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기자들이 발로 쓴 <한국의 워킹 푸어>(책보세 펴냄)를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오 마이 갓! 도대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하는 거야? 안 망하고 살 방법이라는 것이 있는 거야?'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중산층이면 중산층인 대로, 젊으면 젊은 대로, 나이가 들었으면 나이가 있는 대로, 고졸이면 고졸대로, 대졸은 또 대졸대로 다들 가난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다. 게으른 것도 아니고 다들 열심히 살려고 고군분투를 하는데도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삶이 왜 이 모양이 된 것이지?

사실 우리 삶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많은 '언어'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딱 한마디로 정리하라고 하면 점점 더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역시 대답을 알고 있다. '보편적 복지'를 추구해야하며, 이것은 무너진 '공공성'을 다시 복원하고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모두 개인에게 던져져서는 안 되며 사회가 그것을 나누어 가져야하고 국가가 '복지'를 통해서 책임져야 한다.

만약 이 공공성이 공학적으로 '디자인'되기만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백가쟁명식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도대체 이 공공성이라는 것이 누구의 언어로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이다. 이것은 의자에 앉아 디자인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한 번도 공공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져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이미 공공성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공적인 울림이 있는 언어로 듣는 일이다. 이것은 책상에 앉아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귀 기울여 듣는 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한국의 워킹 푸어 : 무엇이 우리를 일할수록 가난하게 만드는가?>(프레시안 특별 취재팀 지음, 책보세 펴냄). ⓒ책보세
<한국의 워킹 푸어>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많은 한국의 글쟁이들이 반짝이는 아이디어 혹은 기획 아이템을 가지고 현장에 가지 않고 검색을 통해 혹은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자료를 모으고 가공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근사하고 산뜻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제작 방식'은 아무리 아이템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바꾸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는 재기발랄할지는 모르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한숨이나 한탄, 혹은 위로나 분노와 같은 그 어떤 정서적 반응, 감응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무식하게 말해서 이런 '기획된 아이템'은 얄팍한 정치적 선동으로 소비되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움직이는 울림이 없다. 책을 읽고 나서 '오마이 갓,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야?' 이런 말이 튀어나오게 하고 자기 주변을 돌아보면서 사회를 발견하게 못하는 글이 '정보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책은 나부터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하였다. 책을 읽고 있던 카페에서 이야기를 풀어보자. 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커피를 얻어 마시고 있는 내 앞에 앉아 있는 후배는 이 책의 3장에 나오는 '치열한 경쟁을 이유로 헐값에 팔리는' 문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명문' 대학을 나와 초국적기업에 취직해서 고액 연봉을 받았지만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경제 위기가 닥쳤고 회사에서는 정리 해고를 했다. 따르던 부장이 잘리는 것을 보면서 미련 없이 회사를 때려 쳤다.

이 후배는 지금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한 달에 얼마를 버냐고? 아무도 모른다. 극단은 늘 적자에 허덕이고 공연을 나갈 때마다 돈을 받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돈을 극단에 쏟아붓기까지 하였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알바'는 손에 잡히는 대로 하지만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언제 공연이 잡힐지, 그리고 그 공연 장소가 서울일지 지방일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알바는 할 수도 없다. 책에 등장하는 드라마 보조 작가인 김국진 씨나 신동호 씨와 전혀 다르지 않다.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냐는 마음이었지만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뷔하려는 작가는 많고, 돈 안 주고도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은 줄 서 있는 것"은 뮤지컬 업계도 마찬가지이다.

이 후배의 동생은 8장에 나오는 '지방대생'이다. 그것도 이름 있는 국립대학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잡대'로 분류되는 대학 출신이다. 몇 번이나 편입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고 그가 건진 것은 졸업하는 학생 숫자보다 교수 숫자가 더 많은 졸업 앨범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고 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다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책에 나오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취직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다시 대학을 가는 것밖에 없었다. 취업이 잘 된다고 하는 물리치료학과를 가기 위해 다시 피땀을 흘려 공부를 했다.

다행히 근면 성실한 그는 편입에 성공하였고 작년에 무사히 졸업해서 지금은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수습 기간 동안 그가 받은 월급은 100만 원이 안 되었고, 지금은 150만 원을 받고 있다. 결혼? 언젠가 하긴 하겠지만 이 월급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은 젊고, 독신이고, 부양해야할 부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 정도라도 버틸 수 있다. <프레시안>의 기자들이 만나고 들여다본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벗어날 가망이 별로 없는 빈곤의 나락에 빠져있다. 무엇보다 이들의 삶은 '빚'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대학생들은 등록금을 대기 위해 받은 학자금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빚꾸러기가 된다. 친구의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이혼까지 당하고 쪽방촌에서 살며 지하철역의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박연자 씨 역시 버는 돈의 대부분을 빚을 갚는데 쓰고 있다. 통계청의 자료를 보면, 저임금 노동자들은 일을 해서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해도 매달 33만 원의 빚만 늘어간다.

농민들 역시 다르지 않다. 한 공중파 방송에 나올 정도로 고소득을 올린다고 소개된 '미래가 촉망되는' 농민 역시 빚더미에 올라있다. 연 매출이 2억 원이라고 하지만 빚은 3억 원이다. 귀농한 농부 주경호 씨의 사례처럼 딸기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비닐하우스를 지어야 하고, '아이스 딸기'와 같은 새로운 상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대형 냉장고를 들여야 하는데 그것도 고스란히 빚이 되어 돌아온다.

이 빚에 결박된 인생들에게 다가오는 가장 무서운 것이 '건강'이다. 아프면 끝장이다. 문제는 빈곤의 늪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감당하기 힘든 치료비 때문에 빈곤의 늪에 빠진 사람들도 있고, 빈곤이 만들어내는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간 이식 수술을 받아 한 달에 병원비가 100만 원이 넘는 박 할아버지의 경우나 막노동판에서 다쳐 노동 능력을 상실했지만 4급 장애 판정을 받지 못한 아들을 수발해야하는 80살의 김순애 할머니, 그리고 지하철 청소를 하다가 감전 사고를 당했지만 돈 한 푼이 아쉬워 정상 근무를 하면서 병원비를 고스란히 떠맡은 박연자 씨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빈곤의 늪에 빠진 사람들이 안전장치가 별로 없는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가 바로 삼성반도체의 황유미 씨와 박지연 씨의 경우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졸이라는 학력으로 삼성반도체라는 '꿈의 직장'에 취직하였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백혈병이었다.

이들은 생산되는 '제품은 보호하지만 노동자를 보호하는지는 않는' 작업 현장에서 발암물질들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 이들에게 들려준 답은 '모든 게 우연일 뿐,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국가 역시 이들의 편이 아니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국격'이 높아진 국가, 한국에서 산재 보험은 로또이지 결코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노동과 가난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더 이상 국가가 공을 들여 재생산하여야하는 생산의 파트너가 아니다. 노동은 과거 노예제와 마찬가지로 언제든 약탈을 통해 구할 수 있고, 대체 가능하며 나아가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이 되었다.

따라서 미래가 나아지기를 바라기는커녕 지금보다 나빠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보니 학교 운동부 코치들의 사례가 말해주는 것처럼 사회적 약자들은 새로운 시스템을 요구하기보다는 '지금의 시스템이 유지돼야 그나마 있는 자리라도 사라지지 않을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당연히 노동의 협상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약해졌다. 특히 운동 코치나 계약직 금융 노동자, 텔레마케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자기 업무뿐만이 아니라 잘리지 않기 위해 시키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돌아와 쉬는 시간에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노동자들의 시중을 들어야하는 이주노동자들처럼 말이다.

운동 코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한·일전 응원에 나가 아이들을 지도해야하고, '빠른 창구'에서 일하는 계약직 금융 노동자는 자기의 실적으로 셈해지지 않는 금융 상품 판매 실적을 쌓아 옆 '정규직 노동자'에게 상납해야 한다.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조폭 사회'이다. 누가 신분제가 철폐되었다고 말하는가? 우리는 노동이 철저히 위계화되어 있고, 그 위계의 벽을 넘나들기는 하늘의 별따기에 가까운 철저한 골품제도에서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항의를 한다는 것은 곧 해고를 의미한다. 해고가 불법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을 견뎌낼 사람은 많지 않다. 설혹 법이 노동자의 편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곧 새로운 탈법이나 초법적 수단을 강구해서 다시 노동자들을 지리멸렬한 법정 투쟁의 덫에 빠뜨린다. 경기장 골프 보조원인 김은숙 씨의 사례이다.

대신 노동자들에게는 법과 원칙에 따라 '무관용' 원칙이 적용된다. 이 무관용 원칙이란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노동자들을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노동자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의 자비에 맡겨진 관용의 대상인 셈이다.

가난에 대한 정책마저 잔인하고 가혹하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20살이 되면 오롯이 혼자 살아야한다. 집도 절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자신을 거두어주던 쉼터나 그룹홈을 떠나야 한다. 행여 자식이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정되면 그 자식이 부모를 돌보지 않더라도 노인들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급여를 받을 수 없다. 그저 '못된 자식' 원망이나 하며 살아야 한다.

복지에도 경쟁을 도입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던 공부방들은 이제 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서류를 꾸미는 작업에 더 신경을 써야한다. 정부의 평가에서 최하위 5% 판정을 받으면 예산 전액 삭감이고, 5~15%가 되면 50%의 예산이 삭감된다. 최하위 판정을 받은 곳은 그동안 거두던 아이들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상태에서 시설을 폐쇄하는 방향으로 '유도'된다.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을 돌보는 시설에도 경쟁이 도입된 것이다.


▲ "몸'마저' 가난한 우리는, 이 약탈의 조폭 사회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프레시안(손문상)

자, 이 시스템에서 살아날 방법이 있는가? 과감하게 나는 예외라고 말을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아니,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야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그 답을 알려주시겠다고 한다. 헝그리 정신이다. 이 모든 일이 헝그리 정신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그 분의 진단이시다.

삼성의 황태자 이재용 씨는 삼성에서 가장 헝그리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셨다. 뭐, '정신'이 가난하다는데 할 말이 없다. 그걸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 그러나 당신은 정신이 헝그리한지 모르지만, 우리는 위장이 헝그리하다. 마음'만' 가난한 당신은, 참 행복할 것 같다.

몸'마저' 가난한 우리는, 이 약탈의 조폭 사회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한강다리 위에 기어오른다. 자식새끼를 끌어안고 쥐약을 마신다. 이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 있으니, 정녕 당신의 정신은 가난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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