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스티븐 킹의 소설을 꾸준히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소 회의가 든다. 한국의 대부분의 '소설' 독자에게 스티븐 킹은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작가이자, "아, <샤이닝>(혹은 <미저리>, 혹은 <미스트>, 혹은 <캐리>)은 봤어. 영화 끝내주게 무섭더군!" 이런 대화에 등장하는 '원작자'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의 책을 한번이라도 들춰봤다면, 불필요한 군더더기 묘사는 좍 빼버린 그 매끈하고 간결한 문장에, 공포 문학 특유의 화려함과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레이먼드 챈들러 식의 실용적 하드보일드를 결합시킨 것 같은 그의 끝내주는 필력에 반하고야 말 것이다. 게다가 그는, 소설에서 아주 자주 드러나진 않지만 매우 웃긴다. 빌 브라이슨과 스티븐 킹을 앉혀놓고 만담을 시키면 최고로 재밌을 것만 같다(거기에 우디 앨런까지 끼어든다면…흠…).

그가 쓴 작법 책 <유혹하는 글쓰기>(작법 책이라고 쓰고 반자서전이라 읽어도 무방하다)를 읽다가 소리 내어 깔깔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980년에 처음 발표됐다가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된 <죽음의 무도>(조재형 옮김, 황금가지 펴냄) 역시 '왜 우리는 호러 문화에 열광하는가' 이런 부제를 달고 있지만, 킹은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미친 유머를 들이댄다. 그 유머 감각이 장장 670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고 싶게 만드는 주요 원동력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진해서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 <죽음의 무도 : 왜 우리는 호러 문화에 열광하는가>(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스티븐 킹은 이 세 작품이 '현대의 공포'라는 마천루의 토대라고 부르며, "이 작품들로 논의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1950~1980년 동안의 공포 작품을 진정 완전히 이해하며 논의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여기에는 이름 없는 괴물, 뱀파이어, 늑대인간이 존재한다. 이름 없는 괴물, 즉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해낸 그 괴물은 "공포가 자유롭고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악을 행하려는 의식적인 결정)에서 일어나는" 내부의 악의 대표자가 된다. 뱀파이어, 즉 브램 스토커가 되살려낸 이 섹시한 괴물은 "악을 문자 그대로 외부에 떨어뜨려놓음으로써", "외부의 악 개념을 인간화"시킴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매우 친숙하고 가깝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만들어낸 '늑대인간' 하이드 씨는 "자유 의지로 악행을 저지를 것이야 거부할 것이냐",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로적인 것 사이"의 싸움을 형상화하는 존재다.

이렇게 관념화시켜놓고 보면 어떤가, 무수한 공포 작품들을 이 카테고리들 밑으로 포함시키는 게 가능해지지 않는가? 이를테면 조지 로메로의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뱀파이어 카테고리로, 하워드 혹스의 영화 <괴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의 현대 버전으로, 로버트 블록의 소설이자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는 늑대인간 카테고리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으로 대표되는 유령까지, 공포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네 가지 신화적 원형이 완성된다. 유령에 대해서는, 사실 스티븐 킹은 위의 세 카테고리만큼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유령은 나머지 세 가지,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괴물성'을 띠고 있는 세 가지에 비해 그 형체가 너무나도 흐릿하고 불명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리라.

대신 우리는 스티븐 킹이 높이 평가하는 유령의 기준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욕구와 어쩌면 인간들 마음의 본질까지도 차용한다는 관념"으로서의 유령 말이다. "만약 유령들이 악의적이라면 그 악의는 우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잘 만든 유령 이야기는 위의 세 카테고리들이 의존하는 내부와 외부, 우리와 그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명쾌한 경계선을 뭉갤 수 있으며 또한 뭉개야만 한다. 유령은 "내부와 외부를 아우르는 역설적인 악"이 될 수 있는 자유로운 소재다. 그리고 '유령'의 가장 좋은 예로는 셜리 잭슨의 소설 <힐 하우스의 유령>(로버트 와이즈와 얀 드봉이 각각 <더 헌팅>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 바 있지만, 소설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한다)을 꼽는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질문. 왜 사람들은 무섭다고 비명을 꽥꽥 지르면서도 공포 이야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왜 무서운 소설은, 혹은 영화는 계속 만들어지며 쏠쏠한 흥행을 기록하는가? 스티븐 킹은 (대부분 싸구려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보석같은 공포 작품들이 '사회적 유용성'에 충분히 이바지한다는 점을 적극 옹호한다. 거칠게 말해 그 보석같은 작품들이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다면, 당대의 독자 혹은 관객들에게 어떤 면에서든 호소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당대의 시대정신일 수도 있으며, 혹은 어떤 공통적이고 심층적인 두려움들(킹은 '압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을 짚어냄으로써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첫 번째 경우의 예를 들어보자. 1950년대 매카시즘이 휩쓰는 미국 사회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돈 시겔 감독의 <신체 강탈자들의 침입>(잭 피니의 원작 <바디 스내처>), 혹은 68혁명이 끝장나고 보수반동의 1970년대가 음울하게 지속되는 분위기에서 엄청난 성공을 기록한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를 떠올려 보라. 두 번째 경우의 예를 들자면, 어떤 금기의 선을 넘어감으로써 깜짝 놀란 우리를 멈춰 세우는 작품, 그럼으로써 우리의 공포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언데드'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죽음과 부패에 대해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지점을 훌쩍 건너뛰고, 동시에 존속살해의 가장 무시무시한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모두를 한순간에 훅 날려버렸다.

스티븐 킹은 우리가 공포 이야기들을 읽고 보는 행위, 악몽을 거듭 대면하려는 이 기이한 의지가 "본질적인 정상이라는 개념으로 우리 자신의 감정을 재확립하기 위함"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이 공포 이야기들을 읽음으로써) 문명화된 뇌 속의 바닥 뚜껑 문을 들어 올리고 그 밑에 흐르는 지하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굶주린 악어들에게 날고기를 한 양동이 던져 주고자 하는 것이다. 왜 귀찮게 그런 일을 하냐고?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악어 녀석들이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이라고, 이 양반아. 그런 일이 녀석들을 저 아래쪽에 위치하고 나를 여기 위쪽에 위치하도록 유지시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공포 작품들에선 선이 승리하고 악이 끝장난다. 공포물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장르다. 스티븐 킹은 "공포 이야기가 죽음과 만연한 악에 대비하는 우리의 예행 연습"이라면, "공포 이야기의 엄격한 도덕성은 그 이야기를 삶과 선한 마음과 꾸밈없는 상상력의 재확인으로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포 작품 좀 번역해 줘요, 출판사들!

어쩌면 이 책의 결론은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피비린내 나는 공포 이야기에 눈을 번득거리며 열중하던 독자에게 다소 김빠지는 마지막 스텝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두시길. 지금 여기 정리한 내용들은 스티븐 킹이 독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다소 딱딱하게 분류한 내용의 극히 일부 뼈대이며, (스티븐 킹 본인도 이런 부분들을 쓰면서 내심 따분해했을 것이다), 진짜 본론은 이 입담 좋은 소설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우웩' 싫어하는 작품들을 분류하며 그 장단점을 숨 돌릴 새 없이 읊조리는 중간중간의 살점들이다.

이중에서 한국에 영화로든 책으로든 소개된 작품들은 절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킹의 소개를 읽다보면 대체 출판사들은 이런 거 번역 안하고 뭐 하는가 분통이 터질 만큼 궁금해진다. 또한 <죽음의 무도>를 완독하고 나면, 그리고 당신 역시 공포 작품에 은밀하게 열광하던 바로 그 사람이라면, 스티븐 킹의 기나긴 목록을 '빈 문서 1'에 죽 타이핑한 다음 하나씩 찾아보거나, 혹은 나만의 목록을 작성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이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 하더라도).

어떤 텍스트에 관한 텍스트로서 이보다 더 좋은 목적 달성은 없다.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텍스트를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 이제 당신도 무한의 공포 속으로 잠식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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