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교사에게 노이로제를 일으키는, 원죄 의식 같은, 그런 소리가 있다.

"역사는 너무 어렵고, 외울 게 많고, 그래서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

아,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닌가 보다. 이걸 반가워해야 하는 걸까?

"고등학생은 역사를 싫어한다. 좋아하는 과목들을 꼽으라면 역사는 대개 맨 꼴찌다."

제임스 로웬의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 :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미국사의 진실>(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의 초판 서론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미국의 이야기이다. 이 책의 (초판과 재판) 서론들을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뭐라고 할까, 한편으로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함에서 오는, 한편으로는 조금 가슴 저림과 함께 오는 웃음이었다.

"역사 교사들은 교실의 처진 분위기를 안다. 시간이 많고, 가사의 의무가 적고, 자원이 충분하고, 교장이 유연한 사람이라면, 교사는 내용을 따라가기에도 버거운 교과서를 팽개치고 독자적으로 미국사 과정을 새로 꾸민다."


▲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제임스 로웬 지음,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그랬다. 학교에 처음 들어왔던 10여 년 전, 첫해 내 수업을 거부하는 듯한 아이들과 맞닥뜨리면서 스스로의 수업에 절망하고 나서, 그 다음해는 내 나름의 텍스트와 생각할 거리를 담은 교재를 만들어 교실에 들어갔다. 그해 진도는 제대로 나가지 못했지만, 조금 뿌듯했다. 그런데…….

"하지만 그 결과는 대부분 실망스럽다. 학생들이 자신의 역사 사랑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교사는 결국 쓸데없이 애만 썼다고 생각한다. 점차 교사는 의욕을 잃고 교과서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면서, 다음 시험에 무슨 문제를 낼지만 고민한다."

앞의 인용에 이어지는 글이다. 그렇다. 지금 내 모습과 같다. 고등학교로 오면서 나름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도 생겼다. '입시'라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 처음에는 나름대로 긴장도 하고 희망도 갖고 수업을 듣는다. 그러나 곧 현실을 알게 된다. 아무리 해도 성적이 안 오른다는 것, 그리고 입시에는 나름의 집중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 역사는 입시에서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현실을 알아버린 아이들을 달래거나 협박으로 끌고 가는 것, 둘 다 쉽지 않다.

안다. 자기변명일 뿐이다. 이 책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을 읽으면서 가슴 쓰렸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나온 미국사 교과서 18종을 꼼꼼히 파헤치고 비판한 책이다. 아니 단지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나름의 대안 교과서를 쓰고 있다. 대형 출판사에서 만들어 보급하고 학교나 주 교육위원회를 통해 채택된 학교 공식 교과서가 들려주지,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들을 그의 책이 대신해서 깊이 있게 풍부한 자료들을 제시하며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하다. 역사가 정말 의미 있게 다가갈 때 흥미도 함께 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 주려는 것 같다.

'1장 역사가 만들어낸 장애 : 영웅 만들기의 과정'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보자.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 이야기는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장애를 극복해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한 후 그녀는 무려 64년을 더 살았다. 그동안 그녀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는 '장애'가 하층 계급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 문제가 사회 계급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사회 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교과서는 그녀의 초기 삶만을 우상화하고 나머지 삶을 무시한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우리 교과서에서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인물로 멋지게 등장하는 인물이다. 많은 미국 교과서에서 그는 세계 평화에 앞장 선 '위인적인' 인물로 미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백인 우월주의를 스스럼없이 드러낸 인종주의자였으며, 주변 약소국들에 대해 매우 냉혹한 제국주의 정책을 서슴없이 실행했던 인물이다. 그런 사실은 공식 교과서에는 담기지 않는다.

미국 역사 교과서에서 누구보다 주목 받는 인물인 콜럼버스는 또 어떠한가? 그가 신대륙에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사 기술을 비롯해서 관료제나 십진법 방식의 복식부기, 인쇄술 같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기술이 발달하고 이동과 개종이 자유로운 유럽인의 종교적 특성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임에도, 교과서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단어로 정리해버린다. 오로지 그의 '용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이다.

게다가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후 정복자로서 벌인 행위들은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원주민들을 정복하는 것을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라 믿게 만든다.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개인을 영웅화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일까? (저자는 이를 '디즈니판 역사'라고 명명한다. 디즈니랜드에 마련된 역대 대통령 전당을 빗대어 말한 듯한데,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생겨난 배경에는 더 끔찍한 역사가 숨어 있음을 들려준다. 유럽에서 새롭게 이주해 들어온 이들에 의해서 어떻게 '신대륙'이 유린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신대륙'이라고 표현하면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과 그들이 미국사에 미친 영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이런 비판적인 역사 읽기, 미국사 읽기가 그 자체로 매우 신선한 것은 아니다.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정도의 이야기들은 새로울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 이런 이야기가 공식 교과서에서 지워지는가, 그것이 어떤 의미와 효과를 가지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한다는 점, 분명 다른 책에서 접할 수 없는 이 책만의 특징이다.

우드로 윌슨의 진면목을 우리가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그의 죄악을 폭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바라볼 수 있어야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성숙시킬 수 있는 교육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가한 콜럼버스의, 유럽계 아메리카 인들의 잔혹한 행위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 역시 그렇다.

그것은 오늘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갈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교육적 경험인 것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서 다루는 미국의 인종주의 문제나 베트남 전쟁 문제도 그 진실을 숨겨서 안 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지금 현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 아니 학교에서 역사를 왜 가르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왜 이토록 절절한 가슴 아픔과 함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안내하는 역사가 학교에서는 어려운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로웬이 이 책을 쓴 이유이고, 많은 역사 교사들이 고민하는 현실이기도 한….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역사도 논쟁의 학문이다. 주어진 정답을 외우는 것보다 사실을 둘러싼 해석, 해석을 둘러싼 논쟁들에 부닥치며 스스로의 견해와 판단을 세워가는 것, 그게 진짜 역사요, 역사 공부다. 그런데 이런 역사에 대한 인식이 학교에 들어올 때는 달라진다. 왜 달라지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어야 한다. 진실을 낙관적으로 전해야 한다. 실패에 관해서는 도덕적 교훈으로서의 가치만 강조하고 주로 성공을 이야기해야 한다."(482쪽)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미국에서 1925년 재향군인회가 밝힌 이상적인 교과서의 상이다. 다른 나라의 오래 전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좋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 지난해 우리 대한민국에서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이명박 정부에서 벌인 치졸한 짓거리와 논리가 닮아 있지 않은가.

좋게 풀이해서, 어린 아이들을 너무 험하고 끔직한 과거 사실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 자부심을 심어주는 것이 한 사회 공동체를 위해 학교 역사 교육이 해야 할 역할이라는 주장, 쉽게 무시할 수는 또 없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런 주장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성숙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상처 입는 이들에 대한 무례를 읽게 된다. 로웬의 이야기처럼 인종주의의 현실을 은폐하는 것은 아이들의 성숙을 막는 일이며, 그로 인해 피해 입은 이들의 삶을 무시하는 짓이다. 진실을 감추고 미화하는 역사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다. 아이들은 '교과서적인' 뻔한 가르침에 요령 것 저항한다. 그게 미국의, 우리의 교실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떤 역사 교과서, 어떤 역사 수업이 필요한 것일까? 그래 이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런데 그가 결론적인 장에서 내놓은 대안은, "다루는 주제의 수를 줄이고 역사적 논쟁에 더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 이건 대한민국의 역사 교사나 역사 교육 연구자들도 줄곧 많이들 해왔던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우리 학교 현실은 그리 크게 변한 것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허전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사실 그렇다. 학교 현장엔, 우리 교육 현실엔 교사들이 핑계거리 삼을 장애, 장벽들이 너무 많다. 교육 과정을 비롯한 교과서 제도, 관료적인 학교 시스템, 그리고 무엇보다 입시 제도 같은. 이런 장애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 그런 장애가 핑계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어쩌면 그게 시작일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이 책의 제목이 던지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거짓말'이란 제목은 교과서=선생님이라고 할 때 교과서대로 가르치는 것이 곧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어찌 보면 단순하게 게으른 교사들을 계도하는 제목처럼도 느껴진다.

그런데 교과서대로 가르치는 것을 넘어설 때는? 이때의 선생님은 교과서가 말하는 의도된 '거짓'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교과서를 다룬 책임에도 이 책의 도발적인 제목은, 그래서 교사인 당신은 어떤 '거짓말'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줄 것이냐고 묻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 뉴욕 주의 롱아일랜드 해안의 존스비치 공원. 공원으로 진입하는 도로를 가로지르는 약 3m 높이의 다리가 놓여 있다. 약 3.5m의 버스가 지나지 못할 만큼 낮은 높이다. 당연히 버스를 타고 공원을 지날 수는 없다. 도대체 다리를 왜 이렇게 낮게 놓았을까?

이유는 '흑인이나 가난한 사람이 절대 공원에 다가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단다. 이들이야 말로 버스의 주된 승객이지 않던가. 설계자의 심술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난한 자들은 자연스레 소외당할 수밖에 없겠다. 왜 자기들이 '대중을 위한 공원'에 좀처럼 발걸음 안 하는지를 알 턱이 없으니, 분한 마음조차 들지 않을 테다.

장면을 바꿔 보자. 1960년대 미국 하버드 대학 졸업식, 어느 법대생이 나와서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우리의 거리는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소요를 일삼는 학생들로 가득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 합니다. 러시아는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위험, 외부로부터의 위험. 우리에게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 없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뜨거운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박수가 잦아들자 법대생은 청중에게 조용히 말한다.

"여러분! 지금 말한 내용은 1932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행한 연설이었습니다."

일상은 늘 이런 식이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넓디넓은 도로가 가로 막고 있다. 작정하지 않고서는 국회에 다가가기조차 꺼려질 정도다. 경사로 없는 계단은 또 어떤가. 높은 계단은 그 자체로 누구에게는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가 된다. 장애인이라면, 노약자라면 계단 위의 공간에 다가갈 엄두를 못 낼 테다. 이처럼, 표 안 나게 차별을 담은 장치들은 생활 곳곳에 널려 있다.

뉴스를 채우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정치가의 입에서는 독재 시절에나 할 법한 이야기들이 튀어나오곤 한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따분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받아 넘길 뿐이다. 독재자들의 논리와 똑같다는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하는 탓이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소크라테스의 직업(?)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것이었다.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됐지, 무슨 생각이 필요해? 좋은 게 좋은 거지. 머리 아프게 그딴 고민은 뭘…"

대부분의 '생활인'들은 이런 자세로 세상을 산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기처럼 끈질기게 시민들에게 달라붙었다. 자신을 '살찐 말을 깨우는 등에(gadfly)'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시민이 깨어있는 사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토론으로 늘 시끄러워도 사회는 언제나 나아지고 있다. 건전한 민주주의를 최고의 정치제도로 여기는 이유다.


▲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 : 인간을 이해하는 아홉 가지 단어>(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동녘 펴냄). ⓒ동녘
최근에 나온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동녘) 시리즈는 '우리 시대의 소크라테스' 같은 책이다. 지은이는 한국철학사상연구소의 젊은 철학자들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아홉 가지 단어>, <세계를 바꾼 아홉 가지 단어>, <현실을 지배하는 아홉 가지 단어>. 시리즈를 이루는 책의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인간'과 '세계', 그리고 '현실'은 철학의 고갱이를 이루는 고민거리 아니던가.

게다가 책들은 각각 인간, 세계, 현실을 꿰뚫는 열쇳말을 9개씩 추려 낸다. 권력, 진보, 소비, 환경, 소수자, 이기주의, 빈곤, 소유, 분배 등등, 27개의 핵심 열쇳말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등에(gadfly)'에 제대로 물리게 될 테다. 불편한 마음으로 일상을 다시 보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재테크는 우리 시대의 생존 수단이다. 열심히 일한다고 부자 되기는 어려운 세상이다. '워킹 푸어(working poor)'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한 재산 모아서 편안하게 살려면 금융 지식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청소년들의 경제 감각을 키운다는 이유로 '모의 증권 투자 대회'까지 열리는 시대다.

하지만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은 금융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외쳤다. '생산 활동으로 이윤을 좇지 않고 고리대금업 같은 금융 자본 운영을 이윤 추구의 기본 형태로 삼는 태도'는 천민자본주의일 뿐이라고.

막스 베버의 잣대로 보자면, 재테크도 일종의 천민자본주의 아닐까? 불편한 의심을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며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 문제 있는 것을 좋다고 여기면 꼭 탈이 나기 마련이다. 온 세상은 지금도 금융 위기에 휩싸여 있다. 거덜 난 나라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베버는 금융 이득을 높이 사는 경제 구조를 왜 '천민자본주의'라고 불렀을까? 지금 우리의 삶을 보면 답은 분명해 보인다.

나아가 책은 친절하게도 천민자본주의에서 빠져나올 방법까지 고민하게 만든다. 일단 막스 베버의 주장부터 알아보자. 베버는 자본주의가 자라났던 이유로 '기독교 윤리'를 꼽는다. 근검과 절약은 기독교의 미덕이다. 게다가 신이 나에게 내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소명(召命) 의식 또한 강렬하다. 그러니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겠다. 넉넉하게 거둔 재물은 고스란히 저축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자본이 되어 경제가 자라났다. 이 같은 자본주의의 기본 정신에만 충실했어도 서구 사회는 지금 같은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테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경제 문제도 결국 '철학의 부재' 탓이 아닐까? 어떤 삶이 제대로인지 고민하지 않으면 눈앞의 결과에만 매달리기 십상이다. 치열한 경쟁은 정말 중요한 물음에 눈감게 만든다. 그럴수록 우리는 행복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 버린다.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 3권을 읽다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점점 커진다.

책 곳곳에 심어놓은 인용들도 적절하다.

"현대 문명의 바탕은 소유욕이다. 소유욕은 공동체 사회에서는 발붙일 길이 없었다. 함께 일해서 함께 나누고, 있으면 같이 먹고 없으면 같이 굶는 사회에서는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데 내 것 네 것을 가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울타리가 무너지고 저마다 제 살길을 찾아야 하는 사회 체제가 들어서면서 내 것과 네 것은 갈라지고, 서로 더 많이 갖고, 많이 쌓아두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공동체의 마지막 울타리까지 무너져 모든 사람이 사회적 원자로 뿔뿔이 흩어진 사회다. 너를 물어뜯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다.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인(homo homini lupus est) 사회', 바로 이것이 현대 문명을 이루고 있는 인간들의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적나라한 구도다."


▲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 : 세계를 바꾼 아홉 가지 단어>(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동녘 펴냄). ⓒ동녘
막스 베버의 설명에 이어지는 인용구이다. 꼬리 설명을 보니 철학자 윤구병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에서 따온 글이란다. 치밀한 논리로 깨진 편견의 자리를, 뭉클한 감동으로 채워주는 구도다. 이처럼 시리즈를 이루는 27개의 열쇳말은 하나하나 튼실하게 꾸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이 시리즈에는 장점만 있지는 않다. 저자는 무려 27명에 이른다. 당연히 글의 수준은 들쑥날쑥하다. 때에 따라서는 수긍이 안 갈 만큼 엉성한 논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또한 이 시리즈의 '미덕'일 수도 있다. 생각하는 능력은 비판과 함께 자라난다. 완성도 떨어지는 글을 만났다면, 책 여백에 멋진 반박 논리를 적어보는 것도 좋겠다.

게다가 책에는 보수주의의 원조 격인 에드먼드 버크에서 '이념의 황소머리'인 카를 마르크스, 장 보드리야르에서 중국의 현대 철학자 리저허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의 이론이 소개되어 있다. 책장 곳곳에 자기 생각을 키워줄 지적 영양제가 가득 담겨 있는 셈이다.

나아가, 시리즈의 27개의 열쇳말은 하루에 하나씩 '맨털 짐네스틱(mental gymnastic)'을 위한 화두로 삼기에도 제격이다. 시리즈를 완독한다면 어느덧 독자는 '몸짱 영혼'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간을 이해하는 아홉 가지 단어>, <세계를 바꾼 아홉 가지 단어>, <현실을 지배하는 아홉 가지 단어>, 시리즈를 이루는 세 권의 책 제목이다. 인간, 세계, 현실은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세 기둥이다. 이번에는 제목의 가운데 낱말만 모아보자. '이해하고 바꾸고 지배하라.' 이 또한 철학함을 이루는 세 가지 주된 활동 아니던가.

'세상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며, 시대의 가치관을 만들어 뿌리 내리게 하는 책', <세상을 밝히는 지식 교양>은 생각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이 새겨 읽어야 할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성 공화국' 이전에 '재벌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 재벌 권력이 국가 권력을 넘어서는 조짐이 나타나자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진 이후에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X파일 사건이란 안기부의 불법 도청 내용이 세상에 폭로된 사건이다. 이 폭로는 삼성의 최고위 인사들이 1997년 대선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정치 자금의 전달을 모의하였다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기타 삼성이 곳곳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는 내용이 폭로되었는데 이때부터 삼성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저널리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삼성 관련하여 또 하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 사건이었다. 김 변호사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 삼성의 총체적 비리를 폭로하였다. 삼성 공화국 논란은 불이 붙었다. 한국의 정계, 관계, 학계, 언론계 모두가 삼성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분출하였다.

유행이 되어 버린 삼성 비판

삼성 비판은 유행이 되었다. 진보 진영에 서 있다는 논객들 치고 삼성 문제 한 번 안 때려 본 사람이 없다. 삼성 비자금으로부터 시작해, 삼성생명 이재용 관련 배임, 대선 자금 제공, 삼성SDS BW 저가 발행, 삼성에버랜드 CB 저가 발행 등에 이르기까지 삼성은 이 나라의 공적이 된 듯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를 통해서 삼성 비리를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최근에는 김상봉, 조국, 우석훈 박사 등 다수의 진보 지식인들이 함께 모여 <굿바이 삼성>(꾸리에 펴냄)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그야말로 삼성 문제를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환기시키고 삼성 문제의 해결을 염원하는 진보 논객들의 총체적 노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번 물어보자. 과연 무엇이 변했는가? 2005년 이후부터 지속된 삼성 폭로, 삼성 죽이기는 무엇을 변화시켰는가? 답은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삼성 죽이기는 오히려 삼성을 키워주었다. 대중들은 이제 '삼성은 역시 대단해', '아무리 떠들어도 안 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 삼성 죽이기는 재벌들 사이에서 지도자 삼성의 위치를 확실하게 세워주었다. 삼성이 앞에서 매를 대신 맞고 꿋꿋하게 버텨온 셈이다. 사실 삼성만 불법 비자금 만들었는가. 재벌은 다 그런 것을. 기억을 깊이 더듬지 않아도 한화그룹과 CJ그룹의 비자금 수사, 형제 싸움으로 드러난 두산그룹 비자금 사건,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의 구속이 있지 않았는가? 재벌이 맞을 매를 지난 몇 년간 죄다 삼성이 맞아 왔으니 기타 재벌들은 삼성을 형님으로 모셔야 할 판이다.

X파일, 양심선언 사건 이후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특검이 실시되었다. 몇 명이 옥에 갔을 뿐이다. 삼성은 2006년 2월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했고, 2008년에는 '삼성 쇄신안'을 발표하여 그룹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고 이건희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2009년 겨울에 특별 사면된 이건희 회장은 퇴진 후 23개월 만인 2010년 4월에 삼성 경영을 위해 보란 듯이 복귀하였다.

삼성 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


▲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 : 삼성그룹을 중심으로>(이종보 지음, 한울 펴냄). ⓒ한울
이 시점에서 이제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 생기지 않았느냐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국가 권력인 특검이나 수사, 재판으로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부 사정에 훤한 인사가 비리를 폭로한들, 시민단체가 팻말을 들고 길거리에 나가 본들, 공권력이라는 특검이 실시된들, 이제 그것은 칭얼거림이요, 징징대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 볼 때다. 마음을 가다듬고 '왜 안 되는가'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과학적 분석으로 찾아볼 단계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종보가 저술한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에 관한 연구 : 삼성그룹을 중심으로>(한울 펴냄)라는 새로운 책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무엇을 말하는지 보자. 저자는 이 책에서 "어떻게 민주 정부에서 다른 어느 시기보다 더 '강력한' 자본의 권력이 작동되는가?"라고 질문한다.

노무현 정부와 같은 민주 정부하에서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자본의 국가 지배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민주 정부에서 자본의 권력화가 작동되는 메커니즘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이고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대자본은 어떻게 국가를 통제하고 계급 지배를 유지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저자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먼저 민주주의 체제란 자본에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 체제는 열린 공간 체계(open system)로 작동된다." "민주화는 시민들 혹은 민주화 운동 세력만의 해방이 아니라 자본의 해방으로도 귀결될 수 있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의 국가는 시민사회 운동 세력과 기업 혹은 자본의 각축장(battlefield)이 된다." 민주화 이후의 국가는 일종의 전략의 장으로서 계급 세력, 계급 분파 세력, 이익집단이 전략을 펼치고 이익을 추구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 틀 안에서 저자는 민주주의 체제하 자본의 국가 지배 전략에 대해 실증하고 있다. 실증 분석은 3개의 영역, 즉 정당과 의회를 매개로 구성되는 제도 정치권, 행정 기구와 사법 기구가 중심인 국가 기구, 그리고 언론, 학교 등이 중요한 매개가 되는 시민사회 영역으로 구분하여 실시한다.

구체적으로 3개 영역별로 실증 분석의 내용을 보자. 저자에 따르면, 제도 정치권 영역에서 자본은 "선거 자금의 제공과 이와 연계된 자본가의 매니페스토 운동을 통해 민주화 세력의 정치를 압도하고 제도 정치권의 다양한 분파들을 포획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의 담론적 동력이었던 '민주 대 반민주'라는 정당 체제의 균열선을 점차 희석했다."

국가 기구 영역에서 자본은(삼성은) "주요 행정 관료와 사업 관료에 대한 포획 전략을 통해 반독재 정치 분파와 행정·사법 관료 간의 각축 과정에 우회적으로 접합하면서 파워블록 내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마지막으로 시민사회 영역에서 자본은 "사회적 책임성 요구를 전략적으로 흡입하면서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저항을 무디게 만들어갔다." 더 나아가 "삼성은 친기업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유통을 통합하며 헤게모니적 지위를 강화하는 접합제로 활용했다."

삼성과 재벌의 구조적 지배력에 주목해야

이종보의 연구는 삼성 문제가 이제는 저널리즘에서 논의되는 것을 넘어 삼성 지배력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요청된다는 시기적 측면에서 매우 환영할 만한 노력이다. 자본 권력의 힘이 국가 지배에 작용하는 세 가지 경로 분석을 통해 삼성과 재벌의 이익이 관철되는 메커니즘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동안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중구난방으로 제기되던 문제들을 종합하여 사회과학의 체계성으로 다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큰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저자가 민주주의 역설이라고 말하는 "어떻게 민주 정부에서 다른 어느 시기보다 더 강력한 자본의 권력이 작동되는가"의 의문은 합당한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자본 권력이 독재정부 하의 자본 권력보다 더 강력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삼성 문제가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거보다 자본 권력이 더 강력해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나마 민주화가 진척되었기 때문에 독재정부 하에서 노출되지 못한 것들이 불거지고 있고, 그러한 현상들을 자본 권력의 국가 지배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이 책은 현 시점에서 우리가 풀어야하는 문제는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쉬운 구석이다. 앞서 말했듯이 삼성과 관련하여 이 시점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제 '왜 안 되는가', '무엇이 국가 권력도 무위로 만드는가' 따위의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노력을 위해서는 한국 자본주의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이 지배하는 시스템, 재벌이 지배하는 시스템이다. 자본은 지배 계급으로서, 재벌은 지배 계급 분파로서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삼성 공화국이라는 개념은 한국 시스템을 지배하는 전체 재벌 중 삼성이 현재 선두주자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 앞서 언급했던 문제 '왜 안 되는가'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찾아야 한다. 이미 국가론을 연구한 풀란차스는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시스템 안에 A라는 지배적인 세력이 있으면 A 세력과 국가에는 '객관적 관계'가 있다. '객관적 관계' 속에서 국가는 A 세력의 이익을 위하는 방향으로 자동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A 세력과 무슨 인적 네트워크 관계가 있거나 서로 예뻐해서가 아니라 (이런 측면에서 객관적 관계이다) A 세력의 구조적 지배가 존재하면 자동적으로 '친 A 세력'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A 세력이란 바로 자본이고 독점자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자본이고 재벌이다.

이를 테면 사회학과에 홍길동 세력이 있다고 하자. 홍길동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학교를 휘어잡았던 엄석대처럼 지배적이다. 그러면 사회학과 학생회(국가)는 학생회장(대통령)이 누가 되든 시간이 지나면서 홍길동 세력(자본, 재벌)의 이익에 충실하게 기능하게 된다.

학생회장(대통령)이 누가 되든, 좀 포악한 성격의 1대 회장 일동이든, 2대 회장 이동이든, 아니면 뒤이어 나타난 좀 민주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3대 회장 삼동이 그리고 4대회장 사동이든, 홍길동 세력이 그 반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한, 학생회는 결국 홍길동 세력이 원하는 대로, 그 세력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굴러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둘 사이의 '객관적 관계' 아래에서, 즉 홍길동 세력과 학생회장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든 없든, 설사 학생회장이 이전에 홍길동과 맞장을 뜬 이력이 있더라도 학생회의 기능은 홍길동세력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구조적 지배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왜 안 되는가'의 답이다. 한국 사회에 비단 삼성 공화국, 재벌 공화국만 있는가? 우리 한국 사회는 '서울대 공화국'이요, 'SKY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공화국'이다. 전라도는 '민주당 공화국'이요, 경상도는 '한나라당 공화국'이다.

구조적 지배가 심한 것은 학교 시스템이 좋은 예이다. 우리는 학교의 다양성 부재를 걱정하고 동종교배를 우려한다. 그러나 못 고친다. 명문 A대학은 A대학 학부 출신의 교수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이 경우 구조적 지배가 있다. 큰마음 먹고 B대학 출신의 교수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그 B대학 출신의 총장은 낙마하고 말았다.

풀란차스는 오래 전에 "좌파 정당이 집권해도 별 기대하지마!" 이렇게 말했다. 자본이, 그리고 독점자본 분파가 구조적으로 지배하는 시스템에서 좌파 정당이 혹시 집권한다 해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2005년 X파일 사건 이후 그렇게 열심히 폭로하고, 호소하고, 특검해도 안 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나라의 시스템에는 재벌의 구조적 지배가 존재하며 삼성은 선두주자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고민할 문제이다. 풀란차스도 자본이 구조적으로 지배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고민하다 '민주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라는 방향만 제시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삼성과 재벌이 구조적으로 지배하는 시스템에 변화를 가하는 시도는 그러므로 매우 진지한 이론적 노력을 요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법철학>의 서문에서 "지혜(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날아오른다"고 말한 철학자 헤겔. 그는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대작 <정신현상학>의 집필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서문을 써내려가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눈앞에 '시대정신(Zeitgeist)'이 어슬렁거리고 있다며 감격해한다.

그 순간 헤겔이 목격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깃발 아래 프러시아를 점령하여 수도 베를린의 (우리의 광화문에 해당되는) 중심가에 나타나 자신의 군대를 순시하던 나폴레옹의 말 탄 모습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이 시대의 나폴레옹은 과연 누구일까?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11~12일 서울에는 글로벌 경제 위기와 무역 전쟁, 환율 전쟁의 해법을 찾고자 각국 정상들이 모였다. TV에는 회담의 의장인 이명박 대통령의 분주한 모습과 함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비쳐졌다. 두 사람은 G20 회의에서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이라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진영에 서 있다.

이번에 모인 120개 글로벌 기업의 CEO들 (여기에는 삼성의 이건희,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SK의 최태원 회장 등이 끼어 있다) 역시 서울 한복판에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시대정신으로 찬양한다. 작은 정부, 부자 감세와 복지 재정 축소(긴축 재정), 대형 할인점 규제와 같은 기업 규제 철폐, 공기업 민영화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지속을 바라는 이들의 목소리는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G20 회의와 거의 동시에 번역·출간된 장하준의 새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부키 펴냄)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자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유 시장이라는 허구"에서 시작해서 "금융 시장은 덜 효율적일수록 좋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주류 경제학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들을 용감하게 펼쳐나간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선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치경제학 이야기보따리를 독자들 앞에 풍성하게 펼쳐 놓는다.

성장과 분배, 트리클다운과 펌프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부키
전작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순희 옮김, 부키 펴냄)에서 장하준은 주로 개발도상국들의 '성장' 이슈에 집중하고 있으며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도 이어진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없다",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는 주장을 통해 가난한 개발도상국도 한국이 1960~70년대에 취했던 적극적 정부 개입과 산업 정책(industrial policy)을 취함으로써 경제 개발과 경제 성장에 성공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3년 전에 나온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주로 개발도상국 독자를 겨냥한 것과는 달리 이번 책은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 독자를 위해 기획되었다. 이 책은 G20 회의를 주최할 정도로 선진국 문턱까지 도달한 한국 독자의 고민, 즉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진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준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실제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은 지난 30년의 세월 동안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는데 실패"했다며 비판한다. 또 그는 부자들에게 부를 몰아줌으로써 자유 시장 경제학이 기대한 것, 즉 '윗부분에서 창출된 보다 큰 부(보다 큰 파이)가 아래로 흘러내려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스며들 것'이라는 이른바 '트리클다운(trickle down)의 원리'도 실제로는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선진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패키지는 부유층 감세와 금융 자본주의화를 통해서 부자들에게 부를 집중시켜 줌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자들은 생산적 투자 확대보다는 금융 자산 투기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경제 성장 지체'와 '고용 없는 성장', '늘어나는 근로 빈곤층(working poor)' 현상을 발생시켰다.

트리클다운 이론에 대응하는 장하준의 이론은 펌프(pump)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부유층에 집중된 부가-중력(즉 '자유 시장' 원리)의 자연스런 작용에 의해-가난한 계급에게 한 방울 한 방울 흘러 떨어지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느리고 부족하다. 따라서 아예 전기 펌프를 설치하여 부를 콸콸 아래로 이전시키는 것이 경제 성장의 혜택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기에 훨씬 더 쉽고 빠른 길이다. 그 펌프가 바로 복지국가이다.

복지국가라는 펌프를 설치한 경제는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복지국가라는 큰 정부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일하는 기업과 산업이 시장 비효율성 문제로 인해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새 직장을 구하는데 필요한 직업 재교육까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까닭에 기업과 산업의 구조 조정에 크게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지국가는 기업과 산업의 효율적 구조 조정과 고부가 가치화를 보다 용이하게 하고, 그 결과 경제는 더욱 빨리 성장한다.

공정과 공평, 자유 시장과 국가 개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공정'과 '공평'에 관해서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져 준다. 장하준은 "잘 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라는 잘 알려진 사실을 지적하면서, 자유 시장 경제학은 이러한 상식적 팩트마저도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장하준은 이어 미국의 버스 운전사와 한국 또는 멕시코의 버스 운전사가 하는 일은 동일한데도 임금 격차가 수배 또는 10배나 난다는 사실이 과연 공정·공평한가라는 윤리적 문제도 제기한다. 물론 이러한 나라 간 임금 격차는 각국이 국경을 개방하여 노동 이민 시장을 완전 자유화하면 금세 사라진다.

자유 시장 경제학의 관점을 수미일관되게 적용한다면 미국의 버스 운전사가 멕시코의 버스 운전사보다 10배의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따라서 미국은 멕시코로부터의 노동 이민을 무제한 허용하는 '자유 시장'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정의(justice)와 공정(fairness)을 구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전신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상품 및 서비스의 국제적 이동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만을 자유화할 뿐 결코 노동 이민의 국제적 이동까지 자유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 시장 이론을 따르는 미국 정부의 멕시코 국경 통제는 날로 살벌해지고 있으며, 세계 어디서나 이 이론은 보수주의적 민족 차별과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한편으론 자유 시장 경제학의 논리적 자가당착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정과 공평에 관한 자유 시장적 접근의 한계를 보여준다. 만약 한국과 미국이 무제한적인 노동 이민 시장 자유화에 합의할 수만 있다면, 한미 FTA도 그렇게 공정·공평하지 못한 협상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사회디자인연구소 등 우리나라 진보·개혁 세력 일부에서 제기하는 '공정 사회' 관점의 복지국가 비판론에 대해서도 이야깃거리를 준다. 예컨대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는 복지국가보다는 정의와 공정·공평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공평이 1차 분배 구조인데 반해 복지국가는 2차 분배 구조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그리하여 사회디자인연구소는 1차 분배 구조의 불공정성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에 오히려 1차 분배 구조에서의 시장 논리(즉 자유 시장)를 더욱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좌파' 정책을 구사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특권적 분배 구조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노동 시장 유연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하준이 이 책에서 잘 지적하듯이 스웨덴과 핀란드 등 북유럽의 복지국가에서도 자유 시장에서 형성되는 '청소부'와 '사장님' 간의 임금 격차는 한국과 미국만큼이나 크다. 즉, 김대호의 표현에 따르면 1차 분배 구조에 있어 북유럽은 미국 및 한국보다도 더 불공정한 사회이다.

그런데도 북유럽 나라들은 부자 증세와 복지 재정 지출을 통해 부를 위로부터 아래로 적극적으로 이전시키는 복지국가 펌프를 설치한 덕택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사회 정의와 공정· 공평을 달성하였다. 자유 시장에서 그 가격이 결정되는 1차 분배 구조상의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유 시장을 더 강화할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가 개입 특히 복지국가적 개입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정의·공정이 먼저냐 복지국가가 먼저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정의·공정을 달성하기 위해 자유 시장 정책을 쓸 것인가 아니면 국가 개입(특히 복지국가 정책)을 할 것인가이다.

기회 평등과 실질적 공정성

공정·공평의 문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기회의 평등이냐 결과의 평등이냐의 문제이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기회의 평등'을 적극 옹호하며, 공평한 기회 제공은 공정 사회를 이루는 출발점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가난한 집 아이도 교육받을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 자립형 사립학교를 늘리더라도 가난한 아이들도 입학할 수 있는 특별전형 제도를 도입하면 기회 균등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장하준은 이 새 책에서 과연 기회를 공평하게 준다고 해서 사회가 '공정'해지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설령 가난한 집 아이들이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들이 집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배불리 먹을 수 없다면, 그리고 집에 공부할 책도, 책상도 없다면, 그들은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무상 급식을 제공하여 이들이 굶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공립도서관을 통해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무상으로 책을 대여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나아가 가난한 집 부모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노동) 시장'('기회 균등'의 시장)이 아닌 복지국가적 개입에 의해 적절한 소득과 교육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차라리 빨리 일자리를 찾아 돈벌어오라고 다그칠 것이다. 이렇듯 기회의 균등은 그 자체의 '형식적 공정성'에 불과한 바, 그것이 '실질적 공정성'으로 승화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의 균등'도 필요하다.

브라질의 룰라 정부는 가난한 집 부모들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전제로 정부가 소득보조금을 제공하는 '볼사 파밀리아(Bolsa Familia) 정책'의 대성공으로 사회에서의 '공정성'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서울 G20 회의의 '나폴레옹'은 바로 브라질 대통령 룰라였다고 할 수 있다.

'성찰적 진보'를 위한 정치경제학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달리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선진국에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리틀아메리카'(미국식 선진화)냐 아니면 '빅 스웨덴'(북유럽식 선진화)이냐의 두 가지 선진화 방향을 놓고 여전히 고심하는 우리나라 진보·개혁 진영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장래의 진보·개혁 재집권을 구상하는 '성찰적 진보'임을 자부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는 진정으로 '신자유주의 좌파'의 시대였다. 그것은 두 대통령과 집권 정당만이 아니라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세대 즉 386(486) 세대 전체의 문제였다. 이 세대가 '신자유주의 좌파'라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양상은 다양하다.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386 세대는 '굴뚝 산업'을 넘어설 '지식 기반 경제론'에 열광했다(지금도 이것은 여전하다). 그들은 굴뚝 산업을 대표하는 재벌계 대기업의 이건희와 정몽구 등 구태의연한 재벌 총수가 아니라 '지식 기반 경제'를 대표하는 새롭고 '멋진 자본주의'의 대표자인 빌 게이츠와 스티븐 잡스(그리고 우리의 안철수)에 열광했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정보통신 기술(IT)과 인터넷을 통해 달성될 정보화 사회 또는 탈산업화 사회(다니엘 벨과 앨빈 토플러)에서는 '상호 소통적 민주주의'와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피터 드러커의 탈자본주의 사회)가 실현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진보·개혁 진영에서 나타난 IT와 인터넷에 대한 이러한 열광과 기대는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미국의 경우 빌 클린턴 대통령과 로버트 라이시 노동부 장관이 그러했고, 영국의 경우 토니 블레어와 앤소니 기든스의 신노동당이 그러했다. 당시 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이 내건 '제3의 길' 노선은 부자 증세 및 복지 국가 지출 등 전통적인 진보적 정책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무관심했고, IT 및 인터넷에 대해서는-미국 민주당과 빌 클린턴을 열렬히 후원한 빌 게이츠 및 앨빈 토플러와 더불어-열광적으로 찬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IT 및 인터넷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서도 영국, 미국, 한국의 '신진보주의(제3의 길)' 세력들은 실리콘벨리의 벤처 왕국과 벤처 캐피탈 천국을 뒷받침한 미국의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이 주도하는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이 1980년대부터 추진해온 신자유주의적 금융 세계화의 정책과 이론을 이들은 '신진보'의 이름으로 대폭 수용한 것이다.

서구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초반 이래 386 세대 전체에서 IT와 인터넷, 탈산업화, 세계화와 개방에 대한 열광적인 방향 전환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각종 정책들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지식 기반 경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는 도발적 주장을 통해 이 세대의 통념을 무너뜨려 버린다.

나아가 장하준은 영국 신노동당과 미국 민주당이 '제3의 길' 노선의 일환으로 주장해온 '사회투자국가' 이론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 즉 영국의 신노동당과 미국의 민주당은 경제 성장과 연계되지 않는 노인 및 어린이를 위한 사회복지 예산은 줄이면서(복지국가 축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투자국가'라는 미명 하에 대학 교육 등 학교 교육은 대폭 강화하는 노선을 추구했다(우리나라의 경우 유시민이 그러하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사회투자국가 이론의 비현실성을 비판한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률이 매우 낮은 스위스의 생산성이 대학 진학률이 매우 높은 미국·한국 등보다 훨씬 높다는 '스위스 패러독스'라는 테제를 통해, 직업 및 경제 활동과 긴밀하게 결합되지 않은 일반 교육의 무조건적 확대만으로는 나라와 국민을 부유하게 만들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밖에도 장하준은 우리나라에서도 진보·개혁 NGO들이 많은 관심과 열성을 가지고 전개해온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날리고 있다. 정부 보조금이 없다면 성공적인 모델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 역시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한다는 지적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은 "금융 시장은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는 역설적 테제에서, 서유럽의 금융 허브로 발돋움하여 융성하던 아이슬란드의 경제가 어떻게 글로벌 금융 위기의 와중에서 사상누각처럼 붕괴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기획되어 이명박 정부가 여전히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 금융 허브' 정책이, 우리 경제와 국민 개개인을 불안정한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 얼마나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지를 지적한다.

장하준이 이 책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동북아 금융 허브 전략 역시 '지식 기반 경제(신경제)' 담론과 '제3의 길' 담론이 없었다면 정책적으로 추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정신과 진보·개혁 집권 플랜

2004년 3월 유례없는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의 업무가 정지되자 광화문 거리는 수십 만 명의 시위대로 넘실댔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청와대 안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읽고 있던 책은 바로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 권오규(노무현 정부에서 그 후 재정경제부 장관까지 지냈고 한미 FTA도 밀어붙인)가 추천한 영국 보수당 마거릿 대처의 일대기였다.

물론 대통령의 개인적 독서 취미까지 일일이 뭐라고 할 수는 없으며, 당시 노무현은 김훈의 <칼의 노래>도 읽었다고 한다. 문제는 당시의 수십 만 진보·개혁 세력 앞에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대통령이 마거릿 대처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청와대의 386 참모진의 모습이었다. 2년 뒤 감세 정책과 함께 한미 FTA를 밀어붙이면서 "신자유주의 좌파면 어떠냐?"라고 반문한 노무현의 행동은 한 개인의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386 세대 전체의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장하준 역시 전형적인 대한민국 386 세대이다. 군부 독재와 경제적 후진이 여전하던 1980년대 초반의 한 개발도상국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다. 그가 쓴 책들에는 그 나라와 그 시대의 고민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의 책들은 식민지 역사와 전쟁의 참화, 그리고 가난한 1950년대와 60년대에 태어나 경제 개발과 정치적 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한 한 젊은이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나아가 그의 이번 새 책은 이제는 개발도상국 딱지를 떼고 선진국을 향해 도약하는 우리나라의 여러 고민고리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선사하고 있다.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 감세냐 증세냐, 제3의 길이냐 복지국가냐 등등의 고민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장하준 교수는 우리나라 386 세대의 잘못된 지향성과 허상들(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도 함께 공유하고 있는)에 대해 적극적으로 애정 어린 비판을 가한다. 나아가 향후 한국을 비롯한 영국의 진보·개혁 세력(영국의 신노동당)이 재집권을 구상한다면 어떠한 경제 사상적 기초 위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영국의 <가디언>이 새로 선출된 신노동당 당수에게 장하준과 점심을 하라고 권유한 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하준의 책은 민주주의를 꿈꾸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던 이 나라의 386 세대의 필독서이다. 더 정의롭고 더 공정한 세상을 꿈꾸는 모든 젊은이들과 장년층들 역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시대정신은 G20 회의가 열린 이 나라의 길거리마다 이 책의 독자들과 함께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화의 민족.' 우리는 늘 이렇게 배웠다. '단군' 이래 반만 년의 역사 동안 한민족은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해 짓밟은 적이 없었다고. 물론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동참한 사실이나, 윤관이 수천 명의 여진족을 살상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사실은 '파병' 혹은 '정벌' 등의 수사에 가려졌지만….

이렇게 '제국주의자의 희생자'이자 '평화의 민족'이 사는 한반도의 남쪽에 난데없이 '제국'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TV 드라마는 가장 대표적인 예다. 고구려 제국, 신라 제국에 이어서 최근에는 가야 제국, 백제 제국이 등장했다. 경상도의 한 구석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고대 국가를 놓고 '제국'이라는 딱지를 붙이다니….

과연 이들 한반도의 고대 국가는 제국이었을까? 예를 들자면, 고구려는 어땠을까? 정말로 <태왕사신기>와 같은 드라마나 이른바 '재야 역사학자'들이 쓴 책에서 나오듯이 만주는 물론 내몽골, 시베리아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을까?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박노자 교수(한국학)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거꾸로 보는 고대사>(한겨레출판 펴냄)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광개토왕 시기의) 고구려가 랴오둥 지역이나 오늘날 지린성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그러나 (이 지역에서의 고구려의 영향력은) 근대 제국들과 달리 기껏해야 주변부 지역을 토착적 지배 집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있을 뿐이었었다. (…) 더구나 이 시기에 고구려가 정치·군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강자가 되긴 했지만, 문화 차원의 영향력은 정치적 영향력에 비례하지 못했다." (57~62쪽)

이뿐만이 아니다. 고조선은 만주를 지배했을까? 만주 벌판과 한반도의 반쪽을 당나라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한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 백제, 가야는 물론이고 통일신라와도 긴밀한 동맹 관계를 유지했던 왜국(일본)은 왜 항상 '우리의 적'으로 즉 '왜구'로만 묘사되는가? 또 대중은 왜 이런 판타지에 열광하는가?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진보 논객'으로 알려진 박노자 교수가 답했다. 러시아에서 가야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국내외 학계의 성과를 갈무리해 민족주의, 대국주의, 근대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은 새로운 고대사 읽기를 시도한다. 박 교수는 이런 새로운 시도를 '흘러가는 고대사'로 명명했다.

다음은 오슬로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박노자 교수와 이메일을 통해 오고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0대의 러시아 청년, 가야에 반하다


▲ 박노자 오슬로 대학교 교수(한국학). ⓒ연합뉴스
프레시안 : 이번에 나온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본 많은 독자들이 일단 당혹스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박노자가 고대사?' 하지만 선생님께서 러시아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점을 염두에 두면 이런 고대사 책은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 대중을 상대로 고대사 책을 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사실, 몇 년 전부터 주간지 <한겨레21>에 써왔던 '고대사' 관련 연재를 책으로 엮은 일일 뿐입니다. 연재가 끝나고서, 아무래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라도 책으로 엮는 게 좋다는 의견이 나와, 그 의견에 따라 이렇게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연재를 약 4년 전에 시작했는데, 그 때만 해도 '북방 사극 열풍'이 한창이었습니다. '고대사'라면, 만주 벌판에서 중무장한 "우리 조상"들이 "남"인 중국인들이나 각종 유목민을 "영웅적으로" 무찌르거나 "억울하게 외침을 당하는" 일로 대중적으로 인식되곤 했습니다. 이러한 민족, 군사 위주의 고대사 인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어서 연재를 시작했죠.

프레시안 : 고대 가야사는 한국에서도 그다지 학자들에게 매력적인 영역이 아닙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조선학과(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조선학과)를 나온 20대 청년이 조선의 고대사에 또 특히 가야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게 이채롭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박노자 : 석사 과정 시절에 제 지도 교수는 11년 전에 서거하신 (물론 러시아와 같은 "후진 지역" 학계에 무관심한 국내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고(故) 니키티나(Marianna Ivanovna Nikitina) 레닌그라드 과학아카데미 산하 동양학 연구소 교수이셨습니다. 신라의 향가와 <삼국유사> 전문가이셨습니다.

그녀는 <삼국유사> 중에서 김해가야(남가야=가락국) 관련 기록인 '가락국기'를 많이 못 보셨다는 걸 아쉬워하면서 저보고 이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면서 역사적 맥락에서 연구해보라고 권하셨습니다. 저도 최초의 러역이다 싶어 신이 나서 번역도 하고, 거기에다 고고학적 자료를 덧붙여 남가야와 그 출신인 신(新) 김 씨 가문의 역사에 대해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그 다음에 박사 과정에서 2009년에 서거하신 고(故) 미하일 박 모스크바국립대학교 교수(2009년 서거)를 만났습니다. 그는 제가 '가락국기'를 번역한 걸 염두에 두고, 저보고 가야의 정치·사회 (국가 형성 단계), 그리고 특히 외교를 중심으로 논문을 쓸 것을 권하셨습니다.

1960년대에 가야인 등 고대 한반도인들이 일본을 "정복"해서 거기에 "분국"을 세웠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석형, 조희승 두 분의 학설을 미하일 박 교수가 반박하신 바 있었어요. 그는 본인이 그 때에 정밀하게 연구하지 못하신 걸 제대로 해서 가야 여러 나라와 일본 정치체 사이의 관계 형태를 알아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가야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이 책에서 선생님께서는 가야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지적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가야에 주목을 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박노자 : 가야는 '교류' 그 자체였습니다. 대가야가 있었던 고령에서 일본계 갑옷 등이 발굴되는 점으로 봐서 대일 교류가 활발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문헌 자료를 보면, 함안의 아라가야가 대일 교류의 중심으로 부각됩니다. 이외에도 낙랑과 일본열도 사이의 교역을 맡은 것도 가야였습니다.

후기에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가야는 끊임없이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면서 병탄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꿰뚫는 문제의식입니다만, 이런 '관계' 중심의 고대사를 보여주는 가야의 경험이야말로 지금 이 시점에 깊이 음미해 봐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만주 벌판을 차지했다?" 판타지 소설일 뿐

"고조선의 지배자들이 나름대로 그 휘하의 여러 소국들을 통솔할 만큼 강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동북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철 문화를 자랑했던 연나라에 비해 그들의 힘은 부족하기만 했다. (…) 즉 청천강이 연나라 세력의 영향이 미치는 남쪽 경계선이 된 셈이고, 고조선의 영향력은 청천강과 한강 사이의 영역에서 중점적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34~35쪽)

프레시안 : 최근에 고구려(<주몽>, <태왕사신기>, <자명고>), 발해(<대조영>), 신라(<선덕여왕>)에 이어서 백제(<근초고왕>), 가야(<김수로>)까지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가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 있게 봤던 드라마가 있습니까? 이런 고대 드라마 열풍을 어떻게 보십니까?

박노자 : 저는 좀 답답한 사람이에요. 텔레비전을 절대 보지도 않고 집에 두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국 대중문화 연구 차원에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VOD로 보려고 했는데, 유료 서비스일 경우가 많고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 가입해야 볼 수 있는 게 많으니 저 같이 주민 등록 못하고 있는 외국 상주 교민은 뭘 보겠습니까?

그런데 거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북방 드라마 열풍'은 아마도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한 것 같아요. 국내 민중의 삶이 답답하고 날로 궁해지고 있지만 삼성이 소니를 밀어내는 등 재벌들의 국제적 경쟁은 (초과 착취를 당하는 비정규직, 하도급 노동자들의 참상을 대가로 해서) 당분간 성공적으로 보이니까요.

또 이제 곧 바닥이 들어나 부동산 신화는 무너지겠지만, 또 여태까지 국민 혈세로 뒷받침되어온 4대강 죽이기와 같은 대형 토건 프로젝트들은, 또 건설 경기를 인위적으로 부양시켜 한국이 대공황을 '졸업'한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등 '주류'의 허위적 자만심을 제고시켰습니다.

더구나 국가가 국민의 혈세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같은 쓸모없는 국제 이벤트를 자꾸 유치해 개최하니 대한민국은 그 중산층들에게 좀 위대하게 보이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 "위대함"을 자꾸 과거에 투영시켜서 "위대한 과거"를 만들어내고 즐기려 하는 셈이죠.

프레시안 : 이렇게 고대사가 대중문화의 소재로 쓰이는 반면에 정작 학계와 대중 사이의 거리는 굉장히 멉니다. 그 틈을 이른바 민족주의, 대국주의를 부추기는 재야 역사학자의 고대사 대중서가 메우고 있습니다. 이런 책의 시각이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에도 많이 반영돼 있고요. 이 책이 그런 흐름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요?

박노자 : 뭐, "우리가 만주 벌판을 차지했다(고조선이 만주를 지배했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낙랑이 랴오둥반도에 있었다)" 등 그 소위 "재야 사학자"의 저서 대부분은 사실 반박의 가치도 별로 없습니다. 그냥 별로 과학적이지 않은 판타지 소설이라고 보시고 읽으시면 되니까요.

저는 그저 근대적 "민족"과 같은, 고대사와 실제로 무관한 이념들을 제외시키고 되도록이면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최대한 복원해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근대 이후 만들어진 우리의 이념에 젖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과거가 너무나 흥미롭고 매력적이기 때문이죠.

프레시안 : 이들 재야 역사학자들의 고대사 대중서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 특히 고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등이 한반도보다 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판타지 소설 같은 이런 설정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 책은 크게 불편할 것 같습니다만….

박노자 : 말씀드린 대로, "고구려 제국"이니 "발해 제국"이니 그런 류의 책을 그저 판타지 소설로 읽으면 별로 문제없어요. 문제는, "상상 속의 과거"를 진짜 있었던 것으로 착각할 때부터 발생되죠. 또 그러한 류의 책을 쓰시는 분들이 자기 저서를 "역사 소설"이라고 명기하지 않고 "역사"라고 잘못 부르니 독자를 오도하게 되는 것이죠.

그게 도덕적으로 큰 문제라고 봅니다.

프레시안 : 이런 고대를 염두에 둔 상상력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대표적인 '진보' 작가를 표방해온 황석영 씨가 이명박 정부의 '유라시아 문화대사'를 역임한 것도 판타지 소설 같은 대국주의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노자 : 한때 베트남에서 제3세계의 자원을 탐내는 미국 제국이 벌인 "더러운 전쟁"의 생리를 폭로한 <무기의 그늘>이라는 명작(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대 한국 소설 중의 하나입니다!)을 남기신 분께서, "유라시아"를 "자원 보고"라고 생각하여 그 자원에 대한 한국 지배 계급의 기형적인 아류 제국주의의 욕망을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객관적으로) 대변하시게 되어서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정말 반제국주의자로 인생을 살기가 아주 힘든 일인가 봐요. 특히 한국처럼, 명실상부한 제국이 되지 못하면서도 그 논리를 완벽하게 내면화한 곳에서 말입니다.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비판의 목적이 한·미 동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면 필자도 그 목적에는 동의한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미 동맹은 냉전의 산물"이라고 훈계한 중국 정부 쪽의 이야기는 외교적 결례일지라도 내용상 틀리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과 본질적으로 달랐던 1500년 전의 상황에 오늘날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중국인들이 보기에 신라, 고구려, 백제는 서로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후예'였지만, 실제 신라인들은 고구려나 백제를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 세 나라는 각각 지배층 사이의 신화나 제사 체계는 물론 언어라든가 행정 체계 등이 서로 달랐던 데다 누적된 적대감까지 가미돼, 동족이 아닌 경쟁 세력일 뿐이었다. (101~102쪽)

프레시안 : 사석에서 한 신라사 전공자가 의외로 학계에서 신라사가 인기 있는 연구 주제가 아님을 고백한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 지적한 대로 1980년대 이후 좌파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남한 사학은 기존의 고구려-발해 중심의 민족주의 사학을 고수해온 북쪽 사학과 많이 유사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는 교과서에도 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김춘추와 당나라의 밀약설("한반도의 반쪽을 당나라에 떼 준다")'이 언급되고 있으니까요. 또 대중도 암묵적으로 신라 때문에 우리나라가 만주 벌판을 잃었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2부('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에서 그런 시각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박노자 : 고대는 고대일 뿐입니다. <삼국사기>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잘못 대한 불효자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 나오는데, 그게 고대인들의 세계관 그대로입니다. 거기에서 '우주'와 (유교적) '도덕'은 그대로 중첩되고 도덕률을 어기는 자는 우주 속에서 더 이상 존재 못하고 천벌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런 고대인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은 존재할 리는 없었죠. 김춘추에게는 백제도, 고구려도 당나라와 똑같은 외국일 뿐이었습니다. 뭐, 고구려를 방문한 김춘추를 구금한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과연 그를 '동족'으로 대한 것 같습니까? 고구려와 신라는 피차 간에 본질적으로 같은 상대방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결국 김춘추 일파가 당나라의 천하통일 작업에 편승해 그 먼 외국과의 협력으로 가까운 외국인 백제를 정복하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통합시켰습니다.

백제도 고구려도 7세기 중반 신라의 입장에서는 그냥 외국도 아니고 '숙적'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민족' 논리로 이를 비판하는 것이나, 불효자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고대인의 사고를 비과학적이라고 목청 높여서 비판하는 것이나 똑같은 일이죠. 도대체 고대를 왜 우리 기준으로 재단해야 합니까?

고대 일본은 '후진 종족'이었나?

신라로서는 왜인들이 서울인 금성까지 쳐들어와 며칠간 포위 공격(393, 405년)을 할 만큼 강군(强軍)을 가졌기에 왕자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 우의를 맺을 정도로 대접해야 했던 것이고, 백제로서도 역시 왕자를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로 왜국과 주요한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었다.

(…) 경주평야와 낙동강 유역은 물론 한반도 중부 지방(황해도)에서도 동북아의 강대국 고구려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신라·백제 왕자들을 인질로 데려가고, 백제왕의 즉위에 군사적 지원을 해줄 정도였던 왜인들이 과연 단순한 '후진적 오랑캐'였을까?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세워 한반도 남반부를 다스렸다는 이야기야 낭설이지만, 한국 자료를 봐도 왜국은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줄 만한 주요 세력 중 하나였다. (154~155쪽)

프레시안 : 이 책에서 독자들이 가장 불편하게 읽을 대목은 일본과의 관계를 언급한 제3부('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고대 일본이 상식처럼 '후진 종족'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 가야와 이질감도 크지 않은 나라였다고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서 선생님은 '임나일본부'와 같은 주장이 식민사학이 만든 허구일 가능성이 크지만,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 역시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이렇게 이 책에서 고대 일본과 한반도 국가들의 관계를 특별히 부각하는데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객관적으로 본다면 고대 국가로서의 고대 왜국(일본)의 성장은 백제, 신라 사이의 '중간' 속도였습니다. <송서> 등 중국 사료에 의거하면 5세기에 접어들어 이미 중국과 활발한 외교 교류를 했던 왜국은, 이미 4세기말에 고대 국가 건설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친 백제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일부 측면에서는 신라보다 약간 빠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의 역할 등을 생각하면 고대 한반도 국가들이 고대 일본의 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 반대급부로 고대 일본열도의 정치체도 한반도 군주들의 요청으로 한반도로 파병하는 등 '쌍방적'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고대 한반도와 고대 일본열도 정치체 사이의 관계가 '쌍방통행'이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한 것도, 자존심이 상할 만한 것도 전혀 아닙니다.

프레시안 : 이어지는 질문입니다만 3부를 읽다보면 박노자 선생님께서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서 남다른 학문적 관심을 보여 온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의 연구에 특히 매력을 느낀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김석형 원사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동료들과 논쟁하신 적이 있었던 미하일 박 은사님께서 제게 특히 이 부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할 것을 유촉하신 바 있었고, 저도 이 부분에 대한 민족주의적 신화에 대한 불만도 있고 해서 이 공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프레시안 : 이 책은 <일본서기>와 같은 일본 측 자료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일본서기>는 일본에서도 '설화'를 짜깁기한 것이므로 엄정한 사료 비판이 필요한 자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 면에서는 부실하지만, 완전한 날조라고 볼 수 없는 어떤 현실을 반영한다"는 선생님의 시각이 비판받을 여지도 있을 듯합니다.

박노자 : 식민사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왜곡하여 '임나일본부'와 같은 날조된 역사를 만들어 이용한 것은 엄연히 사실이고, (<삼국유사> 등 한반도 계통의 여러 자료보다 더) <일본서기>가 다분히 설화적 요소를 내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를 그냥 무시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일본서기>에는 백제계 자료가 많이 살아 있고, '백제기' 등 한반도에서 남지 않은 백제 (내지 도일한 백제 유망인의) 기록들이 인용됩니다. 많은 경우에는 가필, 윤색을 거쳐 인용되지만, 어쨌든 이러한 귀한 자료를 그냥 무시만 할 수 없어서 제한적으로, 사료 비판을 가하면서 이용하려 했던 것이죠.

'조공'의 진실은 무엇인가?

근대적 주권국가론 입장에서야 조공이나 책봉이 '독립 포기'처럼 보이지만, 중원 국가와 비중원 국가 사이의 모든 외교 관계가 조공으로 인식됐던 전통 시대의 동아시아에서는 조공과 국가적 자주성은 얼마든지 양립 가능했다. 독립국임이 틀림없는 영국이 청나라에 최초의 사절단을 파견(1793년)한 것도 청나라 쪽에서는 조공으로 인식하지 않았던가?

(…) 그러나 조공을 단순히 허례로 치부해 조공 관계가 우리 고대사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민족주의 이념에 기반을 둔 '전근대사의 부적절한 현대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고대사에서 중원과 중원 바깥의 나라들 사이에는 경제·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현저한 수준 차이가 나타났기에 조공은 큰 의미를 지녔다. (254~255쪽)

프레시안 : 선생님은 고대의 조공 체제를 근대의 국제 관계와는 다른 물적, 인적 교류가 포함된 관계로 봐야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미 이삼성 한림대학교 교수(<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펴냄)) 등의 노력으로 그런 시각이 상당히 알려져 있습니다만,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박노자 : 조공이라는 것은 결국 중원 국가를 정점으로 설정한 서열적인 세계 체제였습니다. 조공 체제는 그 경직성 등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이 잘만 작동됐다면 전쟁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었고, 또 조공 사절들을 통한 서적 교환부터 일정의 관무역 및 사무역까지 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의학 서적 <황제내경>이나 불교 서적 <조당집> 등이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어도 고려에 남아 있었다는 건, 조공을 통한 서적 구입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얼마나 문화적 영향을 끼쳤는지 잘 보여줍니다. 베이징으로 갔다 오는 조공 사절이 아니었다면 허균이 일찌감치 <수호전>을 얻어, 그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활용해 <홍길동전>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조공은 경직성과 위계성 등 단점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안정적이고 문화 교류의 통로를 보장해주는 국제 관계 시스템이었죠.

프레시안 : 이런 조공 체제에 대한 설명에 수긍하면서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다보면, 특히 자국 방어를 위한 고대 각국의 상호 동맹을 설명하는 부분은 근대 국제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즉 신라가 당과 협력해 고구려, 백제를 압박한 부분이나 고구려, 신라에 대항해 백제, 가야가 왜국과 연합하는 것 등.

박노자 : 조공이란, 한편으로는 중원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하는 '선진 문화 수입'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서열적 관계의 '장식' 뒤에 각자가 실리를 챙기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의 조공국이었지만, 670년에 당나라가 백제의 영토를 내놓으려 하지 않자 전쟁을 벌여서 그 땅을 자국의 영토로 만들었잖아요?

그게 조공이라는 형식 뒤의 또 하나의 현실이었는데, 저는 조공의 의미도 그 현실의 의미도 이 책에서 동시에 살리려 했습니다.

프레시안 :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논리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 또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4부의 한 장('고대 한반도는 공포의 전제왕국?)'에서는 고대 국가가 일종의 합리적 조절자에 가까웠다고 보면서도, 그 다음 장('신라에 금속화폐가 왜 없었을까')에서는 고대 국가가 국가 위주의 사회였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박노자 : 돈(금속화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국가가 재분배 구조를 잘 운영했다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국가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방금 언급한 두 측면이 꼭 상충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와 관련해 다른 예를 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국가가 유통 체계를 철저하게 관리했던 신라에서는 이미 6~7세기에 동시전, 남시전, 서시전 등 시장을 관리하고 물가를 단속하고 상인들의 교환 행위를 조정하는 관청이 존재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가동시키려면 상당한 정보부터 확보해야 했고, 국가는 고도의 통제 기능을 담지해야 했지요.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게 오늘날 남한의 국가 주도 개발이나 북쪽의 스탈린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이른바 "사회주의")의 고대적 '뿌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전통 속에서 이와 같은 적극적이고 개입적인 국가가 없었다면 과연 근대적인 초고속 개발은 가능했겠습니까? 부작용(국가주의 이데올로기 등)도 많지만 말입니다.

다문화 상생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

대한민국의 교과서나 개설서야 원효를 '신라 고승'이자 '한국 불교의 자랑'으로 호명하지만, 원효의 저서에서 신라라는 고유명사는 기껏해야 몇 차례밖에 보이지 않는다. 백제로 이주한 보덕에게 불교 교리를 배우고, 고구려 출신 승랑의 학설을 계승한 길장의 삼론학을 하나의 바탕으로 삼았으며, 사후에 고국 신라보다 오히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진 원효를 신라 사상가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사상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73쪽)

프레시안 : 책 전체에서 '고여 있는' 민족사 대신 '흘러가는' 고대사를 강조합니다. 이런 시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노자 : 한국은 무역 위주의 국가고, 가면 갈수록 외국계 인구가 많아지는 국제 자본 축적의 중심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타자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역사야말로 현재의 생활에 가장 닿아 있고, 또 그 생활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고대사를 '흘러가는' 것으로 파악하면 바로 그런 점을 볼 수 있습니다.

프레시안 : 흘러가는 고대사를 상징하는 인물로 장보고, 원측, 원효와 같은 이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물을 통해서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박노자 : 활동에도 배움에도 국경이 없다는 것이죠. 중국에서 활동하다 죽은 원측의 <해심밀경소>가 티베트어로까지 번역돼 오늘날 티베트 불교의 주류인 가규파의 창시자 총카파에게 큰 영향을 미쳤어요. 원효는 중국에 가지 않았지만 중국과 일본에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고대 한국 문화는 동아시아의 '허브'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었죠.

프레시안 :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이 책은 다문화 공동체로 가는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귀화한 한국인으로서 선생님 자신도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주체이지요. 선생님의 경험을 염두에 두면, 다문화 공동체에서의 역사 교육이 어때야 할까요?

박노자 : 말씀드린 대로 '관계' 중심의 역사, 오늘날의 '민족'이 개입돼 있지 않은 역사를 가르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컨대 베트남계 한국인들이 명나라, 청나라 시절에 베이징에서 조선 사절들과 베트남 사절들이 만나 필담하면서 시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 대해 훨씬 가깝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역사 전쟁…민족주의 vs 탈민족주의


▲ <거꾸로 보는 고대사>(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프레시안 : 이 책의 추천의 글을 쓴 일본 와세다 대학교의 이성시 교수가 인용했듯이 일본의 역사가 이시모다 쇼는 "고대는 언제나 새로운 사상과 오랜 사상이 투쟁하는 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선생님의 책은 전반적으로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간의 투쟁으로 읽힙니다. 앞으로 고대사 연구자로서 어떤 연구를 진행 또는 계획 중입니까?

박노자 : 저는 비록 고대사를 전공한 "가야학 박사" 출신이지만, 요즘에는 연구를 주로 한반도의 근대사 위주로 합니다. 그러나 예컨대 근대의 사상가였던 신채호와 최남선의 고대사관 관련의 연구를 꼭 계속해서 오늘날 '민족사관'의 뿌리를 더 자세히 밝히려는 욕심은 있습니다.

프레시안 : 이 책의 뒤에 붙은 참고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생님께서는 국내외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과를 두루 섭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한국 고대사 연구 그룹과의 관계는 긴밀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짐작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박노자 : 저야 고대사를 하다가 만 데에 대한 마음의 빚도 있고 해서, 고대사를 주제로 공동 연구를 하자 하면 웬만하면 수락하여 같이 할 마음의 준비는 다 돼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 연구자들로부터 그러한 초대를 받은 일은, 적어도 최근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한국 교수라면 누구나 안식년을 가서 골프를 즐기고 싶은 미국 등 '천하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점도 국내와 많이 다르고 해서 이렇게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책 전체에 걸쳐서 추천의 글을 쓴 이성시 교수의 <만들어진 고대>(박경희 옮김, 삼인 펴냄)와 공명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생님이나 이 교수와 비슷한 입장에서 고대사 연구를 진행하는 이들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박노자 : 네, 국내에서는 근·현대사 분야에서 윤해동 선생님 등 일부 '탈민족주의적' 연구자들이 계셔서 저도 많은 협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사 분야에서는 아무래도 '민족사관'의 영향력이 아직도 절대적입니다. 세부적 연구는 탈이념화될 수도 있지만 전체적 그림은 역시 '우리 민족사' 차원이죠.

프레시안 : 고대사는 사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료 비판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역사학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좀 더 대담한 사료 해석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유난히 추측성의 표현이 많습니다. 사료 해석을 비롯한 근대 역사학 일반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간단히 듣고 싶습니다.

박노자 : 독자에게 경고해야 할 일입니다만, 결국 고대사 서술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한"의 복원의 시도지 "완벽한 파악"은 절대 아닙니다. 자료가 적다 보니 많은 경우에는 '추측'을 하게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미리 알리고 하면 꼭 나쁜 일만 아닌 것 같습니다. 단, 추측을 "정확하게 아는 사실"로 가장하면 문제가 큽니다.

불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드는 길

프레시안 : 이왕 인터뷰를 하는 김에 독자들이 박노자 선생님에 대해서 궁금할 법한 것들을 몇 가지 묻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불교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표현해 왔습니다. <불교평론>에 최근 10년간 몇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었지요? 혹시 불교 신자로 개종한 것입니까?

박노자 : 네, 연기론, 무아론, 열반론을 믿는 차원에서는 신자가 맞습니다. 단, 국내 불교 사찰들의 '대학 입시 기도' 같은 의례 장사라든가, 교계의 중생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이 마음에 걸려서 사찰에는 잘 안 갑니다. 조계종 신도 등록도 안 했습니다. 불자로서 지켜야 할 까다로운 덕목을 염두에 둔다면, 여전히 참다운 불자가 되도록 노력 중이라는 답이 좀 더 정확하겠군요.

프레시안 : 특별히 불교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이유가 있습니까?

박노자 : 아무래도 신구의(身口意) 삼업, 즉 나의 모든 행위가 결국 악업 내지 선업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행동은 물론 생각도 윤리적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컨대 부처님의 근본오계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생각해 볼까요?

저는 군인이나 경찰에 속하거나 도살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에 중생에 대한 살해를 '직업상' 입힐 일이야 없습니다. 하지만 <범망경>에 나온 부처님 계율의 내용을 보면 단순히 직접 살해만 금한 것이 아니고 '방편으로 죽이는 것', '죽임을 찬탄하는 것', '죽임을 보면서 기쁘게 따르는 것', '죽임의 인(因)을 만드는 것', '죽음에 대한 기쁜 뜻을 가지는 것'도 아울러 죄로 정해진 것입니다.

만약 '죽임의 인을 만드는 일'까지 문제시 한다면,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수십 명의 군인들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의 현장에 국비로 파견한 노르웨이 정부에 세금을 내는 저의 입장은 곤란해집니다. 피할 수 없는 일들이니까 그냥 눈감고 하는 수밖에 없지만, <법망경>의 말씀을 생각하면 마음에 적지 않게 걸립니다.

이렇게 불교는 단순한 의례 참여 여부나 행동으로 신자의 진실됨을 판단하는 차원을 초월하여 몸과 입, 생각 차원의 실천을 요구하는 가장 깊고도 '잘하기 어려운' 종교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불교에 매료되었고 또 잘 안 될 때가 많습니다만 지금도 참다운 불교 신자가 되도록 노력 중입니다.

프레시안 : 말씀을 듣고 보니, 최근 <한겨레21>에 '국가의 살인'을 연재 중이라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박노자 : 방금 얘기했듯이 살인은 불교에서 최악의 악업이지만, 계급과 국가가 존재하는 한 살인은 제도적으로 늘 존재했습니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극악무도해지고 있지요.

이번 연재를 통해서 국가와 계급을 폐지시키는 사회주의적 혁명 ('혁명'이 꼭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혁명이야말로 세계 대전과 같은 가장 무서운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어쩌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내지 변혁만이 불교가 원칙상 꿈꾸어야 하는 비폭력적 세상을 건설하는 길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칼 마르크스, 에리히 프롬, 함석헌…

프레시안 : '프레시안 books'의 독자를 대신해 몇 가지 더 묻겠습니다. 평소 영향을 받은 사상가를 꼽아 주십시오.

박노자 : 국외는 아무래도 칼 마르크스와 에리히 프롬이고, 국내는 함석헌 정도일 듯합니다.

프레시안 : 항상 옆에 두고 즐겨 읽는 책이 있습니까?

박노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트로츠키의 문학 평론, 빅토르 세르주의 자서전(<한 혁명가의 회상>) 등을 자주 읽습니다. 그저 영감을 얻으려고요. 최인훈의 <광장>도 자주 읽는 작품입니다. 또 김수영 시집도 자주 보고요.

프레시안 : 선생님께서는 러시아에서 한국어를 교육받았으면서도 유려한 한국어 글쓰기로 일찌감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별한 글쓰기 비법이 있습니까?

박노자 : 그냥 좋아하는 책과 논문 등을 자꾸 읽고 거기에서 이용되었던 표현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나중에 자기 글을 쓸 때에 적당히 이용하면 되는 듯합니다. 결국, 그 표현들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관건 아닐까요?

프레시안 : 앞으로 저술 계획이 있습니까? <신채호 평전>, <한용운 평전> 등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박노자 : 네, 당장은 한글 저작으로서는 <신채호 평전>이 급합니다. 그리고 잘되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러시아 말로 <한국사 개설서>를 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미 나왔어야 됐는데, 지금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이 다소 지연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