 이어 큰 키 나무가 자리 잡으면서 숲으로 되어간다." (293쪽)

이것이 들꽃이, 자연이 승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 들꽃마냥 자신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인간들의 투쟁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만 승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게 아닐까? 봄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 생장하고 치유하는 힘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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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용 그리기 쉽고, 소 그리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다.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라 제 마음대로 그려놔도 실제 본 사람이 없으니 시비하기 어렵지만, 소는 낯익은 가축이라 그림에 대해 누구든지 토를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인들 가운데 '공자'라면 우리에겐 소만큼이나 친숙한 존재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식의 악평이든, 평범한 인간으로서 신의 경지를 획득한 성인으로서든 한 마디씩은 비평할 수 있다. 또 '온고지신'이니, '극기복례'니, '내가 하고 싶은 않은 일을 상대방에게 미루지 말라'는 등 '공자님 말씀'은 오늘도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우리에겐 '낯익은 소'가 저 멀리 용으로 인식되는 세계에서 그려져, '낯선 소'로서 만나는 느낌은 그 자체로 신선하다. 우리가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소의 숨은 근육들이 도리어 돌출되어 부각된 대목들을 접하면 놀랍기도 하다. 이처럼 낯익은 존재가 '낯선 것'으로 드러날 때 드는 색다른 감회는 그 자체로 '문화'를 구성한다. 문화란 새로움에의 추구와 숨어있는 것의 재발견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공자 평전 : 권위와 신화의 옷을 벗은 인간 공자를 찾아서>(안핑 친 지음, 김기협 옮김, 이광호 감수, 돌베개 펴냄). ⓒ돌베개
미국의 중국계 여성학자 안핑 친(Annping Chin)이 쓰고 김기협이 옮긴 <공자 평전>은 '용의 땅'에서 그려진 '소의 초상'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외부 사람'으로 규정하는데, 이 외부자의 시각에 "공자라는 이름이 떠올려주는 것은 중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교육, 교사, 학문, 교양, 겸손, 예절, 질서 등 많은 개념이 따라온다"라고 푸념한다.

동아시아의 좋고 나쁜 전통들이 몽땅 공자라는 이름에 덕지덕지 덧붙어있다는 것. 그러니 동양사학자인 저자로서는, "중국에서 있었던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이 쓴 책을 쓴 까닭이다. 나는 공자를 이해하고 싶었고, 이 작업이 그 발견의 과정이 되기 바랐다"(프롤로그)고 저술의 계기를 술회한다.

그리고 이 작업을 위해 "20년 동안 관련된 고전과 주석서를 섭렵하면서 공자의 모습을 구현할 자료들을 연구했노라"고 밝힌다. 상재한 <공자 평전>이 그 결과물인 셈인데, 그렇다면 이 '낯선 소'는 보통 공력이 든 노작이 아니다.

이 책이 지향하는 바는 부제인 '권위와 신화의 옷을 벗은 인간 공자를 찾아서'라는 표현 속에 함축되어있다. 그러나 공자라는 이름에 덧붙여진 수천 년 묵은 '신화'의 때를 벗기고, 더욱이 최근 중국 정부의 공자 프로젝트에서 보듯 또다시 공자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피하면서 '인간 공자'를 찾아가는 길은 녹록하지 않다. 여기서 저자가 '인간 공자'를 복원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채택한 것이 '신빙성 있는'(authentic) 자료들에 대한 치밀한 문헌 고증학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술술 읽히는 대중 교양서가 아니다. 번역자가 속내를 토로했듯, "영어권에서 이 책은 학술서에 가까운 고급 교양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보다 넓은 범위 독자들을 위한 대중 교양서에 접근시킬 수 있었다. 공자와 유가 사상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지식과 이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의 나라'에서 고급 독자들을 대상으로 저술한 '소 그림'이 우리에게 쉽고 술술 읽힌다면, 그것은 번역자의 큰 노고 덕분으로 여겨도 좋겠다.

저자가 보기에 공자와 관련된 '신빙성 있는 1차 자료'로서는 <논어>와 함께 춘추 시대 역사서에 주석을 가한 <춘추좌씨전>이다. 덧붙여 전국 시대의 <맹자>와 <장자> 그리고 <순자> 그리고 한당 시대의 다양한 전적들을 적절하게 인용한다. (이 '신빙성 있는 자료들에 기초한 공자 평전'이라는 뜻이 원제목 '오센틱 콘푸시우스(Authentic Confucius)'라는 말 속에 들어있으니, 이 책의 사활은 고증 자료의 적절한 활용과 편집의 적실성에 있음을 엿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는 공자에 대한 다양한 문헌학적 지식과 정보를 들어야겠다. 흥미로운 점은 공자의 삶을 이해하는 1차 자료로서 그동안 의심 없이 활용해온 사마천의 <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안핑 친에게 "사마천은 과거를 복원하는데 상상력을 많이 활용했다.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재현함에 있어서 그는 역사의 무게에도 기록의 빈틈에도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사마천이 가진 전통적 권위와 더불어 주관적이고 문학적이며 고증성에 문제가 많은 서술 방식이 저자의 공자 접근 시도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 하기는 <사기> 연구의 전문가 미야자키 이치사다 역시 "사기의 묘사 중에는 극중의 일막(一幕)에 해당하는 장면을 취해서 그대로 역사적 사실처럼 다룬 곳이 적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문헌과 정보 자료를 활용한다는 것, 그 자체가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가령 안핑 친 역시 전통적으로 후대의 위작으로 보아온 <공자세가>와 같은 자료를 자주 활용하며 공자 인생의 결정적인 빈틈을 메우는 점들이 그렇다. 물론 이점은 모든 평전 저술의 운명적 요소다. 사료 선택 자체가 이미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문제와 관련하여 저자의 시각(주관성)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곳은 오히려 공자의 적통으로서 순자를 맹자보다 앞세우는 데서 드러난다. <맹자>를 중시하는 것은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 계통에서다. 반면 <순자>를 중시하는 것은 일본을 위시하여, 미국 동부 지역의 유교 연구의 전통이다.

안핑 친은 미국 보스턴 강 유역 동부 대학들의 연구 환경이 몸에 익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순자>를 중시하고 <맹자>를 내치는 태도는 실용주의(프래그매티즘)적 관점에서 유교를 대하는 미국 동부 대학들의 학문적 시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 삶의 실천 축으로서 유교를 대할 때는 <맹자>가 중시되기 마련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맹자가 중시된 데는 인간의 성선을 믿고, 요순의 평화 시대를 신뢰하며 이를 재현하려는 실천적 맥락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핑 친의 <공자 평전>은 '현대-미국 동부 대학'의 시공간에서 제출된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저술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은 공자를 묘사하는 데서도 언뜻언뜻 느껴진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가슴에 닿는 부분은 학자 또는 교사로서 공자를 묘사한 대목들이었다. 공자는 대화를 좋아한 사람이었다. (<논어>라는 제목 자체가 '공자가 주제를 논하고(論),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語)'는 뜻이니까, 대화록이라는 의미가 돌출되어있다.) 다만 저자에 의하면 "그 대화는 서양식의 철학적 주제가 아니었다. 공자의 대화를 통한 가르침은 평범하고 일상적 삶의 지혜에 관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공자 가르침의 특징을 훈고학적으로 접근한다. 몹시 계발적이게도, 그는 '가르침'을 뜻하는 한자어 교(敎)와 훈(訓) 그리고 회(誨) 셋을 비교한다. 이 가운데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교습을 의미하는 '교'나, 교수자의 대중 강연의 뜻을 함축한 '훈'이 아닌, 유독 '회'자를 통해 공자의 가르침을 지적한 <논어>의 용례와 그 까닭을 추적한다. <설문해자>라는 고대 사전을 통해 '회'가 "빛을 비춰줌으로써 가르친다는 뜻"임을 확인한 저자는 공자 사상의 핵심을 이렇게 연결 짓는다.

"공자는 주어진 스승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요구하지 않은 내용을 가르침을 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런 식의 교육이 하찮은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어떤 사람이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지는 스스로 판단하는 편이 낫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자기 역할에 대한 그의 중요한 생각이었다. 가르침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한 모퉁이에 빛을 던져주는 것'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빛을 통해 각자가 더 잘 보게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그 빛을 제대로 이용하는지 여부는 각자에게 달린 일이었다." (198~199쪽)

여기 공자가 말했다는 '한 모퉁이에 빛을 던져주는 것'은 원문으로는 '거일우(擧一隅)'라, 곧 "한 모퉁이를 들어주다"로 주로 번역되는 부분이다. 이 구절이 든 문장은 공자의 교수법에 관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참고로 전모를 살피면, 공자가 학생을 가르칠 때 "책상의 한 모퉁이를 들어주었는데, 그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아채지 못하면 다시는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를 ,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논어>, 7:8) 대개 공자의 교수법이 가진 엄격한 면모를 드러내는 예화로써 드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거일우'를 "한 모퉁이에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해석하면 틀린 것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외부의 빛-내부의 깨우침'이라는 구도 속에 깔린 연면한 서양의 학문적 전통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안핑 친의 공자는, 내게는 하버드 대학이나 예일 대학의 대학원에 소속된 서양 고전 명예교수를 연상케 한다.

역설적으로 안핑 친의 서양적 사고 방법과 서술 방식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이 책의 구성은 공자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질문들로 이뤄져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 소크라테스식의 변증적 질문 과정이 관철되면서 <공자 평전>은 이전의 평전 유들과 구별된다. 저자는 자신의 시각을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공자를 발견하기 위해 그가 통과했던 다양한 질문들을 게시함으로써 그의 공자상을 독자들과 공유, 또는 소통하고자 한다. 공자의 롤 모델이었던 주공(周公)에 대한 서술을 예로 들면 이렇다.

"그런데 주공 자신의 생각은 어땠을까? 그 시점에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족에 대한 사랑과 천하를 위한 걱정 사이에 어떤 저울질이 있었을까? 그의 모든 행동이 현실적 필요에 따른 것이었을까? 그가 아들을 제후로 내보내기 직전에 베푼 훈계 내용에서 약간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64쪽)

이 책 전편을 통해 서술의 결정적인 전환의 고비마다 끊임없이 시도되는 자문과 자답의 행렬, 그리고 핵심적 질문 뒤에 합당하게 준비된 '신빙성 있는' 예화들은 이 책에서 묘사된 공자상의 신뢰성을 높여주고 또 독자의 설득력을 확보하는 힘이다. 요컨대 이 책의 힘은, 적절한 질문들로 이뤄진 서술 방식과 그 답변으로서 제시되는 다양한 고증 자료들에서 나온다.

달리 보자면 공자가 자기 학교에서 관철했던, 아니 인생 내내 주변에서 시도했던 대화의 삶을 저자는 저술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공자의 삶의 현재적 실천이기도 하다. (공자는 스스로를 두고 '호학(好學)'이라,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배움을 좋아함'이란 기필코 낯익은 삶과 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개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끝으로 공자를 오늘날로 모셔온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또 무슨 말을 할까? 저자는 제목 '평전'에 값하려는 듯, 최근 중국 땅에서 빈번하게 개최되는 '공자 학술 대회'에 참석한 공자의 모습을 상상한다. 중국 정부가 돈을 대고, 고위 관료들이 개막 연설을 하고, 군인과 공무원들이 청중으로서 '의무적으로' 참석한 가운데, 속물학자(예학자)들의 내용 없는 발표문들이 이어지는 관제 학술 대회 말이다.

"공자가 만약 이 회의에 참석했다면 그 정치적 성격을 한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관료들이 연설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흘겨보았을 것이다. 제복 입은 군인들과 술잔은 나눴겠지만 '예학자'들은 철저히 피해 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교수 옆에 앉아 편안한 기분으로 학생들과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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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스티븐 킹의 소설을 꾸준히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소 회의가 든다. 한국의 대부분의 '소설' 독자에게 스티븐 킹은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작가이자, "아, <샤이닝>(혹은 <미저리>, 혹은 <미스트>, 혹은 <캐리>)은 봤어. 영화 끝내주게 무섭더군!" 이런 대화에 등장하는 '원작자'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의 책을 한번이라도 들춰봤다면, 불필요한 군더더기 묘사는 좍 빼버린 그 매끈하고 간결한 문장에, 공포 문학 특유의 화려함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레이먼드 챈들러 식의 실용적 하드보일드를 결합시킨 것 같은 그의 끝내주는 필력에 반하고야 말 것이다. 게다가 그는, 소설에서 아주 자주 드러나진 않지만 매우 웃긴다. 빌 브라이슨과 스티븐 킹을 앉혀놓고 만담을 시키면 최고로 재밌을 것만 같다(거기에 우디 앨런까지 끼어든다면…흠…).

그가 쓴 작법 책 <유혹하는 글쓰기>(작법 책이라고 쓰고 반자서전이라 읽어도 무방하다)를 읽다가 소리 내어 깔깔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980년에 처음 발표됐다가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된 <죽음의 무도>(조재형 옮김, 황금가지 펴냄) 역시 '왜 우리는 호러 문화에 열광하는가' 이런 부제를 달고 있지만, 킹은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미친 유머를 들이댄다. 그 유머 감각이 장장 670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드는 주요 원동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진해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 <죽음의 무도 : 왜 우리는 호러 문화에 열광하는가>(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스티븐 킹은 이 세 작품이 '현대의 공포'라는 마천루의 토대라고 부르며, "이 작품들로 논의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1950~1980년 동안의 공포 작품을 진정 완전히 이해하며 논의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여기에는 이름 없는 괴물, 뱀파이어, 늑대인간이 존재한다. 이름 없는 괴물, 즉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해낸 그 괴물은 "공포가 자유롭고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악을 행하려는 의식적인 결정)에서 일어나는" 내부의 악의 대표자가 된다. 뱀파이어, 즉 브램 스토커가 되살려낸 이 섹시한 괴물은 "악을 문자 그대로 외부에 떨어뜨려놓음으로써", "외부의 악 개념을 인간화"시킴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매우 친숙하고 가깝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만들어낸 '늑대인간' 하이드 씨는 "자유 의지로 악행을 저지를 것이야 거부할 것이냐",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로적인 것 사이"의 싸움을 형상화하는 존재다.

이렇게 관념화시켜놓고 보면 어떤가, 무수한 공포 작품들을 이 카테고리들 밑으로 포함시키는 게 가능해지지 않는가? 이를테면 조지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뱀파이어 카테고리로, 하워드 혹스의 영화 <괴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의 현대 버전으로, 로버트 블록의 소설이자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는 늑대인간 카테고리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으로 대표되는 유령까지, 공포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네 가지 신화적 원형이 완성된다. 유령에 대해서는, 사실 스티븐 킹은 위의 세 카테고리만큼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유령은 나머지 세 가지,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괴물성'을 띠고 있는 세 가지에 비해 그 형체가 너무나도 흐릿하고 불명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리라.

대신 우리는 스티븐 킹이 높이 평가하는 유령의 기준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욕구와 어쩌면 인간들 마음의 본질까지도 차용한다는 관념"으로서의 유령 말이다. "만약 유령들이 악의적이라면 그 악의는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잘 만든 유령 이야기는 위의 세 카테고리들이 의존하는 내부와 외부, 우리와 그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명쾌한 경계선을 뭉갤 수 있으며 또한 뭉개야만 한다. 유령은 "내부와 외부를 아우르는 역설적인 악"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소재다. 그리고 '유령'의 가장 좋은 예로는 셜리 잭슨의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로버트 와이즈와 얀 드봉이 각각 <더 헌팅>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바 있지만, 소설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한다)을 꼽는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질문. 왜 사람들은 무섭다고 비명을 꽥꽥 지르면서도 공포 이야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왜 무서운 소설은, 혹은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며 쏠쏠한 흥행을 기록하는가? 스티븐 킹은 (대부분 싸구려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보석같은 공포 작품들이 '사회적 유용성'에 충분히 이바지한다는 점을 적극 옹호한다. 거칠게 말해 그 보석같은 작품들이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다면, 당대의 독자 혹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든 호소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당대의 시대정신일 수도 있으며, 혹은 어떤 공통적이고 심층적인 두려움들(킹은 '압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을 짚어냄으로써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첫 번째 경우의 예를 들어보자. 1950년대 매카시즘이 휩쓰는 미국 사회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돈 시겔 감독의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잭 피니의 원작 <바디 스내처>), 혹은 68혁명이 끝장나고 보수반동의 1970년대가 음울하게 지속되는 분위기에서 엄청난 성공을 기록한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를 떠올려 보라. 두 번째 경우의 예를 들자면, 어떤 금기의 선을 넘어감으로써 깜짝 놀란 우리를 멈춰 세우는 작품, 그럼으로써 우리의 공포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언데드'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죽음과 부패에 대해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지점을 훌쩍 건너뛰고, 동시에 존속살해의 가장 무시무시한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모두를 한순간에 훅 날려버렸다.

스티븐 킹은 우리가 공포 이야기들을 읽고 보는 행위, 악몽을 거듭 대면하려는 이 기이한 의지가 "본질적인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우리 자신의 감정을 재확립하기 위함"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이 공포 이야기들을 읽음으로써) 문명화된 뇌 속의 바닥 뚜껑 문을 들어 올리고 그 밑에 흐르는 지하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굶주린 악어들에게 날고기를 한 양동이 던져 주고자 하는 것이다. 왜 귀찮게 그런 일을 하냐고?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악어 녀석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이라고, 이 양반아. 그런 일이 녀석들을 저 아래쪽에 위치하고 나를 여기 위쪽에 위치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공포 작품들에선 선이 승리하고 악이 끝장난다. 공포물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장르다. 스티븐 킹은 "공포 이야기가 죽음과 만연한 악에 대비하는 우리의 예행 연습"이라면, "공포 이야기의 엄격한 도덕성은 그 이야기를 삶과 선한 마음과 꾸밈없는 상상력의 재확인으로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포 작품 좀 번역해 줘요, 출판사들!

어쩌면 이 책의 결론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피비린내 나는 공포 이야기에 눈을 번득거리며 열중하던 독자에게 다소 김빠지는 마지막 스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두시길. 지금 여기 정리한 내용들은 스티븐 킹이 독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다소 딱딱하게 분류한 내용의 극히 일부 뼈대이며, (스티븐 킹 본인도 이런 부분들을 쓰면서 내심 따분해했을 것이다), 진짜 본론은 이 입담 좋은 소설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우웩' 싫어하는 작품들을 분류하며 그 장단점을 숨 돌릴 새 없이 읊조리는 중간중간의 살점들이다.

이중에서 한국에 영화로든 책으로든 소개된 작품들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킹의 소개를 읽다보면 대체 출판사들은 이런 거 번역 안하고 뭐 하는가 분통이 터질 만큼 궁금해진다. 또한 <죽음의 무도>를 완독하고 나면, 그리고 당신 역시 공포 작품에 은밀하게 열광하던 바로 그 사람이라면, 스티븐 킹의 기나긴 목록을 '빈 문서 1'에 죽 타이핑한 다음 하나씩 찾아보거나, 혹은 나만의 목록을 작성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 하더라도).

어떤 텍스트에 관한 텍스트로서 이보다 더 좋은 목적 달성은 없다.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텍스트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 이제 당신도 무한의 공포 속으로 잠식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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